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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탕카멘 얼굴이 담긴 사진과 왕의 무덤-이집트 여행기 7 이집트 여행 6 투탕카멘 왕(왕가의 계곡 부록) 죽은 투탕카멘 왕을 위해 신관들은 죽은 왕이 부활했을 때 궁전생활에서 쓰던 세간이나 위안품이 가까이 있도록 했다. 투탕카멘 무덤 안에는 식용으로 100개 이상의 바구니에 담긴 과일, 깃털로 만든 부채, 그에게 시종들 하인들의 조상이 넣어져 있었다. 이들 중에는 정교한 장식대, 기름을 넣는 예쁜 항아리, 왕의 군사원정에 대비한 것으로 생각 되는 훌륭한 의식용 단검 2개 등이 있었다. 또 원정 때의 장비용으로 신관들은 2대의 전차와 접을 수 있는 야전침대까지 갖춰 놓고 있었다. 투탕카멘(Tutankhamun)은 기원전 1336년 아켄타텐에서 다신교를 부정하고 아텐신만을 믿 는 아멘호텝프4세와 키야(Kiya)사이에서 투탕카텐(아텐이 생명을 줌이라는 뜻)으로 태 어났다. 따라서 그 유명한 네페르티티왕비의 의붓아들이기도 한 그는 부친이 죽은 후 8살에 왕위에 올라 수도를 아마르나에서 테배로 옮기고 이름도 투탕카멘으로 바꾸었다. 투탕카멘은 쇠퇴하던 제18왕조 말의 보잘 것 없는 왕으로서 9년을 통치하고 18 살의 나이로 죽었지만, 1922년부터 발굴되기 시작한 그의 무덤의 화려한 부장품들 로 인해 오늘날 이집트의 대표적인 파라오로 인정받고 있다. 투탕카멘의 무덤은 모두 네 개의 방으로 구성되어 있고 맨 안쪽의 매장실에는 네 겹의 금박 을 입힌 나무 상자 안에 붉은 화강암으로 만든 석관이 있으며 이 안에는 세 겹의 관이 들어 있었다. 특히 맨 안쪽의 관은 110kg의 순금으로 제작되었고 색유리, 라피스 라 줄리, 터키옥, 홍보석 등으로 상감처리한 정교한 조각술을 보여주고 있었다. 이 관 안에서 미이라가 발견되었고 머리부분에는 무게 11kg의 황금가면이 덮여 있었다. 왕의 미이라의 보존상태는 매우 좋지 않았고, 시신의 부검결과 뇌의 치명적인 손 상으로 죽은 것으로 판명되어, 암살 등의 비극으로 후계자도 없이 통치를 마감한 것으로 추정된다. 투탕카멘이 죽고 나서 10년 만에 도둑에 의해 작아서 쉽게 꺼낼 수 있는 물건은 도난을 당 했다. 그러나 투탕카멘왕의 무덤은 다시 봉인이 되었고 그 후 세월과 함께 돌에 파묻혀 두 번 다시 도둑맞지 않았다 발굴 경과 처음에 가지고 있던 투탕카멘에 대한 지식은 단편적인 실마리밖에 갖고 있지 않았다. 카터는 골짜기의 돌이나 티끌을 헤져가면서 이곳저곳 파헤쳐 보았다. 그러다 1922년 테베 근처의 '왕들의 골짜기'에서 무덤을 발견하였다. 그가 목격한 무덤의 입구를 찾아낸 것은 6년간을 파헤친 뒤였다. " 그때까지 적어도 두 번이나 돌층계 2m 근처까지 왔었는데,,,,"하고 카터는 얘기했다. 그가 무덤의 문을 열었을 땐 예상했던 대로 기묘한 동물과 조상, 그리고 황금 등이 보였다 이후 그의 무덤발굴에 관여한 사람들이 사고나 병으로 죽게 되자 무덤에 관여한 자들 은 불의의 죽음을 당하게 된다는 근거 없는 소문이 퍼지기도 하면서 투탕카멘왕은 이 집트 파라오들 가운데서 유명해졌다 카터는 투탕카멘왕의 무덤에서 발견한 2000점에 달하는 물건들을 기록하고 정리, 복원하는 데 8년의 시간을 보내고 1939년에 사망했다. 투탕카멘 묘의 표지와 안내 게시판들 현장 사진 촬영이 금지되어 있으므로 다음의 사진들은 네티즌을 위해 자료 사진을 수록하였다 투탕카멘 묘의 내부 구조 투탕카멘 묘실의 관과 벽화 투탕카멘의 미이라를 조사하는 카터 투탕카멘의 얼굴 재현 왕의 가슴에 다는 보석 장식품 작살을 들고 있는 투탕카멘 전쟁의 표장 투탕카멘과 왕비 안케샤문이 새겨진 옥좌 등받이 투탕카멘왕 무덤 내부의 아누비스 상 투탕카멘왕의 내장을 담은 단지를 보호하는 셀켓 여신 투탕카멘의 입상과 황금관 투탕카멘의 황금 마스크 보석이 담긴 상자와 하토르 소의 머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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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아주조은 방 원문보기 글쓴이: 아주조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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