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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영업이 이래. 워라벨이 안돼! / 최향희
삶은 바쁜 일상의 연속
아침에 일어나 아이 학교 보내고, 오늘 해야 할 일들을 체크하다보면 금방 출근할 시간이 다가온다. 대충 점심 먹고, 부랴부랴 2시쯤 출근해 일이 끝나면 밤 10시쯤이다. 집 와서 적당히 저녁 먹고 다시 못 다한 일을 한다.
‘자영업이 이래. 워라벨이 안돼!’
일상이 일로 뒤섞여있다. 육아도 집안일도 대충이라도 하면 다행이다.
다자녀 워킹맘
난 느리다. 여우같지 못하고, 재치가 없다. 생각이 단순해 한 가지밖에 못한다. 그러다 꼭 해야 할 뭔가 놓친다. 이렇게 부족한 것 투성이인데 학생들에게 다과목을 가르친다. 가르치려면 수업준비도 해야한다. 일년전에 가르쳤던 것들인데도 잊혀진 것들이 있어 수업준비를 안하면 막히는 부분들이 여전히 있다. 가르치는 것 말고도 해야 할 일은 너무 많다.
막둥이 어릴 적엔 집에서 전과목 공부방을 하면서 수업하고 집안일에 육아도 해야했다. 그땐 회사에 소속되어 실적도 늘려야했다. 일에 육아에 집안일까지 그렇다고 남편이 아이를 봐주거나 집안일을 잘 도와주는 것도 아니다. 게다가 남편은 잠보다. 3교대 근무로 5일 근무하고 2일 쉬면, 2일을 모두 자는데 투자하는 날이 많다. “3교대가 무척 힘든 거다. 야간근무 해봐라. 나이 들수록 더 힘들어진다”며 집안일과 육아에 신경 쓰지 않는 걸 정당화한다.
아이를 넷이나 낳았다. 셋까지는 남편도 동의 했지만, 넷째는 내가 낳자고 했다. 그 덕에 늘 이혼을 꿈꾸던 내가 지금까지 가정을 지켜 온지도 모른다. 남편은 집에 오면 회사에서 쌓인 스트레스를 온 집안 식구에게 풀기 일쑤다. 술 마시고 들어오는 날엔 그 화가 어디로 튈지 몰라 맘 졸여야한다. 아직도 그 화를 다 받는 건 내 몫이다. 아이들이 크니 아이들 눈치는 본다. 만만한게 나뿐인가 보다.
왜 아직도 힘들까?
결혼생활 23년차다. 남편이 대기업에 다니는데, 연봉은 잘 모른다. 돈 땜에 너무 자주 싸워 싸움을 줄이기 위해 각자 벌고, 쓰는 부분은 간섭하지 않기로 했다. 그래서 나는 생활비를 담당하고, 남편은 관리비, 애들 학원비 등을 담당한다. 결혼생활 초반 안정적이던 남편회사 주식이 폭락해 빚이 돼버려 남편은 천원 한장도 허투루 쓰면 잔소리가 많았다. 그래서 그냥 내가 돈을 버는 것이 낫겠다 싶어 둘째 17개월쯤부터 3교대 맞벌이 아기 돌보는 일을 했다. 내 아이도 키우면서 같은 또래 아이들을 돌보면 돈도 벌면서 또래 아이들과 어울려 지낼 수도 있어 일석이조였다. 내가 생활비에 일조하면 잔소리나 싸움이 줄어들거라 예상했지만 오산이였다. 교대근무 부부 아이를 세명까지 돌보면서 수입은 늘었지만. 늘 빚을 갚아야한다는 이유로 “더 버니 더 줘야한다”라고 스트레스를 주었다. 첫애가 9살 때 이사해 공부방으로 전업했다. 방학이나 학년이 바뀌면 휴회가 있어 수업이 줄어들 때도 남편은 수입이 줄면 생활비를 줄이고, 빚 갚는데 주기로 한 돈은 줄이면 안된다고 압박을 했다. 에휴... 내팔자. 그땐 주식 빚은 다 해결된 상태였다. 하지만 땅을 사서 빚을 졌고, 땅 팔아 집을 살 줄 알았는데 땅은 안 팔고 집을 대출 받아 입주했다. 결론은 빚지고 산다는 현실에 얽매여야했다.
지금은 먹고 사는게 어렵진 않지만, 아이들 클수록 지출되는 돈의 단위가 다르다. 중등에서 고등되니 입시를 앞두고 있어 교육비 등이 한 명당 십 단위에서 백 단위로 부담이 가중된다. 남편은 외식이나 배달 음식 엄청 싫어했지만, 아이들이 “싫으면 아빠가 하세요”라고 거두니 조금은 호의적으로 변해 식비의 비중도 커져 6인 가구여도 체감은 4인 가구의 2배 이상은 벌어야 유지될 정도로 늘 한달 벌이에 허덕이는 느낌이다.
스트레스가 많았나보다.
유방암에 걸렸다. 바보! 병 들어가는 줄도 모르고, 내 몸 하나 지킬 줄도 모르며 건강을 외면한 체 살았다. 항암 4번과 수술 다시 항암 4번 그리고 33번의 방사선까지 받으며 치료를 강행했다. 7년전 공부방에서 학원으로 나온 지 일 년 밖에 되지 않았던 때이다. 학원으로 나오는 문제로 공부방 회사와 법정 다툼도 있어서 아프다는 이유로 무너질 순 없었다. 아무렇지 않은 듯 너무 잘 하고 있는 것처럼, 선생님을 한 분 더 쓰더라도 버텨야했다. 요즘은 주변에 암 걸린 분들이 생각보다 있는 편이지만, 7년전 암이라고 하면 큰 병이였기에, 암에 걸렸다는 말이 퍼져 어떤 소문들이 나를 위협할지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아픈 것이 내가 학원을 운영하는 것에 흠일 것이기에 숨기고 싶었다. 왜 그래야했을까? 일을 놓을 수가 없었다. ‘암으로 죽을 수도 있는 사람에게 누가 학생을 맡기고 싶겠는가’ 생각했다. 다자녀의 무게도 있었지만, 남편 또한 쉬라는 말은 없었다. 아직도 이 말을 하지 않은 남편에게 서운함이 있다. 학원 접고 쉬라고 했어도 내가 못 쉬었을 텐데 말이다.
뭐가 제일 아쉬운가?
살기 바빠 제대로 아이들을 사랑해주지 못했다. 육아에 대해 너무 몰랐던 것 같다. 남편과 싸움이 잦아서였는지 4살 터울의 두 딸의 다툼이 잦았다. 둘째 아들은 순 했는데, 중2가 돼서는 중이병이 와 정말 많이 놀랐다. 그래서 ‘나는 아이들을 잘 못키우는구나!’ 싶었다. 가지 많은 나무에 바람 잘 날 없다는 말이 맞았다. 단호함이 없었고, 아이들에게 끌려갔었던 것 같다. 엄마가 엄마답지 못한 것이다. 사춘기 딸들은 내가 지적하는 말에 예민하게 반응 했고, 아이의 고민을 아이편에서 들어주지 못했다. 늘 사회적 틀에 아이들을 가두고 중립을 지키며 아이들의 고민을 듣고 대응했다. 내 아이의 마음을 온전히 공감해주지 못했던 것이다. 다행히 지금은 커서 엄마를 그저 실수 많은 한 인간에 불과하다고 이해해주고 있어 고마울 뿐이다.
응원해주고, 실수나 잘못도 “그럴 수 있어. 그래도 넌 잘 할 수 있어. 걱정 하지마”라고 자존감을 키워주며 세상에서 제일 든든한 엄마가 되어주지 못했던 나를 반성한다. 지금이라도 그때 못했던 ‘예쁘게 말하기, 응원 해주기, 사랑 표현 많이 하기’ 해보려 노력 중이다. 우쭈쭈하며 “세상에서 제일 예쁜 딸, 가장 든든한 아들 사랑해”하며 안아주기! 이렇게 노력해주니 엄마에 대한 서운함이 조금은 사그라 든것 같다.
아이들 어릴 적엔 무늬만 엄마였던 것 같다. 우리 아이에게 위기가 닥쳤을 때 진정한 엄마가 되어 간다는 생각을 했다. 아이에게 위기가 닥쳐 왔을 때 ‘내 자식을 위해서라면 뭐든 할 수 있어’라는 맘을 갖게 되었다. 그렇게 내 자식의 위기를 아이와 한맘으로 용감히 헤쳐 나갔을 때 내안에 모성애가 발동 되었던 것이다.
엄마의 무관심으로 가슴 아파했던 아이의 상처와 늘 옳은 말로 진정 내 아이편이 되어주지 못했던 안타까움에 가슴이 미어질 때가 있다. 또 삶에 치여 아이들과 진정한 대화를 나누지 못하고, 인생의 중요한 가치를 심어 주지 못 했던 것이 너무도 미안하다. 언제 어느때나 내 아이와 함께 할 수 없기에, 내 아이가 어떤 시련에 부딪혔을 때 무너지지 않고 다시 일어설 수 있는 무한 긍정의 마인드와 든든한 마음 근육을 길러줬어야 했다.
이 넓고 험한 세상을 당당히 이겨내고 우뚝 설 수 있게, 세상을 좀 더 아름답고 가치로운 곳으로 만들 수 있게, 너는 누구보다 존귀한 존재임을 심어 줬어야했다. 어떤 누구와도 바꿀 수 없는 이 세상에서 가장 특별한 존재 내 아이들이 자신을 믿고 꿈을 향해 도전하며 작은 성취를 느끼고 행복의 탑을 쌓아가길 원하고 바라고 기도한다.
앞으로의 나
지금의 나의 삶에서 어떤 걸 정리하고 어떤 삶을 추구해야하는가? 묻는다. 25살 때 10년, 20년, 30년 후 인생을 계획했었다. 10년후 요리사가 되고, 20년후 세계여행을 하면서 30년 후 사회봉사를 하고 싶다는 계획을 세웠었다. 요리사 대신 학원장이 되었다. 세계여행은 10개국 정도 다녔고 차츰 이뤄 가면 된다. 사회봉사는 언제 시작할 수 있을지 막연하긴 하다.
늙으면 남편하고 안 살겠다는 로망도 있었다. 굳게 자리 잡고 있던 그 맘이 조금씩 옅어진다. 분명 미운 정밖에 없는 것 같은데 요즘은 딱히 남편하고 떨어져 사는 삶은 생각지 않는다. 남편이 하는 말과 행동으로 얼마나 많은 상처를 받았는가? 진정 나를 사랑해주는 남자를 만나 사랑받고 살고 싶었다.
앞으로 나의 삶의 방향에 대해 좀 더 충분히 생각해보고 계획해 봐야한다. 학원 일을 계속 키우고 있어 줄여가려 하지만 쉽지 않다. 좀 더 가치있는 일에 비중을 두어야하고, 막둥이 육아에도 집중해야한다. 나도 내가 언제 어떻게 바뀔지 모르겠다. 갑자기 대학원 공부를 하러 갈 수도 있고, 선교사가 되고 싶을 수도 있을 것 같다. 어쩜 돈 밖에 모르는 남편을 떠나보면 답이 보일지도 모른다. 변수는 막둥이 육아가 끝나야 가능한 것들, 십년은 훌쩍 넘어야 가능할 것이다.
중요한 건 앞으로의 삶을 좀 더 의미 있고, 가치 있게 살아가야한다는 것이다. 가족들과 더 행복해져야하고, 나에게 의미 있고, 가치 있는 것들을 생각하는 시간을 늘려 가야겠다.
오십에서 / 최향희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
애써 외면하며 살았는데
오십이라니
어릴적 오십대면 늙어가는 나이라 생각했다
오십삼세 되신 아빠의 주름살 깊은 얼굴을 일기장에 그리며
아빠의 늙어감을 애처롭게 생각했던 때가 생각난다
내 나이 오십
우리 아이들은 엄마나이 50을 어떻게 기억해줄까
큰딸 스물세 살... 막둥이 열두 살
우리 아이들에게 엄마 나이를 생각할 시간은 있을까
숫자에 불과한 나이에 가치를 더해
반평생 잘 살아왔으니 남은 반평생
내 존재에 대한 가치를 더하는 삶으로
우리 아이들에게 늙어가는 나이가 아닌
엄마가 살아낸 인생에 많은 느낌표를 갖는
가치있는 흔적을 남겨 줘야겠다
시를 써 봐야겠다!
인생 수업 / 최향희
당남리섬 주인은
수육은 야들야들
닭백숙은 구수하게
열무김치, 배추김치, 각종 반찬까지
뚝 딱 요술 부린다
수육과 닭백숙 삶의 허기 채워주고
참외, 포도, 방울토마토 입가심해주고
넉넉한 미소와 다정한 말투로 마음까지 채워준다
날씨 좋고, 음식 맛나면 더 할 나위 없건만
함께 웃는 사람들 풍월 읊고
이야기 한 보따리 웃음 한 광주리
인생의 여유와 베푸는 즐거움 오고 간다
당남리섬 주인님
수육과 닭백숙 없어도
넉넉한 미소와 다정한 말투로
마음 한가득 채워주는
그 인정 배워 보렵니다
건강하게 인생 수업 해주세요
가려진 얼굴 / 최향희
다리미가 안된다하니
으유, 사용법 알려줄 때 제대로 안 듣고 꼭
다리미가 안돼? 공감 먼저 해주고
함 봐주면 되지 그건 귀찮아 핀잔만
다 내가 잘못 했단다
이건 시작에 불과하다
아, 내가 왜 운전대를 잡았던가
잔소리 잔소리 잔소리
집 앞 도착해 주차하는 것까지 끝까지 잔소리
더는 못참아
운전할 때 잔소리 하지 말라고
화내도 소용없다
홧김에 상한 김치찌개 하수구에 버리다
음식물망에 개구리알 발견
도대체 누가 이런짓을
참내, 자기가 버릴 땐 엄청 작은 알갱이였다네
자기는 아니라고 모른다며 발뺌
역전의 순간이다
어떻게 음식물도 아닌 걸 여기에 버릴 수 있어
버렸어도 음식물이 아닌 건 다시 쓰레기로 버렸어야지
약하다 이 맹추
내가 한 실수나 잘못은 엄청난 폭탄을 던지는데
왜 남편처럼 버럭거리며 비하하고 비난하지 못할까
이제부터는 남편 운전대 잡을 때 잔소리 폭탄 할거다
남편이 실수하면 비하 발언 할거다
꼭 해야한다
그래야 잔소리 폭탄 듣고 살아온 내 맘이
어땟는지 공감 할 수도
그놈의 잔소리를 줄일 수도
퇴근해 바라본 가족사진
해맑게 웃고 있는 남편 얼굴
아니, 나한테 상처주고 웃고 있어
꼴 보기 싫어!
포스트잇으로 붙여버렸다
하 하 하
분이 안풀렸는데 웃음이 난다
이렇게라도 웃자 웃자 웃자!
배꼽 친구 / 최향희
레몬소주 오이소주 원샷
만나면 왁자지껄
이놈 저놈 희희락락
목놓아 질러대며 막춤 추던
너무도 눈에 선한 젊은 날
일년 내내 고대하던 여름휴가
동으로 서로 어디든 좋아
바나나보트 한번 더 외치고
별빛이 쏟아지면 나이트 누비던
뜨겁고 열정 넘쳤던 젊은 날
야간열차로 부산
태종대에서 해운대까지
새해맞이 일출
정동진에서 설악산까지
새하얀 눈밭에서 한 컷
푸르른 하늘 보며 한 컷
눈부신 젊은 날 미소
제짝 찾아 같은 해 결혼
첫애에 둘째까지 같은 해 낳아
동갑내기 아들 딸 스물셋 스물하나
우리의 눈부신 나이
결혼생활 팍팍하고
자식 키우기 버거워
신세타령 힘겹던 날
눈부신 젊은 날이 있어
우리가 함께여서
아직도 젊은 날
그날 애기하며
오늘을 기억한다
나이가 무슨 상관
자식 장성해 오히려 신혼
나만이 늦둥이로 아직도 육아 중
십년만 더 기다려보자
내게도 신혼이 올까?
첫댓글 환영합니다. 원고 감사합니다.
선생님
꽃길만 걸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