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일시 :
2. 대상 : 역사 전공 교사들(공주사범대 출신 - 4명)
3. 장소 : 충청도와 전라도 일대
4. 제목 : 동학농민운동이 발생했던 현장 답사
(황토현전투, 황룡촌전투, 우금치 전투 등 전투 현장을 중심으로)
5. 서정문
1)역사는 진행되고 있다.
효경(孝經) 개종명의(開宗明義)를 보면
신체발부 수지부모(身體髮膚受之父母)라는 글이 있다.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몸을
소중히 여기라는 내용이다.
또한 부모에 대한 감사와
효도를 잊지말아야 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공자는 중국 춘추시대 노나라 사람으로
유교 대가다.
공자와 관련된 것 중의 하나가
문득 생각나 몇자 적어보고 싶었다.
5상이
그것인 데
우리가 어렸을 때부터 들어왔던 것들이고
초등학교 도덕시간에 선생님들이
늘 강조했던 것들이어서
지금도 뇌에서 맴돌곤 했다.
5상은 유교에서 강조한
다섯가지 기본 덕목으로
仁(인), 義(의), 禮(예), 智(지), 信(신)을 말한다.
그 중에서 공자는 인(仁)과 예(禮)를 강조했다.
어질고 예의바름을
으뜸으로 여겼다는 뜻이다.
중국의 전통적 학문인 유교가
여러단계의 변화과정을 거쳐
성리학으로 발전한 것은
남송때다.
남송시대 발달한 유학은
우리나라와 일본 뿐만 아니라
동남아시아에 까지
영향을 미쳤다.
조선의 유학은
중국을 뛰어넘는 단계까지
발달하여 세계적인
석학 들을 배출했다.
이것이
우리나라를
소 중화라고 부르게된 이유 중의 하나다.
불교는 역사가
훨씬 깊다.
불교가
우리나라에 전래된 것은
삼국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게르만민족 이동과
동급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
사건이
중국에서도 발생했다.
그것은
5호의 남침이다.
5호는
다섯 개 오랑캐 부족을 말한다.
이들은
중국 북쪽 초원지대에서
방목생활을 했던 유목민족 이거나
생활이 어려워
약탈에 의존했던 사람들이었다.
생활이 어렵다보니
농경지대의 여유를
그리워 했다.
그래서 남하하여 여러 국가를 건설 했는데
그것이 16국이다.
그 중 전진으로 부터
중 순도가 도래해 불상과 불경을
고구려에 전했다.
그리고 “초문사”와 “이불란사”라고 하는
사찰을 건립해
불 국토 건설에 박차를 가했다.
불교는 크게 대승 불교와 소승 불교로 나뉘는데
대승불교는 중생구제를 중시하고
소승 불교는 개인의 해탈을 강조하였다.
인도 카필라성 룸비니에서 탄생한 석가모니는
부다 가야에서 깨달음을 얻어 성인의 반열에 올랐다.
이러한 불교는 인도 부다 가야에서 간다라 지방을 거쳐
중국 사주 돈황으로 전파되었다.
그리고 다시 장안을 거쳐 낙양으로 전파 되었는데
그 불교가 윈강(운강)으로 전파되어 중국 5호 16국 중의
하나인 전진을 거쳐 고구려로 전파되었다.
주인공은 승려 순도이다.
백제는 뤄양(낙양)에서 남북조시대 남조사람인
동진의 승려 마라 난타가
건강(남경, 난징)에서 범선을 얻어 타고
위례성에 도착하여 불상과 불경을 전파했다.
이때가 백제 침류왕 때다.
고구려 승려들은
중론, 12문론, 백론 까지 탐색해
삼라만상은
“본성적으로 실체가 없다”라고 까지 주장해
사상을 확대 해석하였다.
사상의 폭넓은 발전이 이때부터 시작된 것이다.
여러 종파가 난립하다가
열반 종이 민심속으로
파고들어
독보적인 종파로 자리 잡았는데
중국으로부터
도교가 유입 되면서
열반 종은
차츰 쇠락하게 되었다.
당대 최고의 실세라 할 수 있는
연개소문이
도교를 권장 하면서
승려들은 굴욕감과 모멸감을
감내하지 못하고 도일하거나
백제와 신라 등으로 이주 했는데
이것이 고구려 불교가 쇠락한 직접적 원인이었다.
불교를 받아들였으면
다른 나라에 전파하는 것은 의무이었다.
그래서
고구려 승려들은
이웃 신라로 건너가 불교를 전파했다.
그 중 얼굴이 까만 묵호자가
일선(선산)에 도래해 불교를 전파하려했으나
토착세력의 반발이 커서
난관에 봉착했다.
어려움은 “모록(모례)”에 의해 해소 되었는데
자신의 집에 숨어서 은밀히 포교 활 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었기때문이다.
“모록(모례)”는 소지왕때 승려
아도화상이
신라에 입국 했을 때도
자신의 집에 머무르게 하는 등
불교 교리 전파와 포교에 관심을 보이며
아도화상의 가르침에
적극적으로 동조하며
지지했다.
이때 신라는
고대국가로 진입 하지 못한
상황 이었기때문에
원시 신앙을 숭배하는 세력의 여론을
무시할 수 없었다.
획기적인 동기가 없었다면
불교 수용은
아마도
물 건너갔을 것이다.
하지만
불교 교리를 왕권강화와
연계시키기위해서는
언젠가는
불교를 수용해야 한다는 것이
집권세력 다수의 의중이었다.
고대 국가로 변해가는 과정에서
불교를 도입 하려는 왕과
토착 신앙에 기반을 둔 귀족 세력이
치열하게 대립했다.
이무렵 이차돈은 자신을 희생해
순교를 선택함으로써 국가에 보답했다.
이차돈은
왕권강화를 지지 했던 세력이다.
때문에 왕권에 제동걸었던 보수 귀족들은 그를 비판하고 나섰다.
그 자리서
그는 단호하게 불교를 수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순교 직전에
“부처가 있다면 내가 죽은 뒤
반드시 이적이 있을 것”이라고 말했고,
그 예언이 적중하자
불교 공인을 반대했던
“귀족들도 마음을 돌렸다”라는 설을
삼국유사는 전하고 있다.
삼국시대 초기는
불교가 교종과 선종으로 나뉘었다.
그리고 교종은 5교로
선종은 9산으로 분화되었다.
9산은 다시
천태종과 조계종으로 양분 되더니
천태종은
교종의 입장을,
조계종은
선종의 입장을 고수해
고려시대 사상을 선도하며
백성들의 의식수준을
한단계 도약시켰다.
하지만
고려시대 후반기서 부터
불교가
본래의 교리에서 이탈해
부정과 비리를 낳았다.
고인 물은 썩는다는 말이
현실화 된 시대로
고려는 불교 폐단으로
기본까지
잃어가고 있었다.
불교의 폐단은
도덕과 정의감 상실로 이어지고,
새로운 사상을 수용하게 한
원인으로 작용 되었는데
그것이 성리학이다.
한나라의 국교가
도덕성을 상실하니
사회가 부정과 부패로 가득하고
종교 지도자들의 권위가
추락 함으로서
국가의 위상이 동요돼
세상은 종말이 다가온듯했다.
혹자는 “불교는 수신의 도이며
유교는 치국의 본이다”라고
주장하고 있는데
이것은 신진사대부들이
불교를 매장 시키기위한
수단으로 활용하려는 의도가
농후 하다고
정치적 술수로 보는 사람도 있다.
인간은 태어나면서 부터
아집과 허영심, 집착, 그리고 탐욕을
내재한다.
그리고 장년이 되면
술수의 달인이 되어
자신이 저지른 부정 행위조차
시비를 가리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흔히 불가에서
“집착과 탐욕을 버리면 이 세상이 극락이며
이 마음이 곧
부처다”라고
말을 하고있는데
이것은 교리연구와 참선 결과의
합작 품으로
이것이야말로
인간 최상의 가치가 아닌가 싶다.
나는 전라남도 영암군 월출산 밑에서
태어났다.
도갑사가 눈앞인 곳이다.
어려서 부터 월출산을 바라보고
의지하며 자라서
늘 고마움을 안고 살았다.
꿈 많고 둥둥 비상 하던 시절
초등학교 전체 학생들이 도갑사로 소풍을 갔다.
도갑사 주지스님은
忍之爲德에 관한 어원을 이야기식으로
설명했다.
그때 주시 스님으로부터 들었던
참을 인(忍),
갈 지(之)
하 위(爲)
큰 덕(德)
위 네 글자가 지금까지도
뇌리에 여운이 가시지않고 있다.
忍之爲德은 참으면 덕이 된다는 의미인데
그 중 忍에 관한 구체적인 설명을 듣고 감명을 받았다.
인간은 세상을 살아가면서
수많은 도전에 봉착한다.
그 중 성공 확률은 몇 % 밖에 되지않고
거의 대부분은 실패로 끝난다.
그때마다 좌절한다면
인생은 종 친다고 하면서
참고, 참고, 또 참으면
해뜰 날이 온다고 하셨다.
교리연구와 조선과 선정에 심혈을 기울인 스님들이
수없이 이곳을 스쳐가서 그 자취를 찾기란 어렵지않다.
이러한
사찰이 지척에 있었기에
마음의 등불이 되었으며
방향을 잃었을때
길잡이가 되었다.
월출 산은
비교적 기가 강한 편이라고 들
사람들은 말한다.
이것은
월출산 주변에서
많은 인걸이 태어났기때문일 것이다.
평야지대에서 솟아난
산 치고
봉우리가 다양하며
웅장 하여
자연의 신비를 느낄 수 있는
몇 안되는 명산이라고 할 수 있다.
달이 뜬다 달이 뜬다.
영암 고을에 둥근 달이 뜬다.
달이 뜬다 달이 뜬다.
둥근 둥근 달이 뜬다.
월출산 천왕봉에
보름달이 뜬다.
가수 하춘하의 영암아리랑 가사 일부다.
월출산 천황봉 위에 달이 떠오르면
태초의
천지창조 모습 그대로를 감상할 수 있다.
구름속에 숨어있던 달이
서서히 본연의 얼굴을 내밀고
드러낼때
환상적인 광경에 도취되는데
숨돌릴 틈도 없이
천황 봉 위에서 한쌍의 나비가
춤을 추기시작한다.
신비에 가까운 자연의 조화를 바라보면
호흡이 멈추고 가파지기를
반복한다.
그러한 광경은 주변에서 흔히 볼 수없기에
나 홀로 바라보기가 아까워
한폭의 수채화에 담아보기도 한다.
달이 월출산 천황봉 위에서
정지하면
나도 몰래 궁둥이가 들썩거려지고
흥얼거려진다.
그래서
달밝은 밤이면 언제나 월출산 천황 봉을
바라본곤 한다.
영암군 출신 인물로
군서 면 구림 리에서 태어난
“왕인박사”를 들 수 있는데
그는 이곳에서 태어나
어려서 부터 학문에 심취되어
논어, 천자문, 유교경전을 터득 했으며
명성이 일본에 까지 알려저
일본으로부터 초청받기에 이르렀다.
그는
웅장한 월출산 천황 봉을 바라보며
걷는 것이
마음을 다듬는 방법이었다.
도갑사 가는 오솔길을 걸으며
공자와 제자들이 주고 받는 대화들을
회상하며 학자로서 길을 걷고 있었다.
근초고왕 무렵
아직기가 일본에 건너갔을때
일본 오진왕이 그가 경서에 능통 하다는 말을 듣고
태자의 스승으로 삼았다.
그가 임기를 마치고 돌아올때
일본왕은
사람을 보내
학식이 높은 학자를
보내 달라고 요청하니
이때 추천된 사람이 왕인박사다.
왕인박사는 일본에 건너가
논어, 천자문, 유학을 전파하고
군신 들에게 경서를 지도했다.
성품이 후덕하고 소탈 해서
많은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았다.
이후 백제는
오경 박사를 비롯해
재봉 여, 도공, 화원, 금 공, 의사 등을
일본에 파견해
일본 고대문화 발달에 기여 했다.
이것이 일본이 자랑하는
불교문화 아스카 문화다.
그 외도 백제 근초고왕 때부터 아신 왕 때 사람으로
왕건의 1급 참모인 “최지몽”을 들 수 있다.
그는 낭주최씨 시조인 원보 최상흔의 아들로
유교 경전에 통달 했으며
별자리를 보고 미래를 예측하는 천문학과
오행을 살펴 과거를 알아내는
점술(복서)에도 정통했다.
천문과 복서에 정통 하다는 소식을 들은 왕건은
최지몽을 불러
자신이 꾼 꿈을 해몽해보게 하였다.
최지몽이 뜸을 들이더니
“장차 삼한을 통일하여 다스릴 운”이라고 아뢰었다.
왕건은 기뻐서
“지몽(知夢)”이라고 작명해 주었다.
“지몽”은
왕건의 최 측근에서 보좌했다.
혜종 2년에
몸이 아파 신덕 전에 누워있었는데
왕규가
은밀히 혜종의 암살을 추진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