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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고리우스 7세(1073-1085) 이후에 등장한 12세기 대부분의 교황들은 교황 군주 국가의 확립이라는 목표에 헌신했다. 그러나 그들은 그레고리우스만큼 열렬하지는 않았으며, 오히려 교회의 일상적인 행정업무에 더 관심을 쏟았다. 그들은 자신들의 주장을 지탱해 줄 통치 기구가 없다면, 교황 군주로서의 지배권을 아무리 주장해야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이러한 목적을 위해 그들은 법률과 행정제도를 놀라울 정도로 발달시켰다.
12세기에는 교황의 지도 하에 교회법의 토대가 놓여지게 되었다. 교회법은 성직자에 속한 일뿐만 아니라 결혼, 상속, 과부와 고아의 권리 문제에 이르기까지 온갖 종류의 사건에 대한 교회 재판권을 주장했다. 이러한 사건에 대한 재판은 대부분 주교 법정에서 시작되었지만, 교황은 자신만이 엄밀한 법 규정으로부터의 특면을 공표할 수 있으며, 교황 주재의 추기경 회의 교황과 추기경들로 구성됨 가 최고 재판소의 역할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교황권 및 교회의 권위가 신장됨에 따라, 교회 법정에서 재판되는 사건과 로마 교황청으로의 항소가 급속히 늘어났다. 12세기 중반 이후로는 교황청 업무를 처리하는 데에 법률 전문가의 중요성이 너무나 커지다 보니, 교황들은 대부분 노련한 교회법 전문가 출신이었다. 이것은 과거의 교황들이 대개 수도사였던 것과 좋은 대조를 이룬다.
이러한 법률적 발전과 동시에 기록을 보관하고, 세입을 거두어들이는 행정 기구가 발달했다. 12세기를 경과하면서 교황들은 관료제적인 정부를 발달시켰는데, 그것은 당시의 세속 정부들을 훨씬 앞지른 것이었다. 이로 인해 교황청은 더욱 부유해지고, 효율적으로 운영되고, 또한 강력해졌다. 끝으로 교황들은 주교 선임에서 종전보다 훨씬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함으로써, 그리고 법률을 제정하고 교황의 지도력을 과시하기 위한 종교 회의를 로마에서 소집함으로써, 교회 내에서 입지를 확고히 했다.
중세 전성기의 교황들 중 가장 유능하고 성공적으로 일을 수행한 교황을 꼽으라면 누구나 인노켄티우스 3세(Innocentius III, 1198-1216)를 지목할 것이다. 37세에 교황으로 선출된 인노켄티우스는 역대 교황들 가운데 가장 젊은 교황 중의 하나이자, 가장 강력한 인물이기도 했다. 더욱이 그는 신학 전문가인 동시에 교회법에도 조예가 깊었다.
그의 주요 목표는 교황의 주도권 하에 전체 그리스도교 세계를 통합하고, 그레고리우스 7세가 간절히 염원한 “세상의 올바른 질서”를 확립하는 것이었다. 그는 국왕과 제후의 세속적 영역에 대한 직접적 지배권에 대해 추호도 의문을 품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그들이 “죄를 범할” 경우에는 언제든지 자신이 나서서 왕들을 견책할 수 있다고 확신했고, 그것은 세속적 영역에 대한 교황의 간섭의 여지를 활짝 열어 놓는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그는 교황이 궁극적으로 모든 사람들의 주군(主君)이라고 생각했다. 그의 말을 직접 인용하기로 하겠다.
“우주의 창조주께서는 하늘에 위대한 두 개의 빛을 두셨으니, 큰 빛으로 하여금 낮을 지배하도록 하시고 작은 빛으로 하여금 밤을 지배하도록 하셨다. 이와 마찬가지로, 하늘과 동등하다고 일컬어지는 보편교회의 영역에서도 창조주께서는 두 개의 위대한 권위를 지명하셨으니, 큰 권위로 하여금 영혼(낮)을 지배하도록 하시고, 작은 권위로 하여금 육체(밤)를 지배하도록 하셨다. 이 두 개의 권위란 교황권과 왕권이다. 더욱이 달은 태양으로부터 그의 빛을 얻으며, 그 크기에 있어서뿐만 아니라 자격에 있어서도, 영향력이나 지위에 있어서도 태양보다 열등하다. 이와 마찬가지로, 왕권은 그 권위를 교황권으로부터 얻는다. 왕권이 교황권의 영역을 침범하면 할수록 왕권을 장식하고 있는 빛은 줄어들 것이며, 왕권이 교황권에서 멀리 떨어져 있을수록 그 빛은 증가될 것이다. 모든 이들이 예수께 무릎을 꿇어야 하듯이……모든 사람은 그리스도의 대리인(즉 교황)에게 복종해야 한다.”
인노켄티우스는 자신의 목표를 이루기 위해 다양한 조치를 취했다. 프랑스의 왕들이 했던 것처럼 교황권의 확고한 지리적 기반을 확보하고자, 그는 로마 주변의 교황 영지에 강력한 지배권을 확립하기 시작했다. 합병이 가능한 지역은 이를 교황령으로 합병시켰고, 교황령 전체에 대해 효율적이고 치밀한 행정 제도를 도입했다.
이런 이유로 해서 인노켄티우스는 종종 교황령 국가의 진정한 건설자로 간주되곤 한다. 그러나 일부 도시 공동체들이 단호히 독립을 유지하려 했던 까닭에, 그는 프랑스의 왕들이 일-드-프랑스(Ile-de-France)를 지배했던 것처럼 철저하게 이탈리아의 교황령지를 지배하지는 못했다.
인노켄티우스는 그 밖의 사업에서는 훨씬 성공적이었다. 그는 독일 내정에 개입하여 자신이 내세운 후보인 호엔슈타우펜가(Hohenstaufen family)의 프리드리히 2세를 황제로 선출케 했다. 그는 프랑스의 필립 2세 존엄왕(Philip II Augustus)의 혼인상의 불미한 점을 견책했다. 그리고 잉글랜드의 내정에 간섭하여 존(John) 왕이 원치 않는 인물―스티븐 랭턴(Stephen Langton)―을 캔터베리 대주교로 받아들이도록 했다(1207). 교황의 우위를 과시하고 또 세입을 늘리기 위해 인노켄티우스는 존 왕으로 하여금 잉글랜드를 교황에게 봉토로 양여할 것을 강요했다. 또 이와 비슷한 수법으로 아라곤(Aragon), 시칠리아, 헝가리에 대한 봉건적 주군의 지위도 획득했다.
남프랑스에 이단파인 알비주아파(Albigeois[프]; Albigenses[영])의 세력이 확대되자, 교황은 십자군을 소집하여 무력으로 토벌했다. 그는 또한 성지 회복을 위한 십자군의 자금 지원을 위해 성직자들로부터 처음으로 소득세를 징수했다. 인노켄티우스가 이룩한 종교적 업적의 절정은 1215년 로마에서 제4차 라테란 공의회(Fourth Lateran Council)를 소집한 일이었다. 이 종교 회의에서는 신앙의 기본 교리를 재확인하고, 그리스도교 문명권 내에서의 교황의 지도력을 과거 어느 때보다도 분명하게 천명했다. 교황은 이제 아무런 거리낌 없이 국왕들을 견책하고 또 교회를 지배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