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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게시판 스크랩 조선시대 로데오 거리
흰구름 추천 0 조회 824 16.09.08 21:20 댓글 1
게시글 본문내용

역사적 사실(事實)과 진실(眞實그리고 사실(史實

 

역사를 모르는 민족은 미래가 없다고 합니다.

우리나라가 이만큼이라도 살아가는 것은 역사의 뿌리를 잃지 않아서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여기에 3%부족한 게 있습니다. 역사의 진실입니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고 하지만 행간에는 진실이 숨어있습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성삼문이 역모죄로 처형되었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성삼문이 죽은 것은 사실(事實)입니다.

하지만 '역모죄로 처형되었다'는 것은 사실(史實)일뿐 진실(眞實)은 아닙니다.

 

저는 반평생을 진실 찾기에 천착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역사의 진실을 발견했을 때

천문학자들이 새로운 별을 발견한 만큼이나 기쁘고 보람을 느낍니다.

 

학교 교육에서는 위정자의 입맛에 맞는 역사만 가르칩니다.

여러분도 이러한 시대의 흐름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경제개발시대에 앞만 보고 달려오느라 학교에서 배운 역사마저 다 까먹었습니다.

 

놀자, 먹자, 즐기자 동호회도 많은데

삼복더위 궂은 날씨를 무릅쓰고 지적 호기심을 충족시키기 위하여

역사탐방에 나선 여러분들이 작은 영웅들입니다.

완장차고 피켓 들고 가스통 들고 설친다고 해서 애국자가 아닙니다.

내 나라 역사를 조금이나마 더 알겠다고 나선 여러분이 나라를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여러분 존경합니다.

 

종묘. 우리의 소중한 문화유적뿐만아니라 유네스코가 선정한 세계 문화유산입니다.

 

세계인들은 말합니다.

로마는 발 닿는 곳이 박물관이라고.

600년 도읍지 서울도 그에 못지않습니다.

저를 포함한 후손들이 못나서 지키지 못하고 가꾸지 못해서 그렇지

서울에는 곳곳이 문화유적지입니다.

 

서대문4거리.

빌딩숲에서 오늘의 역사탐방 45%가 진행된다하니까 의아스러우셨죠?

하지만 이야기를 들어보니까 어떠셨어요?

서대문 4거리가 다시 보였지요.

서대문 4거리가 다시 보인것만으로도 여러분은 오늘 보람이 있으십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국토가 두 동강이 나서 그렇지 국토가 분할되기 이전

그러니까 일본이 우리나라를 침탈하기 전

조선시대는 서울에서 부산까지 경부 축이 아니라

한양에서 의주까지 의주대로가 국토의 대동맥이었습니다.

고관대작들의 수레와 가마가 그칠 날이 없었으니 얼마나 번다했겠습니까?

말 그대로 조선1번지였습니다.

 

한양에서 명나라 가는 길 첫머리입니다.

사신으로 길 떠나는 사람, 공부하러 가는 유학생,

기타 개성, 평양, 의주에 관직을 명받아 떠나는 관료. 길 떠나는 첫머리입니다.

지금이야 남북이 가로막혀 서울에서 부산가는 경부선이 1등 길이지만

그 땐 한양에서 의주 가는 길이 1등 길이었습니다.

 

서대문4거리를 조선시대에는 고마동이라고 불렀습니다.

오늘날로 해석하면 인천공항, 고속터미날, 여행사, 렌트카, 택시를 모아놓은

종합교통타운같은 곳입니다.

조선은 교통과 통신과 안보를 위하여 역참로를 촘촘히 짰습니다.

병조가 운영하는 역참로의 출발지가 바로 고마동에 있었습니다.

관서지방으로 떠나는 사람은 고마동에서 출발하여 연서역을 지나 개성방면으로 떠났고

삼남지방으로 떠나는 사람은 청파역에서,

관북, 즉 금강산과 함흥으로 떠나는 사람은 누원역에서 출발했습니다.

 

사신으로 떠나는 관리들이 자기 말을 가지고 떠나는 사람도 있었지만

그 당시 고위직에 있는 사람이라도 자기 말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많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임금이 내리는 하사품 중에서 최고로 치는 물품이 내구마였습니다.

거기에 안장을 갖춘 내구마라는 표현이 나오면

오늘날로 치면 최고급 벤츠 승용차에 해당됩니다.

 

조선 초,

조선과 명나라는 대등한 수평관계는 아니었다하더라도

대국과 소국의 차이는 있었습니다.

약소국의 서러움이며 사대주의의 원천입니다.

헌데 병자호란 후, 남한산성에서 내려온 인조가 삼전도에서 무릎 꿇고

삼배구고두를 행한 항복 후에는 완전 갑을(甲乙)관계로 변질되었습니다.

아버지의 나라 이상의 승전국과 패전국의 관계였습니다.

사신 편수도 많아졌습니다.

오라면 가고, 트집 잡으면 가서 빌어야지 어찌합니까. 

 

정조사/동지사/성절사 3절사 외에 천추사, 진하사, 주청사 등

오가는 사신이 길에서 마주치는 것이 다반사였습니다.

한마디로 사신으로 해가 뜨고 사신으로 해가 졌습니다.

이뿐이겠습니까. 중국에서 오는 사신은 얼마나 많았습니까.

한마디로 사신 망국이었습니다.

 

조선 후기 사역원에 등록된 역관이 600명이었습니다.

조선 초에는 이들에게 녹봉을 주지 못해

조정에서 인삼 10근을 가지고 팔아서 쓰라고 했는데

점점 그 분량이 많아져 80근 까지 상향 조정되었습니다.

인삼 10근이면 한 자루가 됩니다.

팔포무역이라는 말의 유래입니다.

 

인삼은 중국에서 고가로 팔리는 상품이었습니다.

오늘날의 삼성 휴대폰 보다도 더 좋은 상품으로 대접 받았습니다.

그걸 팔아서 경비로 쓰는 것이 아니라

그 돈으로 중국에서 비단과 귀중품을 사가지고 귀국했습니다.

200배 이상 남는 장사였습니다.

대박의 원조입니다. 

그 물건의 집하장이 서대문 4거리였고

은밀히 거래되는 곳이 서대문 4거리였습니다.

 

이게 재테크의 수단이 되면서 밀수까지 성행하게 되었습니다.

도화서 화원, 의원, 등 중인계급 중에서 역관이 부를 축적하는 으뜸이었습니다.

 

육의전거리에서 저포전을 알리는 깃발

 

육의전과 명품거리

 

육의전에는 면포전, 지전, 저포전, 어물전, 명주전, 선전

이렇게 6종류의 가게들이 있었는데

일반 서민들과 거리가 먼 사대부나 왕실 조달품목이었습니다.

일종의 어용상점이었습니다.

서민들을 상대로 배오개 시장과 칠패시장이 발달하였습니다.

 

6.25 한국전쟁 직후 째라면 환장했습니다.

일제와 미제 말입니다.

화장품은 물론 물 건너 왔다면 미군들이 입다버린 사지 쓰봉도 인기 만점이었습니다.

미군부대에서 흘러나온 PX물품이나 부산이나 여수에서 밀수입된 물건이

남대문 시장이나 도깨비시장에서 날개 돋친 듯 팔렸습니다.

 

조선시대에도 당화라고 중국째라면 환장을 했습니다.

당나라가 망한지 언제인데 중국에서 건너온 물건은 모두 당화라고

오늘날의 명품처럼 고위층의 로망이었습니다.

중국에서 들어온 고급 잡화는 없어서 못 팔았습니다.

장신구, 화장품, 귀금속, 귀한 약재, 구하기 어려운 책, 질 좋은 붓 가게가 즐비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중국에서 들여온 물건을 일본으로 재수출하는 중개무역도 했습니다.

오늘날의 보세창고가 즐비했습니다.

왜관에서 샘플을 보고 흥정이 끝나면

부피가 작은 물건은 육로를 통해 문경새재를 넘었고

부피가 많은 것은 삼개나루로 보내 부산으로 해상운송 했습니다.

이러한 거리가 서대문4거리였습니다.

 

반송정 편액. 영조 어필입니다

 

반송정과 서지

 

타지로 떠날때, 여러분은 가족, 친지들로부터 어디에서 환송받고 싶으십니까?

일제 강점기에는 경성역,

관부연락선이 떠나는 부산항,

해방 후에는 김포공항이었습니다.

지금은 인천공항이 송별의 장소가 아닐까요.

조선시대에는 반송정이 송별장소였습니다.

조선 선비들의 부러움의 장소가 반송정이었습니다.

헌데,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아파트공사가 한창입니다.

 

가족과 함께 어디로 나들이를 나가고 싶으십니까?

일제 강점기에는 창경원, 전쟁 후에는 남산공원, 박정희시대에는 어린이대공원,

지금은 과천서울대공원, 에버랜드, 롯데놀이공원, 워터파크등 나들이 코스가 많은데

조선시대에는 돈의문 밖 서지(西池), 숭례문 밖 남지(南池), 동대문 밖 동지(東池)

한양성곽 주변의 연못이었습니다.

그 중 서지(西池)가 가장 아름다웠습니다.

특히 연꽃이 만발한 이맘때면 장안의 여인들이 몰려나와 장관을 이루었습니다.

 

서대문 4거리에서 광화문 쪽을 보십시오.

저쪽에 돈의문이 있었는데 일제에 의해 강제로 헐리고

아직까지 복원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일본 놈들에 의해 경복궁이 헐리고 광화문이 헐렸습니다.

박정희 전대통령이 광화문을 복원한다고 한 것이 콘크리트로 복원했습니다.

조선시대 목조건물을 시멘트로 복원한다니 어처구니 없습니다.

그걸 헐고 다시 복원했는데 현판이 갈라지고 원목이 뒤틀리고 있습니다.

조상들 보기 부끄럽습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서오릉 관리사무소 앞에 아스팔트 길이 있습니다.

왕릉에 아스팔트길이라니?

원래는 남측 명릉과 북측 왕릉군이 하나의 권역이었습니다.

뒷산에 군부대를 만들면서 부대로 통하는 길을 만들고 아스팔트를 깔았습니다.

부대 때문에 왕릉을 갈라놓은 것이지요.

 

또 있습니다.

서삼릉을 떼어내 젖소개량사업소를 만들지를 않나

전두환 노태우 때는 88올림픽을 치른다고 마장마술경기장을 지었습니다.

올림픽을 치른 후에는 종마목장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태능에 가면 태능선수촌이 있습니다.

원래는 문정왕후가 잠들어 있는 태능과

그의 아들 명종이 잠들어 있는 강릉을 합쳐서 태강릉 권역입니다.

이승만 전대통령은 자신을 살갑게 돌봐주는 주치의에게 강릉 쪽을 떼어 주었습니다.

삼육대학입니다.

박정희 전대통령은 엘리트 선수를 기른답시고 태능에 선수촌과 사격장을 만들었습니다.

자신이 누워있는 곳은 조용합니다.

헌데, 왕이 잠들어 있는 곳에서 총소리가 탕탕탕.

편히 잠들지 못한다고 죽비를 내리치는 것만 같습니다.

군인들이 문화재를 보는 눈이 그 정도고 마인드가 그 정도입니다.

 

유네스코가 조선 왕릉을 세계문화유산으로 받아들이면서 조건부로 허락했습니다.

체육시설을 철거하고 왕릉을 원상복구 하라고,

근데 아직까지 시행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안타까운 현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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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작성자 16.09.08 21:20

    첫댓글 서대문사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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