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곧은 스승이신 이오덕 선생을 어렴풋이 알고는 있었지만 동화모임에 들어오면서 좀 더 많은 것을 알았습니다.
작년 동화읽는어른모임 10주년 기념행사에서 우리 책도담 모임에서 이오덕 선생 관을 만들고 그 분이 쓰신 책을 전시하였습니다. 그래서 좀 더 가까이 선생께 다가 설 수 있었습니다.
얼마 전 어도연 사이트에서 "어린이 문학협의회"주관으로 선생께서 살고 계시던 고향과 무덤을 다녀온다는 것을 알고 바로 신청을 했습니다.
선생께서 이루신 일들과 잊혀지지 않는 일화들을 들으면서, 또한 선생께서 남기고 가신 아름다운 흔적들을 눈으로 가슴으로 만나고싶었습니다. 선생을 존경하려면 그 분이 어떻게 어디에서 사셨는지도 알아야 하겠다는 생각이었습니다.
우리 모임에서 선생을 좋아하는 회원이 많아서인지 몇 명이 함께 8월 16일 충주로 떠났습니다.
이 번 행사 주관은 어린이 문학협의회에서 했는데 이오덕 선생과 관련있는 단체들도 함께 참석을 했습니다.
서초구 구민회관앞에서 오전 9시 30분에 출발하기에 우린 홍제에서 회원들(이정아, 졍현옥, 강향자, 김미전, 장은희등 과 그의 자녀들)이 함께 떠났습니다.
즐거운 주말 봄나들이라고 생각하니 마음이 한결 가볍고 즐거웠습니다. 그곳에 도착하니 낯익은 이주영 이사장께서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무척이나 반갑게 맞아주셨습니다. 특별히 서대문동화읽는어른모임을 사랑하시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모두들 정확한 시간 약속을 지켜서 10시에 출발을 하여 충주시 신기면으로 향했습니다. 시원스럽게 달려가는 도로 위에 자연의 아름다움을 느끼면서 인사를 나누었습니다. 처음으로 만나는 분이 많아서 누가 누구인지 잘은 모르지만 이름은 조금씩 들어본 기억이 나곤했습니다.
어린이문학협의회 사무국장이신 윤동재 선생과 어린이도서연구회 이주영 이사장, 마주이야기 박문희원장, 김원숙선생, 박경임선생, 민속연구과 박종대 박사 등 함께 버스를 타고 맛있는 떡과 음료수를 먹으면서 떠났습니다.
2시간이 되기 전에 신니면 수월리 이오덕 선생 생가를 지나 묘소에 도착을 했습니다. 산 자락에 들어서자 선생께서 쓰신 시비가 있었습니다.
<새와 산>
새 한 마리
하늘을 간다
저쪽 산이
어서 오라고
부른다.
어머니 품에 안기려는
아기 같이
좋아서 어쩔 줄 모르고
날아가는구나!
선생은 1925년 11월 14일 경상북도 청송군 현서면 덕계리 574번지에서 아버지 이규하와 어머니 정작선의 맏아들로 태어나셨습니다. 위로 누나 셋이 있고, 아버지와 어머니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이 태어난 해인 1925년 끝자인 "5"와 태어난 마을 이름의 첫자인 "덕"자를 따서 "오덕"이라고 지었습니다.
선생은 1944년 봄 처음 교사로 경북 청송에서도 두메인 부동초등학교로 부임한 뒤 일년 반만에 해방을 맞이하였습니다. 그리하여 43년 동안(1944~1986)을 주로 경북 청송. 의성. 안동. 영주등 두메를 돌면서 평교사에서 교감, 교장을 두루 거쳤습니다. "5공 정권이 하도 시끄럽고 못살게 굴어서" 86년 정년을 5년 가까이 남기고 교단을 그만두기까지 쉴새없는 반성으로 어린이 교육에 임하였습니다.
선생을 교육사상가로 일컫는 까닭은 처음 마음을 끝까지 가져가면서 실천하는 자세에서 나타났습니다. 또 선생는 교사, 어린이 문학가, 우리말 운동가, 수필가, 비평가....등 지칭이 여럿이 있습니다.
선생은 지난 2003년 8월 25일 일흔여덟을 일기로 타계하시고 이곳 수월리에 안장되셨습니다.
어제 스승의 날이라서인지 무덤 앞에는 꽃들이 수북이 쌓여있었고 무덤 둘레 비석에는 선생께서 쓰신 책의 제목이 새겨져있었습니다. 서울에서 일행이 도착하자마자 대구에서 "경북아동문학협회" 회원들이 도착을 하고 청주 동화모임에서도 왔습니다.
참석자들은 서정오선생, 윤동재 선생, 이주영 이사, 박문희 원장, 이대로 선생, 김녹천 선생, 윤태규선생, 김익승 선생, 김경희 선생, 신민재 선생, 김춘화 선생, 주미남 선생, 김춘화 선생, 최춘해 선생, 노명환 선생, 허홍구 선생, 김영길 선생, 김원숙 선생, 박경임 선생, 이정옥 선생, 박정서 선생, 사진 최종규 등이 참석을 했는데 더 많은 사람들이 있었으나 이름을 다 기억하지 못하고 적어오지 못했습니다.
(너무 많은 사람들 속에서 이름표 보고 그냥 적은 것이라서~~ 아마도 백명은 넘어보였습니다.)
우리 단체는 먼저 무덤에 참배를 하고 기념사진도 찍었습니다.
무덤 앞에 <아리랑 나라> <개구리 울던 마을> <삶과 믿음의 교실>-이오덕교육 수상집 <우리글 바로쓰기 우리 문장 쓰기> <거꾸로 사는 재미>-이오덕 수필집 <글쓰기 교육> <우리 크면 농부가 되겠지>-농촌 아이들의 산문집 <어린이를 지키는 문학>-아동문학 평론집이 둘레에 새겨져있었습니다. 그것들을 하나 하나 이주영 이사장이 설명을 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들은 밥집으로 내려와서 특별히 유기농법으로 재배한 야채들로 맛있는 비빕밥을 해서 먹고, 감자떡도 먹었습니다. 시래깃국과 고추장에 맛있는 비빕밥을 모두들 한 그릇씩 먹었습니다. 아이들도 매콤한 비빕밥이 맛있는지 호호 불며 물도 마시면서 먹었습니다.
식사를 마치고 이오덕 선생께서 살아오신 비디오 자료집을 영상으로 만날 수 있었습니다.
선생께서는 "좋은 글을 목표로 하지말고 참된 삶을 살아가는 과정을 기록하는 것이 참된 글이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람답게 살아가는 것, 참된 세상을 살아가는 것, 정직하고 성실하게 살아가는 것, 정직하게 글을 쓰는 것 등을 일러 주셨습니다. 선생께서 말씀하시는 것 하나 하나가 모두 바른 말이라 거역할 수 없음을 깨달았습니다.
선생께서는 운동장에 뛰어 노는 아이들의 모습이 좋아서 선생이 되고 싶었다고 말씀 하시면서 19살 나이에 교단에 서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교육이란 아이들 중심으로 생각하고 아이들이 주인이 되는 학교를 만들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참된 교육은 생활 교육으로서 온 몸으로 활동하면서 놀고, 만들고, 생각하고, 배우는 것이 글쓰기 교육이 된다고 하셨습니다.
1986년 대서초등학교 교장을 마지막으로 교단을 떠나셨습니다. 요즘 같이 도시에서 이론으로 갈고 닦아진 우리 어린이들에게 좋은 글을 원하는 것은 정말로 잘 못 됨을 깨달았습니다. 도시에 있는 어린이일수록 많은 것을 보여주고 함께 놀아주는 것이 좋은 글을 쓸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다음으로는 경북아동문학협회 유승용 선생께서 이오덕 선생과 함께 했던 시절을 이야기 해 주셨습니다. 어른들은 어른들의 입장보다 아이들 편에서 글을 써야 한다는 말을 공감하셨습니다. 지금은 "참 삶을 나누는 봉사 모임"에서 일을 하고 계신답니다.
둘 째 한국 글쓰기 연구회 김익승 선생께서 말씀하시고,
셋 째 우리말 살리는 겨레모임 공동대표 이대로 선생께서
넷 째 어린이도서연구회 이주영 이사장
다섯 째 서대문동화읽는어른모임 이정아 회장
여섯 째 마주 이야기 김원숙 선생
선생께서 살았을 때 먼 발치에서 쳐다보기만 하고 말도 못한 것이 아쉽다
고 눈물을 닦으셨고
일곱 째 아동문예 연구회 김녹촌 선생
선생은 한글을 모르는 아이는 책 읽어도 내용을 모른다고 하면서 현실에
서 한글을 모르는 어린이들을 위해서 글쓰기 교육이 문제라고 하셨습니다.
여덟 째 우리말 살리는 겨레모임 운영위원 노명환 선생
아홉 째 충주 민족문화작가이며 동화작가 이신 박상주 선생
열 째 이오덕 선생 맏아들 이정우 선생이 나와서 얘기를 해 주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의 얘기를 듣고 나니 "이렇게 좋은 일을 많이 하시면서 우리글 우리말을 위해서 애쓰셨구나" 하고 눈물겨웠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이오덕 선생이 우리 고향인 영주에서도 어린이들을 지도하셨다니 무척이나 기뻤습니다. 내 고향이 영주이지만 초등학교는 두메산골에서 다녔기 때문에 1시간을 걸어서 다녔습니다.
선생은 86년 퇴임을 하신 뒤에 우리말글 바로쓰기 운동을 본격적으로 벌었습니다. 일본의 식민지로 자란 문화가 하루 아침에 바뀌기도 힘들겠지만 말 또한 일본사람들이 강제로 쓰게 했기에 그 잔재가 아직까지 우리들도 모르는 사이에 쓰고 있는 것을 보면 깜짝깜짝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어린이를 지도하는 나로서 우리말과 글을 지킬 수 있는 자세로 살아가야겠습니다. 우리글과 말을 바로 알아야지 우리 어린이들에게 올바른 교육을 전달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