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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光復)· 국토(國土) 분단(分斷) | ||||||||||||||
건국 준비 (광복 직전) | | 대한민국 임시정부(상하이. 중국) | | 광복 (1945.8.15) | ||||||||||
조선건국동맹(국내) → 조선건국준비위원회 | ||||||||||||||
조선독립동맹(화북. 중국) | ||||||||||||||
| 미· 소 양군(兩軍)의 한반도 분할 점령 : 38도선 설정(일본군 무장 해제 구실로) → 남(미군), 북(소련군) | | 북한 | 소련군의 군정 실시 (1945.8~1946.2) : 김일성의 공산정권 수립기반 마련 | ||||||||||
남한 | 미군의 군정(軍政) 실시 남한의 주권은 일본에서 미국으로(1945~1948) | |||||||||||||
신탁통치(信託統治) 문제 · 대한민국정부 수립 | ||||||||||||||
카이로 선언(1943) | | 포츠담 선언(1945) | | |||||||||||
한국의 독립을 처음 약속 | 한국의 독립을 다시 약속 | |||||||||||||
모스크바 3국 외상회의(1945. 12) : 미· 영· 소 외상 회의 → 제 2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 국제문제처리 목적 → 한반도 문제 논의 → 한반도에 민주적 임시정부 수립, 임시정부 수립에 필요한 미·소공동위원회 설치 결의→ 한반도를 최대 5년간, 신탁통치 실시 결의 | | → 신탁통치 문제에 대하여 남한(우익. 미국)은 반탁(신탁 반대) 북한(좌익. 소련)은 반탁에서 찬탁으로(임시정부 수립에 의미를 두고) → 좌· 우익의 대립(남북 대립) | | |||||||||||
→ 모스크바 3상회의의 결정 사항을 실행하고자, 미· 소공동위원회 개최(1946.3) → 임시정부 수립을 위한, 협의단체의 참가자격 문제로 대립 심화(미-찬반모두, 소-찬성만) → 결렬(파탄. 찢어짐) → 통일정부수립을 위한 좌우합작위원회 구성(여운형, 김규식. 1946.7) → 미소 간, 좌우익 간의 대립과 갈등으로, 좌우합작위원회도, 미· 소 공동위원회도 결렬 됨(1`2차 모두) | | 국제연합(UN)의 한반도 문제를 유엔에 상정(上程. 토의할 안건을 회의 자리에 내어놓음) | | |||||||||||
유엔 총회 결의(1947.11) | | 유엔 한국임시위원단 한국도착 | | |||||||||||
인구비례에 따른, 남북한 총선거 실시 후, 통일정부를 수립하기로 결의 | 소련의 38도선 북쪽 입국 거부 | |||||||||||||
유엔 소총회 결의(1948.2) | | 남북협상 추진(1948.4) → 남북협상(남북지도자회의) → 김구가 김일성을 만남 → 결렬 | | |||||||||||
선거 가능지역만, 총선거 실시 결정 (남한) | 남북 분단 우려 (김구, 김규식) | |||||||||||||
유엔 소총회 결정 지지 | | 5· 1 0 총선거 | | |||||||||||
이승만과 한민당은 남한단독선거 추진 → 남한 단독선거 반대 투쟁(좌익 중심) → 제주4·3사건(이승만과 우익의 강경 진압) → 다수의 희생자 발생 → 여수· 순천 10·19사건(제주도 투입 거부의 군부내 좌익세력이 여수순천 장악 → 빨치산 ) | 남한에서만 실시 제헌 국회의원을 뽑는 선거 제헌(制憲) : 헌법을 만들어 정함. 입헌 역사상 최초의 민주선거. 보통선거 | |||||||||||||
제헌의원 선출. 제헌국회 구성. 헌법제정(1948) | | 남한 | 대한민국 정부 수립(1948.8.15) | | ||||||||||
제헌국회 : 헌법을 제정한 국회. 우리나라의 초대국회를 이르는 말. 국제연합의 감시 아래 시행된 1948년 5월 10일의 총선에 의하여 198명의 국회의원이 선출되어, 그해 5월 31일에 대한민국 헌법을 제정한 초대국회가 열렸다. 제헌절 : 우리나라의 헌법을 제정ㆍ공포한 것을 기념하기 위하여 제정한 국경일. 7월 17일이다 | 이승만 초대 대통령 선출 | |||||||||||||
북 한 | 북조선 임시인민위원회 구성 (1947년 2월 창설된 북한 최고 집행기관) | |||||||||||||
분단의 책임을 남한에 돌리기 위해 정부 수립을 미루던 북한은, 1948.8.25에 총선거를 실시하여 최고인민회의(국회)를 구성하고 헌법을 제정함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수립(1948.9.9) 수상으로 김일성 선출 | ||||||||||||||
| 6· 25 전쟁(1950) | | 남북 분단의 고착화(固着化) |
친일파 청산(정리) | 남한 | 반민족 행위 처벌법 제정(1948.9) →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구성(반민특위) → 친일파(박흥식, 최남선, 이광수, 최린, 노덕술 등) 조사 → 이승만 정권의 친일파 등용 → 반민특위 방해, 중단시킴 → 반민특위 해산(1949.8) → 친일파 청산 실패 → 가치의 혼돈 → 항일(독립운동)이 정의가 되고, 친일이 불의가 되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부분이 많음 → 아직도 문제가 되고 있음(친일파의 후손들이 정부의 요직을 차지하고, 권력을 잡고, 많은 재산을 갖고 잘 살고 있음, 독립운동을 한 후손들은 제대로 못 배워 어렵게 살고 있음) |
북한 | 북한에서는 친일 반민족 행위자를 철저히 숙청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 숙청의 방법(친일파 숙청을 주민들에게 용인, 재산의 몰수 등) → 친일파의 월남(남한으로 내려 옴) | |
친일파 | 일제강점기에, 일제와 야합(좋지 못한 목적으로 서로 어울림)하여 그들의 침략ㆍ약탈 정책을 지지ㆍ옹호하여 추종한 무리들을 말한다. 친일파 = 반민족 행위자 | |
농지 개혁 토지 개혁 | 남한 | * 유상매수 유상분배 : 국가가 지주에게 대가를 주고 토지를 매입하 여, 농민들에게 일정한 대가를 받고 나누어 줌 * 농지개혁으로 지주제가 사라지다. * 농민들의 토지개혁 요구 → 농지개혁법 제정(1949) → 6·25전쟁으로 농지 개혁이 중단됨 → 전쟁 후, 개혁 다시 시작하여 1957년 끝남 * 농지개혁의 결과 다수의 농민들이 토지를 갖게 되어 자영농이 크게 증가함 → 지주제가 철폐됨 |
북한 | * 무상몰수 무상분배의 방법으로 토지를 재분배함 → 지주층이 사라짐 | |
농지 개혁 | * 농지(농경지. 농사를 짓는데 쓰는 땅)의 소유 제도를 개혁하는 일. * 농지를 농민에게 적절히 분배함으로써 농가경제의 자립과 농업생산력의 증진으로 농민생활의 향상과 국민경제의 균형 발전을 위해 실시 |
* 광복(光復) : 빼앗긴 주권을 도로 찾음
* 해방(解放) : 구속이나 억압, 부담 따위에서 벗어나게 함. 1945년 8월 15
일에 우리나라가 일본 제국주의의 강점(强占)에서 벗어난 일.
* 강점(强占) : 남의 물건, 영토, 권리 따위를 강제로 차지함
* 일제강점기 : 1910년의 국권 강탈 이후 1945년 해방되기까지 35년간의
시대를 말한다.
* 군정(軍政) : 군부(군인)가 국가의 실권을 장악하고 행하는 정치.
* 선언(宣言) : 국가나 집단이 자기의 방침, 의견, 주장 따위를 외부에
정식(공식적으로)으로 표명(드러냄. 밝힘)함.
* 신탁(信託) : 믿고 맡김
* 통치(統治) : 나라나 지역을 도맡아 다스림.
* 신탁통치(信託統治) : 우리 민족의 지배를(주권을) 다른 나라에 믿고
맡김.
* 외상(外相) : 일부 나라에서, 외무성의 우두머리를 이르는 말.
우리나라의 외교 통상부 장관에 해당한다.
* 미소공동위원회 : 모스크바3상회의의 합의에 의하여 설치된 한국문제
해결을 위한 미· 소 양국(두 나라) 대표자 회의.
* 좌우합작위원회 : 좌우 합작에 의한 통일정부 수립을 위해 1946년 여운형
과 김규식을 중심으로 조직된 정치 기구.
* 여수· 순천 사건 : 1948년 10월 19일 여수 주둔 국군 제14연대가 제주도
4· 3 항쟁 진압 명령을 거부하면서 일어난 사건.
* 보통선거 : 선거인의 자격에 재산ㆍ신분ㆍ성별ㆍ교육 정도 따위의 제한을
두지 아니하고, 성년에 도달하면 누구에게나 선거권이 주어지는 선거.
* 무상몰수 무상분배(북한) : 1946년 2월 북한은 '무상 몰수, 무상 분배' 원칙에 따라 토지 개혁을 실시하였다. 일제 총독부나 일본인이 가지고 있던 토지는 물론, 친일파와 민족 반역자의 토지도 모두 몰수하였고, 한국인이 소유한 토지의 경우에도 5정보를 넘거나 스스로 경작하지 않으면 몰수하여 소작농이나 자소작농에게 나누어 주었다. 이에 따라 북한에서는 지주가 없어졌으며, 자작농이 농민의 다수를 차지하게 되었다. 그러나 토지를 빼앗긴 지주들은 북한 당국에 대하여 적대감을 가지게 되었고, 남쪽으로 내려오는 경우도 많아졌다.
* 유상매수 유상분배(남한) : 1가구당 농지 소유 면적을 3정보로 제한하였다. 또한 3정보 이상의 농지나 직접 경작하지 않는 사람의 농지 등을 정부가 유상 매수하여 농민에게 유상 분배하였다. 농지 개혁의 결과 지주 중심의 토지 소유에서 농민 중심의 토지 소유로의 전환을 실현하였다. 그리고 남한의 공산화 방지에 기여하였다. 하지만 유상 분배에 따른 농민의 부담이 커지면서 농민들은 농지를 되팔고 다시 소작농이 되기도 하였다. 또한 유상 매수를 위해 발행한 지가(地價) 증권이 현금화가 잘 안되면서 중소 지주층이 산업 자본가로 변신하는데 어려움이 있었다.
(3) 6 ․ 25전쟁이 일어나다.
6· 25전쟁(한국전쟁) : 1950.6.25 ~ 1953.7.27(3년 전쟁)
6 ․ 25전쟁(한국전쟁)은, 1950년 6월 25일 북한 공산군이 38선을 넘어 남한으로 침략함으로써 일어난 전쟁이다. → 전쟁이 일어나기 전의 상황(정세)을 알아보자. → 광복 후 남한과 북한이 양분(兩分. 둘로 나누어)되어 각각의 정부가 수립되었다. → 대한민국 정부 수립(1948.8.15. 자본주의 사상을 바탕)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수립(1948.9.9. 사회주의 사상을 바탕) → 중국 공산당이, 중화인민공화국 수립(1949.10.1. 모택동 = 마오쩌둥) → 한반도에서 소련군과 미군이 철수(1949) → 김일성은 마오쩌둥으로부터 전쟁 지원을 약속 받음 → 중국 공산당을 돕던, 조선의용군(독립군) 출신들이 북한군에 편입됨(북한의 군사력 증강) → 군사적으로 남한은 1949년 미군이 전부 철수한 반면, 북한은 소련과 중국의 도움을 얻어 빠르게 군사력을 키웠고 전쟁 수행에 자신감을 갖고 있었다. → 미국의 애치슨 선언 발표(애치슨 라인. 한반도를 미국의 극동 방어선에서 제외한다. 즉, 한반도에서 전쟁이 일어나더라도 미국은 개입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함) → 1950년 1월 미 국무장관 딘 애치슨(1949∼1953)이 애치슨 선언에서 언급한 미국의 극동 방위선이다. → 그 내용은 소련의 스탈린과 중공의 마오쩌둥의 공산화를 저지하기 위해 태평양에서의 미국 방위선을 알류산열도 - 일본 - 오키나와 - 필리핀을 연결하는 선, 즉 애치슨 라인으로 정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애치슨 선언은 미국의 극동 방위선에서 한국과 타이완, 인도차이나 반도를 제외시킴으로써 한반도에 대한 군사적 공격에는 대응하지 않는다는 입장으로 비쳐져 북한의 오판을 불러일으켰고 6· 25전쟁 발발(갑자기 일어남)의 원인이 되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이후 애치슨 선언은 공화당으로부터 비난을 받고 철회되었다 → 38선 부근에서 남북 간의 잦은 소규모 무력 충돌 지속되고 있었음 → 소련의 지원으로 북한의 군사력 증강. 국군의 경우 전차 한 대도 보유하지 못한 데 비하여 북한군은 소련제 T-34 전차 많이 보유하고 있었다. 소련군으로부터 체계적인 훈련을 쌓아온 북한군의 전투력은 상당한 수준에 올라 있었다 → 1950년 6월 25일, 북한은 남한을 무력으로 통일하기 위해 북위 38도선을 넘어 침략해 왔어요(북한군의 기습 남침) → 서울 함락(남침 3일 만에 수도 서울이 함락됨으로써 대한민국의 운명은 최대의 위기에 몰렸다. 1950.6.28) → 우리 국군은 북한의 침략에 맞서 싸웠으나 미리 준비한 북한군의 공격을 이겨 내지 못하여 낙동강 이남까지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낙동강 유역을 제외한, 나머지 남한 지역은 북한군이 점령함) → 이에 국제연합(유엔)은 북한을 침략자로 규정하고, 미국을 중심으로 16개국이 참여한 국제연합군(유엔군)을 우리나라에 파견하였어요(유엔군 참전). 유엔군의 대부분은 미군이었다(유엔군 사령관은 미군 극동군 사령관이었던, 맥아더가 맡음) → 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을 계기로 국군과 국제연합군은 평양을 비롯한 북한 지역 대부분을 장악한 후 압록강까지 진격하였다. 맥아더의 인천상륙작전은 전쟁을 한국군과 유엔군에게 유리하게 반전시켰다. 서울도 수복되었다(1950.9.28) → 1950년 10월 1일, 38선 돌파(국군의 날로 기념하고 있음) → 1950년 10월 19일 평양을 함락시킴 → 1950년 12월 24일 압록강까지 진격함 → 그러나 중국군이 북한군을 도와 전쟁에 개입하면서(중국군의 참전. 1950.10.25), 국군과 국제연합군은 한강 이남까지 밀려나게 되었다(1· 4후퇴, 1951.1.4로 서울이 다시 북한군에게 함락 당함) → 중국군의 인해전술(人海戰術. 사람 바다. 무기나 전술보다 인력의 수적인 우세로 적을 압도하는 전술. 우세한 인력을 특정지역에 집중적으로 투입해서 전투원의 희생을 고려하지 않고 계속 공격함으로써, 방어부대를 수적으로 압도하여 돌파구를 형성하고 방어지역을 분단· 고립시키는 것을 말한다) → 전쟁은 혼전 상태로 접어들었다(전쟁의 장기화로 피해 급증) → 한국군 + 유엔군(미군 중심의 16개 국가) ↔ 북한군 + 중국군 + 소련군(부분적 참전) → 6· 25전쟁은 사실상 국제전이었다. → 3차 세계대전으로 확전될 우려, 소련이 유엔에 휴전(休戰. 교전국이 서로 합의하여, 전쟁을 얼마 동안 멈추는 일) 제의(제안)하고, 이를 미국이 받아들임 → 유엔군과 중국군의 휴전 회담 시작 → 이승만 정부의 휴전 협정 반대 → 군사분계선 설정과 포로 교환 문제로 휴전 회담이 지연됨 → 휴전 협정 체결(1953.7.27) → 군사분계선은 협정이 체결되는 날까지의 전선(戰線. 최전선)으로 하고(조금이라도 땅을 더 차지하기 위해서 치열하게 싸움), 포로 교환은 포로들의 의사에 따라 하기로 결정 → 반공 포로(남한), 친공 포로(북한), 그 밖의 다른 나라(제 3국)로 구분 됨(거제도 포로수용소) → 오랜 협상 끝에 남과 북은 1953년 7월 휴전을 하였고, 맞서 싸우던 전선은 휴전선이 되어 남북은 다시 둘로 나누어지게 되었어요. → 휴전선(休戰線)은 휴전 협정에 따라서 결정되는 서로의 군사적 경계선이다. 1953년 7월 27일, 6ㆍ25 전쟁의 휴전에 따라서 한반도의 가운데를 가로질러 설정된 군사 경계선이 휴전선이다. → 3년간의 전쟁으로 많은 피해가 생겼어요. 군인뿐만 아니라 많은 민간인들이 죽거나 다쳤고 가족이 흩어져 서로 생사를 확인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았어요. 많은 어린이들이 부모를 잃고 전쟁고아가 되기도 했지요. 국토는 황폐해졌고, 건물, 도로, 철도, 다리 등이 파괴되어 복구하는 데 많은 시간과 비용이 들게 되었답니다. → 같은 민족이 남(자본주의)과 북(공산주의)으로 나누어, 서로를 불신하며 적대시하고 싸움 → 독재 체제의 강화(남한의 이승만, 북한의 김일성 독재 권력 강화) → 2017년 현재, 남북한은 휴전 상태이다. → 종전(終戰. 전쟁이 끝남. 또는 전쟁을 끝냄)이 아니라, 전쟁을 하다가 잠시 쉬는 휴전(休戰) 상태가 64년째 지속되고 있는 것이다.
◆ 미군과 소련군의 한반도 분할점령으로, 남북 분단 → 남북한 대립(자본주의와 공산주의. 자본주의의 대표는 미국, 공산주의 대표는 소련) → 소련군 철수(북한), 미군 철수(남한)와 미국의 애치슨라인 설정(미국의 극동 방어선에서 한반도 제외) → 북한군의 기습 남침 → 서울 함락(영화, 태극기 휘날리며 참고) → 낙동강 방어선까지 후퇴 → 인천상륙작전으로, 서울 수복(되찾음. 탈환) → 38선 돌파(기념으로 국군의 날) → 평양 함락 → 압록강까지 진격 → 중국군(중공군) 참전(공격), 인해전술 → 흥남철수 작전(영화, 국제시장 참고), 1· 4 후퇴 → 서울 다시 함락 → 서울 다시 수복 → 38선을 경계로 전쟁이 교착상태(전선이 상호 대치하여 고정된 상태. 교착 = 아교처럼 아주 단단히 맞붙어서, 조금도 변동이나 진전이 없음)에 빠짐(영화, 고지전 참고) → 소련의 휴전 제안, 미국의 동의로 휴전 협정 시작 (군사적 분계선과 포로 석방 문제) → 휴전 협정 체결(이승만의 휴전 반대와 반공포로 석방) → 한미상호방위조약체결(1953년 10월 1일 한국과 미국간에 조인되고 1954년 11월 18일에 발효되었으며 상호방위를 목적으로 체결된 조약) → 미군의 한반도 주둔
◆ 6· 25 전쟁의 원인과 그 영향은?
(1) 6· 25 전쟁의 배경
1) 북한 공산 정권의 수립과 남침 준비
1945년 8월 9일부터 참전한 소련군은 8월 12일에 청진에 상륙하고, 16일에는 원산 상륙 작전을 벌였으며, 8월 24일에 북한에 소련군사령부를 설치하고 일본군에 대한 무장을 해제하여 갔다. 그리고 군정 대행기관으로 좌· 우 합작의 <인민위원회>를 조직하여 북한에 대한 간접적인 통치를 해갔다. → <인민위원회>는 <평안남도 인민정치위원회>로 개편 됨 →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신탁통치 안(案)이 결의 된 후, 소련군과 공산주의자들은 조만식 등 민족주의자들에게 찬탁(贊託)을 강요함(1945.12) → 조선민주당과 조만식 등 민족주의자들이 이를 거부하자, 이들을 제거함 → 공산주의자들이 중심이 되어 <북조선 임시 인민위원회, 북한 공산 정권의 모체>를 결성(1946)하고 김일성이 위원장에 선임됨 → <북조선 임시 인민위원회>는 토지 개혁법, 남녀 평등법, 산업 국유화법 등을 잇달아 공포· 강행하고, <북조선 임시 인민위원회>를 해체하고 <북조선 노동당>을 창당함으로서 공산주의 체제의 기반을 마련함 →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을 수립(1948.9.9)함으로써 38선 이북의 북한에서는 공산정권이 수립됨 → 무력 남침 준비(소련과 비밀 군사협정 체결, 군비 증강)
2) 남한의 정치적 , 시회적 불안
① 정치적 불안
- 좌· 우익의 대립
- 정당· 사회단체의 난립(亂立)
② 사회적 불안 : 폭동(暴動), 파업(罷業)
- 제주도 4· 3 사건(1948.4.3)
- 여수· 순천 사건(1948.10.19)
- 대구 폭동(1948.11)
③ 경제적 곤란, 혼란
- 지하자원과 산업시설의 북한 편중(일제의 병참기지화 정책의 결과)
- 파업
- 북한의 일방적 전력 공급 중단
♣ 여수· 순천 사건(1948.10.19)
1948년 10년 19일, 제주도 4· 3 사건을 진압하기 위해 국군(당시 국방군) 제14연대를 제주도에 급파(急派)하려 하자, 지창수 · 김지회 등 좌익계열(공산주의자) 군인들이 일으킨 폭동이다. 그들은 <제주도 출동 거부, 경찰 타도, 남북통일> 등을 외치며 여수를 점령하고 이어서 순천, 구례, 보성까지 점령하고 그 지방의 좌익계 사람들과 협력하여 경찰관과 우익계열의 인사들을 처형함 → 이에 정부는 10월 22일 여수· 순천 일대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진압 작전에 나서 22일, 27일에 여수· 순천을 수복하고 폭동세력을 진압하였다. 그러나 그 과정에 많은 민간인의 희생이 있었다. 폭동군은 그 후 지리산 일대로 들어가 빨치산(파르티잔, Partizan) 활동을 하였다.
♣ 빨치산(파르티잔, Partizan)
1948년 이후 남한 각 지역에서 활동한 정규군이 아닌 민간인으로 구성된 사회주의· 공산주의계열의 유격대.
조정래의 <태백산맥>
♣ 남부군(南部軍)
대한민국정부 수립 이후 토벌당국에 의해 '남부군단', '이현상(李鉉相)부대' 또는 '나팔부대'라고 불리던 좌익 빨치산 부대의 고유 이름. 정식 호칭은 '조선인민유격대 독립 제4지대'이다. 남한 최초의 조직적인 좌익 빨치산 부대였고, 특히 남한 빨치산의 전설적인 총수 이현상의 직속부대였다. 기록들에 의하면 1949년 이래 소백산·지리산 지구 공비 토벌전에서의 교전횟수는 1만 717회, 전몰군경의 수는 6,333명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나있다. 또한 확실한 근거자료는 없지만 빨치산 측 사망자의 수는 대략 1만 수천 명은 넘을 것으로 추정된다. 1952년 3월 15일 빨치산 토벌을 위해 전북 남원에 설치되었던 백선엽 야전군 사령부(일명 백야전사)는 토벌임무를 마치고 해체되었으며, 마침내 제4지대의 이름도 사라지게 되었다. 이후 1952년 4월 남한에서 활동해온 모든 빨치산 지대는 해체되고 남한 전역이 5개 지구당으로 개편되면서 빨치산 부대는 중대단위의 소조(小組)로 분산 활동을 했다.
(2) 북한의 남침 = 6· 25 전쟁의 발발
1) 북한의 남침 준비
김일성을 비롯한 북한 지도층은 정권 수립(1948.9.9)과 함께 소위(所謂, 이른 바) 인민해방전쟁(한반도의 공산화)을 준비하였다.
① 소련과 비밀 군사협정 체결(1949.3)
북한의 김일성과 소련의 스탈린이 비밀 군사협정을 맺고, 소련은 북한에 전투기· 탱크 등 현대식 무기를 지원함으로써 북한의 군사력이 증강됨
② 중국의 지원 - 중국과 상호방위 조약 체결
중국의 모택동(마우쩌둥)은 중공군에 참여했던 조선의용군 5만 명을 북한의 인민군에 편입시켜 주었다.
③ 인민군 창설
2) 남한의 정세 : 정치· 사회 혼란과 경제 불안
① 이승만의 친일파 대거 등용
이승만은 오랜 망명 생활로 국내기반이 미약하자 자신의 정권을 유지할 목적으로 친일파와 타협하고 그들을 정계 요직에 등용함으로써 국민의 지지를 잃어갔다.
② 소요(騷擾) 사태 발생
- 제주도 4· 3 사건(1948.4.3)
- 여수· 순천 사건(1948.10.19)
- 대구 폭동(1948.11)
- 빨치산 활동(1948 ~ 1950년 봄)
③ 북진 통일 제창으로 국민 기만(欺瞞)
북쪽으로 진격하면 점심은 평양에서 저녁은 신의주에서 먹을 수 있다고 호언(豪言, 큰 소리 치며)하며 국민들을 기만함. 이승만의 북진통일 제창은 그 후 김일성이 6·25전쟁은 남침이 아니라, 북침이라고 주장하는 빌미를 제공하였다.
④ 극우세력(서북청년회 등)을 정권 유지에 이용함
⑤ 경제 불안
토지개혁의 비합리적 추진으로(지주에게 유리) 농민의 불만을 샀고, 물가가 상승하고 공업생산이 위축되어 생필품이 부족했고, 인구의 증가로 식량 부족에 허덕임
⑥ 군사력 열세(劣勢)
♣ 6· 25 전쟁 직전 남북한 군사력 비교
구분 | 남한측 | 북한측 |
병력 | 10만 명 | 20만 명 |
탱크 | 없음. 장갑차 27대 | 242대 |
대포 | 대전차포 104문 | 120mm포 156문 |
비행기 | 연습기 10여대 | 211대 |
군함 | 경비정 몇 척 | 30척 |
3) 전쟁 전의 국내외 상황
① 미군 철수(1949.6.30)
미국은 한반도에서 외국군 철수를 의결한 협정에 따라서 군사 고문단 500여 명을 남기고 전투부대는 철수함. 그 후 남한은 미국과 한미상호방위원조협정을 체결하였다.(1950.1.26)
② 애치슨 라인(Acheson Line, 1950.1) 선포
미 국무장관 애치슨은 대 중국정책 상 태평양에서의 미국의 방위선을 알류산 열도 ~ 일본 ~ 오키나와 ~ 필리핀으로 한다고 선포함으로써 미국의 극동(極東) 방어선에서 한반도와 대만은 제외되었다.
③ 중국의 공산화(1949.10): 중화 인민공화국 수립
④ 북한의 위장 평화 공세
4) 전쟁의 발발(勃發) : 1950.6.25
북한군은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경 서해안의 옹진반도로부터 동해안에 이르는 38선 전역에 걸쳐 국군의 방어진지에 맹렬한 포화를 집중시키면서 기습공격을 개시하였다. 적의 YAK전투기는 서울 상공에 침입하여 김포비행장을 폭격하고, 시가에 기총소사를 하였다. 당시 국군은 노동절(5월 1일), 국회의원 선거(5월 30일), 북한의 평화공세 등 일련의 주요사태를 전후하여 오랫동안 비상근무를 계속하여 왔기 때문에 오히려 경계태세가 이완(弛緩)된 상태였다. 특히 북한의 평화공세에 대비하여 하달되었던 비상경계령이 6월 23일 24시를 기해 해제되어 병력의 1/3 이상이 외출 중인 상태에서 기습공격을 받았다. → 북한 공산군은 4일 만에 서울을 점령함(1950.6.29) → 미 24사단 패배, 대전 점령(1950.7.20) → 북한공산군은 8월과 9월 사이에 경주· 영천· 대구· 창령· 마산을 연결하는 경상남북도를 제외하고 전국을 점령함(내전단계) → 한편 미국은 1950.6.26일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를 소집하여 유엔군 파병을 결정함(유엔 안전보장이사회는 북한공산군의 군사행동을 침략 행위로 간주하고, 소련의 불참으로 참전을 승인함. 당시 소련은 안전보장이사회의 상임이사국으로 중국을 삼도록 주장하였고 미국과 영국은 장개석(장제스)의 대만정부를 교체할 수없다고 주장하고 있었다. 소련은 이에 대한 항의로 1950년 1월부터 상임이사국 출석을 거부하고 있었다. 다행스럽게도) → 16개국(미국,영국, 네덜란드, 캐나다, 뉴질랜드, 프랑스, 필리핀, 터키, 타이, 그리스, 남아프리카공화국, 벨기에, 룩셈부르크, 콜롬비아, 에디오피아)으로 구성된 유엔군 파병됨(국제전 단계) → 인천상륙작전(1950.9.15) · 성공 → 서울 탈환(1950.9.28, 9.28 서울 수복) → 38도선을 넘어 진격(1950.10.1) → 평양 점령(1950.10.19) → 압록강변의 초산까지 진격(1950.10.26) → 중공군 개입(전세 역전, 1905.10.25) → 유엔군 퇴각(退却) → 평양(1950.12.4) → 흥남 철수 작전(1950.12.24) → 서울을 다시 빼
앗김(1951.1.4, 1· 4 후퇴) → 국군과 유엔군 38도선 다시 넘어 북진(3.24) → 철원· 금화 점령(1951.6.11) → 휴전 교섭(1951.6.23) → 전쟁 확대론(맥아더 사령관 - 만주 폭격, 대만의 장개석 군대 연합하여 중국 공격)과 반대론(전쟁 종결론, 트루먼 미국 대통령과 영국 - 세계대전으로 확대될 수 있다고 우려) 대립 → 맥아더사령관 해임(1951.4.11, “노병은 죽지 않고 사라질 뿐이다”) → 미국의 한반도 정책도 통일노선(路線)에서 전쟁 종결노선으로 바뀌어 휴전 교섭이 본격화됨 → 소련 측 유엔 대표 말리크의 휴전 제의(提議)를 미국 측이 받아들임 → 휴전선(양군의 접촉선) 설정 → 휴전(休戰) 협정 체결(1953.7.27) → 3년 1개월의 전쟁이 끝남(1950.6.25 ~ 1953.7.27) → 그러나 종전(終戰)이 아니라 휴전(休戰)협정 체결이기에 전쟁의 불씨는 여전히 살아있다고 할 수 있다.
4) 북한 공산군의 남침목적 : 적화(赤化) 통일
김일성의 북한공산군이 남침한 목적은 그들의 주장대로 하면 인민해방이었지만, 실제적인 목적은 한반도 전체의 공산화에 있었다.
♣ 적화(赤化)
붉게 됨. 즉, 한반도를 공산주의자가 지배하는 나라로 만들기 위해서. 구실은 인민해방이었다.
5) 6· 25 전쟁의 결과 및 영향
① 수많은 인명 피해 : 전체 500만 명 이상 사상자
- 남북 쌍방에 약 150만 명의 사망자와 360만 명의 부상자
- 미군과 유엔군 43만 명의 사상자(死傷者) 발생
- 당시 많은 민간인 학살이 있었다.
- 자유진영(200만 정도), 공산진영(350만 정도) : 남북인구 1/6
② 물적 피해, 경제시설 파괴, 국토의 황폐화
- 산업시설, 주택, 공공건물, 학교 등 대부분 파괴
- 미군 지휘관의 말씀(“ 더 이상 목표물이 남아 있지 않다 ”)
③ 남북 적대감 심화 → 남북 분단 체제의 고착화
(민족 분열)
④ 동서 냉전의 격화(激化)
⑤ 한미 상호 방위 조약 체결(1953.10.1)
⑥ 미· 일 안전 보장 체제 재촉, 일본의 재무장과 고도성장의 기초 마련됨
♣ 한민족의 불행이 일본에게는 행복이 되고 말았다
⑦ 반공 포로 석방(1953.6.18) : 2만 7천여 명
6) 6· 25 전쟁의 성격
① 자유와 평화에 대한 공산주의자들의 도전
② 동족상잔(同族相殘)의 비극(悲劇)
같은 겨레끼리 서로 싸우고 죽이는 일
♣ 중공군의 인해전술(人海戰術)
- 많은 사람들이 물밀 듯이 쳐들어 옴.
- 무기나 전술보다 인력의 수적인 우세로 적을 압도하는 전술.
우세한 인력을 특정지역에 집중적으로 투입해서 전투원의 희생을 고려하지 않고 계속 공격함으로써, 방어부대를 수적으로 압도하여 돌파구를 형성하고 방어지역을 분단·고립시키는 것을 말한다. 막대한 인명피해를 수반하게 되는 전근대적인 전술이지만, 방어부대에게 심리적인 압박과 공포감을 주어 일시적인 승리를 거둘 경우도 있다.
그러나 대량살상무기를 사용하는 조직적인 현대전에서는 최종적인 승리를 기대할 수 없다. 인적 자원이 월등하게 풍부한 대신 무기나 장비가 열세한 군대에서 사용되는 경우가 있으나 인명경시(人命輕視)의 비인도적인 전술로서 비난을 면할 수 없다.
중국의 국· 공 내전 때에 사용되었고, 특히 6· 25 전쟁 때 중공군이 북한의 산악지역에서 이 전술을 이용했다. 낮에는 유격전을 통해 적들에게 피로와 불안감을 조성하고, 밤에는 꽹과리, 징 등을 두드려 적들을 혼란에 빠지게 한다.
♣ 철의 삼각지대: 철원 - 평강 - 김화
북위 38 ° 북방 중부의 평강을 정점(頂點)으로 하여 철원과 김화를 잇는 지리적 삼각지대. 6 · 25 전쟁 당시 중부 전선의 심장부라고도 할 수 있는 전략적 요충지대로서, 이 지역의 확보 없이는 중부전선을 장악하기 어려웠으므로 전쟁의 전 기간을 통해서 피아간(彼我間)의 쟁탈 대상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특히 공산군의 남침을 위한 중부전선의 본거지이기도 하였다. 철의 삼각지대라는 말은 이 지역 일대가 아군이 공격하기에는 불리하고 적이 방어하기에는 최적의 지형적 특징을 지니고 있어, 천연적인 난공불락(難攻不落)의 여건을 구비하고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