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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계적으로 학문을 이루라는 충고였다. 단순히 말로만 그친 게 아니라 일곱 살짜리 외조카손자가 혹시라도 가르침을 잊을까 시 한 수를 주었다. 학문의 길을 자연스럽게 가르치고자 했던 셈이다. 이렇게 그는 깎아내고 주입식으로 강요하는 교육보다는 물 흐르는 듯한 가르침 속에서 자랐다. 청렴했던 가풍 탓에 어려서는 넉넉치 못해 주로 아버지에게서 글을 배웠다. 가끔 진외종조부 이정리, 이정관과, 외종조부 류화 등을 찾아가 배우기도 했다.
공부를 잘할 뿐만 아니라 독특하고 폭넓은 견해를 갖게 된 그는 15세의 어린 나이에도 조종영 등 명망높은 성리학자들과 나이를 뛰어넘어 친구가 될 만큼 (망년지교, 忘年之交) 학문적으로 성장했다. 18세 무렵에는 할아버지 연암 박지원의 문인들을 찾아다니며 이곳저곳 가르침을 청했는데, 개중에는 당대의 명필이자 화가이며 금석학자였던 김정희도 있었다. 또한 김정희의 스승은 역시 연암 박지원의 문인이었던 실학자 박제가였다. 할아버지의 학연을 활용한 셈이다.
그는 지구가 둥글다는 사실을 배워 알고 있었다. 열여섯 살 때 도봉산 정상에서 하늘을 두고 읊은 시 한 수가 남아있다.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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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양(A)·지구(B)·달(C)에 대한 천문학적 통찰을 시로써 정리한 것이다. 요즘 식으로 말하면, '과학탐구 영역'을 공부한 학생이 새로운 지식을 시로 정리하는 것과 유사하다. 시 쓰기를 통해 복습한 셈이다. 또 다른 문집인 <장암시집>에는 지구과학적 지식을 정리한 것도 보인다. "아아! 큰 안목으로 볼 때, 지구를 만져보면 호두 속살 같을 거야"라고 했다.
그를 아는 사람중에는 박규수가 늘 특이한 것에 관심을 둔다며 기인이라 평하기도 했지만, 그의 집안 어른들은 그의 폭넓은 지적 호기심을 나무라기 보다는 오히려 더 북돋아
1828년 약관의 박규수는 효명세자와 친분을 나누며 개화를 논했고, 친구 이상의 관계로 학문과 미래를 토론했다.주로 《주역》과 나랏일이었다.
후일 익종으로 추존되는 효명세자는 대리청정 2년째에 아직 벼슬도 없던 20세의 박규수를 불러들여 '박규학의 학문은 누구도 따를 수 없으리만큼 출중하다'며 그를 곁에 뒀다. 주역을 신하들 앞에서 진강케 하는 한편, 조부 박지원의 저작을 모두 모으라 명하고, 박규수 자신의 저술도 있으면 같이 올리라 했다. 이때 직접 상고도설 80권을 지어 효명세자에게 바쳤다. 효명세자는 이런 그를 몹시 아꼈다.
효명세자는 대리청정 중에 안동 김씨 세도문벌들을 배제하고 처가인 풍양 조씨와 노론내 비주류 및 남인을 중용하는 한편, 이인좌의 난 이후 축출됐던 소론까지 과감히 등용하는 등 개혁군주로서의 싹을 보였다. 박규수는 이런 효명세자의 개혁 가능성에 모든 기대를 걸었다. 그러나 효명세자가 1832년 갑자기 훙거하면서 그의 꿈은 꺾였다. 슬픔과 실망이 너무 컸던 나머지 원래 자신의 자와 호의 '환'(桓: 굳셀 환)이라는 글자를 '환'(瓛: 옥홀 환, 재갈 얼)으로 바꿀 정도였다.
안동 김씨 세도 정치가 계속됐던 데다가 효명세자, 어머니 유씨, 아버지 박종채의 연이은 죽음으로 상심한 그는 20년 칩거에 들어간다.그는 할아버지 박지원의 저작들을 거듭 읽어 북학 사상을 정교화하고, 할아버지의 제자들을 찾아다니며 가르침을 청했다. 윤종의, 남병철, 김영작 등 당대 기라성같은 유학자들과도 깊은 교분을 나눠, 후일 홍문관 대제학에 오를 정도의 주자학적 깊이까지 더하게 된다.
1848년(헌종 14년) 42세가 된 그는 문과 증광시에 병과 25위로 합격했다. 헌종은 '일찍이 부왕의 사랑을 받던 너를 내가 너무 늦게 알아보았다. 앞으로 크게 쓸 것이니 진력하라'고 했다. 사간원 정언(正言)이 되고 병조정랑을 지냈으며 용강현령으로 외직에 나간 동안 헌종이 사망했다.
1850년(철종 1년) 전라북도 부안현감으로 부임한 그는 대실학자 반계 유형원의 사적지를 찾아 반계수록 등 그의 저서들을 입수해 탐독한 후, 세상을 구할 학문이 쓰이지 못했다며 찬탄했다 한다. 그 해 사헌부 지평으로 궁에 복귀한 뒤 홍문관 수찬이 됐다.
1854년(철종 5년) 승정원 동부승지를 거쳐 그해 경상좌도 암행어사로 민정을 시찰했다.
1855년(철종 6년) 다시 경상좌도 암행어사로 파견됐다. 당시 탐관오리들을 봉고파직한 전말을 기록한 수계등이 남아있다
1858년(철종 9년) 황해도 곡산부사로 나갔다.
1860년(철종 11년) 조부 연암 박지원이 그랬듯, 청나라 사신단에 열하부사로 임명돼 6개월 간 연경에 다녀왔다. 이 때 그는 처음으로 당시 국제정세의 흐름과 제국주의 침략의 실상을 접했다. 업무 외 시간에는 4년 전 애로우 호 사건 때 영·프 군의 북경, 톈진 점령 직후 함풍제의 대응 방식과 그 후 4년 여의 전쟁에 대해 자세히 조사했다. 박규수가 청국에 당도한 때는 4년 전쟁도 끝이 나고 베이징 조약이 체결될 시점이었다. 거인 중국이 불평등 조약으로 홍콩 주룽 반도와 연해주를 생으로 뺏기고 외교적 위신이 깎이는 모습을 현장에서 목격하며 심각한 문제인식을 가지게 됐다. 또한 심병성, 왕증, 풍지기 등 백여 명의 현지 문인, 학자들과 교류해 견문을 넓혔다.
1861년(철종 12년) 초 귀국 후 성균관 대사성이 됐다. 얼마 후 그는 열하부사로 다시 청나라에 갔다. 제2차 아편 전쟁 직후라 청나라를 통해 격변하는 국제 정세를 살피기 위해 일부러 사행(使行)을 다시 지원했다. 그는 이때부터 1871년 신미양요 때까지 승문원에서 각종 외교 문서들을 작성했다. 영어를 몰랐던 당시 조선 정부였기 때문에 그는 영어를 해석한 중국 문헌들에 기초해서 서양과 외교 문서를 작성했다.
2번에 걸친 양요때 청나라로 보낸 자문 및 미국에 대한 힐문장과 통상 요구에 대한 거절 문건을 대부분 그가 만들었고, 강화도 조약 때도 조정 중론을 모으는 것을 넘어, 일본을 상대로 한 외교문서 다수의 자문과 감수, 교열에 참여했다.
1862년(철종 13년) 2월 진주민란이 경상우도 일대로 확대되자 안핵사로 나가 사태 수습을 맡았다. 지방관과 지역 향반들의 부패로 인한 백성들의 참상을 보고하고 세금 감면과 구휼을 주청해 성사시켰다. 그는 민란의 원인이 삼정의 문란에 있음을 확인하고, 근본적 해결책을 마련하도록 조정의 중론(衆論)을 모을 특별기구를 건의했다. 그의 헌책으로 음력 5월 26일 삼정이정청이 설치된다. 동년 10월 이조참의로 승진했다.
1863년(고종 즉위년) 12월 승정원 도승지에 임명돼 고종을 측근에서 모시게 됐다. 막 즉위한 고종은 익종의 양자로 입양돼 보위에 오를 수 있었는데, 효명세자(익종)의 정비이자 고종의 양어머니가 된 조대비가 남편의 생전 절친했던 박규수를 흥선대원군에게 천거했다. '박규수는 벼슬길에 오르지 않았을 때도 익종께서 크게 쓰려던 인물이다. 그가 벼슬한 뒤 이제까지 그의 재주를 마음껏 발휘할 자리에 앉아본 적이 없는데, 한 번 써보는 것이 좋겠다'며 간곡히 부탁했다고 한다.
1864년(고종 1년) 병조참판을 거쳐 사헌부대사헌, 홍문관제학, 이조참판을 두루 거쳤다. (모두 요직이었으나 같은 종2품계)
1865년 영건도감제조를 겸해 흥선대원군이 착수한 경복궁 중건 작업 실무를 총괄했다.
1865년(고종 2년) 한성부 판윤(정2품)을 거쳐 공조판서 겸 지경연사에 전임됐다. 경복궁이 완성될 때까지 영건도감 제조직은 계속 겸임했다. 그 뒤 예조판서, 사간원대사간을 거쳐 그 해 8월 돈녕부지사에 올랐다.
1866년(고종 3년) 고위 관리는 반드시 지방 외직을 순환해야 하는 규정에 따라 그 해 음력 2월 평안도 관찰사로 부임했다.
1866년(고종 3년) 제너럴셔먼호 사건이 터졌다. 선교사 토마스(한국식 이름 최난헌) 등을 태운 미국 상선 제너럴 셔먼호(The General Sherman)가 조선 정부의 분명한 통상요구 거절에도 허가없이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오자 평양감사 박규수가 공격 명령을 내렸다.
셔먼호는 상선이었으나 무장을 적재한 상태였고 밀물을 타고 강을 거슬러 올라왔지만 곧 조수가 밀려나가면서 모래톱에 좌초됐다.박규수는 체포조를 구성하는데 상금을 걸었다. 이 때 한 교졸이 곧 자원해 어촌에서 징발한 괴피선 여러 척에 기름먹인 섶을 가득 실어 셔먼호 옆에 붙였다. 그리고 궁수들로 일제히 불화살을 당기게 해 화공했다 화공이 시작되자 셔먼 호 내부의 인화물질에 옮겨 붙으면서 셔먼 호가 항행 불능에 빠졌다. 미국인들이 다급히 배에서 뛰어내려 도망쳤으나 대개가 사살되고 선장과 선교사 토마스는 평양 부민들에게 맞아죽었다.
조정에 전말이 보고된 후 박규수는 승차(품계가 승진됨)됐고 한낱 지방 아전(중인 계급)에 불과했던 교졸도 정3품 진장(鎭將)에 올랐다 외세에 대해 민심이 흉흉했던 차에 박규수는 전국적으로 인기를 얻었고 아울러 대원군의 각별한 총애도 얻게 됐다.
1866년(고종 3년) 10월 병인박해로 천주교도들이 많이 죽었다. 당시 8천 여 명의 평신도와 프랑스 파리 외방전교회 출신의 선교사 등이 처형된 사건으로, 발단은 러시아의 남하 정책에 위기를 느낀 흥선대원군이 프랑스 선교사들을 통해 한불 동맹을 맺으려다 뜻대로 되지 않자 천주교를 혹세무민에 무군무부의 사상이라며 탄압했기 때문이었다. 박규수는 천주교 박해가 국제 분쟁의 원인이 될 수 있는 데다, 백성이 천주교에 혹하는 것은 결국 가렴주구와 악정 때문이므로 처벌보다는 교화하고 선도하자며 관대한 처분을 상주했다.
전국적으로 혹독한 검거 및 고문 처형이 이어질 때도 그는 구금 정도의 관대한 처벌만 내렸다. 관찰사 때 그의 관내에는 처형자가 없었다. 결국 병인박해가 원인이 돼 병인양요가 터지면서 그의 선견지명이 증명됐다. 그는 민심이반을 막기 위한 방책으로 세금을 감면하고 흉년이 든 농가를 구제하며, 업무 후에도 따로 서실을 열고 선비들을 모아 글을 읽어 평안도 선비들이 과거에 응시해 관직을 얻을 수 있게 애쓰는 등 선정을 베풀었다. 2년 임기 후에도 1869년 4월까지 만 3년 2개월 간 유임됐다.
1871년(고종 8년) 예문관 제학과 홍문관 제학을 겸했고 외교 자문을 직접 청나라에 지어보내 글씨좋다는 칭찬을 들었다. 이듬해 홍문관 대제학 겸 예문관 대제학이 돼 조선 유학의 종장으로 인정받았다.
1872년(고종 9년) 철종의 하나 남은 혈육인 영혜옹주의 혼례를 정하게 됐다. 부마자리를 두고 4월 수원부유수 신석희와 함께 자신의 문하생이자 같은 일족인 박영효를 부마로 추천했다. 조선 왕실은 그의 추천대로 박영효를 부마로 삼아 금릉위의 봉작을 주는 한 편, 고종의 친척 매제 뻘이 된 10살짜리 박영효에게 삼정승의 품계인 상보국숭록대부도 내리고 왕실종친 반열에 올렸다. 고종의 친형인 이재면의 품계보다 높았다.
1872년(고종 9년) 청국 황제 동치제의 혼례식에 진하사 정사로 서장관 강문형과 수역오경석 등의 사신단을 꾸려 건너갔다. 이 때 그는 전년도 청나라 사신으로 프랑스에 다녀온 삼구통상대신 완안 숭후를 만나 세계 정세를 묻고 아울러 서구의 서적과 무기, 화포, 건축술에 대한 자료도 손에 넣었다. 청나라 조정이 서구 열강에 대항해 자구적 노력의 일환으로 일으킨 양무운동에 깊은 감명을 받고 귀국 후 개국과 개화의 필요성을 역설했지만, 흥선대원군의 쇄국 정책과 최익현, 김평묵 등 주자학적 명분론의 공격에 막혀 좌절해야 했다.
1873년(고종 10년) 5월 형조판서에 임명됐고 음력 12월에 마침내 우의정에 올랐다. 그 때까지도 그는 흥선대원군에게 개국의 필요성을 여러 차례 역설했으나 채택되지 않았다. 박규수는 어디까지나 조정 중론에 따랐으면서도 당시 일본과의 국교문제에 있어서까지 줄기차게 개국을 주장했다.
1873년(고종 10년) 12월 일본이 자신들의 왕정복고와 이에 대한 정식수교 요청을 통고해 왔다. 메이지 유신을 성공시킨 일본은 종전의 서계 격식을 버리고 고종에게 '황제, '칙령', '대일본' 등의 표현을 써보냈다. 이른바 서계문제로서 조선 정부로서는 적어도 대등한 위치도 아니고 일본이 상국의 위치에서 써보낸 외교 전문에 대해 수리를 거부했다.
조선 정부에서 충격 속에 격론을 벌이는 가운데 그는 "직함을 가서한 것은 저네들 자신 그 나라의 정령이 일신되어 그 인군의 우상을 입은 것을 과시한 것뿐이다. 소위 관작을 승진했다는 것인데, 이것이 우리에게 무슨 상관인가? 종래의 격식과 다르다고 하여 이를 힐책하며 받지 않는데, 이것이 일개 통역관의 견해라면 괴이할 것이 없겠지만, 하필 조정 스스로 이를 교계하려 하는가? 가히 일소에 붙일 일이다." 라며 그냥 형식적인 것이니 연연하지 말자고 주장했다. 흥선대원군을 직접 찾아가 일본이 평화적인 뜻으로 수교하려는 한 대국적 견지에서 서계를 받아들이자고 설득하였으나 역시 거부됐다.
1874년(고종 11년) 9월 영의정 이유원과도 계속 충돌하고 자신의 뜻이 더이상 통하지 않는 걸 납득하게 된 그는 사퇴했다. 관직에서 물러난 그는 사랑방에 출입하는 젊은 양반자제들에게 박지원의 사상을 강의하기도 하고 중국을 왕래한 사신이나 역관들이 전하는 새로운 사상을 전하기도 했다. 《연암집》, 《해국도지 》 등에 대한 강연과 자명종, 시계, 태엽, 기계, 서양화 등을 소개하는 한편, 서양 열강의 무서움 및 중국의 패배와 양무 운동 등 세계의 정세를 전하고 부국강병을 역설했다.
1875년(고종 12년) 5월 조선 정계에서 은퇴한 몸임에도 대원군을 찾아가 '만약 저들(일본)이 포성을 한 번 발사하기에 이르면 이후 받으려 해도 이미 때늦어 나라를 욕되게 할 것'이라며 재차 설득했으나 받아들여 지지 않았다.
1875년(고종 12년) 9월 일본은 운요 호(운양호)로 강화도를 포격했다. 그와 제자 김홍집, 역관 오경석 등은 다시 한 번 수교를 강력히 촉구하고 설득해 이듬해 2월 강화도 조약을 맺게 됐다. 이후 다수에 의해 매국노로 규탄받고 모함에 시달린 그는 병석에 누웠다. 그의 문인 중 한 사람인 운양 김윤식은 "공(박규수를 지칭)은 늘 천장을 쳐다보며 길게 탄식하며, 윤기가 끊어져 나라도 장차 따라서 망하리니 가련한 우리 생민이 어찌하여 하늘로부터 저버려져야 하는가라고 했다. 드디어 걱정과 분함 때문에 병석에 누웠다."라고 했다.
1875년(고종 12년) 11월 25일 대왕대비의 가상존호옥책문제술관을 겸했다.
1876년(고종 13년) 1월 건강도 좋지 않았을 뿐더러 칠순을 맞은 그는 치사(은거)를 상주했으나 불허됐고 대신 노신들의 모임인 기로소에 소속돼 궤장(지팡이)과 의자, 안마를 하사받았다.
1876년(고종 13년) 2월 수원부 유수에 임명됐으나 건강이 악화돼 가지 못했고, 병세가 차도를 보이던 8월 9일 수원부 유수에 재차 임명돼 수원으로 내려갔다.
1877년(고종 14년) 2월 9일에 임지인 수원부 청사에서 71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고종은 슬퍼하며 '도량과 식견이 고명하고, 문학이 박식해서 내가 의지하고 온 조야가 기대하던 사람이다. 근래에 우의정의 벼슬을 벗은 것과 관련하여 특별히 거기에 머물러 살게 한 것은 바로 평시에 정력이 강직하여 잠시 휴식하게 해주면 다시 등용할 날이 있을 것이기 때문이었는데, 어찌 까닭모를 병으로 갑자기 영영 가버릴 줄이야 생각이나 하였겠는가? 내 슬픔과 한탄이야 어찌 그 끝이 있겠는가?' 라며 승지를 보내 치제하게 하고, 3년치 녹봉을 부의로 지급했다
1877년(고종 14년) 경기도 양주군 노원면 하계리(현, 서울특별시 노원구 하계동) 산 20-3번지 현재 서라벌 고등학교 자리에 안장됐다.[18]
1878년(고종 15년) 11월 1일 문익의 시호가 내려졌다. 그의 사상과 학문은 김옥균, 박영효, 유길준, 윤웅렬, 김홍집, 윤치호, 홍영식, 서재필 등에게 계승됐다. 그가 죽은 후에도 유대치, 오경석 등이 문하생들의 훈육을 맡았다. 양무 운동 모델의 동도서기를 주장했던 박규수와 달리 제자들은 메이지 유신 모델의 급진적인 개화를 향해 나아간다.
1884년(고종 21년) 10월 그의 제자들인 김옥균, 박영효, 서재필, 유길준 등이 갑신정변에 실패해 대거 일본과 미국으로 망명갔다. 문하생들이 역도들이 되자 이미 사망한 그 역시 관작을 모두 삭탈당했으며, 집은 헐려 공터가 됐다가 1906년 보성중학교 부지가 됐다.
1894년(고종 31년)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을 등에 업고 개화파들이 조정에 복귀해 갑오경장을 실시한 뒤에야 사면복권됐다.
1910년 대한제국 멸망 후 그의 개화 사상과 삶을 소개한 문집이 처음 간행됐다. 연암집 역시 처음으로 정식 간행됐다.
1921년 3월 31일 일제 강점기였지만 이왕직등으로 명맥은 유지하던 순종의 명으로 신응조, 이돈우, 민영환등과 고종의 묘정에 배향됐다.
1950년 6.25 전쟁 통에 경기도 광주군에 보관 중이던 그의 저서와 유물 상당수가 소실됐다. 개화파들에 대해 해방 이후에도 평가가 좋지 않아 같이 잊혀져 가는 듯했던 그의 사상은 1970년 대가 돼서야 국사편찬위원회를 통해 한글로 번역됐고, 70년대 중반부터 일본 덴리대학교 조선학회에서도 그의 저서와 사상 등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가 진행됐다.
그의 개화 사상은 실학 사상의 근대지향적 측면을 내재적으로 계승한 위에 외발적 요인이 작용해 촉발된 것으로, 선대의 북학파 학자들이 주장한 이용후생(利用厚生)이었다. 두 차례에 걸친 연행을 통하여 세계 정세를 파악하고 서구에 보다 우수한 문명이 있음을 인정, 좋은 것은 과감하게 수용하자는 의견을 개진하게 됐다. 중국의 개화파 관리들과 접촉하면서 개화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개항을 역설했다.
그는 서양사정에 밝아 신문물의 수입과 문호개방을 주장했다. 그는 개항을 통해 서구의 선진 문물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보았다. 그는 할아버지 박지원의 사상을 후대의 개화파에게 전달하여 북학파의 개혁, 실용주의 학문을 가르쳤다. 그는 현실에 유용하게 쓰이지 못하는 학문은 죽은 학문이라 했다.
그의 개국론은 그가 운양호 사건 직전 '일본이 수호를 운운하면서 병선을 이끌고 온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 그러나 수호의 사신이라 하니 우리가 먼저 선공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만일 의외의 일이 있을 것 같으면 무력을 행사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한 것처럼 유사시 무력 충돌도 불사한다는 자주적 개국으로, 무력적 굴복에 따른 타율적 개국은 아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의 개국론은 일본에 굴복하는 것처럼 곡해됐다.
그는 척화론을 공리공담과 불필요한 체면으로 규정했다. 할아버지 박지원의 사상을 계승하여 최익현, 김평묵 등의 주자학적 명분론에 입각한 척화론을 헛된 명분론으로 규정, 반대·비판했다. 그는 적극적인 서양문물의 도입 및 외국과의 통상강화를 주장했고, 북학파의 사상을 개화파에게 전수했다. 정계에서 은퇴한 후 개화파 청년들을 지도하여 김옥균, 박영효, 서재필, 윤치호, 박정양, 이상재 등에게 영향을 주었다.
개항파로 알려진 박규수의 행적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성균관 대학교 한국한문학과 김명호 교수에 따르면, 그가 척사론자들과 마찬가지로 대원군의 양이 정책에 동조했으며 다만 교섭 여지를 주어 서양을 중화문명에 귀의시키려 했을 뿐이란 것이다.
제너럴 셔먼 호를 불태우던 1866년 박규수는 강경한 척화파처럼 보인다. 이어 셰난도어호 내항 때에도 그가 미국·중국 등에 직접 지어 보낸 각종 문서는 어디까지나 정부 측의 강경한 입장 내지 힐문장들이었다.1871년 신미양요 때에도 미국과의 교전을 주장하고 이를 관철했다.
김명호 교수에 의하면 “박규수가 양이를 주장하는 이항로의 상소를 칭찬했으며 서양 오랑캐와 화친 불허 등을 담은 대원군의 양이책을 전폭 지지했다”며 박규수를 대표적인 주화론자나 개국을 구상한 인물로 보기는 어렵다는 견해를 밝혔다.그는 “신미양요 시기에 박규수가 대미수교를 원했다는 종래의 논의는 단편적인 자료를 통해 확대해석한 결과”라고 주장
한편 제너럴 셔먼 호에 승선했다가 살해된 토마스 선교사가 대동강을 거슬러온 것이 박규수의 초청 때문이었다는 설에 대해서도 김명호 교수는 이를 부정했다. 토마스 목사가 베이징에서 박규수를 만나 선교활동의 지지와 후원 약속을 받았다는 설은 전혀 사실 무근으로, 셔먼호 사건을 전후해 박규수는 베이징에 간 사실이 없다는
북학파들의 문제 인식 속에는 양반 사회의 모순이 늘 자리잡고 있었다. 박규수 역시 사대부들의 도덕과 명분론이 허울이며 위선임을 지적했다. 선대의 선비들이 현실 정치나 벼슬길을 멀리했던 것은 도덕적 문제가 아니라 단지 자기 자신을 위해서라는 것이다. 다음은 벼슬길에 출사한 후 친지에게 보낸 편지 중 일부다.
공부가 완숙해질대로 완숙해진 42세 이후의 출사길이니까 젊은 혈기로 한 말은 아니다. 그를 비롯한 북학파들의 작품이나 언급에서 나타나는 조선 사회 모순의 핵심은 양반들이었고 그들의 위선과 아집이 역사적 발전을 막았기 때문에 오늘의 문제가 계속된다는 공통적인 문제의식이 있었다.
외교관계에 있어서 도의적인 것과 감정 보다는 실리를 찾을 수 있는 것이 외교의 기본이라 주장했다. 이에 따라 위정척사파의 맹목적인 폐쇄론에 저항하고 서구의 문물을 받아들이는 한편 외국의 주장이 합당하다면 이를 무조건 배척할 것이 아니라 어느정도 수용해야 됨을 역설했다. 외국의 주장을 수용하는 한편 타협을 통해서 절충안을 찾자고 주장했다.
일본과 병자수호조약이 체결될 때는 막후에서 반대파를 설득하여 조약 체결에 결정적으로 공헌했다. 그는 중요한 것은 호칭 문제가 아니라며 실질적으로 조선이 획득할 수 있는 이익을 찾아야 함을 역설했다. 1875년(고종 13년) 운요호 사건으로 일본이 수교를 요구하자 최익현 등의 강력한 척화 주장을 물리치고 강화도 조약을 맺게 했다. 그 뒤 그는 척사파로부터 온갖 인신공격에 시달리게 된다.
그의 제자들이 메이지 유신식 개화를 주장했기 때문에 그도 같은 입장으로 오해되는 경우가 많으나, 실상 그는 청나라의 동도서기론를 주장했다. 어디까지나 양무 운동 모델을 따른 것이다. 그는 서양법(西洋法)에 대한 동양 학문과 도덕성의 우월함을 확신했던 유학자로, 북학파 사상의 연장선상에서의 개국통상론이었다. 그의 제자들은 각자 스승인 박규수의 사상을 시대적 상황에 맞게 실천한 것 뿐이다. 서양의 물질 문명은 역시 우수하나 아편 전쟁이나 포함 외교 등을 미뤄봤을 때 분명 서양의 것을 답습해선 안된다는 인식이 있었다. 동양의 정신을 지키면 서양 역시 배울 점이 있고 개선될 점이 있을 것이라는 견해였다.
박규수는 백성이 있은 뒤에야 사대부가 있다고 했다. 그리고 사대부가 백성의 윗사람이 아니라 백성들을 위해 일하는 것이 그 직분이라 가르쳤다. 이를 실천에 옮기기도 했다. 다음은 그 일화다.
그의 집안은 고조부 대에까지는 한성부의 벌열가문이었지만 조부 박지원의 대부터는 재산이 없었다. 그의 처지를 안타깝게 여긴 문하생인 생원인 주씨가 박규수 모르게 논 80석을 사뒀다. 그런데 신씨(申氏) 성을 가진 시골 노인이 찾아와 '연전에 사기를 당해 대감댁 땅을 모르고 샀으니 이를 어찌하면 좋으냐'고 했다. 박규수는 주 생원을 불러 땅 문서를 신씨 노인에게 주라 했다. 주생원이 후생들을 위해 그러지 말라고 애걸하였으나 박규수는 '백성이 있고 사대부가 있는 법'이라며 끝내 노인에게 주게 했다.
연암 박지원과 유길준의 5대조 유한준은 당대 쌍벽을 이루던 문장가들로 본래 문우(文友)이자 친구였는데, 연암 박지원이 유한준의 글을 풍자한 데서 감정싸움이 오가다가 이런저런 일이 있어 둘은 끝내 원수가 됐다. 싸움은 대를 이어 후일 박지원의 아들 박종채가 과정록에서 유한준을 깎아 내렸다.
저암 유한준과 연암 박지원은 집안끼리 친분이 있었고 연배도 비슷해 젊은 시절부터 절친한 사이였다. 그런데 연암 박지원이 유한준에게 '글이 너무 기교에 치우쳤다'고 여러 차례 혹평했다. 그러자 저암은 연암에게 '오랑캐의 연호를 쓴 글(虜號之稿)을 쓴다'라며 몰아붙였다. 결정적으로 선산 이장 문제가 불거지면서 원수가 되는데, 연암이 조부 박필균과 친부 박사유의 묘를 이장코자 한 곳이 마침 기계 유씨 선산 근처였었다. 유한준은 이를 반대하다가 막을 방법이 없자, 원래 집안의 정자가 있던 곳이라며 어린 나이(15세)에 죽은 자기 손자를 박필균 묘 위에 매장해 법률로 다투게 됐다. 이에 박종채는 유한준의 집안을 일컬어 '백세의 원수'로 규정한 것이었고, 이에 유한준의 아들 유만주도 연암을 '매우 잡스러운 인간'이었다라고 받아치는 등 감정의 골은 돌이킬 수 없게 됐었다.
1871년 홍문관 제학 박규수는 향시에서 장원으로 뽑힌 시 한 수를 읽고는 장원급제자를 호출했다. 그가 당시 16세의 유길준으로 바로 유한준의 5대손이었다. 그러자 유길준의 아버지 유진수가 '어떻게 원수같은 자를 찾아간다는 말이냐'며 완강히 반대했다. 그러나 홍문관 제학으로 유길준을 만난 박규수가 먼저 손을 내밀어 그를 거듭 칭찬하고는, '너희 집과 우리 집이 지난날 사소한 문제로 불화했으나 이제부터 옛날처럼 다시 화목하게 지낼 수 있다면 어른들이 풀지 못하셨던 감정을 우리가 풀어드리는 셈이 되는게 아니겠냐'며 감개무량해했다. 또한 힘써 공부할 것을 당부하고 구원(舊怨)을 잊고 자주 찾아오라며 은근하게 대했다. 그의 인품에 감복한 유길준은 그 때부터 박규수를 스승으로 예우하고 배웠으며 개화파로서 평탄하지만은 않은 삶을 관철했다.
할아버지 박지원, 유형원, 박제가, 이익, 정약용, 서유구, 김매순, 조종영, 홍석주, 윤정현등을 선배로서 사숙했고, 문우로서 남병철, 김영작, 김상현, 신응조, 윤종의, 신석우등과 주로 교유했다.
그의 학풍은 제자의 한 사람인 김윤식(金允植)의 지적에 의 하면 "크게는 체국경야의 제(制)로부터 작게는 금석·고고·의기(儀器)·잡복 등의 일까지 연구하여 정확하고 실사구시하지 않는 바가 없고, 규모가 굉대하고 종리(綜理)가 미세 정밀"했다 한다.
박지원의 손자로서 인맥으로도 북학파에 직결되는 그가 사숙한 선배 중에는 박지원, 박제가 등 노론북학파 외에도 남인인 정약용, 서유구, 북인인 유형원, 윤휴 등의 학문도 폭넓게 사숙했다. 다양한 선배 학자들의 학문을 사숙하였던 탓에 어떤 특정한 사상만이 정답은 아니라는 결론을 내리게 된다. 또한 소론인 유수원의 학문에도 관심을 갖기도 했다.
백의정승 유대치, 중인 출신 외교관 오경석 등과는 신분을 초월하여 친구로 사귀었고, 승려 이동인은 사상을 떠나 친구로 지냈다. 박규수는 사람은 신분이나 지위로 평가할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됨됨이를 보고 평가해야 된다고 했다. 박규수는 자신의 문하에서 김옥균, 박영효, 박정양, 서재필, 김윤식, 김홍집, 유길준, 어윤중, 윤웅렬 등의 제자, 문인들을 길러냈다.
그림도 좋아해 수백 여 편의 그림과 글씨를 남겼다고 하나 6.25 전쟁 때 작품들이 대부분 소실됐 앞에서 기술했듯 그의 글씨는 청나라 고관대작들의 칭찬을 받기도 했었다.
고전 읽기와 공부 방법을 흥미롭게 엮은 '상고도회문의례' 16권을 지었고, 그가 직접 제작한 지구본 설계도 평혼의와 천문지도 간평의의 종이 제작본 등이 현재 전한다.
문인화와 수묵화 외에도 또한 경기도 지도인 동진방략을 그렸고, 평안도 전도를 그리기도 했다. 청나라의 세계지도와 천문도 등 여러 문헌을 참고해 세계 지도인 혼평의와 천문도, 간평의등 천문지도를 제작했다.
박규수의 해시계이자 천문도인 '간평의의 종이 제작본은 2006년 5월 실학박물관 기공식 때 공개됐다
-청과 일본의 대립, 청의 마지막 수호자 이홍장, 결코 낙후되지 않은 나라 중국
한국에서는 구한말의 개화파와 일제시대에 주입된 사고에 의해서 중국은 동양적인 전제주의를 표방하는 나라이고, 그래서 일본과의 문물교류를 통해서 개혁노선을 걸어야만 한다는 사고가 매우 팽배했었고, 그러한 가운데에 독립협회는 영은문을 헐고 독립문을 세우는 등 별의 별 짓을 하지만, 실은 이 모든 것이 한일합방으로 가는 매국행위이며, 실은 청일전쟁의 결과가 기운 상황에서 정치인들이 벌이는 기회주의적 작태였었습니다.
그러나 서재필, 윤치호, 박영효, 이완용 등 이들 정치인들의 후계자들이 훗날 대한민국의 건국주도세력이 되고, 구한말이래 일본에 대한 협력의 댓가로 이들 집안이 학계에도 포진되어 있었던바, 이들은 개혁세력으로 묘사되고, 동학당이나 척사파는 동떨어진 사고방식을 지닌 집단인 것처럼 묘사됩니다.
그러나 실상은 아편전쟁이전에도 이후에도 광동성과 양자강하류일대에서 서양자본과 그리고 서양자본의 정수라고 할 수 있는 영국이나 프랑스인들과 활발하게 관계를 맺어온 것은 중국이며, 반면에 일본은 줄곧 쇄국정책을 고수하다가 페리호사건을 통해서만 가까스로 개방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중국이 서양문물에 대해서도 실은 일본보다 우위에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중국이 청조말기의 부패상에 바져있었던 것은 사실이었고, 특히 아편전쟁이후에 국제체제속에 편입됨에 따라서 적어도 중국의 안보만큼은 이전의 중국중심의 세계관이 가미된 동양적 전제체제의 외교시스템에서 전세계의 일부분밖에 되지 않는 중국의 현실적인 지정학적 요건에 맞는 것이 될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외에도 현실적으로 중국의 역사를 보면 안보우산을 제공할 수 없는 왕조는 망하는 것이 순리였으므로 이 것은 화급한 일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등장하는 것이 이홍장의 양무운동인 것입니다.
이 때 중국의 안보문제는 한국과도 연관이 되어 있는데 그 것은 중국의 낙후된 전제주의때문이 아니라 현실적으로 서해의 제해권이라고하는 중요한 지정학적 사안이 한국과 맞물려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중국의 현대적 지정학적 문제는 여러가지로 표현될 수 있지만, 당시에 중요시되던 것은 중국의 양대축선인 북경과 남경, 그리고 북경에서 산해관, 요동을 거쳐서 신의주, 평양으로 들어갔을때 닿게 되는 한국이라는 나라가 있고, 남경으로부터는 광동성을 지나서 베트남으로 연결되는 중차한 중국의 방위라인이 있습니다.
곧, 한국-북경-남경-베트남의 그 것으로서 만약 한국이나 베트남이 침략받는다면, 그 것은 현대의 캐나다와 멕시코가 외세로부터 침략받는 상황의 미국에 대한 의미와 같은 것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지금은 한국과 베트남은 오히려 마치 남미의 베네주엘라를 축으로한 반미노선마냥 중국으로부터 자주노선을 걷는게 일반화되었고, 현실적으로도 한국과 베트남을 통한 회랑은 멕시코나 캐나다에는 비할바가 아니게 좁으므로, 중국으로써도 양국에 크게 관여를 하지 않지만, 외세침임이 일상적이었던 당시에는 베트남과 한국의 방위가 곧 중국의 방위와 같았다고 봐야합니다.
두번째는 황해(우리말로는 서해)의 제해권이었습니다. 아편전쟁당시 청이 영국에게 무릎을 굻게된 가장 큰 원인이었던 천진으로 외세가 상륙한 뒤 북경을 위협하는 가능성은 중국의 가장 아킬레스건으로써 황해의 제해권상실은 북경의 존립을 어렵게한다는 것은 지금도 상식이어서, 현대에도 중국은 미해군의 황해진입을 철저하게 막고 있고, 미국과 중국사이에는 미해군이 황해진출은 하지 않는다는 양해가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홍장으로써는 과거와 같은 봉건적위계에 의거한 동양적외교가 사라졌을때, 그리고 아편전쟁의 뼈아픈 경험으로써 무엇보다도 황해의 제해권을 제어할 함대의 건립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셋째는 청조부터 자행되었던 중국의 서진과 서쪽변경의 방어, 넷째는 러시아의 남하가능성과 내몽골과 만주의 방어 이 정도가 당대 중국의 안보현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상의 것들, 정리하자면 하나는 한반도와 베트남을 점령한 외세가 육로로 쳐들어올 가능성, 둘은 황해의 제해권확보, 셋은 러시아의 남하와 내몽골과 만주의 방어, 이렇게 세가지의 문제가 조선이라는 교집합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당시 청조으로써는 한반도문제는 곧 청의 몰락과 직결되다고 할만한 것이었습니다.
여기에 대해서 당시 동아시아 정세를 파탄냄으로써 이득을 취하려던 일본이 도전해 오는 것이 당시의 국제정세였던 것입니다.
여기서 잠시, 우리는 중국의 당시 상황에 대해서 결코 오판하지 말아야될 것이 있습니다.
그 것은 당대 중국이 물론 여전히 농업인구가 주인 낙후된 사회였다하더라도 여전히 전세계 GDP에서 그때나 지금이나 상당부분을 차지하고, 아편전쟁이후로는 서구세력과의 교역이 활발한 보통국가였다는 사실입니다.
사실 당시의 세계정세상 각국간 국제무역이 활발하면서 서로 경쟁하기도하면서 또한 교역도 활발한 상공업이 주인 사회는 유럽밖에는 없습니다.
19세기의 사회상은 서유럽에서 조금만 벗어나서 러시아에만 이르러도 농노가 대부분인 지금과 비교하면 농업이 주인 사회였음이 감안되어야합니다.
사실 그러한 상황은 미국도 마찬가지여서, 남북전쟁이전에는 미국역시 압도적으로 1차산업인구가 많은 나라였습니다.
역사적으로는 2차대전발발 이전까지도 유럽에서조차 일부국가는 rural side의 인구는 많게는 50프로에 이르는 나라조차 있었습니다.
도시인구가 70프로를 넘어가게끔한 인구구조의 변화는 2차대전이후에야 비로소 세계적인 표준이 된 것입니다.
각설하고, 당시 열강의 하나로 꼽히던 러시아가 농노가 대부분이었던 사회였던 것처럼 중국의 인구문제는 당시에는 전혀 중국의 국력의 근본적인 결함요소라고 할만큼 간주되지는 않았습니다.
오히려 중국의 함대보유작업이야말로 당시에는 아무 나라나 할 수 없는 열강급이 되는 나라들이나 할 수 있는 작업으로써 이미 당시에도 유럽은 중국을 일종의 잠자는 호랑이라거나 지금의 우리로 치면 최소한 브릭스같은 나라라고는 인지하고 있었습니다.
그 것이 황화론의 배경이 되는 구체적으로는 러시아와 중국에 대한 경계론인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유럽적인 인지에 우리가 이른 것은 불과 얼마전이죠.
지금은 브릭스를 들면서, 어째서 당시 중국의 후진성이 반대로 고성장과 직결되는 국제안보에 있어서 하나의 위협요소라고 하면 우리역시 자본주의적인 사고가 발달했기 때문에 알아먹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당시의 중세적인 사고방식인 조선인들로써는 그러한 것은 보이지가 않았던 것이죠.
중요한 것은 실은 우리나라조차 일본에 병합당한 것은 1910년의 일이고, 중국은 당대의 잠재적 열강의 하나이므로 결코 인도와 아프리카에 적용되는 식민지이론을 우리에게 적용시키면 안된다는 사실입니다.
동북아세계는 명백하게 19세기후반에서 20세기까지 명맥을 유지하였고, 이후 베트남과 한국이 독립을 잃는 판세는 열강간의 다툼에서 비롯된 것으로 외교적으로는 세르비아가 오스트리아의 식민지가 된 일이나 루마니아가 오스만투르크로부터 멀어지는 과정과 같은 열강다툼이 근원이고, 지극히 당시의 세계질서의 일부로써 그랬던 것이지 결코 이 것을 서세동점과 결부시키면 안된다는 것이죠.
당시의 동아시아의 정세는 잠재적 열강이었던 중국과 일본, 그리고 명백한 동양전제적(서양입장에서는 러시아도 동양이죠.) 열강이던 러시아 이렇게 준3열강이 동아시아의 패권을 다투던 시기이고, 마치 이 것은 독일제국,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 오스만제국 이렇게 3국의 대립판세가 발칸반도와 동유럽에 영향을 주는 그러한 것이었지, 서양세력이 해양을 통해서 아프리카와 중동, 인도를 병합하던 그 것과는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식민지라는 표현은 그 것은 어디까지나 점령지라는 의미로써 영국의 인도식민지라고 할때에는 서세동점이라는 것과 결부되는 그 것이지만, 오스트리아의 보스니아식민지 혹은 점령지 혹은 신점령지는 2차대전의 독일의 폴란드 점령당시 폴란드의 국위와도 똑같은 오로지 지배와 피지배의 관계로만 설명될 수 있는 것입니다.
독일입장에서보면 2차대전의 폴란드도 식민지혹은 점령지였고, 독일인 총독이 폴란드의 통치를 대행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맹아론따위나 식근론따위는 애초에 그 전제인 식민상황에 대한 전제부터가 이상한 것이죠.
맹아론이 적용될 그러한 서세동점상황따위는 조일관계에는 적용되지 않으며, 조일관계는 단지 2차대전의 폴란드가 처했던 것처럼 점령국상황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때 서구근대화이론을 내세운 식민지이론은 조선통치의 편의를 위해서 조선인들의 열등감을 자극하는 논리인 것이죠.
식민지근대화론은 조금 다르게는 비춰질 수 있는데, 그 것에 굳이 식민지라는 말이 들어갈 필요가 있을까요?
역사적으로는 단지 영조통치기간이나 정종통치기간, 고종통치기와 같은 정권을 지칭하는 의미로써 식민통치기의 경제연구라고 봐야하고, 사실 그렇게 순화된 의미는 식근론내에도 어느정도 있긴 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근대화라는 단어를 쓰는 이상 그건 문제가 있다고 봐야겠죠.
정조통치기의 경제상 이렇게 쓰지 정조통치기의 근대화상 이렇게 쓰지는 않듯이 말이죠.
어쨌든 당시 동북아에는 서양인들이 보기에는 동양적열강 삼국이 대치중이고, 이 때 이들의 힘의 역학은 제로섬관계이기 때문에 승리하는 쪽은 패한쪽으로부터 전쟁배상금과 자원개발권, 철도부설권을 받아 진 놈의 피를 바탕으로 자신의 살을 불릴 것입니다.
반면에 진 쪽은 서구화라기보다는 현대적인 경제성장, 그리고 경제성장에 수반되는 인구구조변화의 정체, 국가재정의 확보의 어려움등으로 상대적으로 뒤떨어지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여태 그 결과에 대해서 중국이 근본적으로 일본에 떨어졌던 것이라고 세뇌를 받은 것이고, 이 것은 전적으로 승자의 역사에 불과하죠.
다시 19세기의 상황으로 돌아가서 당시 이홍장정권에게 그리고 지금의 중국에게도 황해제해권은 특별한 지정학적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런데 당시 일본은 운요호 사건으로 황해를 통해서 군함을 내보내서 조선을 개항시키는 묘한 행위를 하게됩니다.
당시 청국은 그 때는 아직 북양함대가 설립되기 이전이므로 일본에 즉각적인 보복을 하지는 않지만, 그로 인해서 청과 일본이 충돌하게 될 것은 이미 강화도조약이 설립될 시점에서 예측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의미는 앞서 말한바와 같이 미국함대가 황해로 진입하는 것과 같은 의미를 지니는 것이죠.
그리고 세계사를 보면, 살라미스, 레판토, 칼레, 이순신이나 넬슨이 거둔 일련의 승리들은 대게 역사의 향방을 가르기 일수였습니다. 왜냐면 해군에 들어가는 군비가 만만치 않기 때문이죠. 그래서 해군을 잃는다는 것은 적어도 단기간 혹은 상당기간 그나라의 군비에 충격을 주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항해술이 비교적 발달하기 이전이었고, 해전은 내해에서만 가능했던 시기조차 그러하였죠.
북양함대가 일본함대에게 패한 위해해전도 그와 같아서 위해해전이후의 중국은 일방적으로 일본에 침략당하는 처지가 됩니다.
위해해전의 결과로 인해서 청일전쟁당시에 육상으로 한국으로 들어왔던 원세개또한 평양성에서 농성전을 한차례시도한 뒤에는 일본이 해로를 통해서 퇴로를 차단할 우려때문에 퇴각해버립니다.
그로써 조선은 일본의 세력권에 들어가서 더 크게는 동아시아전체가 일본의 침략에 놓이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것은 단지 열강의 판도로써 한시대로 정리될 수 있는데, 그러한 일본의 승천기는 다시 미드웨이, 레이테 등 미국함대가 일본을 해전으로 격파하는 시기까지로 비정될 수 있고, 미해군이 일본해군에 승리를 거둔뒤의 동아시아판도는 팍스아메리카라고도 할 수 있는 미국중심의 역사가 된 것이죠. 이건 또 나중에 여기에는 다른 패러다임이 작용하는데, 그건 나중에 적구요.
다시말하지만 우리가 식민시기라고 생각하는 그 시기는 서세동점이 동아시아세계로 파고드는 시기가 아니라 위해해전부터 미드웨이해전으로 비정될 수 있는 일본의 외교적 패권기인 것이고, 이 것은 태평양전쟁을 마지막으로 끝이 나고 이 때 우리는 폴란드나 헝가리가 러시아와 오-헝제국이 중부유럽을 제패할때에는 각각 제정러시아와 오-헝제국밑에 있다가 1차대전으로 판도가 바뀌자 강대국의 이해관계에 의해서 독립하게 되는 것처럼 독립하게 되는 것이지, 아프리카나 인도의 신생국과 한국을 동일선상에 놓아서는 안된다는 것이죠.
그렇게보면 청일전쟁보다는 위해해전은 역사의 향방을 결정한 무척이나 중요한 싸움이었음을 알게됩니다.
특히 직접적으로 조선의 운명에 영향을 끼치죠.
지금의 세계에는 핵탄두보유조약이 강대국의 위상을 결정해주는 핵의 시대로 패러다임이 바뀌었지만, 1922년의 워싱턴조약당시만해도 각국의 함대보유수준으로부터 타국의 무역로를 박살낼 전력의 유무가 곧 강대국의 위상자체라고 여겨질 정도로 해군전력과 그 배치는 중차한 외교적 사안이었습니다.
워싱턴 조약을 예로 들면 영국 : 미국 : 일본 : 프랑스 : 이탈리아 = 5 : 5 : 3 : 1.75 : 1.75 의 비율로 함대총톤수를 제약하는 것이 곧 세계평화라고 생각했을 정도로, 그리고 내가 얼만큼의 함대를 보유하고 상대측은 얼마만큼의 함대를 보유하느냐는 지금의 핵전력보유와도 같은 민감한 사항이었으므로 청과 일본의 해군경쟁이 곧 전쟁이라는 것은 당시의 발달된 나라의 외교관이나 상인이라면 바보도 알만한 사실이었으므로, 당시에 조선에서 일본을 통한 개항론을 펼치던 사람들은 정말로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이 아니라면 그자체로써 조선내에서 실은 전쟁프로파간다를 펼치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지금 우크라이나와 러시아가 동우크라이나와 전세계를 상대로 벌이는 그 것이란 말이죠.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당시의 조선상황으로는 전쟁프로파간다가 뭔지도 모르고, 그에 대한 내성도 없죠.
프로파간다라는 용어는 후일에 정의된 것이고, 이 당시에는 단지 외교와 언론공세였던 것이죠.
그리고 이 때, 척사론과 동학이 개항론에 반대로 제시된 것이고, 그들사이의 논쟁은 지금은 프로파간다전으로 정의됩니다. 그렇게 보면 김옥균이나 서재필 이런 인간들은 한국을 위하는 사람이 아니라 애초부터 매국노였던 것이죠.
그리고 그 김옥균, 서재필등이 내세우는 개항론이 조선낙후론과 일본의 조선점령을 서세동점으로 연결시키는 당대의 사관과 연결이 되는 것이죠. 이 것이 이병도등을 위시한 경성학파를 위주로 한국의 주류사관으로 자리잡게 되는데, 그들이 그렇게 역사를 보는 이유는 바로 그 이병도가 개화파가 나중에 바뀐 독립협회의 이완용의 방계인 것 외에도 경성의 중산층들이 거의 대부분 친일계급인 것과 결부되어 있고, 그런 사관이 한국의 주류랍시고 교과서에 그대로 씌여 있는 것이죠.
그러나 비판적인 시각을 가하자면 그렇게 보는 것 자체가 그들의 관점이죠.
특히 이 것은 친일파를 어떻게 보느냐와도 직결되어 있는데, 이게 또 사관이랑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건 현대한국인의 현대적인지와도 관련이 있죠.
우리가 현대사를 쓸려면 당연히 지금은 봉건적인 체제는 무너졌고, 국민이 중심이 되는 사회인만큼 좀 더 보편적인 정서를 기준으로 써야 할겁니다.
그런데 보편적인 국민을 무엇이냐고한다면, 이 것은 계급적인 입장을 취하지 않을 수 없죠.
아무래도 강남4구 주민을 중심으로 쓴 역사를 현대한국사라고 할 수는 없단 말이죠.
그리고 계급적인 입장에서 친일파를 정의하면 그 것은 강남이 부유층의 상징이듯이, 그리고 강남구주민에는 응당 어린아이도 노인도 있듯이 친일파라기보다는 친일계급, 친일로 이득을 본 사람들의 당시의 보편적인 한국인의 자화상과는 동떨어진 사람으로 본다면 이 것은 꽤나 재미있는 접근이 되는 것이죠.
공산주의적인 연좌적인 사고가 아니라고 할지라도 말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정의하고자하는 친일파는 어디까지나 행적상 명백한 사람들만 그리고 개인적 차원에서 친일을 규정짓습니다.
그건 아버지가 쿠데타세력이라서 졸부처럼산 아들이 있다고할때, 아버지가 군부세력임은 인정하더라고 아들이 한국의 당대의 한국기득권임은 인정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처럼 그들이 그렇게 쓰면 그건 묘한 꼬리짜르기가 된다는 것이죠.
쉽게 말해서 대한민국의 일반적 국민입장에서보면 이병도같은 경성대학교수조차 굳이 만주사관학교직함같은거 안달았다 할지라도 친일계급 혹은 당대기득권내의 사람중 하나이다 이렇게 볼 수는 있다는 것인데, 그들이 역사를 통해서 간접적으로 내 아비 혹은 종친의 한명이 한자리했던 협의의 친일파임은 인정하겠어요. 그러나 나는 (협의의)친일파는 아닙니다라고 말하면서 (광의의)친일계급의 가능성조차 부인한다면 이 것은 자기변명에 불과하다는 것이죠.
그러므로 이 것은 국민의 입장에서 제대로 쓴 적실성을 지닌 현대적 사관이 아니죠.
강남4구 혹은 4대문안에 사는 사람들의 역사적 관점으로 초기경성학파의 사관을 평가해도 무방하다는 말입니다.
물론 그렇다해도 역사적 가치는 지닙니다.
그러나 역사 사실 과거가 아닌 가장 최신이념이라는 관점으로 보면 비판할 여지가 생기죠.
그들로써는 그렇게 쓰고 싶어하는 이유는 사실 그게 현실과도 결부된 사실이기 때문이죠.
그 때 잘나가던 사람들이 지금도 잘나가는 사람이라는 현대의 민중과 기득권간의 역사를 보는 관점의 문제외에 현한국의 기득권을 중세적인 중앙에서 생산하는 권위주의적이고 비판불가하며 주입적인 사관으로 보호하느냐 그렇지 않냐의 문제까지 되기 때문입니다.
다시 당대의 조선으로 돌아가봅시다. 우리는 임오군란으로부터 연결되는 일련의 사건들을 고종의 통치권력약화와 조선의 약체화로 돌리려고 하는 사관을 마주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진짜 현실은 청과 일본의 위해해전이 조선의 앞날의 영향을 줄거라는 것이고, 당대에 해군전력을 갖추는 것은 어지간한 나라는 꿈도 못꾸는 끔찍하게 비싼 비용이 들어가는 일입니다. 그리고 그 것으로부터 중국낙후론이 승자의 허황된 역사왜곡임도 쉽게 유추할 수 있습니다.
한편, 그러한 중국과 일본의 끔찍한 돈싸움에 유감스럽게도 조선은 구축함 한대라도 자력으로사서 청의 보조함대전력으로조차 참전할 수 없는 무기력한 약소국으로써의 조선의 위치도 알 수 있죠.
결국 조선에게 당대의 일련의 역사적 사실은 조선으로써는 전적으로 어찌할 수 없는 차원의 일이었고, 여기에 대해서 당대의 조선의 왕 혹은 황제이던 고종에 대해서 일말의 책임이라도 물린다는 것이 과연 타당한 것인가를 다시 생각할 수 있어야합니다.
만약 고종이 하다못해 위해해전에 보낼 수 있는 구축함 3대라도 있는데, 이를 정세를 착오해서 일본편에 내보내는 실기를 저질렀다면 이는 명백한 무능이자 자기입증적인 조선왕조의 몰락이겠지만 그렇지는 않았다는 것이죠.
그리고 역사의 배열은 사가가 하기에 따라서 임오군란이나 동학운동따위는 어떻게보면 그 것들은 단지 왕조체제에서는 제법 빈번한 비율로 일어나는 아무 것도 아닌 사실로서 간주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만약 그런 사건들에 의미를 부여하고, 그러한 사고방식을 시간인과속에 확대시킨다면, 그 것은 홍경래의 난이 청일전쟁당시 조선북부의 방위체제에 끼친 영향같은 주제로 발전될 수 있고(그만큼 말이 안된다는 의미입니다. 실제 그런 논쟁은 없습니다.), 같은 시간인과적인 사고의 맥락에서 자본주의맹아론같은 것이 튀어나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역사의 가장 기본중의 하나는 역사는 모든 사실을 다루지는 않고 어디까지나 취사선택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임오군란이라던가 동학도의 난같은 사실들을 중요치 않는 사건으로보면, 청일전쟁이 일본의 승리로 끝나고, 곧 민비가 살해당하고, 이후에 고종은 러시아공관으로 숨는 아관파천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시기적으로도 이 것은 청일전쟁(1894.7.25~1895.4월), 민비시혜(1895.8.20일),아관파천(1896.2.11일)로써 연속된 사건이라고 주장할 수 있는 것이죠.
교과서에서도 지금의 서술방식과 제가 말한 것처럼 조선은 잘 살고 있는데, 청일전쟁으로 청의 명백한 자주주권의 영역인 황해제해권을 일본이 가져간뒤(seize), 이전부터 서해를 통해서 군함을 파견 조선합병의사를 내보이던 일본이 민비를 시해하고, 고종이 러시아공관으로 도피하게끔 했다라고 하면 그 뉘앙수는 매우 틀리겠죠?
그리고 이러한 관점에 입각해서 몇가지 고종의 정치적 실기를 논할 수 있는데, 그 중 하나는 집권으로부터 갑오개혁(1894.7월~1896.2월)으로 가는 시기에 개화파가 중용된 것이 문제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특히 갑오개혁의 성격을 보면 그 것은 미약하지만 조선의 청일전쟁에 대한 전시체제로의 전환노력이라고도 볼 수있습니다. 그래서 군국기무처가 설립되고, 특히 개화파들의 군사력증강노력이 돋보이죠.
그러나 문제는 이들 개화파들은 친일노선이기때문에 훗날 왕권에 아무 도움도 주지못하게 됩니다.
당시의 김홍집같은 인사들을 보면 그들은 분명 나라를 팔아먹는 친일은 아니었다고 보여집니다.
이 때의 친일은 지일이라던가 지금의 친미와 같은 외교적의미에 불과하다고도 할 수 있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니까 고종과 온건친일파의 연정파기가 불가피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와중에 친일파의 당수격인 김홍집은 배신자로 몰려서 살해당하고, 이 것은 고종정권의 레임덕이 되고, 이후에 살아남은 친일파들은 진짜 친일파인 매국적 친일파가 되므로, 정권면에서 갑오개혁은 한 때 개혁을 위해서 동맹했던 세력들이 완전히 갈라서게 되는 처참한 실패가 되는 것입니다.
그건 당시 친일파당수인 김홍집에게도 고종에게도 매우 나쁜 결말로 귀결되었죠.
사실 이 과정을 보면 조선사회가 끔찍하게 일본의 근대화를 앞세운 외교, 정치이론에 취약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김홍집같은 정치인이 나중에 자신의 정치기반을 약화시킬 수 있고, 입헌군주제하에서 군주는 내각을 불신할 수 있음을 감안하면 황실과 연정이 결렬될 수 있는 친일노선을 표방하지는 않았겠죠.
그리고 여기에 대해서 당시의 한때는 당파라고도 불리었던, 학벌적인 귀족사회에서 박규수문하생들과 신사유람단 출신들이 내각(당시에는 신료진)에서 득세하는 것에 대해서 못마땅해했고, 이들과 대립한 최익현의 정치적 식견이 옳다고도 할 수 있는 것이죠.
최익현이 표방한 척사론의 내용보다는 그 의미에 대해서 말이죠.
그리고 그런 근거로써 최익현이 고종통치초기에는 고종의 친정을 상주한 사람이며, 또한 척사파라고 하는 사람들은 실은 이항로의 문하로써 개화파와 척사파의 대립이라는 것이 실은 박규수문하들과 이항로문하들간의 알력싸움에 불과했다는 것도 염두에 두어야합니다.
물론 고등학교 교과서에는 이런 식으로 말하지는 않죠.
다시말해서 단지 정치공학적으로 훗날 고종이 개혁을 추진하려면, 개화파보다는 척사파가 연정파트너가 되는 것이 정권안정에 좀 더 유리했다는 것입니다.
동도서기와 개항의 차이는 당대의 청이 약소국이 아님을 알게되고, 서양과 활발한 교류를 하고 있으며, 당대 동아시아정세가 친일파들의 말하는 서세동점이 아님을 알게 되면 그 것은 단지 정치구호에 불과한 것입니다.
물론 척사파가 고종신료진의 주축이 된다한들 조선국력으로 위해해전에 낄 수는 없으므로, 그 결과적 차이는 미미하겠지만요.
그리고 확실히 검증된 역사적 사실로써 이 것은 일본의 농간일지도 모르지만 척사파들이 필요이상의 정치적 보복을 당한 것은 틀림없죠.
그 것부터해서 개화파들중에도 일부 인사는 처음부터 엇나간 의도를 지니고 있었다고 볼 수 있구요. 그렇다면 최익현의 주장은 일견 타당하죠.
여기까지가 고종의 즉위로부터 아관파천까지의 역사가 되겠습니다.
교과서와는 다르게 저는 임오군란, 동학의 난은 왕정하에 흔히들 일어나는 일정도로 중요하지 않은 사실로 다루었고, 청일관계에서 조선국권이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에 중점을 두었습니다.
민비는 정치를 잘못해서 죽는 것이 아니라 일본이 청에게 승리했기 때문에 죽는 것이고, 청의 개화파가 득세하는 조선정치환경에 대한 대원군등을 이용한 간섭등은 청의 방위권문제로써 현재의 미국도 가끔씩 우리에게 충고이상의 압력을 넣는 정도의 통상적국제관계이죠. 반면 민비시해등을 자행하는 일본이야 말로 명백한 국권침탈세력이죠.
그러므로 훗날 김홍집내각의 온건친일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간 친일이자 반청을 표방한 독립협회의 박영효나 서재필, 윤웅열, 윤치호부자등은 이완용보다 더 나쁜 매국노가 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