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부 칼리굴라 황제
(제위: 서기 37년 3월 18일 ~ 41년 1월 24일)
<젊은 황제>
- 서기 3월 18일 원로원은 제국 창설자인 아우구스투스의 피를 이어 받았다는 이유만으로 25세도 채 안된 젊은이에게 광대한 로마 제국의 통치를 위탁함.
- 9월 27일 칼리굴라에게 스물 다섯번째 생일 기념으로 "국가의 아버지"라는 존칭이 주어지다.
- 칼리굴라는 티베리우스와는 정반대의 통치를 하겠다고 선언.
① 정치적 이유로 추방된자는 모구 귀국을 허용.
② 밀고자(델라토르) 제도 완전 폐지
③ 중앙정부의 요직 선출은 원래대로 민회에서 한다.
④ 매상세 폐지.
⑤ 티베리우가 추방한 반사회적 작가들의 귀국 및 직품활동 허락.
⑥ 티베리우가 추방한 배우들의 귀국 허락.
⑦ 제일인자는 로마에서 살며 원로원 회의에 반드시 출석한다.
<성장 과정>
- 아우구스투스가 타계하기 2년 전인 서기 12년 8월 30일 안티움(오늘날의 안치오)에서 태어남.
- 티베리우스가 황제 시 두살 인 카리굴라는 아버지 케르마니쿠스를 따라 군단 폭동 현장으로 감.
- 5세에 부모와 함께 로마로 돌아와 개선식 참가. 오리엔트로 떠남.
- 6세에 이집트 여행.
- 7세에 33세인 아버지를 여윔.
- 7세부터 14세가 될 동안 티베리우스를 증오하는 어머니 아그리피나 밑에서 자람.
- 15세 때 티베리우스가 카프리 섬에 은준을 시작.
- 17세 때 할머니를 여의고 어머니와 형들은 유배됨.
- 17세부터 19세 사이는 할머니 안토니아에게 맡겨져 자람. 외국 왕자들과 교류.
- 서기 31년 카프리 섬으로 티베리우스에게 불려옴. 성년식을 가짐.
- 21세에 회계감사관에 선출되고 결혼을 함. 유배중이던 어머니와 둘째 형 사망.
- 서기 36년 아벤티노 화재 시 아내와 아기 죽음.
- 티베리우스가 남겨준 2억7천만 세스테르티우스로 대중을 만족시켜주려고 노력함.
<치세의 시작>
- 매상세 단계적 폐지: 37년 0.5%, 38년 오나전 폐지
- 6월 1일 티베리우스의 유언 집행. 리비아의 유언도 같이 집행.
-8월 31일 카리굴라의 생일날까지 축제가 이어졌다.
<중병>
- 10월 칼리굴라가 중병에 걸리다. 로마인들을 비롯해 유대인들까지도 칼리굴라의 쾌유를 빌었다.
서기 37년 가을에 걸린 중병을 전후하여달라진 것은 병에 걸리기 전에는 하고 싶어도 조심스러워서 망설인 일을 병에서 회복된 뒤에는 거리낌없이 하게 되었다.
- 완쾌한 후 맨 먼저 한일은 자신의 양자로 삼았던 게멜루스를 죽인 것임.
<신으로>
- 칼리굴라는 소싯적의 친구들인 오리엔트의 왕자들이 가르쳐준 동양적인 권력을 생각.
- "관"이 없는 황제이지만 오리엔트의 왕을 뛰어넘기 위해 신이 되고자 함.
칼리굴라가 바란 것은 최고신 유피테르와 동일시 되는 것이었다.
<쾌락>
- 칼리굴라는 검투사 시합과 전차경주 같은 오락들을 해금했다.
바티카누스(오늘날의 바티칸) 땅에 개인용 경기장을 건설. 오벨리스크 통채로 운잔, 설치.
※전차 경주용 경기장(키르쿠스), 운동경기용 경기장(스타디움)
- 할머니 안토니아에게 "아우구스타"라는 존칭을 줌.
- 아그리피나, 드루실라, 율리아 리비아 세 누이동생 중 드루실라를 가장 총애함.
- 38년 초여름, 칼리굴라의 누이동생 드루실라가 사망하다. 드루실라를 신격화 함.
- 칼리굴라, 새로운 수도를 건설하겠다고 발표하다. 아쿠아 노부스와 아쿠아 클라우디아
- 메시나 해협에 피낭항을 건설.
- 10월 로마에서 화재 발생...화재로 인한 피해는 전액 국가가 보상해 주기로 함.
- 포추올라에서 바이아까지 징발한 수많은 배를 잇대어 놓고 그 위를 흑으로 포장.
칼리굴라가 말을 타고 건너갔다 마차를 타고 건너오는 쇼를 연출.
- 초대형 선박을 만들고 배에 과일 나무를 싣고 그 사이에서 잔치를 벌임.
<자금 마련책>
- 국가 재정 파탄이 명백해지다.
- 자금 마련책
황실의 가재도구와 패물에서부터 노예까지 경매에 내놓음.
속주민의 로마 시민권 취득을 사실상 허가하지 않게 됨.
민사재판 국고 납부분 환불 금지.
땔감에도 새금을 붙이고 매춘업저와 창녀에게도 세금 부과.
유산 상속 명단에 칼리굴라 이름을 포함시키도록 함.
<갈리아로>
- 39년 가을에 칼리굴라가 갈리아를 감. 게르마니아로 진격을 계획했지만 단념.
- 40년 3월 군자금 부족으로 브리타니아 침공을 단념한 칼리굴라가 도버 해협에서 시위 행동을 함.
- 40년 5월말 칼리굴라가 로마로 돌아와 8월 31일 개선식을 거행.
- 칼리굴라는 원로원 의원들에게 국가 반역죄 처벌법을 이용 부자들의 재산을 빼앗기 시작.
칼리굴라 암살 음모를 꾸몄다는 이유로 칼리굴라의 두 누이동생은 유배되고 죽은 누이동생 드루실라의 남편이었던 레피두스와 고지 게르마니아 군단 사령관인 게툴리쿠스는 자살을 강요 당함. 이 무렵부터 칼리굴라와 원로원은 완전한 대결관계로 바뀌었고 일반 시민들도 칼리굴라에게 싫증을 내기 시작했다.
<로마인과 유대인>
- 헤롯 대왕
순수한 유대인도 아니면서 치열한 권력투쟁에서 유대의 주권을 장악.
폼페이우스가 승리자인 동안은 폼페이우스 편에 붙고
카이사르가 유대 왕국을 재건하자 당장 카이사르에게 달려가 율리우스라는 가문 이름을 받음.
카이사르가 암살 당하자 브루투스와 카시우스 편에 붙었다. 단 필리피 회전은 중립을 지킴.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 간의 권력투쟁 시에는 안토니우스 편에 섰고, 안토니우스가 패하자마자 헤롯은 옥타비아누스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서둘러 로마를 방문한 헤롯을 아우구스투스는 로마의 동맹자로 삼고, 유대 왕위를 인정했다.
- 헤롯은 카이사레아를 건설하고 두 아들을 로마로 유학 보냈다.
- 서기 4년에 헤롯 왕이 사망.
헤롯 왕은 유대 왕국을 삼분하여 세 아들에게 나누어 줌.
왕국의 북부는 필리포스에게
남부는 헤롯 안티파스에게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하는 중부는 아르켈리오스에게 남겨줌.
중부 예루살렘의 제사장들이 신권통치 부활을 요구하며 봉기.
아르켈라오스는 시리아 속주 총독에군대 출동을 요청.
이 시기의 시리아 총독은 5년 뒤 게르마니아 숲에서 3개 군단과 함께 목숨을 잃은 바루스였다. 바루스는 유대인의 대표를 로마로 보내어 아우구스투스에게 왕정 폐지를 간청해 보도록 했다. 그러나 아우구스투스는 왕정 대신 세금 감면을 제시했다. 예루살렘의 유대인들이 이에 불응하자 아우구스투스는 예루살렘을 직할 통치하기로 결정했다.
퀴리누스 총독의 탁월한 능력으로 봉기나 폭동이 없이 속주화가 진행되었다. 서기 21년 퀴리누스가 죽자 당시 황제였던 티벨리우스가 국장을 치러 줌.
퀴리누스 사후 유대 장관 빌라도 총독은 예루살렘 제사장들로 구성돤 법정에서 판결을 받은 그리스도의 사형 집행을 허락함으로써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박히게 되었다.
<그리스인과 유대인>
- 디아스포라(Diaspora 조국을 떠나 외국으로 이주함)에서는 유대인보다 그리스인이 선배였다.
- 그리스인은 새로운 땅에 도시를 건설하고 그곳을 기지로 하여 수공업, 무역업으로 부를 축적.
- 유대인은 이미 존재하거니 번영하고 있는 도시로 이주 수공업, 무역업, 금융업으로 부를 축적.
- 아우구스투스 시대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 서방의 경제력 향상이 유대인의 관심을 끌게 됨.
<티베리우스와 유대인>
티베리우스는 사회 불안을 일으켰다는 이유로 일시적으로나마 로마에 사는 유대인을 모조리 이탈리야에서 추방했다. 종교의 자유는 인정하지만 사회 불안의 원인이 되는 것은 용납하지 않겠다는 로마의 이교도 종책은 티베리우스에 의해 확립되었다.
<칼리굴라와 유대인>
-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서 그리스인과 유대인의 대립이 격화하여 폭동으로 발전함.
이집트 장관 플라쿠스가 그리스인 편을 들자 이 지역 유대인에 대한 전면적인 탄압으로 확대.
필로를 단장으로 하는 유대인 사절단이 로마로 떠나다.
39년 봄 칼리굴라는 유대인 및 그리스인 사절단을 접견함.
유대인의 불리한 환경이 개선되지 않았다는 점에서는 실패였지만, 칼리굴라가 새로 임명한 장관은 알렉산드리아의 그리스인들이 더 이상 횡포를 부리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힘의 대결>
- 40년 팔레스타인에서 그리스 인들이 칼리굴라에게 바친 제단을 유대인이 산산히 부셔버림.
칼리굴라는 시리아 총독 페트로니우스에게 예루살렘 신전에 자기를 본 뜬 유피테르 신상을 세우게 명령.
페트로니우스가 자꾸 시간을 끌자 자살을 명령했으나 실행 전에 칼리굴라가 사망.
- 파르티아 왕국과의 우호관게도 또다시 위태로워지기 시작했다.
- 칼리굴라가 마우리타니아 왕 트로메우스를 죽이고 왕국을 속주화하겠다고 선언.
트로메우스는 누마니아의 마지막 왕 유바의 아들과,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 사이에서 태어난 딸 사이에서 태어남.
안토니오는 트로메우스의 외조부이자 칼리굴라의 증조부인 셈인데 신을 자칭하는 카릴굴라로서는 이 점을 참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반정(反正)의 칼>
- 서기 41년 1월 24일 가이우스 황제가 살해되었다.
범인은 근위대 대대장이었던 카시우스 카이레아와 코르넬리우스 사비누스였다.
황제를 죽인 직후 황제의 숙부인 클라우디우스를 찾아내어 근위대 병영에서 "황제!"라는 환호를 받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