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에는 이스라엘 주변에 있는 여러 나라가 등장해요. 이집트, 아시리아, 바빌로니아, 페르시아 제국, 알렉산더 대왕의 헬라 제국, 로마 제국 등이지요. 그러니 이 나라들의 역사에 대해서도 자연히 관심을 가지게 된답니다. 그중 역사에 기록된 절세가인(絶世佳人·세상에 견줄 만한 사람이 없을 정도로 뛰어나게 아름다운 여인)의 흥미진진한 생애는 후대에도 다양한 창작자들에게 영감을 줘 영화와 소설로 재창작되지요. 티끌 한 점 없는 아름다움에 대한 관심은 동서고금을 막론한 많은 사람의 공통점 아닐까요?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이집트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마지막 여왕, '클레오파트라 7세'도 절세가인 중 한 명이에요.
- ▲ 클레오파트라 7세는 이집트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마지막 여왕이에요. 지성과 미모를 갖춘 클레오파트라는 파라오가 되지만, 자신을 도와주던 로마 권력자들이 힘을 잃자 스스로 목숨을 끊는답니다. /토픽이미지
프랑스의 사상가 블레즈 파스칼은 클레오파트라를 두고 '그녀의 코가 조금만 낮았더라도 미인으로 불릴 수 없었을 것이고, 그랬더라면 로마 장군들이 서로 싸우지 않아 지금과는 다른 역사가 만들어졌을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어요. 클레오파트라는 당대의 영웅들과 결혼하여 막강한 권력과 부를 누리며 이집트의 자치권을 지켜낸 똑똑한 여왕이었다고 해요. 이집트에는 수없이 많은 왕조가 존재해왔어요. 클레오파트라 '7세'라는 그녀의 이름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클레오파트라라는 이름을 가진 이집트 왕녀도 한두 사람이 아니었고요. 하지만 클레오파트라 7세가 속한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는 기독교에 끼친 영향력이 꽤 크답니다. 이집트 프톨레마이오스 왕조가 유대 민족의 나라인 이스라엘을 통치했던 역사가 있기 때문이에요. 이집트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는 이스라엘에 그 당시 선진 문물이었던 헬레니즘 문화를 소개하고, 화해 정치의 목적으로 이스라엘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당시 세계 공용어였던 헬라어로 성경을 번역해 '70인 역 헬라어 성경'을 만드는 데 공헌했어요. 성경 세계화의 초석을 세운 일이라고 하지요. 기원전 198년 이집트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와 시리아 셀레우코스 왕조 사이의 전쟁으로, 이스라엘을 지배하는 나라가 이집트에서 시리아로 교체돼요. 지배 왕조가 교체되면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다시 수난을 반복하게 되지요.
그럼 클레오파트라의 삶에 대해 더 살펴볼까요? 왕족은 왕족과만 결혼할 수 있다는 이집트 율법에 따라, 클레오파트라는 남동생과 결혼해 왕좌에 올랐어요. 이집트의 왕은 파라오라고 불려요. 그러나 남편이자 남동생인 프톨레마이오스 14세가 왕권을 쟁취하려고 하자 치열한 권력 투쟁을 벌이지요. 기원전 48년, 클레오파트라는 프톨레마이오스 14세와의 정치 싸움에서 패배하는 바람에 왕좌에서 쫓겨나요.
막다른 골목에 처한 클레오파트라는 이집트를 침공한 로마의 최고 실력자 카이사르의 힘을 빌려 왕권을 되찾겠다는 계획을 세웠어요. 하지만 유배 중인 클레오파트라는 당당히 카이사르를 만나러 갈 수 없었죠. 정복자 카이사르가 이집트 왕궁에 묵고 있다는 사실을 안 클레오파트라는 기상천외한 계략을 펼쳤어요. 신하에게 자신의 몸을 양탄자로 둘둘 말 것을 명령하고, 카이사르에게 선물로 가져다주라고 한 거예요. 충직한 신하는 어깨에 멘 양탄자를 호위 병사들에게 보인 후, 값진 선물을 가져왔다고 둘러댔어요. 큼직한 양탄자는 카이사르의 눈길을 끄는 데 성공했고, 양탄자에서 나온 클레오파트라에게 완전히 반한 카이사르는 그녀가 이집트 여왕 자리를 되찾도록 돕게 됩니다. 클레오파트라는 다시 왕좌에 오르지만, 자신을 밀어주던 로마 정치가들의 도움을 받지 못하는 상황이 되자 자결하지요. 클레오파트라의 삶을 들여다보면 아름다움과 권력을 갖춘 삶은 영원하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답니다.
첫댓글 조선일보에서 발췌함.
마음이 상한 자에게 노래하는 것은 추운 날에 옷을 벗음 같고 소다 위에 식초를 부음 같으니라(잠언 25장 20절 말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