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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한산이씨 목은(牧隱) 이색(李穡)의 후손들 원문보기 글쓴이: 기라성
만주 망명한 이건승·홍승헌, 독립운동 씨앗 뿌리다
이덕일의 事思史 근대를 말하다
주류가 잘못된 시대에는 그에 맞서는 한 개의 작은 씨앗이 중요하다. 그런 씨앗이 싹을 틔우고 꽃을 피우면서 잘못된 시대를 무너뜨리고 새 시대를 열기 때문이다. 100여 년 전 온 생애를 걸고 망명했던 소수 사대부들의 결단이 중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대한민국 건국의 씨앗이기 때문이다.
이건창 생가. 인천광역시 강화군 화도면 사기리에 있다. 이건창과 생시에 교유했던 양명학자들은 황현처럼 자결하거나 정원하·홍승헌·이건승처럼 만주로 망명해 독립운동을 펼쳤다. [사진가 권태균 제공]
절망을 넘어서
③ 만주 횡도촌
1910년 9월 26일 강화도에서 개성의 원초 왕성순의 집에 도착한 이건승은 진천에서 문원(紋園) 홍승헌(洪承憲)이 도착하기를 기다렸다. 개성은 상해 북방 남통(南通)으로 망명한 창강 김택영의 고향이었고, 왕성순은 김택영의 문인이었다.
양명학자 김택영은 먼저 배를 타고 남통으로 망명하면서 고려·조선의 문장가 9인(김부식·이제현·장유·이식·김창협·박지원·홍석주·김매순·이건창)의 글을 모은 구가문(九家文)을 왕성순에게 주었다. 왕성순은 1914년 여기에 김택영의 글을 더해
청나라의 학자이자 개혁정치가였던 양계초(梁啓超)도 이 책에 “한 나라의 국민성은 문학으로 나타난다”는 내용의 서문을 썼다.
10월 초하루 진천의 홍승헌이 왕성순의 집에 도착했고, 같은 날 이건승의 종제인 난곡(蘭谷) 이건방(李建芳:1861~1939)과 조카 범하도 당도했다. 원래는 이건방도 망명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모두 떠나버리면 조선 양명학을 계승할 사람이 없었다. 살아서는 돌아올 수 없기에 누군가는 식민의 땅에라도 살아남아서 양명학을 전수해야 했다. 이미 생사는 문제가 아니었다.
이건승은 을사년(1905) 가족들의 저지로 자결에 실패한 후 식음을 전폐하고 두문불출하다가, “내가 비록 방 안에서 말라 죽은들(瘦死) 무슨 이익이 있으랴”면서 의연히 일어나 학교를 건립했다고 회고했다. 그 학교가 이건승이 1906년 강화도 사기리(沙磯里)에 설립한 계명의숙(啓明義塾)이었다.
자결이 단기전이라면 저항은 장기전이었다. 학문으로 민족의 뿌리를 지키고, 교육으로 먼 미래에 대비해야 했다. 그래서 이건방은 남아야 했다. 그 덕분에 일제 식민사학을 비롯해 일제에 들러붙은 학문 자세를 허학(虛學)이라고 비판했던 위당 정인보 같은 학자들이 그 문하에서 배출될 수 있었다.
10월 2일 밤 이건승과 홍승헌은 개성 성서역에서 신의주로 올라가는 경의선 열차에 몸을 실었다. 왕성순과 이건방, 조카 이범하는 만주로 떠나는 두 선비를 배웅했다. 떠나는 자와 남는 자의 심정은 같았다.
열차에 몸을 싣고 먼 북방으로 떠나는 홍승헌은 전통 명가 출신의 사대부였다. 선조의 부마 영안위(永安尉) 홍주원(洪柱元)의 후손이자 이계(耳溪) 홍양호(洪良浩)의 5대 종손이었다. 홍양호는 영조 40년(1764) 일본에 가는 통신사(通信使) 일행에게 벚나무 묘목을 부탁해 서울 우이동을 벚꽃 경승지로 만든 인물로 알려져 있다. 홍승헌의 조부 홍익주(洪翼周)는 충청도 진천현감을 역임하면서 진천에도 터를 잡았다. 진천이 강화도와 함께 조선 양명학의 한 반향(班鄕)이 되는 배경이 여기에 있다. 이건승·홍승헌보다 조금 늦게 망명하는 석주(石洲) 이상룡(李相龍)은 망명일기인
이상설 생가 및 생가 마을. 충북 진천읍 산척리에 있다. 홍승헌의 조부 홍익주와 정원하의 부친 정기석이 진천에 터를 잡으며 양명학의 반향이 되었다. 이상설도 양명학을 공부했다.
이건승·홍승헌은 10월 3일 밤 신의주 종점에서 하차했다. 일제가 만주 망명을 막기 위해 삼엄한 경계를 펼치고 있어서 쉽게 도강할 수 없었다. 두 망명객은 사막촌(四幕村) 주막에 몸을 숨긴 채 압록강이 얼기를 기다렸다. 사막촌 주막은 중국으로 망명하려는 지사들의 비밀 거처였다.
만주에는 이미 기당(綺堂) 정원하(鄭元夏)가 망명해 기다리고 있었다. 정원하도 홍승헌 못지않은 명가 출신이었다. 현종 때 우의정을 역임한 정유성(鄭維城)이 8대조, 강화학의 비조(鼻祖)인 하곡(霞谷) 정제두(鄭齊斗)가 6대조다. 조부 정문승(鄭文升)은 종1품 숭정대부(崇政大夫)까지 올랐고, 부친 정기석(鄭箕錫)도 지평현감과 안성군수 등을 역임했다.
정원하가 어린 나이에 진사과에 합격했을 때 지금의 서대문에서 반송방(盤松坊:아현동·현저동 부근) 집까지 축하 행렬이 끊이지 않았다는 일화가 남아 있을 정도로 축복받은 어린 시절을 보냈다. 부친 정기석이 진천에 터를 잡으면서 진천에 살았던 정원하도 고종 19년(1882) 사간원 대사간, 승지, 대사헌 같은 청요직을 역임했다. 그러나 나라의 운명이 요상하게 돌아가면서 정원하는 벼슬을 집어던진다. 벼슬을 그만둔 정원하는 선조의 고향인 강화도로 들어가 홍승헌·이건창 형제 등과 양명학을 강론했다.
이건창은 ‘난고(亂藁)’라는 시의 서문에서 정원하와 홍승헌은 진천에서 출발해 배를 타고 강화도 하현(霞峴:하곡)에 도착해 처음 대화를 나누었다고 전하는 것을 비롯해 자신의 문집인
이건승은 황현에게 보낸 편지에서, “선형(先兄:이건창)께서 살아계셨으면 의(義)를 어느 곳에 두었을지 알 수 없지만 하늘이 준 수명대로 살지는 못했을 것입니다”라고 말한 것처럼 이건창도 살아있었다면 정원하·이건승·홍승헌과 함께 만주로 망명했을 인물이었다. 나라를 빼앗기자 정원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망명을 결심했다.
이건승·홍문헌도 마찬가지였다. 그 길은 몸은 죽고 정신이 사는 길이고, 현실에서는 죽고 역사에서는 사는 길이었다. 그들은 그렇게 믿었다. 광복(光復)은커녕 그 조짐도 찾기 어려웠다.
왕실 일부와 집권당 노론이 조직적으로 매국에 나선 나라였다. 일본군은 ‘남한대토벌’이란 작전명으로 호남을 중심으로 삼남 일대의 의병들을 그물 치듯 살육했다. 위를 보나 아래를 보나 광복은 불가능해 보였다.
그러나 그 불가능의 길이 성현들의 글을 읽은 인간 세상 식자(識者)의 길이었다. 정원하에겐 떠나기에 앞서 처리할 일이 남아 있었다. 어린 손녀들의 혼처를 정하는 일이었다. 그래서 15세 장손녀를 생전의 약조대로 이건창의 장손자 이덕상(李德商)에게 출가시키고 12세 손녀는 옥천군 청산리 조동식(趙東式)의 집안으로 시집 보냈다. 모두 세교(世交)가 있던 소론가 집안이었다.
정인보의 제자인 서여(西餘) 민영규(閔泳珪) 교수는
이렇게 주변 정리를 마친 정원하가 가장 먼저 압록강을 건넌 것이다. 이미 만 55세의 장년이었다.
이건승과 홍승헌이 신의주 사막촌에서 강물이 얼기를 기다리던 10월 7일 일제는 76명의 왕족과 사대부들에게 작위와 은사금을 수여했다. 이른바 ‘합방공로작’이었다. 다음날 1700여만원의 임시은사금을 각 지방장관에게 내려 친임관(親任官)·칙임관(勅任官) 등의 대한제국 전 관료와 양반·유생들에게 ‘은사공채(恩賜公債)’를 주었다.
유림(儒林) 출신의 독립운동가인 심산(心山) 김창숙(金昌淑)은 자서전
김창숙은 “나는 혹 이런 자들을 만나면 침을 뱉으며, ‘돈에 팔려서 적에게 아첨하는 자는 바로 개돼지다. 명색 양반이라면서 효자 열녀 표창에 끼어든단 말이냐?’라고 꾸짖었다”고 전하고 있다.
그러면서 늘 “나라가 망하기 전 사대부가 먼저 망해서/양정에 춤추는 자들 대부분 최가, 노가더라(亡國先亡士大夫 梁庭舞蹈半崔盧)”라는 시구를 읊으며 통곡했다고 말했다.
이 시는 매천 황현의 ‘형저기우(荊渚騎牛)’인데 당(唐)나라가 망했는데 귀족인 최씨, 노씨들이 양(梁)나라에 붙은 것을 비판하는 내용이다. 노론 유력 가문 출신들이 매국에 앞장선 것을 비판하는 황현의 시가 김창숙 같은 지사들에게 많은 영향을 준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세상은 이미 매국에 앞장선 이들의 것이었다.
12월 초하루 새벽 이건승과 홍승헌은 중국인이 끄는 썰매에 몸을 싣고 얼어붙은 압록강을 건넜다. 압록강 대안 안동현(현재 단동) 구련성(九連城)에서 이국의 첫 밤을 보냈다. 이튿날 새벽 두 선비는 북상길에 올랐고 12월 7일 첫 목표지인 횡도촌(橫道村)에 도착했다. 흥도촌(興道村), 항도촌(恒道村)이라고도 불리는 이 마을에 정원하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아직도 올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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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숙선생(金昌淑)
선생의 본관은 의성(義城), 자는 문좌(文佐), 호는 심산(心山)·벽옹(?翁).
김창숙선생[金昌淑. 1879(고종 16)~1962]은 유학자이면서 교육자로서 항일운동가. 임시정부의 주요인물로 8·15해방 후에는 이승만 정권의 독재에 반대하는 투쟁을 벌였다. 성균관대학교의 설립자이다.
왜경에 잡혀 옥고를 치르던 중 고문으로 하체가 부자유스러워지자 남들이 벽옹(?翁. 앉은뱅이 노인)이라 불렀는데 선생도 따라서 스스로를 벽옹이라 하였다.
출신 및 한말의 활동
본관은 의성. 자는 문좌(文佐), 호는 심산(心山)·벽옹(翁). 한때 우(愚)라고 이름을 바꾸었다. 아버지는 호림(頀林)이다. 당시 유학자로서 이름이 높던 이종기(李種杞)·곽종석(郭種錫)·이승희(李承熙) 등으로부터 학문을 배웠다. 1905년(광무 9)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이승희와 함께 상경하여 을사 5적의 처형을 요구하는 〈청참오적소 請斬五賊疏〉를 올렸다. 1908년 대한협회가 설립되자 고향인 성주에 지부를 조직하고 총무에 취임했다. 1909년에는 사립 성명학교(星明學校)를 설립했다. 같은 해 친일단체인 일진회(一進會)가 한일합병론을 주장 하자 동지를 규합하여 이를 규탄하는 글을 중추원에 보냈다.
일제강점기의 항일투쟁
1910년 일제에 국권을 빼앗긴 뒤에는 한동안 칩거하며 유학 연구에 몰두했다. 그의 유학적 소양과 한학의 조예는 주로 이 시기에 기반이 다져졌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전국의 유림을 규합하여 137명의 연명으로 독립청원서를 작성하여 국내의 향교에 배포하고, 이를 갖고 중국으로 망명한 뒤 김규식을 통해 파리 평화회의에 우편으로 제출했다. 이 사건으로 곽종석 등 수백 명의 유학자들이 체포되었는데, 이것이 '제1차유림단사건'이다.
같은 해 대한민국임시정부에 참여하여 임시정부 의정원 경상도 의원으로 선출되었고, 이후 교통위원으로 선임되어 활동했다. 이때 당시 대한민국임시정부 내의 파쟁을 조정하는 데 힘을 기울였다. 또한 쑨원[孫文]을 비롯하여 이문치(李文治)·임복성(林福成) 등 중국국민당의 여러 인사들과 접촉하면서 '한국독립후원회','중한호조회'(中韓互助會)의 결성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특히 망명한 한국청년들의 교육에 힘을 기울여 능월(凌越)·오산(吳山) 등의 도움을 받아 50여 명의 학생에게 숙식을 제공하면서 외국어 교육을 받도록 주선했다. 한편 독립운동을 고양시키기 위해 1920년 박은식(朴殷植)과 함께 〈사민일보 四民日報〉를 발간하여 그중 일부를 국내로 우송했으며, 신채호(申采浩)를 도와 베이징[北京]에서 잡지 〈천고 天鼓〉를 발행했다.
1921년 이승만이 미국에 조선의 위임통치를 청원하자, 이를 규탄하는 성토문을 신채호 등과 연명으로 발표했다. 그뒤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를 조직하여 군사선전위원장으로 활동했다.
1924년 이회영(李會榮) 등과 함께 중국국민당과 교섭, 만주와 몽고 접경지의 황무지를 조차·개간하여 한인들이 집단 거주하는 독립운동기지를 건설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이듬해 8월 국내에 잠입, 모금활동을 폈으나 기대한 성과는 올리지 못하고 중국으로 돌아갔다. 이때의 모금활동으로 600여 명의 유림계 인사가 일경에 체포되었는데, 이것이 '제2차유림단사건'이다.
1925년에는 임시정부 의정원의 부의장으로 선출되었다. 1926년 이동녕(李東寧)·김구(金九) 등과 청년결사대를 국내에 파견하여 친일파와 일제의 통치기관을 박멸하기로 결정하고, 나석주(羅錫疇)로 하여금 동양척식주식회사를 폭파하게 했다. 1927년 상하이[上海] 공공조계(公共租界)의 한 병원에서 치료를 받던 중, 일본영사관원에게 체포되어 국내로 압송되었다.
대구지방법원에서 14년형을 선고받고 대전형무소에서 복역하다가, 1934년 9월 병세가 악화되어 형집행정지로 출옥했다. 출옥한 뒤에도 일제의 창씨개명에 반대하는 등 항일의 자세를 꼿꼿이 유지했다. 1945년 건국동맹(建國同盟)의 남한 책임자로 추대되어 왜관경찰서에 다시금 구금되었으나, 일제패망으로 석방되었다.
해방 후의 활동
해방 이후 일반 정당이나 사회단체의 활동에 깊이 관여하지는 않았지만 인민공화국 반대와 임시정부 지지, 신탁통치 반대 등 우익 정객으로서의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미소공동위원회 참가와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문제에 대해서는 한민당 및 이승만 계열과 정치적 입장을 달리했다.
비상국민회의 8인 특별위원을 거쳐 1946년 2월 민주의원(民主議院) 의원으로 선출되었으나, 정부수립을 위한 모체가 아니고 미군정의 자문기관일 뿐이라 하여 거의 출석하지 않았다. 이 해 봄 해방 이후 난립한 유림단체의 통합에 힘써 유도회총본부(儒道會總本部)를 결성했고 위원장에 취임하였다. 또한 일제 때 경학원(經學院)으로 개칭되어 친일파 유림이 득세했던 성균관을 정비하는 등 유림의 재조직에 힘을 기울였다. 이를 바탕으로 유교이념에 입각한 교육을 실시하고자 성균관대학기성회를 결성했다.
이석구(李錫九)로부터 재단법인 학린회(學隣會)의 토지재산을 기부받고 명륜전문학교(明倫專門學校)를 병합하여, 그해 9월 성균관대학의 설립을 인가받았다. 학교설립 후 초대학장에 취임했다.
1948년 김구·김규식(金圭植) 등과 함께 남한 단독정부 수립에 반대했다. 8월 단독정부가 수립된 뒤로는 이승만 정권의 독재와 부패에 반대하는 투쟁을 벌였다.
1951년 이승만에게 하야경고문을 냈다가 투옥되었으며, 이듬해 부산 정치파동 때 이시영(李始榮)·조병옥(趙炳玉) 등과 함께 반독재호헌구국선언문을 발표하여 이승만정권과 투쟁했다.
1953년 2월 전국의 향교재단을 규합하여 성균관대학의 종합대학 승격을 인가받고 초대 총장에 취임했다. 1955년 재단분규로 사임한 뒤 궁핍한 생활을 하다가 1962년 죽었다.
그해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저서에 〈심산만초〉·〈벽옹만초〉 등이 있으며, 〈벽옹칠십삼년회상기〉 초고를 1973년 국사편찬위원회에서 편찬하여 〈심산유고 心山遺稿〉로 간행했다. / 朴千佑 글
題屛畵十絶(매천집 권4 소수)
난세에 처해 지조를 지켰던 중국 은사(隱士) 10인을 뽑아 지은 시 10수
6. 荊渚騎牛 . 梁震
형남 물가에서 소를 타다.
亡國先亡士大夫 망국선망사대부 나라가 망하면 먼저 사대부가 망하나니
梁庭舞蹈半崔盧 양정무도반최노 梁庭에서 춤추는 이는 반이 노씨와 최씨인데
荊南進士頭如雪 형남진사두여설 형남의 진사(양진)는 머리가 눈같이 희도록
倦對春江種木奴 권대춘강종목로 괴롭게 춘강을 마주하여 목로를 심었다네
梁庭 : 梁나라
崔盧 : 최씨(崔氏)와 노씨(盧氏). 두 성씨가 다 육조(六朝) 시대부터 당(唐)에 이르기까지의 망족(望族 : 명망있는 집안)이었음. 《舊唐書 竇威傳》
木奴 :柑橘(감귤)의 별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