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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의지가 왜 행복의 열쇠일까(2254.2024.6.16)
갈5:13-15
할렐루야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오늘도 우리가 드리는 예배에 임재하셔서 우리 예배를 받으십니다. 오늘도 주의 전에 나오신 여러분 모두에게 하늘의 위로와 평강이 함께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혹시라도 삶의 현장에서 상처와 상한 마음을 가지고 오셨으면 말씀 듣다가 위로와 치유함을 받으시고 질병과 싸우는 중이라면 여호와 라파 치료의 하나님을 만나서 치료받는 시간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삶이 힘들고 지쳐서 오셨다면 독수리가 날개치며 올라감 같은 새 힘을 얻으시기를 축복합니다. 무엇인가 계획하고 기도중에 있는 것이 있다면 응답받는 은혜가 임하시기를 바랍니다. 모든 삶이 해결되고 성령이 충만하여 기쁨과 감사와 웃음이 넘쳐나는 유쾌한 신앙생활을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인간관계 대부분 실패하는 원인은 무엇일까 생각해보면 한 마디로 서로 왕 노릇 하려 하기 때문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롬12:6절‘서로 마음을 같이 하며 높은데 마음을 두지 말고 도리어 낮은데 처하며 스스로 지혜 있는 체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지금 우리는 어떻습니까? 혹 그 마음을 높은데에 두고 있지는 않습니까? 낮은데 두는 것 대신 말입니다. 또한 어떻습니까? 혹 스스로 지혜 있는 체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마음을 서로 같이 하는 것 대신 말입니다. 이 같은 이유 등으로 대부분의 인간관계는 균열 내지는 파국을 맞고 맙니다. 마음이 서로 맞지 않는데 함께 무슨 일을 이룰 수 있으며, 각자가 제 잘난 맛에 살고 있는데 어찌 같은 마음과 같은 뜻을 품을 수 있단 말입니까?
그럼 우리는 무얼 어찌 해야 합니까? 왕 노릇 하기를 멈춰야 합니다. 높아진 그 자리만큼 다시 내려와야 합니다. 높은데 그 마음을 두기를 그만 두어야 합니다. 높아진 마음을 억지로라도 끌어내려야 합니다. 스스로 지혜 있는 체 하기를 중단해야 합니다. 지식은 반지름이기 때문입니다. 즉 지식이 원의 반지름이라면 그 반지름만한 원둘레가 우리의 지식이 닿지 않는 무지의 부분이라는 말입니다. 고전8:2절‘만일 누구든지 무엇을 아는 줄로 생각하면 아직도 마땅히 알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이요’, 갈6:3절‘만일 누가 아무 것도 되지 못하고 된 줄로 생각하면 스스로 속임이라’고 했습니다.
지금 우리는 어떻습니까? 명심해야 합니다. 서로 물고 뜯으면 피차 멸망할 수 없다라고 갈5:15절‘만일 서로 물고 먹으면 피차 멸망할까 조심하라’고 했습니다.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해야 합니다. 갈5;13-14절‘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 하라 온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 같이 하라 하신 한 말씀에서 이루어졌나니’대신 우리는 어찌 해야 합니까? 서로 종노릇해야 합니다. 즉 더 이상 그 마음을 높은데 두지 않고 오히려 낮은데 두어야 하며, 또 스스로 지혜 있는 체 여기는 대신 겸손한 마음으로 종 노릇 하시기를 바랍니다. 지금 이 시간 그리스도의 강권하시며 이끄시는 그 사랑으로 충만한 가운데 오직 그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 하기를 축복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종이라면 누구의 종노릇을 해야 합니까? 우리 하나님의 종노릇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창조주, 구원자, 주권자,(주인)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주인이십니다. 참 자유를 주신 하나님, 우리에게 죄사함을 주시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신 예수님, 그리고 영원한 생명을 주신 우리 예수님의 종이 되어야 합니다. 상주감리교회 성도여러분 ‘예수님은 나의 주인이십니다. 예수님을 위해서 살겠습니다’ 이제 우리는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신 하나님을 찾았습니다. 죄에서 자유함을 얻었습니다.
--찬송--죄에서 자유를 얻게함은--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종인 것입니다. 그러나 이때의 종은 억지로 끌려다니는 종이 아니라 자유한 종입니다. 우리가 스스로 종인 것을 인정하고 종의 삶을 살 것을 작정했다는 말입니다. 이는 사랑의 종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우리 상주감리교회에서 예배드리시는 여러분은 모두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은줄로 믿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주신 최고의 선물이고 은혜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너무 경시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고 싶어도 믿어지지 않아서 믿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래서 구원받음은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이라고 했습니다. 이 구원받음으로 우리에게 몇 가지 은혜가 주어졌습니다. 자신의 값을 발견하게 된 은혜 칼 바르트라는 신학자는 ‘나는 십자가를 바라볼 때마다 나의 값을 발견하게 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은 ‘나의 나됨은 주의 은혜’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예수님은 나의 구주시고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라고 고백할 수 있다는 것은 작은 일이 아닙니다. 이것은 참 위대한 발견이고 가장 큰 은혜입니다. 이 발견이 있어야 이 세상에서 더 귀한 것이 무엇인가를 알고 발견하게 됩니다. 그래서 고백하기를 ‘나는 이제부터 예수만 알기로 작정했다’고 하였습니다. 알고 보니까 예수를 알게 된 것이 은혜 중의 은혜라는 고백입니다.
상주감리교회 성도여러분들도 예수가 최고인줄 믿습니다. 예수를 알게 된 것이 은혜이고 축복입니다. 사람들이 보이고 만져지고 힘 있는 것을 의지하고 믿으려고 하지만 그것은 아닙니다. 정말 인생의 결정적인 순간에는 예수밖에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이 세상을 살아갈 때 가장 중요할 때, 가장 소중한 순간, 가장 화급할 때는 예수밖에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가 최고입니다. 예수를 알게 된 것이 은혜이고 복이고 은총이고 가장 큰 선물입니다. 세상의 모든 사람은 불행하게 살기를 원하지 않을 것입니다. 자기에게 주어진 인생을 좀 더 행복하고 가치 있게 살고자 애를 씁니다.
하나님도 사람을 창조하시되 행복한 자로 세우셨습니다. 사람의 행복을 위하여 첫 번째로 하신 것은 하나님의 생명인 생기를 불어넣어 주는 것입니다. 창2:7절‘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생령’이란 ‘a living being’ 이라고 하였고, 다른 영어 성경에서는 ‘a living creature’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살아 있는 존재’ ‘숨 쉬는 피조물’ 이라는 의미입니다. ‘살아 있는 존재’란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는 존재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행복의 모든 것을 지니신 분으로 그분과 친밀한 교제를 나눔으로 사람은 행복을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행복에 대한 개념을 잘못 이해하는 분들이 종종 있습니다. 어떤 조건이 갖춰지고 환경에 의하여 행복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을 말합니다. 맞는 말인 것 같지만 틀렸습니다. 행복은 조건도 환경도 아닌 존재에 달려 있습니다.
이를 고백한 바울이 있습니다. 빌4:4절‘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바울이 말한 ‘기뻐하라’라는 말은 어떠한 상황 가운데서도 기뻐해야 함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이 빌립보서를 쓸 당시에 로마 감옥에 갇혀 어려운 형편에 놓여 있었습니다. 환경과 조건으로 따지자면 전혀 기뻐할 수 없는 상황입니다. 어떤 면에서는 억울하고 분했을 수 있습니다. 제대로 먹을 것도 입을 것도 없을 뿐 아니라 환경은 열악하기만 합니다. 그런데도 그가 기뻐할 수 있었음은 그의 생명에 주 안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유지하고 친밀한 코이노니아, 교제가 있었기 때문에 그는 생명 자체에 행복이 넘침을 체험한 것입니다. 상주감리교회 성도여러분 이처럼 생명이란 하나님이 주신 생명력이 왕성하게 내 안에서 작용할 때 환경과 조건을 뚫고 어떤 상황에서도 행복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행복을 심어주기 위한 또 하나는 사람에게 자유의지를 심어주셨다는 것입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동산 중앙에 있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입니다. 창2:17절‘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그분의 뜻이 담긴 프로그램을 사람의 생각에 집어넣지 않으셨습니다. 즉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수 있고 반대로 불순종할 수 있는 자유의지를 주셨다는 것입니다. 상주감리교회에서 예배드리시는 여러분들에게도 자유의지를 주셨습니다. 자유의지가 좋은데 거기에는 책임도 따른다는 것입니다.
자유의지가 왜 행복을 이루는 열쇠가 될까요? 자유의지에 의한 선택권이 없다면 종과 다름이 없습니다. 종은 오직 주인의 명령에 따라 움직일 수밖에 없습니다. 자기 소유도 의사도 없습니다. 하물며 가족도 없습니다. 아내와 자식까지 모두 주인의 소유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고대의 노예에게는 신을 신지 못하도록 하였습니다. 마음대로 다닐 수 없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오직 자유인만이 신을 수 있는 특권을 누렸습니다.
누가복음 15장에서 돌아온 탕자에게 ‘발에 신을 신기라’고 합니다. 이것은 이제는 노예가 아닌 아들이요 자유인이 됨을 보여주는 내용이기도 합니다. 노예는 행복하지 않습니다. 자유를 잃었기 때문입니다. 인류 역사에서 잃은 자유를 얻기 위하여 수많은 희생의 피를 흘린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런 대가를 치르더라도 자유를 얻으려고 한 것은 행복한 삶을 얻기 위한 몸부림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자유의지를 주셔서 하나님께 대한 사랑을 결단하고 나오도록 하신 것입니다. 사랑은 결단으로 이뤄집니다. 강제로 이뤄진 사랑은 결코 행복할 수 없습니다. 자발적으로 기쁜 마음으로 하나님을 사랑할 때 하나님은 우리에게 변함없는 사랑과 그분께 속한 행복으로 우리를 채우시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처음 사람 아담과 하와에게 주신 자유의지를 선용(善用)하는데 쓰지 않고 마귀와 결탁하여 하나님을 배반하기로 한 것입니다. 마귀의 속임수는 네가 하나님처럼 될 수 있는데 굳이 피조물의 굴레에 갇혀 지낼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갖는 불행의 원인이 여기에 있습니다.
창조주와 피조물의 한계를 허무는 것입니다. 인간 스스로 존립할 수 있다는 마음입니다. 인간 스스로 행복할 수 있다는 환상입니다. 이것이 죄입니다. 내 마음에 죄가 들어오니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할 수 없는 것입니다. 흔히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따 먹음으로 죄가 들어왔다고 설명합니다만 성경의 흐름을 자세하게 살펴보면 마귀의 유혹으로 죄가 들어오고 그 죄로 인하여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행위를 한 것으로 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죄는 피를 타고 전이가 됩니다. 그러므로 아담의 후손은 모두 죄에 오염된 채 세상에 태어났습니다. 죄는 하나님의 뜻을 따를 수 없는 것을 말합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에서는 상주감리교회에서 예배드리시는 저와 여러분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받았다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하나님께 속한 행복을 위하여 부르심을 받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행복을 이루기 위하여 세 가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들의 부르심에 대한 목적이 자유를 위함이며 둘째는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로 삼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셋째는 사랑으로 종노릇 하라고 합니다.
1.우리의 부르심의 목적이 무엇입니까?
자유를 위함이라고 하였습니다. 13절‘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형제들’은 갈라디아 교인들을 말합니다. 오늘날 이 성경을 읽고 있는 우리 상주감리교회 성도들과 저를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을 부르셨습니다. 그 이유에 대하여 ‘자유를 위하여’라고 합니다. 갈5:1절‘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더는 죄의 종의 신분이 아니라 자유 하는 존재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요8:36절‘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케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하리라’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누가 우리를 자유롭게 만드셨나요? 만왕의 왕이요 영원부터 영원까지 존재하시는 창조주가 자유를 주셔서 누구도 다시는 우리를 죄의 종으로 이끌어 갈 수 없습니다.
구체적으로 참 자유는 어떤 자유입니까? 먼저는 율법에서 자유롭게 되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할례를 받아야 하고 율법을 지켜야만 구원을 받는다고 하면서 스스로 율법의 굴레 안에 들어갔습니다. 유대인들이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 중의 하나가 안식일 법입니다. 유대인들의 39가지의 까다로운 안식일 금지법이 있습니다. 운전하는 것도 안식일에 불을 피워서 안 된다는 법에 걸리니까 걸어서 갈 수 없는 먼 회당에 가려고 하면 안식일이 시작되기 전에 가야 합니다.
화장실 휴지도 절취선을 끊는 것은 일하는 것이니까 미리 잘라 놓아야 합니다. 꽃을 물병에 넣어 놓는 것도 일하는 것이니까 꽃을 선물 받아도 그냥 물이 없는 꽃병에 꽂아 놓았다가 다음날 물을 주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율법을 다 이루심으로 우리는 이런 율법의 종으로부터 완전히 해방되었습니다. 죄 아래 놓여 있는 인간은 스스로 죄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법에 순종할 수 없습니다. 생각과 행위는 죄 아래 놓여 있어서 스스로 이 굴레에서 벗어나는 것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롬7:24절 사도바울은‘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고 말입니다. 이런 상태에 놓여 있는 인간을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그의 백성을 대신하여 죽으심으로 그들은 죄에서 해방되었습니다. 죄에서 놓였다는 말은 저주에서 죽음에서 벗어났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상주감리교회 성도여러분 인간에게 주어진 최대의 적은 죽음입니다. 죽음에 대한 공포를 스스로 이겨낼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여러분은 이겨낼수 있습니까? 누가 죽음 앞에서 두려워하지 않고 자유롭게 맞이할 수 있겠습니까? 오직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이를 무너트리시고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셔서 믿는 사람에게 죽음은 공포의 대상이 되지 않게 하셨습니다.
2.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로 삼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섬김에는 반드시 십자가가 있습니다. 섬김은 나의 육신의 소욕을 가슬리는 일입니다. 언제나 육신의 욕망은 섬김을 받는 것입니다. 요일2:16절‘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세상으로부터 온 것, 타락한 육신의 죄성은 세 가지입니다.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 생의 자랑입니다. 이 세 가지가 지배하는 한 섬김의 삶을 살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섬김의 삶을 살기 위하여 먼저 내 속에 있는 육신의 욕망을 십자가에 못박아야 합니다.
여기서 ‘육체’란 ‘신체’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타락한 본성’에 대한 표현입니다. 즉 죄 가운데 빠져있는 옛사람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기회’라고 번역된 원문의 단어는 군대에서 어떤 공격이 시작되는 작전기지를 가리키는 데에 사용되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자유로 육체의 기회로 삼지 말라’는 표현은 죄의 종에서 벗어난 자유를 전에 모습으로 돌아가 죄를 지을 기회를 얻어서는 안 됨을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육체의 기회로 삼는다는게 무슨 뜻입니까? 한마디로 육신의 욕망을 채우는 수단으로 삼는 것을 의미합니다. 반면에 사랑으로 종노릇한다는 것은 하나님과 이웃을 진정 사랑하는 마음으로 감사와 기쁨과 은혜로 섬긴다는 의미입니다. 우리는 결코 자유를 오해하면 안됩니다. 자유는 내 맘대로 해도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요8:32절‘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우리가 죄를 범하면 자유를 잃어버립니다. 죄의 노예가 되어 죄에게 끌려다닙니다.
그런데 진리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알면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진정한 자유함을 누릴 수 있습니다. 역설적 진리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속에 이런 놀라운 진리가 담겨져 있습니다. 십자가에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이 있습니다. 죄를 범한 죄인이 십자가에서 죽었습니다. 그러면 더 이상 죄의 심판을 받지 않습니다. 죄에서 자유함을 얻은 것입니다. 이제 그는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사는 것입니다. 그안에 진정한 자유함이 있는 것입니다. 진리안에 진정한 자유함이 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상주감리교회 성도여러분, 이제 우리는 십자가에서 이 죄의 몸이 죽은 것입니다.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지배의 욕망을 따라 살면서 섬김을 받으려고 했던 죄성을 십자가에 못박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내것이 아무 것도 없음을 깨닫게 됩니다. 갈2:20절‘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이제는 내 안에 예수께서 내 생명이 되셔서 사는 것입니다. 이제는 모든 것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사용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섬김인 것입니다
상주감리교회 성도여러분은 죄지을 자유를 얻은 것이 아니라 죄를 짓지 않을 수 있는 자유를 얻은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전에는 우리가 죄를 지을 수밖에 없었으나 이제 그 죄의 노예 상태에서 풀려났음을 말하려는 것입니다. 우리가 얻은 자유는 하나님께로 나아갈 자유이지, 죄에 빠져있을 자유가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전에는 우리가 도저히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없도록 죄에 갇혀있었으나 이제는 아무런 제약이나 조건 없이 그에게 나아갈 수 있게 되었음을 말하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아 자유를 얻었음에도 전혀 죄를 짓지 않는다는 말이 아닙니다.
요일1:8-9절‘만일 우리가 죄 없다 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라고 하였습니다. 자유를 얻은 사람에게는 성령이 그 안에 임하여 계시기 때문에 죄에 대하여 상당히 민감합니다. 성령으로 죄에 대하여 마음에 불편함을 느끼고 주 앞에 나와 회개할 수 있습니다. 상주감리교회 성도여러분 회개는 성도에게 주어진 은혜의 도구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죄를 가볍게 여기면 안 됩니다.
놀이터에서 어린아이들이 모래밭에서 뒹굴고 놀면서 옷을 더럽힙니다. 더러워진 옷을 엄마에게 벗어 던지면 이를 세탁해서 깨끗한 옷으로 입혀 줍니다. 이것은 어려서는 가능합니다. 나이 들어서 그렇게 했다가는 엄마에게 무서운 꾸중을 들을 수 있습니다. 이처럼 성도의 죄도 무지할 때는 하나님도 그냥 넘어가 주십니다. 그러나 믿음이 자라고 성숙하였음에도 그렇게 죄를 가볍게 여긴다면 하나님의 징계가 따르게 됩니다. 히12:6절‘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가 받아들이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라 하였으니’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성숙하였나를 가름하는 척도는 얼마큼 죄에 대하여 민감하고 죄에 대하여 증오하고 있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3.사랑으로 종노릇 하라고 합니다.
그 자유를 가지고 적극적인 면에서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 하라’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랑으로 종노릇 할 때 자유는 보존되며 최선으로 이용하는 것이됩니다. 아울러 자유는 최고의 가치를 발휘하여 그 인생은 또한 최고의 인생이 됩니다. 우리도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를 얻었으니 만큼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 하며 살아 가야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 하며 사는 생활이 무엇입니까?
먼저는 겸손히 서로 사랑을 주며 사는 생활입니다. 살전3:12절‘또 주께서 우리가 너희를 사랑함과 같이 너희도 피차 간과 모든 사람에 대한 사랑이 더욱 많아 넘치게 하사’모든 사람에게 사랑을 많이 주며 사는 생활입니다. 우선 형제와 이웃에게 친절을 베풀고 피차 서로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며, 이웃과 형제를 자기 몸같이 사랑하며 도와주는 일입니다.
무디 목사님의 말씀에 ‘많은 사랑은 혀끝에 있고, 참사람은 손끝에 있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사실 말로는 사랑을 잘하나 실천적 사랑은 약합니다. 실지로, 형제와 이웃의 애경사에 동참하여 같이 울고, 웃으며 형제를 도와 드리는 일이 사랑으로 종노릇하는 것이며 서로 형제를 섬기는 일이 사랑으로 종노릇 하는 일입니다. 진실하게 형제와 교제하는 것입니다. 롬12:9절‘사랑에 거짓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상주감리교회 성도여러분 형제의 영혼을 사랑하여 믿음이 약할 때 서로 권면하여 붙들어 주고, 허물도 덮어 주며 때로는 개인적으로 만나 충고를 아낌없이 해주면서 형제가 잘못 갈때 책망을 해서라도 바로 잡아주는 것이 서로 사랑으로 종이되는 구체적인 일입니다.
많은 생명을 구원의 길로 인도하기 위해 복음을 열심히 전하는 일도 사랑의 종노릇 하는 일입니다. 우리 기독교는 사랑의 종교이므로 그리스도인은 모두가 사랑의 종으로 일해야 합니다. 요일서4:11절‘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육신의 소욕으로부터 자유하면 진정으로 행복할 수 있고 그러면 하나님께나 사람에게나 사랑으로 종노릇할 수 있게 됩니다. 물론 사랑의 종은 무엇인가에 얽매어 노예생활 하는 그런 종과는 질적으로 다릅니다. 사랑의 종은 오히려 반대입니다. 육신과 물질과 세상의 것으로부터 해방되어 주님안에 있는 기쁨, 은혜, 평안을 알고 행복하게 감사하며 기뻐하며 섬기는 삶을 말합니다.
주님의 사랑과 은혜가 얼마나 큰지, 또한 내 사랑하는 가족과 이웃과 성도와 그외 모든 인생들이 얼마나 고귀한 인생인지, 얼마나 하나님이 사랑하는 존재인지, 하나님을 섬기고 이웃을 섬기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일인지를 알고 자발적으로 감사와 기쁨과 은혜로 섬기면서 진정 자유와 행복을 누리는 삶인 것입니다. 상주감리교회 성도여러분, 남녀 간에 사랑에 빠지면 어떻게 됩니까? 서로 정말 사랑하면 얼마나 서로를 위해서 무엇인가를 해주고 싶어 애를 씁니까? 그래서 선물도 주고, 맛있는 음식도 사주고, 함께 만나 데이트도 하고 여행도 가고 전화로 뭐라고 뭐라고 속삭이고 하면서 얼마나 행복해 합니까?
또 부모와 자식 간에도 그렇지 않습니까? 부모는 자녀를 위하여 헌신하면서 얼마나 행복합니까? 자녀에게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 주면서, 예쁜 옷을 사서 입혀주면서, 함께 나들이를 하면서 얼마나 기쁘고 행복합니까? 자녀에게 무엇인가를 해 줄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하고 기쁘고 행복합니까? 도리어 자녀에게 더 해 주지 못해서 안타깝지 않습니까? 이게 바로 사랑의 종된 모습인 것입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사랑하는 대상에게 종노릇하면서 행복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대상이 기뻐하는 것을 보며 내가 더 기쁜 것입니다. 그래서 다 주어도 아깝지 않은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도 우리를 너무너무 사랑하시기 때문에 자신의 그 고귀한 몸까지 내어 주시지 않았습니까? 그렇다면 우리가 주님을 사랑한다면 어떻겠습니까? 예수님을 진정으로 만나면 그 주님의 사랑과 은혜가 얼마나 큰지를 알게 됩니다. 주님 안에 있는 그 생명과 평안과 기쁨과 은혜가 얼마나 크고 아름답고 복된 것인가를 알게 됩니다. 그러면 얼마나 주님을 사랑하게 되겠습니까? 주님을 사랑하면 얼마나 주님께 드리고 싶어서 안달이 나겠습니까? 주님께 몸과 마음과 물질과 재능으로 헌신하면서 얼마나 행복하고 기쁘겠습니까? 주님께 무엇인가를 해 드릴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하겠습니까?
그러면 우리는 어떻습니까? 어떤 경우에는 자녀를 위해서는 죽자사자 종노릇합니다. 그러나 주님을 사랑하고 섬기는 일에는 별로 그렇지를 못합니다. 자신을 섬기고 가족을 섬기는 일에는 온갖 정성과 시간과 물질과 뜻을 다하면서 주님을 위해서는 별로 그렇지를 못합니다. 그러나 주님을 진심으로 사랑한다면 그럴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이웃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웃이 얼마나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존재인 줄 안다며, 얼마나 귀한 하나님의 형상인 줄 안다며, 주님께서는 얼마나 그들이 구원받기를 원하신다는 것을 안다면, 또한 우리에게도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 안다면 우리는 이웃을 사랑하게 되고, 사랑한다면 그들에게도 사랑으로 종노릇하게 될 것입니다. 사랑으로 종노릇하면서 너무나 행복할 것입니다. 그러면 나도 행복하고 너도 행복하고 주님도 기쁘게 됩니다.
결국 나와 내 가정과 교회와 이 사회 속에 그야말로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져 우리 모두가 진정 천국을 맛보며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13절‘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 사랑의 감정이 생기면 억지로 하지 않습니다. 즐거움과 기쁨으로 행합니다. 서로 사랑하는 사람끼리 있으면 온종일 같이 있어도 지루하지 않습니다. 하루가 짧았고 헤어지는 것이 싫어 조금만 더 있다 헤어지자고 하는 것입니다.
상대를 사랑할 때는 기쁘게 종노릇 할 수 있습니다. 상대의 기쁨을 위하여 나를 얼마든지 낮출 수 있는 것입니다. 상주감리교회 성도여러분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면 그렇습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시간이 참 행복합니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저도 사무실에 출근해서 혼자 있습니다. 교회에 머물러 있으면서 설교 준비하는데 어디서 말을 걸어오는 때도 별로 없습니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지루하지 않습니다. 주님의 성령 안에서 교통이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어린 아기 모세가 담긴 갈대 상자를 나일강에 던졌을 때 모세의 모습이 어떠했을까를 상상한 적이 있습니다. 어린 모세가 담긴 상자를 히브리어도 ‘테바’라고 하였고 영어로는 ‘Ark’라고 합니다. 홍수가 났을 때 노아와 그의 가족 그리고 동물들이 타고 있었던 방주도 ‘테바’라고 하였습니다. 단어가 똑같습니다. 어린아이 모세의 갈대 상자나 노아의 방주나 규모가 다를 뿐, 앞을 알 수 없는 물에 떠다녀야 하는 것은 같습니다. 그러지만 그 안에는 하나님의 뜻이 담겨 있고 구속사의 흐름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갈대 상자에 담긴 모세나 방주에 담긴 노아와 식구들 그리고 동물에게는 하나님의 안식이 있었으리라 판단됩니다. 그들은 두려워하지 않고 평안을 누렸을 것입니다. 갈대 상자의 모세는 평안한 잠을 잤을 것이고 노아의 방주에 실린 동물들도 그렇게 잠을 잤을 것으로 상상할 수 있습니다. 저도 상주감리교회에 흐르고 있는 주님의 구원의 은혜가 있기에 늘 평안과 기쁨을 누릴 수 있었던 것이라고 고백을 합니다.
죄의 종에서 놓여 자유를 얻게 된 사람은 하나님의 뜻이 그 안에 머물러 있어 육신은 땅에 속하여 있지만, 영혼은 하늘에 속하여 하나님을 더욱 사랑하고 믿음을 지니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넘치게 밀려 들어오기에 기쁨으로 다른 사람들을 섬기는 종이 될 수 있습니다.
14절‘온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 같이 하라 하신 한 말씀에서 이루어졌나니’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므로 내게서 하나님이 말씀하신 율법이 성취되는 것입니다. 율법의 성취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함이 내게 이뤄짐을 말하는 것이요 땅에 속한 자가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존재로 변환됨을 말하고 있습니다. 상주감리교회 성도여러분 나를 자유롭게 하시기 위한 부름의 목적을 잘 받아들이고, 더는 죄의 종노릇 하는 어리석음에서 벗어나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믿음의 성도는 하나님도 원하시는 행복한 삶을 이 땅에서뿐 아니라 영원한 나라에서도 누릴 수 있습니다. 여러분들에게 이런 축복이 임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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