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김춘수)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는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의미가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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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춘수시인은 본관은 광산이며, 경상남도 충무시 동호동에서 태어났다. 경기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1943년 니혼대학[日本大學] 예술학과 3학년에 재학중 중퇴하였다. 통영중학교와 마산고등학교 교사를 거쳐 1965년 경북대학교 교수, 1978년 영남대학교 문리대학 학장을 역임하였다. 1981년 제11대 전국구 국회의원 및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1986년 한국시인협회 회장 등을 지냈다.
유품 목록에는 육필원고 126점과 서예작품, 액자, 통영 두석장(豆錫裝:놋쇠, 백통장식장)과 침대를 포함한 가구류, 10폭 산수화 병풍, 생전에 입던 롱코트, 사진 등 330여점과 이와 별도로 400여권에 달하는 수필집과 사전류를 포함한 서적이 포함돼 있다. 전시관 한쪽에는 김 시인이 생전에 기거하던 것과 비슷한 형태로 방을 꾸며 침대와 병풍, 액자 등을 넣었고 나머지 공간에는 옷가지와 책, 평소 쓰던 소지품 등을 전시하고 있다.
통영시 동호동 63번지에서 출생한 김 시인은 해방 후 고향에서 시인 유치환, 작곡가 윤이상, 시조시인 김상옥, 화가 전혁림 등과 함께 '통영문화협회'를 만들어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통영중학교 교사로 재직하던 1947년 첫시집 '구름과 장미'를 출간한 이후 2004년 향년 82세로 타계할 때까지 20권이 넘는 시집을 출간, 한국 시문학에 큰 족적을 남겼다.
통영시민들은 그의 타계 3년후 자발적으로 성금을 모아 시내 중심가 항남동에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로 시작되는 '꽃' 시비를 세우기도 했다.
첫댓글 점심 때와 김추수 기념관 둘러보고 맛있는 족발과 김밥을 먹을 때도 좋은 그림을 잡기 위해 연신 사진 찍느라 정신이
없어 먹을 것을 제대로 먹지 못하고 끝까지 애쓴 백암님께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