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토론] 깨달음이란 무엇인가
[깨달음과 수행] <24> 혜능 스님
“스스로 그마음을 맑게하면 깨달음의 길 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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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해탈에 이르기 위한 청정행인 계율은 모든 중생에게 이익을 안겨주는 부처님의 자비로운 말씀이다. 사진은 스님들이 계를 지키겠다는 다짐으로 연비를 받는 모습. |
생활속에 계율 실천하면 삼매.지혜의 눈 열려달음(bodhi)이란 잠에서 깨어난 것처럼 이제까지 알지 못했던 일을 환희 알게 되었다거나, 일체의 사물을 감지하며 널리 관찰하고 추측하는 정신작용을 일컫는 말인데, 부처님을 ‘깨달은 이[覺者]’라고 번역하는 것은 스스로 깨달았을 뿐 아니라(自覺) 다른 사람을 깨닫게 하는(覺他) 깨달음의 작용이 충만[
覺行圓滿]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불교를 깨달음의 종교라고도 한다. 그렇다면 자신도 깨닫고 다른 사람도 깨닫게 하며 깨달음의 작용이 충만한 삶의 모습은 어떤 것일까? 사실 우리는 이 깨달음이라는 것을 이상화.관념화시키거나 신비롭고 초월적인 어떤 현상으로 생각하고 있지나 않은지 모르겠다.
초기 경전에서 부처님은 깨달음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신다.
“벗이여, 나는 이 세상에 홀로 존재하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사실, 즉 만물은 상즉관계에 있다는 사실을 깊이 깨달았다. 그리고 모든 중생은 불성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도 깨달았다.”
존재하고 있는 모든 것은 불성(우리 마음속에 있는 부처님)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모든 사람이 불성을 지니고 있을 뿐 아니라 모든 지혜와 힘이 그들 내면에 이미 깃들어져 있기 때문에 외부에서 깨달음을 구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 부처님의 위대한 발견(깨달음)이며 모든 사람들이 기뻐할 소식인 것이다.
부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벗이여, 인간과 신, 바라문 그리고 수행자와 마라를 증인 삼아 말하는데, 내가 너희에게 말한 것 중에서 하나라도 직접 겪어보지 않은 것이 있다면, 내가 고통에서 벗어난 깨달은 이 부처님이라고 공언하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직접 고통을 확인하고 그것을 이해하고, 고통의 원인을 확인하고 그것의 원인을 제거하고, 행복을 확인하고 그것을 누리고, 행복에 이르는 길을 확인하고 그 길의 끝까지 가보았으므로, 이제 나는 너희에게 자유로운 사람이라고 선언하는 것이다.”(쌍윳따 니까야 V, 420)
깨달음을 여신 후 최초로 말씀하신 사성제의 가르침은 그저 우리가 논할 수 있는 대상이나 이론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 그것들은 바로 우리들이 실천하고 이루어야 할 행동 방식이라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그리고 부처님이 깨달으시고 찾아낸 그 길은 우리들이 항상 마음의 눈을 뜬 채 살아가야 하는 길이며, 몸과 마음이 언제나 현재 속에서 맑게 사는 길이다. 그 반대의 길은 망각의 어둠 속에 사는 것이다.
우리가 망각의 미혹 속에서 산다면 우리는 자신이 살아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게 된다. 우리의 몸과 마음이 지금, 바로 여기라는 현재의 순간에서 벗어난다면 결과적으로 우리는 인생을 제대로 누릴 수가 없게 되는 것이다.
불성의 자각으로 인생의 온갖 고통을 제거하고 평화와 기쁨, 그리고 평정의 빛이 넘쳐흐르는 깨달음의 실현을 위해서는 어떠한 실천과 삶의 모습을 보여야 할까?
불교에는 깨달음의 실천이란 어떤 것인가를 구체적으로 노래한 ‘칠불통계게(七佛通誡偈)’라는 게송이 있다. “그 어떤 악도 행하지 말라. 모든 선을 받들어 행하라. 스스로 그 마음을 맑게 하라. 이것이 모든 부처님의 가르침이다.”라는 이 게송은 깨달은 이의 삶의 모습인 ‘청정행’을 잘 설명하고 있다. 일곱 부처님이 공통적으로 일러주시는 청정행의 가르침은 너무나도 당연하고 평범하기 이를 데 없는 내용이다. 하지만 지극히 당연한 일을 바르게 실천한다는 것이 반드시 쉬운 일만은 아니다.
요즈음 우리 사회에는 악을 가볍게 여기는 풍조가 만연해 있다. 악을 가볍게 보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악을 행하여 마음을 더럽게 물들여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특히 이 게송의 세 번째 구절인 ‘스스로 그 마음을 맑게 하라’는 대목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이 말이 바로 불교의 ‘청정행’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부처님이 깨달음을 여시고 법을 전하던 시절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불교의 수행은 한 마디로 자기정화라는 청정행을 강조해 왔다. 이것이 인간의 삶의 기본일 뿐만 아니라 불교 수행의 근본이기 때문이다.
우리 주변에는 불보살의 모습과 그 덕을 생각하며 명호를 부르는 염불수행, 부처님의 공덕과 진리의 뜻이 함의되어 있는 다라니와 만트라를 쉬지 않고 외우는 주력수행, 그리고 마음을 고요하게 가라앉히고 하나에 집중시키는 좌선과 경전을 읽는 독경, 악한 짓을 저질렀거나 게으름 피운 것을 반성하며 자신의 일상을 돌아보는 참회 등 갖가지 수행법들이 행해지고 있다.
이러한 온갖 수행들은 한결같이 ‘스스로 그 마음을 맑게 한다’라는 이 한 구절과 연관되어 있다. 즉 번뇌와 집착에 얽매인 인간에게 자기정화라는 청정행이야말로 불교수행의 기본이 된다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할 것이다.
번뇌와 아집의 극복에 전념하면 이기적인 자기로부터 사욕을 벗어난 자기로 전환해 가게 된다. 그러므로 불교의 그 어떤 가르침도 결국 실천적으로 본다면 자기정화를 떼어놓고는 성립할 수 없다. 자기정화는 불교 수행의 기본 맥인 것이다.
자기정화의 ‘청정행’이 분노.탐욕 극복하는 길
생활속에 계율 실천하면 삼매.지혜의 눈 열려
모든 부처님 가르침의 목표는 명확하다. 인간의 괴로움을 극복하는 것이 궁극의 목표이다. 목적지는 해탈, 또는 열반이라고도 부르는 안락한 경지이다. 이 해탈 열반의 안락한 경지를 얻기 위한 자기정화의 길[청정행;계행]이 결코 쉬운 것은 아니다. ‘스스로 그 마음을 맑게 하라’라고 하였지만 문제는 바로 그 마음을 다스리는 일에 있다.
〈법구경〉에 “붙잡기 어렵고 경솔하고 욕망을 따라 헤매는 마음을 억제하는 것은 좋은 일이다. 억제된 마음이 평화를 가져오기 때문에.”라고 하였다. 마음을 잘 거두어 다스리는 것을 계[攝心爲戒]라고 하는데, 어떻게 마음을 거둘 것인가?
우리 인간은 정신을 느슨하게 풀어버리면 어떤 일이든 닥치는 대로 즉흥적으로 해버리고 마는 존재이다. 대체 인간에게 근본적인 선악의 기준은 무엇일까? 사람들은 아무리 선한 일이라 해도 그것이 오직 선하다는 이유만으로 하려고 들지는 않는다. 이런 문제에 대해서 부처님은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을까? 해답은 역시 부처님이 설한 ‘청정행’으로 귀결된다.
청정행은 얽매임과 그릇된 집착, 끝없는 애욕을 극복하는 길이요, 지나친 욕망을 극복하는 길이다. <능엄경>에 “이치로는 돈오하여 온갖 번뇌를 녹일 수 있으나 실제 모든 경계에 있어서는 습기가 단박에 제거되지 못하므로 업장을 차례로 끊어 없애야 한다.”고 하였듯이, 욕망은 단번에 극복할 수는 없다.
하지만 한결같이 다스려 나간다면 해탈에 다가가게 되는 것이다. 한결같이 다스려 나가는 이것이 바로 자기정화의 길이고 청정행이며 계행이다. 남을 괴롭히거나 다치게 하고 나중에 참회하는 식의 행위는 결코 괴로움이 소멸된 해탈의 길에 도움이 될 수 없다.
청정행인 계율은 모든 중생에게 이익을 안겨다 주는 부처님의 대자대비의 말씀이요 부처님의 지혜에서 나온 말씀이다. 계율을 잘 지키면 나쁜 일을 멈추게 하고 후회가 없으며, 환희심과 안락함, 삼매와 지혜의 눈이 저절로 갖추어지게 된다. 청정행을 지킬 때는 항상 세간의 좋은 일은 모두 모여들게 될 뿐 아니라 세간을 뛰어넘는 진리의 세계로 나아가게 되는 것이다.
혜능스님 / 해인총림율원장
[출처 : 불교신문 2068호/ 10월5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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