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권씨 충재고택의 건물들은 2선으로 배치되어 있는데, 1선을 이루고 있는 것은 행랑채, 유물관, 충재 청암정이다. 2선을 이루고 있는 것은 본채, 사당과 그 부속 건물 등이다. 행랑채는 7칸으로 되어 있다. 중앙 1칸에는 솟을대문이 높게 가설되었다. 안채는 정면 6칸, 측면 1칸 반의 규모이다. 건물의 높이는 통상의 경우보다 높다. 口자 모양을 하고 있는 좌·우의 연결채와는 지붕이 서로 떨어져 있다. 왼쪽 연결채와는 벽을 같이하여 아랫부분은 빈틈없이 연결되어 있고 지붕의 높이가 서로 달라 어긋나 있다. 오른쪽 건물채와는 건물 사이가 2m 정도 떨어져 위 아래로 완전히 떨어져 있다.
안동권씨 충재고택 영역의 서쪽 끝부분에는 청암정이 있다. 이 정자는 아마도 가장 아름다운 집안 정자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산간정자로서도 이만한 풍광을 갖추고 있는 곳은 없다. 청암정 영역에는 충재(沖齋) 건물이 같이 어울려 있다. 남북방향을 축으로 서 있는 작고 아담한 건물이다. 정면 3칸, 측면 1칸의 규모이다. 사방으로 폭 좁은 쪽마루가 돌아가며, 북쪽 1칸 영역에는 마루방이 마련되어 있다.
문중 이야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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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곡의 안동권문 |
안동권씨유곡종친회에서 펴낸 『유곡』지에는 다음과 같이 기재되어 있다. “문과 16인, 소과 59인, 참판 2인, 방백수령 12인, 의병장 3인을 내고, 광복 후 차관 2인, 국회의원 2인을 배출했다. 유곡의 자랑은 1) 산천의 아름다움, 2) 문장 명필의 대가 이어짐, 3)충의와 정절의 고장이다. 특히 영남지방에서는 문필의 마을이라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천하를 놀라게 할 재주를 가졌으면서도 부형과 조상의 명예를 가릴까봐 나타내지 않고, 혹은 형제들에게 양보하고, 혹은 글을 쓰지 않은 사람도 많았다. 그러나 문집과 유고를 남긴 이가 90여 명이다. 특히 주옥같은 시 300편을 남긴 충재 선조의 증손인 권상원(權尙遠)과 그의 아우인 권상명(權尙明)은 당대 명인인 이식(李植), 김유(金?), 김응조(金應祖), 윤훤(尹暄), 홍우정(洪宇定) 등과 교유하였다. 5대손에 이르러 이른바 28두(二十八斗)라 하여 두자 항렬 28명이 도학과 문필로 크게 알려졌었다. 유곡에는 6기(六奇)라 하여, 가당(苛塘)의 글-5대손 권두인(權斗寅)의 문장, 창설재(蒼雪齋)의 시-5대손 권두경(權斗經)의 시, 대졸자(大拙子)의 글씨-5대손 권두응(權斗應)의 글씨, 강좌(江左)의 재주-6대손 권만(權萬)의 재주, 평암(平庵)의 충성-7대손 권정침(權正?)의 충성, 송관자(松館子)의 그림-7대손 권정교(權正敎)의 그림을 꼽는다.”
관련이야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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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월문 안의 넓은 집 |
안동권씨 충재고택의 건물들은 2선으로 배치되어 있는데, 1선을 이루고 있는 것은 행랑채, 유물관, 충재 청암정이다. 2선을 이루고 있는 것은 본채, 사당과 그 부속 건물 등이다. 행랑채는 7칸으로 되어 있다. 중앙 1칸에는 솟을대문이 높게 가설되었다. 대문의 아래쪽 횡보는 아래로 배가 부른 횡목이다. 대문의 위쪽 횡보는 위로 배가 부른 횡목이다. 그리하여 대문은 위 아래가 자연스럽게 휘어 이지러진 원형을 이루게 되었다. 안동권씨 충재고택의 차종손인 권종목(權宗睦)은 이 문을 ‘월문’이라고 불렀고, ‘대궐 문을 본뜬 것 아닌가’ 하는 추정을 하였다. ‘월문’이라면 만월문이라고 하겠다. 매끈하게 원형을 갖추고 있는 것이 아니라 자연적으로 휜 횡목을 사용하여 이지러진 원형을 갖추어 놓은 것이 상당히 재미있어 보인다. 대문칸의 지붕은 좌·우 행랑 칸의 지붕보다 조금 높게 만들어져 있다. 좌·우 행랑채는 각 3칸씩이다. 밖에서 보았을 때 이 행랑채 건물은 각 벽면의 3분의 2 높이까지는 통으로 강돌을 쌓아올려 처리하였다. 각 벽면을 쌓은 강돌은 9줄이다. 이 부분에서 벽면에는 돌과 흙 외에는 기둥도 목재도 보이지 않는다. 그 위 3분의 1 벽면에서 각 벽면은 짧은 기둥을 세워 만든 3칸 구조를 드러낸다. 각 3칸의 좌우 행랑채 벽면 중 오른편 끝의 1칸에는 좌·우 다 옆으로 넓은 직사각형의 창문을 달고 있다. 왼쪽 행랑채에서 그것은 벽면 중앙에 위치하지만, 오른쪽 행랑채에서는 안쪽 기둥에 바짝 붙어 있는 모습이다. 행랑채의 대문과 본채로 들어가는 중문의 시선 방향은 조금 엇갈린다. 중문이 동쪽으로 약간 치우친 자리에 자리 잡고 있다. 중문의 왼편으로는 2칸 규모의 중문 행랑채 건물이 만들어져 있다. 중문까지 포함하면 3칸 규모이다. 지붕은 우측에 있는 사랑채 건물보다 낮게 되어 있다. 두 건물의 지붕은 서로 합해진다. 행랑채 건물 앞에는 낮은 쪽마루가 가설되어 있다. 행랑채 건물 중문 왼쪽의 2칸은 각 벽면마다 같은 방식으로 처리되어 있다. 이 처리 방식은 사실 나무판 같은 것으로 되어 있지 않은 모든 벽면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난다. 벽면은 일단 위 1, 아래 4 정도의 비례로 횡단된다. 아래쪽 벽면의 중앙에는 2쪽 방문을 달았고, 좌·우의 빈 벽면은 중간에 짧은 횡목을 넣어 반분하였다. 벽면은 백토로 칠해져 있다. 중문의 오른편에 있는 사랑채 건물은 정면 4칸, 측면 1칸 반 정도의 규모이다. 앞으로 나와 선 것은 원형의 두리기둥이다. 앞의 두리기둥과 뒤의 각재기둥 사이에는 반 칸 넓이의 앞마루가 가설되어 있다. 이 마루 끝 선은 앞쪽 기둥에까지 나와 있다. 4칸 중 중문 쪽 2칸은 방이다. 안으로는 2쪽 미닫이, 밖으로는 2쪽 여닫이 방문이 가운데 마련되어 있다. 4칸 중 다른 2쪽은 마루방의 벽이다. 4칸 긴 방문과 그 위쪽의 옆으로 긴 사각형의 광창으로 벽 전체가 메워져 있다. 안채는 정면 6칸, 측면 1칸 반의 규모이다. 건물의 높이는 통상의 경우보다 높다. 口자 모양을 하고 있는 좌·우의 연결채와는 지붕이 서로 떨어져 있다. 왼쪽 연결채와는 벽을 같이하여 아랫부분은 빈틈없이 연결되어 있고 지붕의 높이가 서로 달라 어긋나 있다. 오른쪽 건물채와는 건물 사이가 2m 정도 떨어져 위 아래로 완전히 떨어져 있다. 동쪽 끝 1칸은 방인데, 이 방의 마루 쪽 벽면을 처리한 방식은 상당히 매력적이다. 중앙의 기둥에서 앞 뒤 양쪽 기둥 사이를 연결하는 횡목은 제비 날개 모양으로 양쪽으로 휘어 있다. 그 위쪽의 횡목이 또 양쪽 제비날개 모양의 곡면이 가장 높이 올라서 있는 곳 사이를 서로 곡면으로 연결시킨다. 이 곡면은 위쪽으로 상당히 배가 부풀어져 있다. 이 2개의 휜 목재들은 특별히 휜 모양의 목재를 골라서 이용한 것처럼 보인다. 위쪽 곡면의 가장 배가 부른 부분에서 마치 뜀틀 모양의 폭이 넓은 각재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대들보를 걸쳤다. 이 부분에서 벽면과 기둥, 들보와 횡보, 깊은 기울기의 서까래와 낮은 기울기의 서까래가 서로 어울려 만들어내는 목구조의 미학은 상당한 흥미를 불러일으킨다. 전체 6칸 중 중간 2칸은 마루영역이다. 마루 오른편의 2칸은 앞에 반 칸 넓이의 마루를 두고 있는 방이다. 안채 건물의 오른쪽 마지막 칸은 부엌 영역이다. 이 부분에는 다락이 가설되어 있다. 2칸 방 앞의 반 칸 넓이 앞마루 오른쪽 끝의 벽면에는 다락으로 오르는 4단의 나무계단이 매달려 있다. 안동권씨 충재고택 영역의 서쪽 끝부분에는 청암정이 있다. 이 정자는 아마도 가장 아름다운 집안 정자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산간정자로서도 이만한 풍광을 갖추고 있는 곳은 없다. 청암정 영역에는 충재(沖齋) 건물이 같이 어울려 있다. 남북방향을 축으로 서 있는 작고 아담한 건물이다. 정면 3칸, 측면 1칸의 규모이다. 사방으로 폭 좁은 쪽마루가 돌아가며, 북쪽 1칸 영역에는 마루방이 마련되어 있다.
관련인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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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출 인물 |
권동보(權東輔),권래(權來),권상원(權尙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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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유 인물 |
이식(李植),김응조(金應祖),윤훤(尹暄),홍우정(洪宇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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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충재 권벌 가문의 사람들 |
안동권씨 충재고택은 충재 권벌이 머물러 살 집으로 지은 것이다. 충재 권벌은 복야공파 중에서 예의판서 권인(權靷)을 파조로 하는 판서공파에 속한다. 판서공 권인은 고려가 멸망한 것을 슬퍼하며 안동 소야촌에 은거해서 충절을 지키며 살았다. 호를 송파(松坡)라고 했는데, 송도를 잊지 못하는 마음을 담은 것이다. 그의 호 송파로 인하여 그가 살던 마을 이름도 소야(所夜)에서 송파로 바뀌게 되었다. 판서공 권인의 손자 권개(權?)와 권곤(權琨)은 세조의 왕위 찬탈에 분노하여 고향에서 두문불출하고 은거해 살았다. 권곤은 ‘동풍촉혼산, 서일노릉한(東風蜀魂酸, 西日魯陵寒 : 동풍에 촉나라 혼은 비통함에 잠기고, 서쪽에 비치는 햇빛에 노나라 언덕엔 찬바람만 도네)’라는 시를 읊었다. 권곤의 아들은 의정공 권사빈(權士彬)이다. 그는 청주정씨가 살고 있던 도지촌(오늘의 북후면 도촌) 외가로 옮겨 살았다. 권사빈은 권벌재의 부친이다. 권벌도 도지촌에서 출생하였다. 권사빈의 배위는 파평윤씨인데, 유곡에 살던 사재감 주부 윤당(尹塘)의 딸이다. 윤당은 소정공 윤곤(尹坤)의 손자이고, 영천부원군 윤삼산(尹三山)의 아들이다. 우의정, 영원부원군 윤호(尹壕)는 그의 형이고, 그의 외조부는 좌의정 철성부원군 이원(李原), 장인은 영의정 지봉 황보인(皇甫仁)이다. 윤당은 세조가 황보인의 가문을 멸문시키려고 하자 유곡으로 물러나 숨어 살았다. 1남 1녀를 두었는데 그 딸이 권벌의 모친이다. 권벌은 권사빈과 파평윤씨 사이에서 출생한 4남 1녀 중 2남이다. 권벌(權?, 1478~1548)은 안동권씨 20대이다. 자는 중허(仲虛), 호는 충재이다. 부친은 성균생원 권사빈, 모친은 파평윤씨이다. 1499년(연산군 5)에 22세의 나이로 화순최씨와 혼인하였다. 1507년(중종 2)에 30세의 나이로 별시 문과 병과 제 2인으로 급제하여 승문원 부정자 종사랑이 되었다. 여러 직책을 두루 역임하였으며, 1519년(중종 14)에는 42세의 나이로 고향으로 돌아와 유곡에 살 땅을 마련하고 집을 지었다. 49세 되던 나이에 집 서쪽에 서재를 짓고 충재(?齋)라는 편액을 걸었으며, 서쪽 바위 위에 정자를 짓고 구암정(龜岩亭)이라고 이름 붙였다가 청암정(靑巖亭)이라고 이름을 바꾸었다. 56세에 직첩을 환수받고 용양위 부호군이 되었고, 밀양 부사에 제수되었다. 57세에는 춘양에 산장을 마련했다. 60세에 한성부 좌윤이 되고, 61세에 형조 참판이 되었다. 68세에 숭정대부 의정부 좌찬성 겸 지경연 판의금부사에 임명되었고, 8월에는 병조 판서가 되었다. 윤임 등을 구원하려는 주청을 하였다가 파면되어 낙향하였다. 70세에 양재역 벽서사건이 일어나자 삭주로 유배되었고, 71세에 삭주에게 타계하였다. 권벌의 장자 권동보(權東輔, 1518~1592)의 자는 진경(震卿), 호는 청암(靑岩)이다. 1543년(중종 38)에 생진시에 합격하였으며, 군수를 지냈다. 퇴계 이황의 문인이다. 문집이 있다. 배위는 숙인 밀양박씨이고, 묘는 부친의 묘와 같은 산자락에 있다. 아들이 없어서 양자를 들였다. 권래(權來, 1562~1617)의 호는 석천(石泉)이다. 송암 권동미의 2남으로 출생하여 군자감 정을 지냈고, 묘는 사동에 있으며, 문집이 있다. 배위는 숙인 선성김씨이고 후 배위는 숙인 완산이씨이다. 백부 권동보에게 양자로 가서 충재 권벌 종계의 후사를 이었다.
충재 권벌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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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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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벌(權?) , 1478년(성종 9)년 ~ 1548년(명종 3)년 |
본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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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安東) |
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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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허(仲虛) |
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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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재(?齋) |
시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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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정공(忠定公) |
출생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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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安東) 도촌(道村) |
출신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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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화(奉化) |
분묘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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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화(奉化) 유곡(酉谷) |
입사경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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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과(1507년) |
내관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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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문관 검열(藝文館檢閱), 홍문관 수찬(弘文館修撰), 부교리(副校理), 사간원 정언(司諫院正言), 이조 정랑(吏曹正郞), 호조 정랑(戶曹正郞), 사헌부 장령(司憲府掌令), 승정원 동부승지(承政院同副承旨), 좌승지(左承旨), 도승지(都承旨), 예문관 직제학(藝文館直提學), 예조 참판(禮曹參判), 병조 참판(兵曹參判),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 병조 판서(兵曹判書), 의정부 좌참찬(議政府左參贊), 의정부 우찬성(議政府右贊成), 위사공신(衛社功臣), 길원군(吉原君) |
외관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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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천 군수(永川郡守), 삼척 부사(三陟府使), 밀양 부사(密陽府使), 경상도 관찰사(慶尙道觀察使) |
증직및기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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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 영의정(議政府領議政)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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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에 합격했으나 취소되다 |
권벌은 27세 때인 1504년(연산군 10) 대과에 급제하였는데, 고관(考官)이 그가 쓴 글 중에 처(處)자가 있는 것을 보고 합격을 취소하였다. 당시 연산군은 내관인 김처선(金處善)이 직간하는 것을 싫어하여 죽여 버린 다음 중외에 명을 내려 처(處)자를 사용하지 못하게 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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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관으로 명성을 떨치다 |
권벌은 출사한 초기에 주로 언관으로 봉직하였다. 그는 일상적인 언론 이외에 정치적으로 민감한 문제에 자주 직언하여 명성을 날렸다. 일례로 천민 출신인 정막개(鄭莫介)가 박영문(朴永文)·신윤무(辛允武)가 역모를 꾀했다고 무고(誣告)하여 당상관에 제수되었다. 이에 그 부당함을 강력히 주장하면서 그 체직과 추핵을 강변하였다. 결국 그의 의견을 ?아 정막개의 관직을 삭탈하였다. 또 무오사화(戊午士禍)로 화를 입은 사람들의 무고함과 신원을 주장하고, 비록 왕위에서 쫓겨났지만 제사마저 끊을 수는 없다면서 단종과 연산군의 봉사손을 정해줄 것을 계청한 것은 그러한 언관으로서의 면모를 잘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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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묘사림과 함께 보수와 혁신 두 세력을 중재하다 |
조광조 등이 출사하면서 권벌은 조광조(趙光祖)·신상(申?)·이자(李?)·김안국(金安國) 등 기호사림파와 긴밀한 교우관계를 가졌고, 개혁정치의 핵심에 섰다. 그러나 의욕이 앞서는 젊은 층의 비현실적인 급진적 개혁논리에 대해서는 우려하는 처지에 서 있었다. 따라서 권벌은 조광조 등과 함께 보수와 혁신 두 세력 사이에서 완충적 기능을 행사하였다. 그 때문에 소장세력의 기피 대상이 되어 삼척 부사로 물러남으로써 기묘사화의 피해를 입지 않았다. 그러나 기묘사화를 일으킨 당사자들은 그를 개혁론자로 파악하고 10여 년 동안 관직에 등용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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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윤 일파와 운명을 같이하다 |
권벌을 비롯한 사림파들은 중종 사후 인종의 즉위를 명분상 정당한 것으로 받아들이면서 그를 보호하는 데 주력하였다. 때문에 상대적으로 명종의 외척, 즉 윤원형과는 원치는 않았지만 대결할 수밖에 없었다. 특히 명종 즉위 직후 임백령 등 윤원형 일파가 윤임·유관·유인숙 등 세 사람의 치죄를 주장하자 이에 강력히 대응하였다. 이언적에 비해 권벌이 훨씬 과격한 입장이었다. 그는 밤새워 그 부당함과 윤원형 일파의 잘못을 엄하게 비판하는 상소문을 작성하였으나, 이언적의 만류로 다소 완화된 내용의 소장을 제출하였다. 그러나 이와 같이 윤임을 변호하는 입장은 당국자의 분노를 샀고, 정순붕의 강력한 주장으로 파직되고 말았다. 그럼에도 그는 의연한 모습을 보였다. 이때 서울 안의 민심이 흉흉하여 모두 두려워하였으므로 그의 사위 홍인수(洪仁壽)가 급히 달려왔는데, 그는 단정하게 서책을 대하고 앉아 언어와 안색이 평일과 다름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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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재역 벽서사건으로 태천으로 귀양 갔다 |
1547년(명종 2) 가을에 양재역(良才驛)의 벽에다가 국가의 변란을 예고하는 글을 써 놓았다. 이른바 양재역 벽서사건이다. 이로 인해 그는 가중처벌을 받아, 구례현(求禮縣)에 부처되었으나 곧 태천(泰川)으로 옮기게 되었다. 이때에도 그는 태연하게 길에 나서면서 이별하려고 모여든 마을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이 역시 하늘의 은혜로다.”라고 하였다. 또 진사 금원정(琴元貞)이 공의 손을 잡고 소리를 내어 울음을 터뜨리니, 공이 웃으며 말하기를, “내가 그대를 대장부로 여겼더니, 어찌 이러한가? 사생(死生)과 화복(禍福)은 하늘이 정하지 않은 것이 없는 것일세.” 아들인 권동보(權東輔)에게 편지를 보내었는데 그 내용은 이러하다. “옛날에 범충선공(范忠宣公)은 나이 70이 넘어 만 리 밖으로 유배되었으니, 너의 아비가 받은 죄는 매우 관대한 은전이라 할 것이다. 다만 내가 은혜를 저버림이 이와 같으니,내가 죽거든 박한 예로써 장사 지냄이 가하니라.” 하였다. 또 벽제역(碧蹄驛)에서 강계(江界)로 유배가던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의 일행도 그곳에 있음을 알게 되자, 농담으로 “두 재상이 한 가지로 길을 가니, 어찌 이리도 빛나는가.”라 하였다. 유배지에 도착한 이듬해인 1548년(명종 3) 봄에 감기로 인해 베개를 베고 눕게 되었으나 오히려 손에서 서책을 놓지 않았으며, 아이들에게 천자문을 가르치는 일을 매일의 일과로 하다가 3월 26일에 돌아가셨다. 향년 71세였다. 가 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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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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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곤(權琨) |
생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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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사빈(權士彬) |
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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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평윤씨(坡平尹氏) 윤당(尹塘)의 딸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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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상한 성품이지만 준엄한 아버지 |
권벌은 평소에 매우 온후한 사람이었다. 하루는 자신의 여종이 밥상을 들고 오다가 실수로 엎질러 국그릇이 그의 옷에 떨어진 적이 있었다. 그러나 전혀 노여운 기색을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그러나 관료의 자세와 관련해서는 자식들에게 무척 엄하게 대했다. 그의 아들 권동보(權東輔)가 능참봉을 지낼 때 타고 다니던 말이 매우 살찌고 튼실했다. 이에 그가 화를 내면서 말하기를, “국가의 명을 받은 선비는 반드시 재물을 아껴 쓰고 백성을 구제하는 데 힘을 다해야 하는 것이다. 너는 겨우 미관말직에 있으면서 백성의 피와 땀으로 하찮은 말을 살찌우고 있으니, 이러고도 목민관 노릇을 제대로 하겠느냐.”고 꾸짖었다. 그리고는 마침 임금을 호위할 일이 있을 때도 그 말을 물리치고 다른 사람에게 말을 빌려서 타고 갈 정도였다. 또 평소 독서를 좋아했는데, 성현이 남긴 언행 중 아주 중요한 내용을 읽게 되면 반드시 자식들을 불러다 보여주고 반복해서 가르쳤다. 그리고는 “학문은 반드시 자기를 수양하는 데 있는 것이지, 결코 과거와 같은 것을 목표로 해서는 안 된다.”고 가르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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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순최씨와 혼인하여 2남 1녀를 낳다 |
권벌의 부인은 화순최씨(和順崔氏)로, 직장을 지낸 최세연(崔世演)의 딸이다. 자식은 2남 1녀를 두었는데, 장남은 군수를 지낸 권동보(權東輔), 2남은 현감을 지낸 권동미(權東美)로 모두 진사이다. 딸은 좌랑(佐郞) 홍인수(洪仁壽)와 혼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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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 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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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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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계서원(三溪書院) |
학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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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계 학파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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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유인물 |
이언적(李彦迪), 조광조(趙光祖), 신상(申?), 이자(李?)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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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사록(近思錄)』을 특히 좋아하다 |
권벌은 평소 독서를 좋아했는데, 만년에는 특히 『자경편(自警篇)』과 『근사록(近思錄)』을 좋아해서 근무를 볼 때에도 늘 소매 속에 넣고 다녔다. 중종 연간에 재상들을 불러 창덕궁 후원에서 꽃을 감상하고 맘껏 취하도록 하였다. 이에 신하들이 모두 만취하여 부축을 받고 퇴궐하였는데, 내시가 『근사록』 소책자를 주웠다. 중종은 “그 책은 권벌의 것이다.”라고 하면서 돌려주도록 할 정도로, 그가 『근사록』을 탐독했던 것은 널리 알려졌다. 심지어 효종은 권벌의 6대손인 권만에게 특별히 『근사록』을 하사하였는데, 이 역시 『근사록』에 얽힌 중종과 권벌의 일화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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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사사화의 전말이 담겨있는 『충재선생문집』 |
『충재선생문집』은 1705년(숙종 31)에 완성되었고, 그 이후 내용을 추가하여 1752년(영조 28) 한 차례 더 간행되었다. 처음 간행 때 허목이 지은 서문에는 시 16편, 간독(簡牘) 2편, 계사(啓事) 1편, 제문(祭文) 1편, 묘문(墓文) 1편, 대(對) 1편 등 얼마 되지 않는 분량을 수록했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중간본에는 그 3배 분량의 많은 글이 수록되어 있다. 이 밖에 부록에는 퇴계 이황의 만장(挽章)과 「을사화적(乙巳禍蹟)」이 있는데 이 글은 을사사화의 전말과 작자와의 관계를 기술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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