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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규슈 여행기 1997. 8. 5. - 9.
여름 방학에 계획했던 4박 5일 일본여행이 다소 차질을 빚으면서 이루어졌다. 출발은 순조로웠으나 귀국이 순조롭지 못했다. 8일 저녁 승선하여 9일 아침 부산에 도착할 계획이 태풍 때문에 변경되어 시모노세키에서 하룻밤 더 자고 9일 아침에 승선하였다. 지금 배를 타고 부산을 향해 가면서 다소 흔들리는 배 안에서 그 동안의 여행 기록을 해 보려고 펜을 들었다.
8월 5일 아침 10시경 무등 경기장 앞에서 버스를 타고 부산을 향하는 것으로 여행이 시작되었다. 섬진강 휴게소에서 약간 이른 점심식사를 하고 부산에 2시가 넘어 도착해서 수속을 밟고 4시 30분 부관 페리호에 승선하여 6시경 선상식으로 김치찌개 저녁식사를 했다. 배는 7시 30분 출발을 했고, 맑은 날씨이기에 갑판에 올라 부산항을 점점 멀리하며 어두워져서 불빛만 반짝반짝 할 때까지 갑판에 있다가 객실로 내려와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부산을 출발하기 직전 부두 대합실 TV에 속보로 10명의 장관이 바뀌는 뉴스를 들었고 6일 아침 6시경에는 일본 시모노세키 앞 바다에서 괌 Kal기 사고뉴스를 접했다. 여행객들은 모두 아연 실색, 한숨을 내쉬는 소리가 곳곳에서 들렸다. 왜 하필 우리나라 비행기가 또 사고인가? 광주의 인물 신기하 의원의 사망 소식과 함께 광주 사람들이 많이 변을 당했다는 소식은 내 아는 사람도 끼어 있지 않을까 우려가 되면서, 신 의원을 생각하는 한쪽 가슴이 저려오며 한동안 생각이 끊임없이 연결되곤 했다. 하루 이틀 사이에도 급변하는 세상사를 생각하며 우리의 삶도 성실하게 살아야 됨을, 마지막의 준비가 항상 필요함을 생각했다.
밤 3시가 못 되어 일본에 도착했지만 아침식사까지 선상식을 하고 세관원의 출근시간에 맞추어 9시경 하선을 할 수가 있었다. 일본 소년단 학생들 한 무리가 배안에 같이 타고 있었는데, 하선 시에 전부 교복으로 바꾸어 입었다. 하선 후 우리는 곧 현지 안내원을 만나 버스로 관광지를 향해 이동했다. 본섬인 혼슈와 규슈를 잇는 관문교(1068m)를 지나 나가사키로 향했다. 첫 인상이 우리나라와 비슷한 점이 많다는 것이지만 모든 것이 작게 보였다. 집들이 작게 보였고 우리나라와 같은 아파트 숲은 전혀 없고 이층정도의 주택들이 많았다. 마지막 날 후쿠오카에서 아파트들이 주택지에 다소 있는 것을 보았을 뿐 아파트는 거의 보지 못했다. 집을 크게 지으면 세금이 많기 때문에 크게 짓지 않고, 지진 때문에 아파트는 건설비용이 많이 들어 거의 짓지 않는다고도 했다. 또 우리가 다니는 지역이 주로 일본의 시골이나 소도시 지역이기 때문이기도 했다. 도로 폭이 우리나라는 한 차선이 4m인데 일본은 3m이기에 도로가 훨씬 좁게 보였고, 소형차에 대한 혜택이 많고 시골이어서 소형차들이 눈에 많이 띄었다. 일본은 인구 1억 2천만에 자동차는 6000만대라 하나 도로에 그렇게 차가 많은 것 같지는 않았다. 국민소득이 36000불이지만 흔히 듣는 말로 국가는 잘 살고 국민은 못 사는 나라이고 수입의 50%정도가 세금이기에 도로를 비롯한 시설들은 잘 된 나라이다.
일본을 계속 다녀보면서 느낀 점은 깨끗하다는 것이었다. 도로가 깨끗하고, 집들이 깨끗하고, 산의 나무는 삼나무 종류가 많아 곧게 반듯한 나무들이 줄 맞춰 조림되어 있고, 논밭에 농작물들이 모두 반듯반듯 줄이 맞춰져 심어져 있어 단 한군데도 아무렇게나 심어진 것을 볼 수가 없었다. 쓰레기통이 없고 도로에 경찰이 없는 나라이기도 한데 모든 차들이 스스로 도로규정을 잘 지킨다고 한다. 우리가 다녔던 고속도로는 주로 산간지대로 터널 20여 개를 지나는데 2600m와 2090m짜리 터널이 약간의 사이를 두고 연결되기도 하고, 계곡을 다리로 연결해 만든 곳도 있었다. 준공된 지 일 년 정도 되었다고 했다. 시모노세키에서 나가사키까지 계속 고속도로를 달리는데 차량속도가 아주 느려 답답하기도 했다. 제한속도가 시속 80km라 하는데 50km정도로 달리는 것 같아 중간에 우리 일행 가운데 짜증을 부리며 좀 빨리 가자고 해서 시비가 생기기도 했지만, 빨리 가자는 것은 요구사항이 아니라고 일축되기도 했다. 나가사키에서는 일종의 동물원인 Bio Park를 비가 많이 내리는 가운데 우산을 쓰고 한 바퀴 돌아보았다. 날씨가 좋으면 동물들의 재롱을 보며 먹이를 가지고 원숭이, 캥거루 등과 어울려 놀 수 있다고 하는데 비가 와서 웅크리고 있는 동물들과 식물원으로 조성된 식물들을 한 시간정도 보았다. 다음에 원폭 투하지점에 조성된 평화공원에 갔다. 2차 대전 때 원자폭탄이 투하된 지점에 만들어진 공원에는 오른손은 하늘을 향하고 왼손은 수평을 가리키는 거대한 동상이 있는데 하늘을 가리키는 손은 폭탄투하를, 수평을 이루는 손은 땅을 가리킨다고 한다. 나가사키에 거대한 조선공장이 있는데, 원폭을 받은 원인이었다고 한다. 원폭피해를 입은 두 살짜리 어린애가 종이학이 많아지면 병이 났겠다는 소원을 이야기 한 것이 세계 각처에 알려져 종이학을 접어 보내준 종이학들이 수없이 많이 보관되고 기념하는 탑도 있었다. 8월 7일이 원폭투하일 이어서 대대적인 대회 준비 공사가 진행되고 있었다.
파도가 높아서 배가 심하게 움직인다. 속이 이상하고 멀미 할 것 같아 여기서 쓰는 것을 잠시 멈추어야겠다.
일본 여행 중 현지 가이드가 일본의 성문란에 대해 잠시 이야기 한 적이 있었다. 남학생들은 약간의 폭력 사고가 있을 뿐 별 문제가 없는데, 여고생들이 큰 문제라는 것이다. 일본의 여고생들은 화장이나 몸치장 등이 자유인데 몸치장을 위해 돈을 벌려고 못 하는 짓이 없다는 것이다. 4만-5만 엔을 받는 매춘 아르바이트가 많고, 그러다 보니 감추어진 에이즈도 아주 많다고 한다. 여고생이 자기 몸을 샤넬로 온통 치장하는데 210만 엔(1600만 원 정도)정도가 드는데 자기가 벌어서 치장을 한다는 것이다. 일본은 국방의무가 없고 자위대는 지원제도이므로 사회생활은 남녀가 같이 시작한 셈이다. 자위대에 들어가면 대우가 상당히 좋아 지원자로 자위대 구성 인원이 충족된다고 한다. 돌아다니면서 자위대 모집 광고를 몇 번 보기도 했다. 그리고 흔히들은 이야기로는 회사 평생 고용제도와 그의 변화추세, 고물가로 수입이 생활에 부족하여 일을 많이 하다 보니 세계에서 과로사가 제일 많다는 것, 노년에는 국민연금으로 모두 생활을 하는데 65세 정년 후 남자들이 여자들의 이혼 요구로 위기를 당한다는 것 등을 들었다. 담배를 피우지 않는 사람에게는 금연수당을 주는 회사도 많다는 얘기는 솔깃했다.
나가사키에서는 거의 산 정상에 있는 호텔에서 일박했다. 좁은 길에 구불구불한 산길을 이층 버스가 올라가 준 것도 신기했고 다다미방 하나에 두 쌍의 부부가 같이 자라는 것도 특이했다. 나는 같이 근무하는 선생의 조카부부와 한 방에서 방 가운데에 Tea Table 두 개로 경계를 지어놓고 하루 밤을 지냈다.
8월 7일 나가사키를 출발하여 온천지역인 벳푸에 갔다. 벳푸에 온천지역이 8군데 있는데 해(海)지옥과 피 지옥을 구경했다. 땅속에서 증기와 함께 솟아나는 물이 바다색이라서 해 지옥, 빨간 색이라서 피 지옥 했다. 그 외에도 산지옥, 백야지옥 등이 있는데 솟아나는 물과 증기의 색이나 장소들에 따라 이름이 붙여진 듯하다. 지옥 구경을 한 후 오이타에 있는 수미요시 하마네 리조트에서 해수욕을 하고 연예인 이벤트 행사에 참석했다. 연예인이라야 무명가수 같은데 김상배, 김재희, 한심, 그리고 광주 KBS MC 변진우가 있었고, 노래 두어 곡씩 부르고 행운권을 추첨하고 하는 것이었다. 행여나 하고 기대해 보았지만 역시 나에게는 행운은 없었다. 마이크 때문에 예정시간보다 두어 시간을 지루하게 바닷가 뜨거운 햇볕을 견디어야 했다. 소년소녀 가장 돕기를 한다는 등 모금도 하고 있어, 믿을 수 없는 행사에 기분도 좋지 않았다. 저녁식사도 자연히 늦게 되었고 온천욕도 충분히 못했다. 벳푸에 있는 風月(Hammond)호텔에서 하룻밤 쉬면서 8층 옥상에 있는 노천 온천탕에서 빨가벗고 시내를 내려다보면서 목욕도 하고 1층에 있는 대중탕에 가서도 하고 저녁과 새벽 두 차례 온천 욕을 즐겼다. 지옥을 보았으니 천국도 보아야 한다고 하기에 입장료가 상당히 비싼데도 천국이란 곳에 들어가 보았더니 민속예술 전시관이라는 간판의 Sex백화점이었다. 벳푸 시내는 곳곳이 땅에서 솟아나는 김으로 온천지역임을 나타냈고 시가지가 환락가임을 알 수 있는 시설들이 많았다. 온천은 국가소유여서 땅 임자가 개발을 하려면 400-500만 엔씩 권리금을 내야 되기 때문에 자기 땅에서 온천 김이 솟아올라도 개발 염두를 못 낸다고 한다. 8월 8일 아침 호텔을 출발하여 가까운 거리에 있는 다카사끼야마 자연 원숭이 공원에 갔다. 수많은 야생 원숭이 세 그룹이 교대로 사람들이 다니는 곳 가까이 내려오는 것을 구경하는데 원숭이 세계와 여러 가지 이야기들이 곁들여졌다. 힘센 놈 리더가 있고 새끼 원숭이들만 모여 노는 유치원이 있고 서로 몸을 다듬어 주는 정다운 모습들을 펼쳐 보이는 등 원숭이구경을 잠시 했다.
벳푸를 출발해서는 후쿠오까로 갔고 거기서는 다자이후텐반궁이라는 신사와 시내관광을 했다. 신사의 치장은 화려하고 어마어마하지만, 기독교식으로 말하면 굉장한 우상숭배요 미신인데 그러한 것이 성한 나라가 어찌하여 잘 사는지 하나님을 믿는 나는 이상했다. 국민들이 성실하고, 정직하며, 열심히 노력한 결과라는 것인 것 같은데 미신숭배가 너무 많은 것 같았다. 일본은 97%가 불교인이라는데 그 불교도 미신적인 것이 많은 것 같다. 돌아다니면서 십자가는 서너 번 보았는데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기독교, 천주교, 기타 종교 모두해서 3%밖에 안 된다니 당연하겠다.
일을 많이 하니 어울리는 문화가 없고 혼자 노는 경우가 많아 슬롯머신이 성하고, 화려하게 꾸며진 곳을 보면 슬롯머신 장이고 슬롯머신 경영자가 가장 돈을 많이 번다고 했다. 그런데도 함부로 경영을 못하는 것은 막대한 돈을 투자해야 가능하기 때문이라 한다. 기계 한대에 주차 공간 한군데씩 확보해야 허가가 되므로 돈이 많이 투자되어 누구나 할 수 없는 업종이라 한다. 그리고 일본에는 우리 교포가 약 70만인데 불법체류자가 40만으로 비참한 생활들을 하고 있다고 한다. 환락가나 노동현장에서 고생하면서도 귀국도 못하는 족속들이 많다고 한다.
식당에 들어가서 식사를 하고 나오거나 호텔에 투숙했다가 떠나면 종업원들이 모두 나와서 인사들을 하고 손을 흔들며 배웅을 했다. 형식적인 것이라 해도 친절행동이 몸에 베인 것만은 틀림없는 것 같다. 일본 관광은 다른 지역보다 볼거리가 제일 적고 있는 것도 초라했지만 관광지마다 반드시 상가를 지나 들어가고 나오게 되어 있어서 그들의 상술을 엿볼 수 있기도 했다. 별로 즐거울 것은 없지만 배울 것은 배워서 일본을 앞서야겠다는 마음만 여행 중에 내내 간절했다.
시모노세키에서 아침 9시에 출항한 배가 부산에 오후 7시경 도착했다. 큰 파도를 피해서 돌아왔기에 보통 6-7시간 걸리는데 10시간을 항해한 셈이었다. 제법 파도가 있어서 배가 흔들려 배 안에 있는 사람들이 모두 죽은 듯이 누워 있는데 유일하게 아내는 복도에 나가 창밖으로 밀려다니는 파도를 보며 즐거워하고 있었다. 파도가 잔잔한 곳을 지날 때 배 난간을 붙잡고 끝없이 넓은 바다를 보며 한 시간 반 정도 노래를 부르고 있는 사람은 나밖에 없었다.
부산에 도착하여 마중 나온 버스에 오르니 기사가 90도로 인사를 하며 나에게 배웠다고 한다. 잘 모르겠기에 나중에 확인 해 보니 광주 고등학교에서 일학년 때 담임을 했던 아이로 불량 서클에 가입해 애를 먹였던 학생이었다. 졸업을 못하고 나중에 통신고로 졸업했다고 하면서, 선생님 말씀 안 듣고 공부 안 해서 운전이나 하고 있다고 하며 엉겁결에 선생님을 본 순간 인사를 했다고 했다. 성실하게 생활하는 것이 중요하고 기사가 나쁜 직업 아니므로 열심히 살라고 격려해 주었다. 밤 12시경 무사히 집에 도착하여 편안함과 함께 다시 시작해야 될 일들을 생각했다. 집에 왔다. 밀린 신문을 뒤적이니 휴가 이야기가 있다. 휴가란 일상생활을 떠나서 모든 것을 잠시 잊고 홀가분하게 지내기 위해 떠나는 것인데, 휴가가 끝나면 다시 일상생활로 되돌아올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이 있다. 다시 되돌아 올 일터나 집이 없으면 휴가가 아니다. 학교생활도 가정도 교회 생활도 모두 잊고 일본의 곳곳을 돌아다니고 온 나는 멋진 휴가를 보낸 셈이다.
★큰 나라, 중국 1999. 11. 15.(월)-20(화)
나에게 취미가 무엇이냐고 물으면 서슴없이 여행이라고 대답한다. 시간과 돈이 있으면 여행을 떠나는 것이 내 생활의 많은 부분을 차지해 왔다. 내 주위의 다른 사람에 비해 해외 여행도 많이 다닌 편이고 국내 여행도 많이 했다. 유명한 곳은 물론이고 어디에 좋은 곳이 있다는 말을 들으면 기어이 가 보아야 직성이 풀린다. 여행은 시간과 돈이 많이 들고 피곤하며 위험이 따르는 것이다. 나는 교직에 종사했기에 방학기간에 시간을 확보할 수 있었고, 평소에 절약하며 여행을 위한 적금 등으로 여행비를 마련했다. 여행을 하면서 새로운 곳을 구경하고 새로운 음식을 먹으며 많은 새로운 것들과 부딪치면서 즐거워 하다보면 별로 피곤을 느끼지 않는다. 국내 여행을 할 때는 1박 2일이나 2박 3일 정도는 계속 자동차 운전을 하면서 다녀도 괜찮다. 여행도 믿음의 행위이다. 질병의 위험이 있고 먹는 음식물이 다르고 두고 온 가정이 염려되지만 모든 것을 믿을 때 가능하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동행해 주시는 여행이라는 믿음을 가질 때 무엇이 두렵겠는가?
커다란 나라 중국은 한번쯤 가보고 싶은 나라였다. 홍콩과 마카오를 거쳐 대만을 다녀오는 여행은 한 적이 있지만 공산 치하의 중국은 안 가보아서, 회갑 기념 여행을 중국으로 정하고 일주일간 특별 휴가를 받아 다녀왔다. 북경과 소주, 항주, 상해 네 곳을 중심으로 관광여행을 했다. 장님이 코끼리 만지는 격으로 커다란 나라의 극히 적은 한쪽을 보고 온 셈이다.
첫날 북경에 도착해서 바로 천안문 광장에 갔고, 천안문을 입구로 즐비하게 늘어선 커다란 건물들로 구성된 옛 왕궁 자금성을 돌아보았다. 중국의 모든 것은 한마디로 크다는 것이라 해야 할 것 같다. TV에 잘 나오는 천안문과 같은 커다란 건물이 10개 이상 일렬로 늘어선 곳이 자금성이다. 임금을 비롯한 관리들의 집무실, 인재를 뽑는 시험장소, 벌주는 곳, 휴식소, 전쟁의 승리나 경사 시에 축하연을 베푸는 곳, 생활하는 곳, 황후의 숙소 등, 각각의 건물들에 들어가는 문들, 어마어마한 커다란 건물들이다. 자금성 주변은 운하로 되어 있어 외부에서 쉽게 접근 할 수 없게 되어 있었다.
다음날에는 만리장성에 올랐다. 만리장성을 관광하는 곳은 여러 군데 있는데 우리는 케이블카를 타고 올라가는 제일 높은 곳으로 갔다. 사진 등을 통해 많이 본 곳이기에 새로움은 덜 했지만, 내 발로 딛고 서보고 싶었던 곳이기에 좋았다. 만리장성의 역사는 600년에 이르는데 현재의 장성은 명나라 때에 개축한 것으로 6350km에 이른다고 했다. 진시황제 때는 우리나라 압록강 부근에서부터 시작하여 파키스탄까지 10000km가 넘은 때가 있었다고 한다. 우리가 본 곳은 극히 일부에 불과함을 알 수 있었다. 만리장성에 가기 전에 명 13능(정릉지하궁전)이란 곳에 갔었다. 명 황제가 죽은 다음에 있게 될 묘소로 만들이 놓은 곳인데 지하 35m까지 내려 간 곳에 만들어 놓은 궁전으로, 사후 정사를 보는 자리 등 죽어서도 정치를 하려고 하는 여러 시설이 지하에 있었다. 신기한 것은 지하인데도 습기가 없고 산소를 제거하기 위한 불화로가 설치되는 등 과학적인 시설이 되어 있었다.
중국은 땅이 넓다. 자동차를 타고 아무리 가도 산이 보이지 않는 넓은 평원이 계속된다. 고속도로도 평탄하고 반듯반듯한 직선으로 계속된다. 이제 개발을 하는 시기여서 도로가 좋은 편은 아니나 도로 폭이 넓고, 북경시내에는 차가 많지만 북경을 벗어난 도로는 한가하고 차가 많지 않다. 60년대 우리나라에서 보았던 트럭이 다니는가 하면 신형 차들이 함께 다니는 그러한 곳이다.
북경을 비롯한 도시에는 자전거가 많다. 자전거가 물결을 이루듯 도로 양편에 즐비했다. 북경시내는 기왕에 있던 것은 인정되나 새로 오토바이를 구입해서 타는 것은 금지된다고 한다. 공해 때문이라고 했다. 자전거 전용도로가 있었지만 교차로 등에서 자동차와 자전거가 뒤얽힐 때는 곧 사고라도 날 것 같은 상황이 많이 보였지만 거의 사고가 없다고 한다. 우리 눈에 너무 무질서한 장면이 많이 목격되는데 무질서 속에 질서처럼 사고가 없는 것이 신기했다. 지하철역 근처에 자전거가 많이 주차되어 있었는데 그것은 지하철역까지 자전거를 타고 와서 놓아두고 지하철을 이용하고 다시 돌아올 때 타고 가는 것이라고 했다.
북경의 밤거리는 어두웠다. 화력발전에 의지한 전력이 부족한 것을 실감할 수가 있었다. 관광지도 어두워지면 볼 수 없을 정도로 조명이 약했다. 북경인들은 수입이 좋은 사람이 2000元(한화 30만 원 정도)정도이고, 백화점의 점원은 보통 500元 이었다. 그러기에 물가가 우리나라에 비해 훨씬 저렴했다. 버스 요금은 한국의 5분의 1정도, 휘발유 값은 3분의 1정도였다. 북경에서 첫날 저녁은 천지극장에서 아기자기한 서커스 관람으로 마감했다.
중국여행에서 공원 두 군데와 정원 세 군데를 관광했다. 자금성 뒤에 있는 북해공원과 첨단공원 두 곳을 보았는데, 북해공원은 북경의 역사보다 오래된 곳으로 원나라 때 건설되었다고 한다. 커다란 저수지가 있고, 1651년 달라이 라마의 방문 기념으로 세웠다는 티벳형의 백탑이 높은 곳에 위치해 있는데 지진으로 원래의 높이보다 좀 깎였다고 했다. 첨단공원은 동짓날 황제가 하늘에 제사 지낸 곳이라 했는데 시전, 신년전, 칠성전등 여러 건물이 있고 넓은광장들이 많이 있다. 아침 일찍 갔더니 수많은 사람들이 곳곳에서 아침운동을 하고 있었는데 요가, 테니스, 검도, 포크댄스, 각종 도구를 사용하는 운동 등 젊은이, 노인 모두 어울려서 운동을 하고 있는 아침 풍경은 가관이었다.
북경 시내에서 자동차를 타고 가면 길에서 의자 하나 놓고 이발을 해주는 이발사, 서너 명이 열심히 자동차 세차를 하는 모습, 노인이 처녀 자전거의 펑크를 수리해 주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는데 바로 길에서 하는 영업인 듯했다.
정원은 북경에서 서태후와 관련 있는 황실 정원인 이화원과 소주에 있는 졸 정원 그리고 상해에서 예원을 보았다. 졸 정원은 왕헌신이라는 사람이 16년간 공사를 했다는 개인정원이었다. 중국의 4대 명원중 하나라 하는데 연꽃호, 태호등 연못이 있고 4대 중요 보물중 하나인 태호석이 있고 용모양의 집무실로 견산루, 꼬불다리 4개, 600년생 백목향, 분재를 전시해 놓은 분경원, 접대실이라는 투수당, 애인이 있는 여인의 고민처 등 크고 아기자기하게 꾸며놓은 곳이었다. 상해에 있는 예원도 4대 명원중 하나로 당시 상해시장 위치에 있는 반윤단이라는 사람이 자기 아버지를 위해 만들었다는 정원인데 1559년부터 18년간에 걸쳐 건축을 하다 보니 중간에 아버지는 돌아 가셨다는 개인 정원이었다. 예원에서 담 위에 크게 만들어놓은 용이 있었는데 발톱이 보통 용 보다 하나 부족하다고 했다. 그것은 왕 외에는 용을 사용 못하는 규정 때문인데 왕이 사용하는 용과 다름을 나타내서 죽음을 면하기 위한 방편이었다고 했는데 중국 사람들이 얼마나 용을 좋아하는가를 나타내는 상징이었다. 중국을 다니면서 도처에서 용의 조각이나 그림을 수없이 많이 볼 수 있었다. 예원에는 삼수당, 가짜산(12m, 황포강 전망을 위해 접착제를 사용해서 바위를 쌓았다는 곳), 만화루, 100년 이상 된 태산목, 은행나무, 점춘당(여자 찍는 곳), 경구청(여자 노래 부르게 한곳), 옥화당(서재), 용 뿌리로 된 화기당, 여인들의 거처인 내원궁 등 많은 건물과 시설들이 있었다.
상해에서는 우리나라 임시정부청사가 있었던 건물도 돌아보았는데 김 구 흉상이 현관에 있고 임시정부와 관련된 자료와 사진들이 허름한 2층 건물에 진열되어 있었다. 윤봉길 의사와 관련 있는 홍구공원은 밤중에 들려 달빛에 조용한 공원을 둘러보고 나왔다. 상해는 중국의 다른 지역과는 차별화된 서구 풍의 도시로, 외탄 거리에서 바라본 야경도 화려했다. 높은 빌딩과 탑들에는 조명이 화려했고, 금융가 건물들은 유럽풍의 건축물들로 외국 자본이 많이 들어와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대우, 삼성 등 우리나라와 관련된 건물도 쉽게 볼 수 있었다.
소주는 미녀, 곡식, 보물이 많은 곳이라 했는데 가장 높은 곳이 해발 33m인 호구산이고, 그곳에 높이 47.5m인 운암사탑(또는 호구 탑)이 있는데 7층 8각의 탑으로 6000톤의 무게에 15도 정도 기울어져 피사탑과 비교되는 탑이라 했다. 한산사와 졸정원을 구경하고 실크 가게에 들려 구경도 했다. 많은 사람들이 실크 가게에서 쇼핑을 하는데 나는 이번 여행에서도 쇼핑은 전혀 하지 않았다.(사실 여행에서 돈을 많이 쓰는 것은 쇼핑 때문이므로 우리는 해외여행을 할 때 쇼핑은 자제해 왔다.) 실크가게에서는 미녀 모델들의 패션쇼도 잠시 관람했다. 중국에서 십자가를 구경 할 수가 없어 소주에서 만난 가이드에게 교회에 대해서 물었더니 소주 인구가 100만이 넘는데 교회는 세 군데 있고 골목 안에 있어서 다니면서 볼 수는 없다고 했다. 현재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자유스럽게 신앙생활을 하지만 전도는 금지되어 있다고 한다.
소주에서부터 보이기 시작한 경항 대운하는 북경에서 소주를 거쳐 항주까지 1793Km에 달하는 운하이고 운하에 수많은 배들이 연속적으로 떠다니는 것이 장관이다. 배는 모두 꾀죄죄해서 가난한 티가 나는 것들이고 모래, 나무 등 무슨 짐들을 운반하는 것이 대부분인 듯 했다. 배 위에서 생활을 하고 있어서 떠가는 배에 빨래가 많이 널려 있고 취사도구가 모두 노출되어 있었으며, 한 식구인 듯 남 여 어린이들이 함께 있는 모습들이 많이 보였다. 가이드의 설명에 의하면 배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최 하층민들이라 했고 어린애가 학교 갈 나이가 되면(7살) 상륙시켜 학교를 보내는데, 배에서만 자란 아이는 걸음이 서툴러 2년 정도 걸음연습을 한 후에 입학이 되니 육지 아이들보다 2년 정도 늦게 취학하게 된다고 한다. 운하도 삼거리가 있고 종종 이정표가 있는 것도 특이했다.
소주관광을 마치고 항주로 향해 가는데 고속도로에 차가 별로 없고 한가했다. 넓은 들판에 2층, 3층 정도의 네모반듯한 거의 같은 규격의 농가 건물들이 우중충한 어두운 색의 사회주의 국가의 획일적인 모습들을 드러내고 있었다. 항주에 가까워지면서 넓은 들에 하얀 국화 꽃밭이 대 파노라마를 이룬다. 길가 집 근처에는 김을 말리는 발 모양으로 꽃차를 말리는 모습과 백국차를 제조하는 집들이 많이 보였다. 항주는 서호 용정차로 유명한 곳인데 백국차가 함께 대량 생산되는 곳인 듯하다. 항주는 중국의 8개 성 가운데 두 번째로 작은 절강성의 수도로 600만이 살고 있다고 한다. 절강성의 인구가 4600만이라고 하니 우리나라 전체 인구보다 많은 곳이다. 절강성은 70%가 산이어서 다른 곳에서보다 산을 많이 볼 수 있는 곳이었다. 그런데 민둥산이 많아서 1950-60년대 우리나라 산을 연상케 한다. 과거를 생각게 하는 것보다 미래를 생각하는 것이 더 도움이 될 것 같아 앞으로의 여행은 우리보다 잘 사는 나라를 택해야겠다는 생각도 많이 했다.
항주에서 둘레 15Km의 서호라는 큰 호수에서 유람선을 타고 호수 주변을 관광했다. 서호 십경중 5경 정도를 본다고 했는데 평호투월, 삼단민월, 단교 등을 보았고 점심은 서호에서 오염 예방용으로 기르는 가시 많은 고기 초어를 맛보기도 했다. 서호에서 상륙하여 높이가 58.9m라는 육화탑과 영은사라는 절을 구경했는데, 1660년경 건축되었다는 영은사는 규모가 크고 해리스님 사리탑, 향나무로 된 사천왕, 높이 33.6m의 대웅보전 불상이 보존되어 있다는 큰절이다. 우리나라 사람 지장 보살상도 있었다. 중국은 스님도 목사도 모두 공무원들이다. 국가에서 봉급을 받는 그들이 신앙과 얼마나 관련이 있는지는 의문이고 시설을 보존 관리하는 책임이 더 큰 것이 아닌가 생각게 했다.
용정차를 파는 가게에 들려 차 맛도 보고 모두 차를 많이 사는데 나하고 또 한사람만 사지 않았다.(이번 여행에 총무를 한 덕에 돌아오는 길에 가이드에게서 국화차 한 통을 선물로 받았다.)
5박 6일의 중국여행 중 북경에서 남자가이드, 소주, 항주, 상해에서 각기 여자가이드, 한국에서 따라간 에스코트 가이드(여)등 5명의 가이드의 안내를 받았다. 현지 가이드들은 모두 조선족 3, 4세대들로 56소수민족 중 한 민족인 것에 대해 자부심을 가지고 열심히 사는 것 같았고, 중국인으로서의 애국심도 제법이었다. 중국은 지금 자본주의 화하면서 급속도로 발전할 나라라 한다. 하지만 우리의 6-70년대 수준이고 주민들도 어렵게 사는 것 같지만 값싼 중국의 농산물 등이 우리나라에 밀려오는 것 등을 보면 곧 우리수준이 되지 않을까 생각되기도 했다.
중국은 우리가 공산주의 국가라 하는데 자기들은 사회주의 국가라 했다. 획일적인 정책이 통하는 곳이어서 자식은 한 명 이상 낳을 수 없게 되어있고 (단 소수민족은 2명까지 허용) 종교는 자유라 하나 전도를 못하게 해서 현재 상태 이상을 갈 수 없고 사라지도록 하고 있는 점은, 아무리 나라가 발전한다고 해도 희망이 없는 나라로 보였다. 중국이라고 하는 그 큰 나라가 지옥으로의 길만 가게 하는 하나님의 뜻은 무엇일까? 우리들에게 할 일 많음을 깨우쳐 주려는 하나님의 뜻일까? 어렵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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