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생 조주천씨 "북한 당국이 형을 죽음으로 몰아갔거나 살해했을 것"
수학 천재로 불리던 조주경(趙周璥)이라는 청년이 있었다. 서울대 수학과 2학년 때 6·25 전쟁이 터지면서 북한군에 의해 의용군으로 낙동강 전선에 투입된 뒤 총상을 입고는 종적이 사라졌다. 가족들은 모두 그가 죽은 줄 알았다. 하지만 실종 50년만인 2000년, 그는 서울 이산가족상봉장에 나타나 노모와 친척들을 만났다. 그는 북한 최고의 수학자가 돼 있었다. 2004년 북한 잡지 ‘금수강산’은 그가 사망했다며 남한에 있는 어머니에게 보내는 그의 편지 등을 실었다. 북한 당국은 사인(死因)을 심장마비라고 했다.

- 2000년 8월 서울의 이산가종상봉 때 만난 조주경 박사(당시 68)와 어머니 신재순 여사(당시 88).
-2000년 서울에서 조주경 박사를 상봉했을 때 조 박사가 무슨 얘기를 했나.
“북한에 애들 2남 2녀가 있다는 등 일상 생활을 얘기했다. 나한테 인민과학자상 상장을 보여주더라. 형이 그 상장을 받기 전에 북한에서 그 상을 받은 사람은 김일성 시절 1명 밖에 없었다고 자랑하더라. 그런데 상장은 정말 초라하고 볼품이 없었다. 북한 정치와 체제 이야기는 안하더라. 6·25 때 총상을 입은 왼쪽 팔에 의수(義手)를 했던데 수준이 너무 형편 없더라. 내가 전문업체에 의수 제작을 부탁했는데 시간이 없어 결국 바꿔주지 못했다. 그 일을 생각하면 지금도 마음이 아프다.”
-북한에서 어떤 기여를 했기에 인민과학자가 됐나.
“내가 그걸 물어보았다. ‘북한 미사일 쏘는데 형이 수학적 계산을 해주지 않았느냐’고. 형이 ‘그런 소리 하지 마라. 그런 건 얘기할 수 없다’며 아예 입을 막아버리더라. 나는 속으로 형이 계산을 해주었을 것으로 짐작했다.”

- 조주경 박사의 사촌동생 조주찬씨가 형과의 이별 당시를 설명하고 있다./여시동 기자
“당연히 후회했다. 그때 북한에 가지 않았다면 어머니와 헤어질 일도 없었다고 마음아파했다.”
-어머니 신재순 여사는 50년 만에 만난 아들에게 무슨 말을 했나.
“무슨 말이 필요했겠나. 껴안고 울고 안타까워하고 그랬지.”
-6·25 직전 사촌 형과 서울에서 함께 생활했다고 했는데 어떻게 헤어지게 됐나.
“6월 23일이 금요일이었는데 나는 부모님이 계시는 논산 두마면 두계에 쌀을 가지러 가게 돼 있었다. 형에게 같이 가자고 하니 ‘내일 애들이 수학 배우러 오니 갈 수가 없다’고 하더라. 당시 서울대 수학과 2학년이던 형은 수학 천재로 소문이 나 친구들과 후배는 물론 선배들까지 수학을 배우러 왔었다. 형은 대구 사대부고 1회 졸업생인데 월반을 하고도 수석으로 졸업했다.
어쨌든 그때 형이 서울에 남는 바람에 나 혼자 논산에 갔다가 이틀 뒤 6·25가 터져 더 이상 만날 수가 없었다. 내가 그날 전쟁이 난 것도 모르고 서울로 가기 위해 두계역에 갔더니 역장이 나보고 ‘서울? 가긴 어딜 가? 삼팔선이 터졌어. 빨갱이들이 몰려와’라고 알려주었다. 역앞 철로를 통해 낡은 탱크와 트럭들이 광주 쪽으로 실려가고 있었다. 평소 방치해놨던 무기를 전장에 투입하기 전 수리하러 가는 것 같았다. 나는 그 길로 대구 고모집으로 피란을 갔다.”

- 조주찬씨는 북한 당국이 형 조주경 박사를 살해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2000년 형을 만났을 때 형이 북한으로 가게 된 과정을 어떻게 설명하던가.
“형은 서울에 남아 있다가 인민군이 서울에 진주하자 고교-대학 친구인 홍순영씨와 함께 숨어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홍순영씨가 형에게 ‘학교가 수업을 재개했다’고 해서 같이 학교에 갔다가 인민군에게 잡혀 수송국민학교로 이송이 됐다. 수송국민학교에 잡혀와있던 젊은이 100여명과 함께 의용군 형식으로 낙동강 전선에 투입이 됐다.
형은 낙동강 전투에서 왼쪽 팔꿈치에 총을 맞아 치료를 위해 안동으로 걸어갔다. 이어 트럭을 타고 충북 제천의 인민군 야전병원에 가서 썩어가는 팔을 마취도 안하고 잘라냈다고 하더라. 절단 부위는 불로 지져 소독을 하고. 인민군이 형에게 더 치료를 하지 않으면 목숨을 잃을 지 모른다며 북한으로 가서 치료를 받으라고 하자 형이 그말을 따라 북으로 갔다고 하더라.”
-형이 사회주의 이념을 좇아 북한으로 가지 않았나.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형이 사회주의 이념을 얘기하는 것을 들어보지 못했다.”
-상봉 행사가 끝난 뒤 연락이 끊겼나.
“우리는 2000년 상봉 직전 형의 소식을 듣기 전까지 형이 부상 때문에 제천에서 숨졌을 것으로 생각했다. 팔에 총상을 입고 제천 야전병원으로 갔다는 소식까지만 홍순영씨한테서 전해 듣고 그 이후 상황은 알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 2000년 8월 15일 이산가족상봉을 마치고 숙소인 워커힐 호텔로 돌아온 북한 상봉단이 박수를 치며 걸어오고 있다.
“사연이 기가 막힌다. 서울대 수학과에 김종식 교수라는 분이 중국 연변에서 열린 국제수학대회에 참가했다가 대회에 참가한 형을 만났다. 형은 서울대 수학과 후배를 반가와하면서 ‘서울에 돌아가거든 내 사촌동생 조주찬이를 좀 찾아달라. 경복중학교를 나왔으나 학교에 가면 기록이 있을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그때는 경복중학이 불에 다 타버리고 없던 때라 김 교수는 나에 대한 기록을 찾을 수가 없었다. 그때 나는 상공부에 들어가 일하고 있었는데 이종렬이라는 경복중 선배도 상공부에서 일하면서 나와 알고 지냈다.
그러다 이종렬 선배가 캐나다 이민을 가게 됐는데 이민가기 전날 친척들을 불러 마지막 가족 모임을 했다. 그 모임에 그의 사촌 여동생도 왔는데 남편이 김종식 교수였다. 김 교수는 이종렬 선배한테 경복중 출신의 조주찬을 아느냐고 물었고 이 선배는 상공부에 같이 있는 후배라고 알려주었다. 인연은 그렇게 극적으로 연결됐다. 이후 북한의 형님과 연락이 돼 상봉 신청을 했고 죽은 줄 알았던 형을 50년 만에 기적적으로 다시 만나게 된 것이다.”
-조 박사와 친분이 있었던 한 탈북인사는 조 박사가 자살했다고 했는데.
“정확한 내막은 모르지만 북한 당국이 죽음으로 몰아갔거나 살해했을 것으로 생각한다. 형의 제자 3명이 미국으로 달아났다던데 그에 대한 책임문제도 있었을 것이고. 과거 북한 매체에 형이 강의를 하다 과로로 쓰러졌다는 글이 실렸는데 나는 믿지 않는다. 다만 탈북인사 주장대로 어머니를 만났을 때 눈물 흘렸다고 그렇게 모진 비판을 받았을지는 의문이다. 이산가족 상봉 때 북에서 온 많은 사람들이 울지 않았나.”
-조 박사의 학문적 명성은 어느 정도였나.
“형이 제기한 확률적분방정식은 대단한 업적이라고 하더라. 당시 연변 국제수학대회에서 형이 이 방정식을 발표했을 때 참석자들이 모두 압도됐다고 하더라. 서울대 김종식 교수는 그런 사람이 한국에 있었으면 세계적인 학자가 됐을 것이라고 했다.(조 박사의 동료 학자였다는 탈북인사는 그의 이론이 당시 소련에서도 유명했다고 했다)”
-조 박사의 어머니 신 여사는 어떻게 됐나.
“50년 동안 죽은 줄 알았던 무녀독남 아들을 극적으로 만난 그 심정이 어땠겠나. 아들이 태어난지 2년 만에 남편이 병으로 세상을 떴으니 의지할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형님이 전쟁 통에 사라진 뒤 부산 친정조카집에 피란을 가서 국제시장에서 포목장사를 했다. 그 뒤 1970년대부터 부산의 절에 들어가 생활했다. 글씨도 잘 쓰고 바느질도 참 잘하던 분이셨는데….(신여사는 북한 잡지 ‘금수강산’이 아들 조 박사의 사망소식을 전하던 바로 그날 92세로 세상을 떴다.) ”
-북한에 조 박사의 유족은 없나.
“부인도 있고 아들 딸들도 있다. 강원도 양구에 부인 친정이 있고 외삼촌도 있다. 양측이 서로 만나고 싶어 이산가족상봉 신청을 했는데 다 선발이 안됐다고 하더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