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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rdo domus Sanctæ Mariæ Theutonicorum Ierosolimitanorum
[4] 튜턴기사단의 조직과 이념
4-1. 기본 조직
기사단의 기본 단위는 콤투라이(Komturei)와 포크타이(Vogtei)였습니다.
콤투라이는 기사단 직속의 영토였습니다. 각 콤투라이의 중심부에는 대부분 성채가 건설되어 있었으며 콤투어(Komtur)로
불리는 지휘관의 지도를 받았습니다. 콤투라이의 각 성채에는 보통 12명에서 많게는 24명 정도의 기사 형제들이 대략 50~60여명의
서전트 형제들을 거느리고 생활하였습니다. 이러한 성채들은 단위 수도원으로 기능할 수 있었으며, 동시에 해당 지역의 군사
및 행정의 중심지였습니다.
이 곳에는 포크트(Vogt)로 불리는 교단 대리인이 부하들과 함께 파견되어, 소속된 마을들의 운영 상태를 감시하고 마을의
장로들에게 조언을 하며 재판을 주관하고 원주민 보조병들을 훈련시켰습니다.
포크타이의 교단 형제의 수는 콤투라이보다 훨씬 적었습니다. 예를 들어 15세기 초반의 어느 포크타이에서는 병력 총원
250여명, 기사 30여명 중에서 튜턴 기사는 단 1명뿐이었습니다.
각 콤투라이와 포크타이의 대표들은 매년 소속된 지부의 평의회에서 개최하는 연례 회의에 출석하여 운영상황을 보고하였고
중요한 경제적, 정치적, 종교적인 사안들을 토의하였습니다. 이 곳에서 기사단 지부의 행동지침들이 결정되었고, 그러한 행동
지침들은 평의회의 간부들과 지휘관(Komtur), 대리인(Vogt)들의 역할분담을 통하여 시행되었습니다.
4-2. 평의회 구성
튜턴 기사단의 각 지부에는 평의회가 있었는데 이 평의회는 기본적으로 단장(마이스터 Meister) 을 정점으로
회계관(트레슬러Tressler), 총지휘관(그로스콤투어 Grosskomtur), 사령관(마샬 Marschall), 병원장(슈피틀러 Spittler),
보급관(트라피어 Trapier)으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단장은 대기사단장(호흐마이스터 Hochmeister)과 지역단장(란트마이스터 Landmeister)을 뜻합니다. 대기사단장은 튜턴
기사단의 최고 권위자로서 교단이 행하는 모든 활동에 대한 최종 결정권자였으며, 또한 이웃 나라들과의 관계, 특히 교황청과
신성로마제국에서의 정치 외교적인 활동을 주관하였습니다.
지역단장, 또는 지부장은 튜턴 기사단의 지부가 늘어감에 따라 신설된 직위였습니다. 기사단의 지부들은 서로 지리적으로
떨어져 있었고 각 지부마다 그들이 처한 대내외적인 상황이 각각 틀렸습니다. 교단이 택한 방법은 지부 자체적으로 독자적인
평의회를 구성함으로써 각각의 상황에 독자적으로 대처하고 곤란할 경우에는 서로의 협력을 통해 해결하는 것이었습니다.
기사단장의 선출은 선거위원회에 의해 이루어졌는데, 자치권이 강한 리보니아 지부의 경우에는 해당 지부의 지휘관(Komtur)들이
두 명의 후보자 명단을 만들어 보내면 대 기사단장이 그 중 한 명을 지역단장으로 임명하는 방식이었습니다.
기사단장은 거의 대부분 지휘관(Komtur)과 같은 교단의 하급 간부 자격으로 보통 10년 정도의 경력을 쌓은 자들이었습니다.
최종적인 선출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혈통보다는 후보가 쌓아왔던 실적과 리더십이었습니다. 그러나 고귀한 혈통이
우선 순위를 가지는 경우도 있었는데, 이런 경우는 보통 외국 공후들과 긴밀한 관계를 쌓기 위해 상급 귀족 혈통의 권위가
필요할 때였습니다.
기사단장은 교단의 다른 형제들과 마찬가지로 교단 규정(Rule, 종규宗規)의 엄격한 적용을 받고 있었습니다. 기사단장은 교단의
지도자였지만 만일 자질이 적합하지 않거나 부적절한 행동을 저질렀다고 판단되는 경우에는 교단 규정에 의하여 중도에라도
퇴임될 수 있었습니다.
기사단장이 부재하거나 사망하게 될 경우, 평의회의 다른 이가 바로 기사단장의 역할을 대신 수행할 수 있었고 선거 위원회가
신속히 구성되어 3개월 이내에 새로운 기사단장을 선출했습니다. 따라서 기사단은 세속국가에서 종종 벌어지는 정권다툼이나
내란, 무능한 지도자로 인해 발생하는 여러 곤란들로부터 비교적 자유로웠습니다.
이러한 예 중 하나로 튜턴 기사단의 20대 기사단장인 쾨니히(Koenig)의 경우가 있었습니다. 그는 1345년 리투아니아와의 전쟁
도중 스트레스로 미쳐버렸고, 그러자 기사단의 평의회는 기사단장을 연금시켰습니다. 선거 위원회가 구성되어 새로운 기사단장이
탄생했고, 나중에 쾨니히는 제정신을 차렸지만 새 기사단장에게 복종하고 조용히 일선으로 돌아갔습니다.
총 지휘관(Gross-Komtur)은 매일 벌어지는 교단의 활동을 관리하고 책임질 권한이 있었으며 휘하에 사령관, 회계관, 보급관,
병원장의 보조를 받아 업무를 수행했습니다. 그의 권한은 상당부분 단장과 겹치는 부분이 있었는데, 그 이유는 단장의 외부 출장이
잦았기 때문에 교단의 실질적인 관리를 대행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회계관(Tressler)는 교단의 회계와 관련된 업무를 주관했습니다. 그는 단장이나 총 지휘관과 가까운 곳에서 그들의 업무를
보조했습니다. 교단이 벌이는 모든 주요 활동들, 다시 말해 성채구축, 군사원정, 병원운영, 병기제조 및 구입, 용병고용, 외교용
선물구입 등등에는 당연히 많은 돈이 지출되어야 했으므로 어떠한 의사결정을 하기에 앞서서 얼마만한 비용이 들어가는지에
대한 조언이 필수적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사령관(Marschall)은 교단의 군사적인 부분을 전담하였습니다. 그는 군마와 병장기의 준비 및 기사들의 훈련과 같은 군사
준비태세를 책임졌으며, 전투 시에는 콤투라이나 포크트에서 집결된 군대를 지휘하였습니다.
그 외에 보급관(Trapier)는 의복과 같은 일상적인 보급품을 담당했으며 병원장(Spittler)은 말 그대로 교단이 운영하는 구호
시설들을 책임졌습니다.
기본적으로 튜턴 기사단의 규정과 관습은 성당 기사단의 것을 따른 것이었고, 여기에 구호 기사단의 병원 조직법을 모방하였
습니다. 그러나 이 기사단은 직접 하나의 나라를 운영하고 있었고 교단의 평의회는 그 자체로 기사단 국가의 운영 조직이기도
했습니다.
4-3. 기사단 국가
1230년대부터 튜턴 기사단은 급속히 확장되어 나가는 신생국가의 중심에 있었습니다. 발트 지역에 세워진 기사단 국가, 또는
수도회 국가(Monastic State)로 불리는 이 독특한 나라는 훗날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의 형성, 독일 문화권의 확대, 독일
민족주의 선동 등과 같은 여러 사건들에 일정한 영향을 끼쳤습니다.
13세기 말까지 튜턴 기사단의 조직은 팔레스타인, 아르메니아, 독일, 프러시아, 리보니아 등지에 걸쳐 있었지만 실제로 기사단
국가를 구성하는 지역은 발트해 연안의 프러시아와 리보니아였습니다. 여기에 기사단의 점진적인 정복활동으로 수도비아,
폼메라니아, 마조프셰의 북서부 지역, 리투아니아의 서부 해안지역이 추가되었습니다.
승인한 이 칙서는, 튜턴 기사단이 발트 지역의 이교도들을 정복하고 통치권을 행사할 수 있는 독립 국가의 설립을 신과 황제의
이름으로 보장해주는 동시에, 기사단이 영토에서 가질 수 있는 권한의 범위를 명시해주는 것이었습니다.
발트지역에 설립된 이 신생 독립국가의 신분제 피라미드에서 교단의 기사형제들은 최 정상에 자리를 잡고 있었습니다. 튜턴
기사들은 결혼을 하지 않았으므로 지배 신분은 세습될 수 없었고, 인력충원은 기사단 국가 내부가 아니라 독일 본토에서 주로
이루어졌습니다. 새로 입단한 튜턴 기사들은 대체로 입교 전에 이미 일정수준의 군사 훈련을 쌓았고 통치 경험도 어느 정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숫자는 결코 많지 않았고 기사단 국가의 엘리트 중의 엘리트였습니다.
수도승 기사들의 리더십 아래 주교들, 봉건영주들, 시민들, 원주민들이 지배를 받고 있었습니다. 기사단 국가의 사회 안에는
주교령, 자유도시, 장원, 원주민 촌락 등 다양한 공동체들이 기사단 직속의 콤투라이와 함께 얽혀있었습니다. 프러시아에서는
튜턴 기사단이 이러한 지역사회들을 확실하게 장악하고 있었지만 리보니아에서의 장악력은 보다 느슨했습니다. 기사단 국가의
전성기까지 대체로 기사단 국가의 신민들은 그렇게 큰 권한을 가지고 있지는 못했습니다.
기사단 국가는 일종의 연합 국가였습니다. 크게 나눈다면 프러시아와 리보니아가 대 기사단장의 권위 아래 손을 잡고 있는
형식이었습니다. 두 지부는 각자의 지역단장 아래 독자적인 평의회를 구성하고 있었습니다.
1309년 기사단 본부가 프러시아로 들어오면서 대 기사단장이 프러시아 지부장의 역할을 겸직했고 기사단 국가 운영의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지만, 리보니아가 가지고 있던 자치권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비록 리보니아 지부는 기사단 본부의 사업에
협력을 아끼지는 않았지만, 근본적으로 두 지부의 관계는 상하 관계라기보다는 협력과 협정으로 맺어진 것이었습니다.
4-4. 기사단 국가의 정부
기사단 국가의 공식적인 수장은 대 기사단장(Hochmeister)이었습니다. 그는 휘하의 평의회 간부들을 지휘하고 교단과 국가의
여러 사안들을 의결하였습니다. 기사단장은 조직관리 차원에서 자주 기사단의 영토를 순시하며 각 단위 수도원들과의 관계를
돈독히 하고 운영상태를 살폈습니다. 또한 외부세계의 여러 공후들과의 외교관계 역시 기사단장의 몫이었습니다. 그러나 다른
형제들과 마찬가지로 그의 지위는 세습될 수 없었으며, 중요한 의사결정은 평의회의 다른 간부들과 협의하여 이루어져야 했습니다.
평의회의 간부들은 서로 다른 지역에 흩어져 각자의 업무를 수행하였습니다. 14세기 경 프러시아에 위치한 기사단 본부의
경우, 대 기사단장과 회계관(Tressler), 총지휘관(Gross-Komtur)은 마리엔부르크(Marienburg) 성에 있었습니다.
병원장(Spittler)은 교단의 병원이 위치한 엘빙(Elbing) 시에, 보급관(Trapier)은 크리스트부르크(Christburg)에서 근무했고,
사령관(Marschall)은 리투아니아와 가까운 쾨니히스베르크(Koenigsberg)에 있었습니다.
이와 더불어 1320년대부터는 기사단 국가의 수익을 관리하기 위한 다양한 방법이 개발되었습니다.
경제는 총 관리인(그로스 섀퍼 Gross-Schaefer, 원래 양치기, 목자의 의미)이 담당했으며, 그들은 휘하에 부하들을 거느리고
교역을 주관하였습니다.
서부 프러시아에서는 총 관리인이 총지휘관(Gross-Komtur)의 밑에서 마리엔부르크에 주재하며 지점장(리거 Lieger)들을
통해 비스툴라 강 유역의 곡물재배 및 교역을 총괄했습니다. 총 관리인이 임명한 지점장들은 곡물의 구입과 판매를 맡았으며
동시에 교역로를 방어할 책임이 있었습니다.
동부 프러시아의 총 관리인은 사령관(Marschall)의 휘하에서 쾨니히스베르크에 있었고, 총 관리인이 임명한 지점장 중 프러시아에
세 명이, 그리고 북해의 주요 교역도시인 브뤼주(Bruge)와 뤼베크(Luebeck)에 각각 한 명씩 자리를 잡았습니다. 이러한 지점장들은
영업사원들(비르테 Wirte, 원래 집주인, 살림꾼의 의미)과 함께 주로 삼란트(Samland) 지방의 특산품인 호박(Amber) 교역을
맡았습니다.
마리엔부르크에서 열리는 연례 회의를 통해 기사단의 다음연도 정책이 결정되었으며 회계장부가 제출되었습니다. 교단이 직접
관할하는 지역에서는 농지 개간, 어로 개척, 통행세 징수, 시장세 징수, 화폐주조, 기타 특산품 개발 등과 같은 수익 수단이
강구되었고, 동시에 한자 교역의 수수료 수입을 받아낼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다가 대 기사단장 스스로가 한자 동맹의
멤버이기도 했습니다.
14세기 중엽 리보니아 지역의 물자 목록을 요약해 본다면, 기사단의 경제 활동에 대해 간략하게나마 유추해볼 수 있을 것입니다.
*곡물 비축량
- 호밀: 골트링겐(Goldringen)에 75톤, 알스방겐(Alswangen)에 39톤, 하젠포트(Hasenpoth)에 27톤,
노이하펜(Neuhaven)에 15톤, 린달(Lyndal)에 43톤, 쿠를란트 주교구에 2톤
- 밀 : 골트링겐에 35톤, 빈다우(Windau)에 114톤, 외젤(Oesel)에 122톤, 페르나우(Pernau)에 100톤,
고틀란트(Gotland)에 92톤
* 암소 308마리가 원주민들에게 분배되어 있음
* 메멜(Memel) 시에서 절인 생선이 도착하여 창고에 비축하였음
* 홉 1톤은 숙성 중에 있으며 2톤은 맥주로 양조할 준비가 되었음
* 꿀 1/2톤이 벌꿀 술 제조에 사용되었음
* 회계관(Tressler)은 고틀란트에서의 교역을 위해 300 마르크의 현금을 사용할 수 있으며 최근에 판매한 쇠고기 4톤의
대금 지급을 기다리고 있음
* 회계관은 43 마르크 어치의 호박(Amber)을 창고에 저장하고 있음
* 여분의 화물을 적재하고 과적을 피할 수 있도록 빈다우에 200톤 급 선박 1척과 30톤 급 선박 1척이 정박 중임
이러한 경제적인 수단에 덧붙여 기사단은 종교 교단으로서 유럽의 여러 공후들로부터 기부금을 받아내어 제법 많은 수익을
올릴 수 있었습니다. 기사단 영토의 자치도시들에 대하여 14세기까지 직접적으로 세금을 과세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여러
수익수단으로부터 얻어지는 부를 통하여 튜턴 기사단은 북방에서 벌어지고 있는 끊임 없는 전쟁 속으로 인력과 물자를 쏟아
부을 수 있었습니다.
4-4. 기사단 국가의 신민들
튜턴 기사단은 건국 초기부터 주로 독일인들로 구성된 이주민들을 받아들였습니다. 기사단은 기사나 장인, 상인, 농민들에게
자신들이 정복한 땅과 재산을 주었고, 대신 그들에게는 기사단에 대한 의무를 부과하였습니다.
기사단 국가로 모여드는 이주민들은 대부분 신분이 그리 높지 않았는데, 그 지역의 혹독한 기후와 반 영구적인 전쟁상태를
고려한다면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기사단은 그들에게 유리한 조건을 제시하여 많은 이주민들을 유치하고자 노력했고, 이렇게
기사단 국가로 모여든 이주민들은 신분에 관계없이 전사로서, 상인으로서, 장인으로서 가지고 있는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여
국가 운영에 보탬이 되어 주었습니다.
1236년의 한가지 예를 든다면, 기사단의 봉신이 된 어느 기사는 프러시아 지부장으로부터 거주할 성채 하나와 어장(漁場)이
딸린 300 하이드(hide)의 자영농지를 하사 받았고, 주변의 마을 세 곳에서 십일조를 징수할 권리를 얻었습니다. 대신 그는
매년 1파운드의 밀랍과 은(銀) 1마르크, 그리고 곡물 십일조를 기사단에 납부해야 했습니다.
그는 초기 이주민으로서 병역은 면제 받았지만, 나중에 혹시라도 영토를 매각하게 될 경우 그 구매자는 기사 두 명과 종자
한 명을 거느리고 기사단의 캠패인에 참전할 의무를 져야 한다는 단서가 붙었습니다. 이런 식으로 영지를 얻은 사람들은
프러시아의 영주(융커 Junker)가 되었고, 도시 지역에 정착한 상공업자들은 시민(부르거 Burgher)이 되었습니다.
기사단 국가의 이주민들은 기사단이 직접 통치하는 콤투라이에 소속되지 않으면 주교령이나 장원, 자유도시 등에 거주하고
있었습니다. 교단 규정(Rule)을 적용 받는 기사단의 형제들과는 달리 이들 세속민들은 대부분 쿨름 법 (Kulmer Recht)의 적용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기사단에 세금을 납부했고, 다양한 형태로 기사단 군대에서 복무했습니다.
기사단은 직접 한자 무역에 몰두하면서 많은 수익을 올리고 있었고 입교 희망자와 유럽의 공후들로부터 많은 기부금을 받고
있었으므로, 200년 동안의 끊임없는 전쟁과 곳곳에서 벌어지는 대규모의 공사판에도 불구하고 14세기까지는 기사단령 내부의
자유민들에게 중과세를 물리는 일이 별로 없었습니다. 더군다나 지배자의 자리를 독점하고 있는 튜턴 기사들을 제외한다면
기사단 국가에서 이민자들 간의 신분 차이는 아직까지 두드러지지 않았습니다.
이주민들이 가지고 있는 정치적인 권한의 크기는 지역별로 차이가 있었는데, 크게 보았을 때 프러시아와 리보니아 지부 간의
차이가 두드러졌습니다.
프러시아 지부의 신민들이 가진 권한의 크기는 더 작았고 튜턴 기사단과 단단히 결속이 되어 있었습니다. 이 곳은 튜턴 기사단이
초창기부터 개입하면서 면밀한 계획을 통해 신민들과의 각종 권리와 의무 등의 주종관계를 통제할 수 있었고, 반 세기 동안
다섯 차례나 벌어진 프루스 족의 봉기로 인하여 독일인 이주자뿐만 아니라 프루스 족 전향자까지 기사단의 보호에 의존해야
했습니다. 또한 14세기에는 기사단 본부가 들어오면서 튜턴 기사단의 중심지가 되었습니다.
벌어진 복잡한 정치적인 사건들로 인해 리보니아는 이미 상당한 자치권을 가진 주교령과 도시들, 장원들로 쪼개져 있는 상태
였습니다. 1237년에 튜턴 기사단이 리보니아를 접수하기는 했지만 이러한 구조를 깨뜨리지는 못했습니다.
일사불란한 의사결정과 실행이 미덕인 프러시아에 비한다면 리보니아 지역은 혼란스러운 편이었고, 이러한 사정으로 이 곳의
의사 결정은 튜턴 기사단이 주도권을 잡고는 있었지만 보다 협력이 필요한 사안에 대해서는 지역 의회(란탁 Landtag)에 의존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한편 기사단에 정복당한 원주민들은 대체로 기사단 국가의 하층 구조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일부 원주민들은 독일인들과
어울리면서 영주가 되었고 또 어떤 이들은 여전히 자유민의 지위를 유지하고 있었지만, 많은 이들은 튜턴 교단이나 독일인들,
또는 독일화된 옛 원주민 상전들의 밑에서 농노신분으로 농업에 종사하고 있었습니다.
원주민의 운명은 지역별로 차이가 있었습니다. 프러시아에서는 반세기 동안의 전쟁과 봉기로 인한 대량 학살, 집단 이주의
여파로 14세기 이후로는 원주민이었던 프루스 족의 저항이 사라졌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민족 멸종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기사단에 협력한 일부 프루스 족의 지도자들과 주민들은 그 지위를 보존 받고 독일인 이주민들과의 통혼을 통하여 빠른 속도로
독일 사회에 흡수되었습니다. 끝까지 저항했던 자들은 기사단 국가의 계급 피라미드 밑바닥으로 곤두박질쳤지만, 여전히 농촌의
원주민 사회를 형성하고 있었고 보조병들의 인력 풀(pool)이 되어주었습니다. 결과적으로 프러시아 농촌지역의 하부 원주민
사회는 18세기에 최종적으로 언어와 풍습이 소실될 때까지 느린 속도로 독일화가 진행되었습니다.
리보니아의 경우에는 그나마 사정이 나았습니다. 독일 십자군에 협력적이었던 리프 족과 라트 족, 그리고 보다 반항적이었던
에스토니아 인들의 경우에는 지배계급으로 편입된 옛 장로(Elder) 계급이 있었고, 기독교로 개종은 했지만 여전히 농업에 종사하며
옛 문화와 언어를 간직한 자유민과 농노들로 이루어졌습니다. 몇몇 산발적인 반란과 특히 14세기 초의 대규모 반란에도 불구하고
그 정도는 프러시아만큼 심각하지 않았고 신속히 제압되었습니다. 오늘날 원주민의 후손들은 라트비아와 에스토니아라는
독립국가를 이루고 있습니다.
4-5. 기사단 국가 – 외교
기사단이 나라를 세운 곳은 정교를 신봉하는 러시아 인들과 다신교를 신봉하는 발트민족들로 둘러싸인 카톨릭 세계의 최전선
이었습니다. 더군다나 가장 가까운 카톨릭 세력이자 기사단 국가 초기에 협력을 아끼지 않았던 폴란드는 14세기부터 적대적인
태도로 돌아섰습니다.
기사단 국가의 가장 큰 적은 리투아니아 대공국이었습니다. 그 이교도의 나라는 지리적으로 접근하기가 상당히 곤란했을 뿐만
아니라 단기간의 캠패인으로 제압하기에는 국력이 매우 강했습니다. 기사단의 이념상 리투아니아와는 공존하기 힘들었으므로
양자 간의 전쟁은 어느 한 쪽이 완전히 패배하기 전까지 끝이 날 수 없었습니다.
러시아의 경우에는 다소 애매했습니다. 리투아니아가 백 러시아를 정복하고 우크라이나 일대로 세력을 확장하고 있었으므로,
이 경우는 북서 러시아의 노브고로드와 프스코프가 그 상대였습니다. 튜턴 기사단과 이 두 나라와는 교역 관계로 맺어져 있었기
때문에 일방적인 적대관계로 일관하지는 않았습니다.
폴란드는 13세기까지 기사단에 우호적이었지만, 14세기 초반의 그다인스크 학살사건이 시발점이 되어 적으로 돌아선 경우
였습니다. 기사단 측으로서는 발트해의 주요 교역항과 교역로를 장악하여 기사단의 부를 늘릴 수 있었지만, 그 대가로 폴란드와는
14세기 중반까지 간헐적인 전쟁상태에 돌입하였고 14세기 후반의 결정적인 위기를 자초하였습니다.
수도회의 도움을 받아 발트 십자군 운동을 설파하며 십자군을 끌어들였고, 이렇게 ‘초빙’된 십자군의 공후들의 종교심과 명예욕을
충족시켜 줌으로써 든든한 군사적인 지원군을 얻었을 뿐만 아니라 기사단에 호의적인 유력한 친구들을 만들어 둘 수 있었습니다.
튜턴 기사단이 신경을 가장 많이 쓴 곳은 교황청과 신성로마제국(독일)이었습니다. 여기에는 수시로 대 기사단장과 사절들이
오고 가면서 외부 세력들이 교단에 대해 가하는 각종 비난과 소문을 가라앉히고 황제와 교황으로부터 여러 특권들을 획득
하였습니다. 또한 기사단의 정복사업 전에는 이러한 권위자들로부터 공식적인 허가를 받고 문서화 함으로써 추후에라도 있을 수
있는 법적 분쟁의 가능성을 차단하였습니다.
4-6. 기사단 국가의 한계
기사단 국가는 정치적, 지리적으로 고립된 환경 속에서 소수의 튜턴 기사들이 다수의 신민들을 다스리는 구조였습니다. 튜턴
기사들은 국가의 통치와 방위에 가장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었지만 그 숫자는 많지 않았습니다. 이 나라가 자리 잡은 곳은 척박
하고 험난한 곳이었고 하나의 나라로 기능하기 위해서는 교단의 수도승들, 주교들, 영주들, 시민들, 농민들과 같이 기사단 국가를
이루는 많은 사람들의 희생과 노고가 함께 필요했습니다.
결과적으로 1230년대부터 시작된 기사단 국가는 프러시아에서 1525년까지, 리보니아에서 1562년까지 약 300년간 지속되었습니다.
위계질서, 능력주의, 높은 사기를 강점으로 한 군사 교단의 통치기구는 국가 운영에 있어서도 효율적으로 작동했으며, 다양하고
이질적인 신민들을 효과적으로 통합하여 (또는 무력으로 제압하여) 어느정도 성공을 거둘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강점은 동시대
다른 유럽 국가에서는 좀처럼 찾아보기 힘든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기사단 국가의 한계는 명백했습니다. 근본적인 목표는 공존공영이 아니라 이교도와 정교 ‘분리주의자들’과 끝까지
싸워서 완전하게 패배시키는데 있었습니다. 기사단에 있어서 그들의 나라는 기사단의 목적을 달성하는데 유용한 보조병력과
자금을 충당할 수 있는 일종의 보급창고였습니다. 신민들에 대한 정책은 ‘감히 기사단에 대적하지 않는 한’ 대체로 관대한
편이었지만, 그 것은 기사단이 민본주의에 눈을 떴기 때문이 아니라 그 편이 기사단을 살찌울 수 있었고 내부 혼란의 소지를
줄일 수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더군다나 기사단 국가의 지배계급인 튜턴 기사들의 뿌리는 발트 지역이 아니라 멀리 떨어진 독일에 있었습니다. 비록 튜턴
기사들이 공용어인 독일어 사용자였고 원주민들이 사용하는 토착 언어를 배우기까지 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대를 이어
살아가면서 ‘프러시아 인’이나 ‘리보니아 인’이 되어가고 있던 그 나라의 신민들과는 진정으로 융합되기가 어려웠습니다.
기사단의 지배층인 튜턴 기사들이 뛰어난 수완을 발휘하여 나라를 수호하고 땅을 정복하고 교역을 장려하고 영토를 나누어
주는 동안에는 이러한 문제들이 두드러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1410년의 치명적인 패배 이후로는 상황이 달라졌습니다.
프러시아 지역에서는 여전히 튜턴 기사단이 성전 이념에 집착하고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과의 가망 없는 전쟁에 몰두하는
사이, 점차 신민들 사이에서는 프러시아 인으로서의 자각이 자라나면서 자치권 확대를 요구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요청은
단호하게 거부당했고, 그들은 더 이상 자신들을 지켜줄 능력이 없고 전쟁 부담만 지우는 기사단 대신 폴란드 왕과 손을
잡음으로써 기사단에 거역했습니다. 이것은 15세기 중반 13년 전쟁의 발단이 되어 튜턴 기사단에 결정타를 날렸습니다.
리보니아의 기사단 국가 체제는 더 오래갔습니다. 여러 정치세력으로 쪼개져 기사단의 전성기에도 여러 가지 혼란을 겪었던
이 지역은, 그룬발트 전투 후 위기 상황이 찾아오자 지역 의회(Landtag)를 중심으로 단결하였습니다. 리보니아는 프러시아의
기사단 국가보다 약 40년을 더 연명하면서 상대적으로 번창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프러시아가 없이는, 리보니아 혼자의
힘만으로 주변에서 발흥하는 강대국들과 대적하기엔 역부족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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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토를 하사받는 경우는 세속 기사에게 해당되는데, 이렇게 수여된 봉토는 공동소유와는 관련이 없습니다. 이러한 세속 기사는 기사단 국가의 신민이기는 하지만 교단 소속의 기사형제는 아니지요.
기사단장의 이름이 쾨니히(왕) 이네요. ^^
Hochmeister에서 Hoch는 크고 아름다운 것을 뜻하니 영어의 불어의 Grand나 영어의 Grand에 매치되니 하노라~ Meister는 영어로 Master이니 튜튼기사단의 대장은 그랜드마스터가 아니겠는가? 이드에 따르면 그랜드마스터는 홀로 5만명을 상대 가능한 굇수이니 타넨베르크 전투에서 리투아니아-폴란드 연합의 군대는 최소한 5만명임이 분명하지 않겠는가!!!
한편 기사단장을 탄핵도 가능한 평의회의 실력을 보면, 튜튼기사단에는 그랜드마스터를 상대할 실력자가 바글바글했던게 분명하니~ 마스터급만 모아도 15만이상을 상대가능한 이 위대한 튜튼기사단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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