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
내 앞에 마주하고 서 있는 낯선 듯 낯설지 않은 남자. 이렇게 현우석을 마주하게 될 거 라고는 미처 생각도 못했었다. 뭐가 그리 좋은지 배시시 웃어 보이고 있는 현우석을 놀란 토끼눈을 해서는 구부정하게 서 있었다.
“이루나, 안 들어오고 뭐해?”
“네? 아... 신발 좀 벗고... 아니, 근데...”
“나?”
손가락을 자신을 향해 가리키면서 한쪽 입 꼬리를 스윽 올려 되묻는 현우석. 그 말에 난 그저 고개를 살짝 끄덕이는 대답으로 대신했고, 말을 이으려던 현우석은 엄마의 이끌림에 어느새 거실로 발길을 돌렸고, 나란히 마주하고 앉은 둘 사이에 밥상 하나가 놓여 져 있을 뿐 어색한 정적만 흐르고 있다.
엄마는 그래도 집에 온 손님인데 뭐라도 대접을 해야 하는데 어쩌냐는 말을 반복하시면서 연신 눈꼬리를 휘어 웃어 보이며 냉장고에 있는 반찬들을 쉬지 않고 내오셨다. 몸둘바를 몰라하며 차곡차곡 놓여져 상 하나를 그득하게 차지하고 있는 음식들을 보면서 난감해하는 현우석의 모습에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어느새 내올 음식은 다 내왔다는 듯 밥공기 4그릇을 동그란 접시에 담아 들고 어색하게 마주앉은 우석과 내가 있는 거실로 오시는 엄마. 그제서야 경직됐던 얼굴 근육을 풀 듯 숨을 훅 뱉어냈다.
“어서 먹지 않고 왜 그러고 있어.”
“그래도 어머니 오시면 같이 먹어야죠.”
“그래? 그럼 나 수저 들었으니 이제 먹자.”
“네, 잘 먹겠습니다.”
“차린 건 없지만 그래도 한술 떠봐.”
“아닙니다. 집 밥이 얼마나 그리웠는데요 제가. 너무너무 맛있습니다 어머니.”
눈꼬리를 휘어 미소를 띤 얼굴로 엄마를 바라보는 우석. 그런 우석의 태도가 마음에 드는 듯 엄마는 입매를 늘리며 미소를 지어 보인다. 반복되던 일상에 불쑥 누군가가 찾아와서 잔칫날인 듯한 느낌을 주는 기분이 들었다. 한 끼를 배불리 채운 우석이 불뚝 올라온 배를 빙글빙글 돌려가며 문지르며 잘 먹었단 인사를 잊지 않고 한다.
“참! 근데요 어머니, 제가 루나랑 둘이 시간을 좀 갖고 싶은데 외출 좀 하고 와도 될까요?”
“에이 뭘 그런 걸 일일이 확인받고 그래? 그럼그럼 얼마든지.”
“감사합니다.”
“엄마...!”
“이루나, 그만 빼. 못 이기는 척 우석이 따라 나가 얼른.”
“역시, 어머니께서 뭘 아시네요. 그럼 루나 데리고 나갔다가 안전하게 귀가시키도록 하겠습니다.”
“그래, 믿는다 우석아.”
“넵! 다녀오겠습니다!!”
어느새 난 밥먹기가 무섭게 외투를 다시 챙겨 입고 있었다. 그렇게 우석의 뒤를 따라 나서고 있었다.
* * * *
몇 시간 전만 해도 얼굴을 마주하고 있게 될 거라곤 생각도 못했던 루나와 우석은 지금 함께다. 자신의 옆자리에 루나가 앉아있다는 현실이 믿기지 않는지 우석은 운전하는 내내 곁눈질로 루나를 본다.
“운전에 집중해. 너 그러다 사고나.”
“응! 그럼, 내가 안전운전 해야지. 이루나 지켜야지 내가.”
“무슨 또 결론이 그렇게 되냐...”
“잊었어? 내 인생은 기승전..!”
“아! 알았어. 알았어. 그만.”
“부끄러워 하긴...”
왼손으로 핸들을 잡고, 오른손으로 조수석에 앉은 루나의 뺨을 두 손가락으로 살짝 쥐었다 놓는다. 우석의 행동에 루나가 흘깃 운전석으로 고개를 돌린다. 갑작스런 루나의 행동에 우석은 오른손을 원래의 자리인 핸들에 얹고는 아무일 없었다는 듯 시치미를 떼며 정면을 주시한다.
“뭐야, 내가 그렇게 보고 싶었어?”
“어? 뭐?”
“알았어, 나도 무지많이 보고 싶었어. 이루나.”
“답이 없다 너란애 진짜......”
루나의 반응에 피식 웃음을 내뱉는 우석. 한참을 달리던 차는 한적한 산책로에 멈췄고, 산책로 안쪽에 카페로 보이는 운치 있는 건물이 보이기 시작한다. 시동을 끄고, 조수석으로 달려가 문을 열어주고, 안전벨트를 풀러주는 우석. 우석에 손길에 이끌려 자연스레 차에서 내려 선 루나.
“날도 추운데 저기가서 차나 한잔 할까?”
“어...”
“자!”
불쑥 루나의 앞으로 뻗어 보이는 우석의 손. 루나는 멀끔히 우석의 설명이 덧붙여지기를 기다리는 듯 바라보고 섰다. 안되겠다 싶었던 우석은 루나의 손을 잡아채서 자신의 외투 주머니에 찔러 넣고, 꼬옥 잡은 채로 카페로 향한다. 놀란 루나가 손을 빼려 하자 우석은 쐐기를 박듯 무심하게 툭 한마디 뱉는다.
“자꾸 그러면 나 너랑 더 가까이 서서 걸어갈 거야.”
“더... 뭐?”
되묻는 루나에게 더 이상 못 참겠다는 듯 긴팔로 감싼 어깨를 당겨 우석의 품안에 루나를 꼬옥 넣는다. 갑작스런 우석의 행동에 루나는 놀라 심장이 밖으로 튀어나올 듯 뛰어대는 가슴에 한손을 얹는다. 루나의 심장박동이 빨라진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우석은 루나를 감싸 안은 채 귓가에 속삭인다.
‘내가 진짜 너 땜에 힘들어 한 거 알면 너 나한테 이렇게 못 한다 이루나. 보고싶었어...’
* * * *
“어디야?”
“이루나 마음 속.”
“그럼 나오지 마. 계속 갇혀있어. 내가 안 내보내 줄 거야.”
“응! 이루나 마음속에서 구속되는 거 바라던 바야.”
“히히... 그러니까 진짜 지금 어디냐구.”
지금껏 그런 적 없던 루나에게 변화가 찾아왔다. 우석이 한국에 돌아오던 날 정식으로 연인이 되기로 약속한 두 사람. 그리고 그 결과, 가장 큰 변화는 루나였다. 남자란 상대와 결혼하는 일은 없을 것이고, 연애 따위도 안할 것이라 매일같이 다짐하며 버텨왔던 루나. 우석에게 응석부리고 있는 자신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변화되어 가고 있었다.
불쑥 루나 앞으로 장미꽃 한 송이가 보여 지고, 장미꽃을 들고 있는 손을 따라 뒤를 돌아보던 루나는 이내 눈을 휘어 웃어 보이며 다가선 우석을 반긴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이젠 먼저 다가서서 우석을 안아주는 행동까지 마다하지 않는 루나.
“나, 이렇게 행복해도 되는 거야?”
“왜?”
“나한테 그렇게 철벽 치던 이루나가 지금은 나밖에 모르는 바보가 됐다는 게 실감이 안 나서. 눈앞에서 보고 만지고 있는데도 꿈인가 싶고...”
우석의 말에 말없이 말끝을 흐리는 입술에 루나의 입술을 맞댄다. 그리고 서로는 약속이라도 한 듯 눈을 지그시 감고 우석에게 루나의 마음을 확인이라도 시켜주듯 키스를 나눈다.
* * * *
[초등학교 동창회]
“루나야, 여기야!”
“어, 오랜만이다 진짜.”
급하게 뛰어온 듯 맥주전문집에 들어선 루나가 숨을 헐떡이며 동창들이 둘러앉은 테이블로 다가선다. 2015년의 송년회를 집에선 보낼수 없다면서 결혼한 유부녀, 유부남들이 자리를 만들어 추진하게 된 동창회.
남녀가 섞여 앉은 테이블에 빈자리를 찾아 자리하고 앉으려는 순간 루나의 어깨를 감싸 쥐며 못 앉게 멈춰 세우는 현우석. 동창들은 다들 예상치 못한 둘의 모습에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설명을 기다리듯 시선을 준다.
“지금 뭐 하는 거야 자기?”
“뭐... 뭐? 자... 자기? 야, 현우석. 너 지금 루나한테 뭐라 한 거야? 미쳤어?”
“몰랐어? 둘이 사귀는 사인 거?”
마치 루나와 우석에게 각별한 친구란 듯 으스대면서 노선화가 동창들 사이에 불쑥 뱉은 한마디. 어색하게 미소 지어 보이는 루나와 그 곁에서 루나가 앉으려는 자리에 계속 못 앉게 하더니 기어코 루나가 앉으려던 자리에 현우석이 앉고, 다른 테이블에서 의자를 한개 가져와 놓으며 자신의 옆에 딱 붙어 앉게 만드는 우석.
“노선화 말대로야.”
“이야, 현우석. 결국 성공한 거야?”
“뭐, 그렇다고 해야 되나?”
“축하한다 진짜. 그럼 니들 결혼까지 생각하고 만나는 거겠네? 나이가 있으니까?”
“난 처음부터 그런 생각인데, 루나가 아직 생각이 없는 거 같다.”
“이루나, 너 이제 내년이면 서른이야, 서른. 정신차려.”
“에잇! 새키야. 말조심해. 감히 지금 누구한테 말을 막해? 어?!”
“이야... 현우석... 너 많이 변했다? 너 원래 이런 놈이었냐?”
“난, 이루나한테만 이런 놈이다 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