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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평동의 기억-통복동 화촌마을 토박이 성선용(남, 1940년생)씨
2019.11.14., 2020.11.06.
통복동 화촌마을에 거주한다. 부친 때 팽성읍 대추리에서 이주하여 정착한 토박이며, 젊어서부터 계명공민학교, 신문사 지국, 택시회사 총무, 개인택시 등 다양한 이력을 쌓았다. 원평동주민자치위원장 등 여러 직책을 수행했다.
고향이 어디세요?
통복동 화촌마을입니다.
몇 대를 사셨어요?
아버지 때 왔어요.
부친은 어디에서 오셨구요?
대추리, 팽성읍 대추리마을 있잖아요.
그럼 대추리가 고향이세요?
아니 우리 할아버지는 현덕면이었지. 광덕나루(현덕면 신왕1리)에서 배를 타고 대추리로 분가해서 정착한 거여. 간척 땜에 농경지가 많잖아.
분가했던 거네요?
아버지가 (팽성읍)동창리 사는 어머니하고 결혼했어. 결혼 후에 우리 아버지가 화촌에 간척지가 많으니까 그리로 이사한 거여.
본관이 어디세요?
창녕 성씨.
명문가문이네요?
아는 사람은 명문이라고 말해. 13개 파인데 우리가 홰곡공파라고. 홰곡공파에 생사육신이 다 있어. 사육신 성삼문이 종손이지. 우리는 생육신 성담수라고 그 분의 후손이지. 우리는 창녕 성가(成家)에서도 명문이지.
그럼 화촌으로 이사 올 때는 어르신 태어나기 전인가요?
그렇지 태어나기 전이었지.
그러면 왜정 때네요?
왜정 때였지.
그럼 1930년대 후반인가요?
아냐, 3.1만세 할 때 우리 어머님이 군문다리에서 횃불 들고 만세 하는 거 봤다고 했어.
그럼 최소 1910년대에는 이주한 거네요?
그렇지.
아버님하고는 몇 살 차이나세요?
아버지가 4살 때 돌아가셨거든.
큰 형님은 몇 살이었어요?
큰 형님은 돼지 띠(1935년생), 큰누님은 말 띠(1930년생)였으니께.
그럼 큰형님은 1935년생이고 누님은 1930년생이네요. 그럼 부모님이 1909년경에 결혼한 걸로 봐야겠네요. 결혼 직후에 화촌으로 이사하셨고요?
그 때 3.1운동을 본 거지. 부친이 4살 때 돌아가셨으니까 어머니가 그 이야기를 해줘요.
아버님이 일찍 돌아가셨네요. 기억은?
내가 막내니까 아주 일찍은 아니고. 그래도 아버지 생각은 조금씩 나. 내가 울고 그러니까 장롱에서 과자를 꺼내서 줬던 기억이 나거든. 산자 있잖아. 그리고 그 해에 돌아가신 거야. 음력으로 3월 말일에 돌아가셨으니까.
부친 살아계실 때는 가정형편이 어떠셨어요?
잘 살았지. 대농(大農)이고.
부친은 어떻게 돈을 많이 벌었어요?
여기는 간척지라 윤보선씨 동생 윤원선이라고 그 사람이 논을 다 만들었어. 그래갔고 소작을 준 거지.
아버님도 소작한 거예요?
윤씨네 마름을 본 사람이 덕수 이씨인데 아버지의 둘도 없는 친구야. 그래서 좋은 땅을 많이 줘서 잘 살았어. 덕수 이씨가 해평 윤씨하고 관계가 있어 마름으로 온 거야. 음봉 윤씨하고 아산 이씨들.
농지개혁 때 땅을 분배받았어요?
그 때 당시(해방직후)에 마을에 좌파(좌익)가 있었어요. 그 사람이 우리가 형도 어리고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하니까 땅 브로커한테 우리 것을 판 거야. 정씨인데 아들들은 지금도 살고 있어. 아버지는 죽었는데 그 사람이 아주 못된 짓을 많이 했어. 아들이 개명을 해갔고 지금 이름은 모르겠네. 과거 좌익경력 없애려고 일본에서 온 것으로 바꾼 거여.
신대동 일대에 좌익세력이 많았죠?
신대동에 대장이 있었지. 신대동, 세교동 은실하고, 재랭이 하고 김씨들이 많이 활동했어. 내 친구 아버지가 대단했어. 그래서 내 친구가 연좌에 걸려서 출세 못했는데. 똑똑하고 재주도 좋고 참 괜찮은 친구였는데.
그래서 분배농지는 못 받았어요?
개혁 전에 큰 땅을 빼앗겼으니까 받은 게 없지. 실제로 못 받았어요.
그럼 집안이 어려웠겠네요?
풍비박산이 되었지. 그런데다 6.25전쟁 나서 큰형이 서울에서 행방불명되었어.
큰형은 뭐했는데요?
평택에서 초등학교 나와 가지고 공무원 시험을 봤어요. 수원에서. 형님이 강의록으로 공부를 했더라고. 평택에서 두 명이 합격을 했는데, 공무원은 합격되었는데 안 갔어. 그리고 양복기술 배워서 천일양복점이라고 미싱사도 두고 평택시내(원평동)에서 크게 했다고. 그게 망한 거지. 천일양복점이라고 여기(원평동) 길(옛 국도1호선)옆에 있었는데.... 6.25 전에 호국군이라고 있었어. 형님이 호국군 활동을 하고 훈련도 받고 하다 보니 양복점을 소홀히 한 거지.
청년방위군하고 같은 성격인가요?
청년방위군? 여기는 현역군인이 와서 훈련 시켰어. 여기서 훈련을 시킨 뒤에 현역으로 잡아들였어. 1950년도 전에 현역으로 끌려가고 그랬어. 그런 사람들 길옆에 서서 태극기 흔들고 환영하고.
그럼 형님도 현역으로 입대한 건가요?
우리 형님은 나이가 많아서 안 가고 양복점 문을 닫고 서울로 상경한 거여. 6.25가 터지니까 우리 둘째 누이가 용산에서 방직공장 여직공으로 있었고 한강철교 끊기 전에는 종로 피륙점에 종업원으로 있었는데, 형한테 가서 ‘오빠 내려가자’라고 말하니까 ‘오빠 나중에 갈 테니 먼저 가라’고 해서 먼저 내려왔어. 그 뒤에 다리가 끊기고 영영 못 내려온 거지. 다리 끊기고 15일쯤 지나서까지도 우리 사종 형이 서울에서 봤다는데. 같이 있다가 사종 형이 내려가자고 했더니 ‘나는 안 된다, 내려가다 잡히니까’라며 뿌리쳤데. 사종형은 광나루에서 배를 타고 걸어 내려왔지. 그게 끝이야. 그런데 뭐가 문제냐면 경찰서에 우리 형이 ‘납북’된 것으로 되어 있어요. 그래서 내가 (관공서)취직을 못했잖아. 그런 관계가 있어.
그럼 지금도 월북한 것으로 되었네요?
아녀, 납북이여. 박정희 때는 연좌제에 걸려서 내가 공직생활을 못한 거잖아. 그런 관계가 있었으니께. 납북자, 월북자는 박정희 때는 모두 요시찰 인물이여. 신원조회에서 걸려가지고. 납북은 진짜 억울한 거여. 월북한 것도 아니고. 그거를 동네 사람들이 허위로 한 거야. 그래서 내가 납북자 가족이 되었어. 경찰 친구들이 있는데 그 애들이 우리를 감시했어. 그래서 옛날에는 우리 집 근처에서 어슬렁거리면 ‘야 감시하러 왔냐’ 그랬지. 그러면 ‘할 수 없이 온 거여’라고 말했어.
옛날에는 동향보고 했죠. 어르신은 몇 형제세요?
2남 3녀.
초등학교는 어디를 다녔어요?
중앙초등학교
다닐 때는 진청초등학교였어요 중앙초등학교였어요?
우리가 1학년 입학하니께 학교명을 뭐로 하냐고 학부모들 부르고 그랬어. 우리는 유리창 너머로 봤는데 . 그러고는 중앙초등학교로 한 거지.
어르신은 몇 회 세요?
내가 10회여
10회면 진청국민학교에서 연결된 거잖아요?
내가 호적이 1942년으로 됐었어. 6.25 때 호적대장이 불타서 그랬는데 나중에 1940년으로 고쳤지. 지금도 옛날 호적에는 1942년생으로 되어 있어. 중앙초등학교가 원래는 진청학원이여. 중학교 과정이 일본애들은 뭐라고 했지. 중학교가 아니고 고등소학교라고 했지.
심상고등소학교라고 했죠. 통복시장 고추전 옆에 있었던 심상학교잖아요?
맞어, 고추전 있던 통복다리 옆에 있던 거. 해방 되고 일본애들이 물러가고 중앙초등학교에서 그걸 인수해가지고 학교를 만든 거지. 통복교 바로 옆에 있었어. 이름이 진청공립국민학교였는데.
그게 몇 년도죠?
그러니까 (19)49년. 내가 2학년 때 6.25가 터졌으니까.
그 때 건물 모양은 어땠어요?
일본은 목조건물이잖아. 단층 목조건물이 쭉 있었어. 교실이 4개 밖에 없었어. 고등소학교니까.
성동국민학교하고 진청국민학교하고 입학자격은 달랐어요?
구역에 따라 들어갔어. 이쪽(원평동 일대)은 죄다 진청학원이야. 초등학교가 되고도 진청학원으로 불렀어. 성동은 멀고 여기는 가까우니까. 나도 진청학원 입학했는데 우리는 1학년 만 5개 반이었어.
아니 교실이 4개인데 어떻게 한 학년이 다섯 개 반이나 되어요?
그런가? 4칸은 아닌가봐. 어째든 ㄱㄴㄷㄹㅁ반 다섯 개가 있었어.
교사들은?
교사들은 다 있었지.
진청국민학교가 중앙초등학교로 옮겨간 것은 언제죠?
6.25 때 통복다리를 폭파하느라고 학교가 같이 날아가 버렸어. 그래서 1951년에 은실로 갔지. 그래서 교실이 없으니까 지금 통복시장 들어선 자리에 교회가 하나 있었어. (평택)성결교회. 교회 마루를 4개로 나눠서 뒤에도 칠판 걸고, 앞에도 칠판 걸고 수업했어. 아침 점심 저녁 반으로 나눠서. 책상도 없고 뭐 있어 그냥 놓고 쓰는 거지. 그 때는 죄다 연필이었지. 시내 원평동은 교회로 다니게 하고 신대동은 새터마을에 학교가 있었어. 사랑방 같은 데서 가르치고. 학교가 없으니까 사랑방 같은 데서 공부한 거지. (동삭동)서재는 배 창고에서 공부하고. 과수원 창고에서 배웠고. 동삭동은 큰 집 대청마루나 사랑방에서 배웠고 그랬어.
그럼 누가 가르쳐요?
선생님은 한 분씩 파견되어서 가르친 거야. 한 사람이 여러 학년 가르친 거지. 아주 비참했지.
평택장로교회에서 설립한 요셉고등공민학교는 기억하시죠?
알지. 그 송선생, 그 사람이 (목사님)아들이고 당시 신학대학 다녔어. 송(두규) 목사가 처음에는 제재소자리에서 고등공민학교를 시작했어. 지금 상여팔고 불교 물건 파는 데였지. 아버지가 목사고 그 양반(송선생)은 학생이었어. 내가 평택장로교회 유년주일학교 다녔었어. 원 교회는 저 쪽 군문주공아파트 옆 제방이 있어. 왜정 때 일본놈들이 바닷물이 못 들어오게 제방을 쌓고 벚나무를 심었지. 그래서 여기 원평동도 네모반듯하잖아. 거기에 교회가 있었지.
최범재 장로하고 김기주 장로하고 평택장로교회에는 두 분이 있었어. 송목사가 계시고. 최범재 장로는 대서소를 운영했는데 김기주 장로는 한광 교장까지 하고. 내가 김기주 그 사람 때문에 교회를 그만둔 거여. 내가 유년주일학고부터 교회 다니고 반사노릇도 하고, 경찰서 뒤로 교회를 옮길 때는 벽돌 찍고 나르고, 전기고장나면 고쳐주고 열심이었거든. 그런데 군대 갔다 오니까 김기주 그 사람이 교회를 휘어잡고.... 군대 가기 전에는 김요한 목사 그 분이 담임목사였는데 애들이 무척 많았다고. 목사님 셋째 아들은 굶어 죽었어. 먹을 게 없으니까 맨날 수재비만 떠서 먹었는데 영양실조로 죽은 거지. 내가 손재주가 있어서 교회 일을 많이 하니까 저녁 때 돌아가려면 목사님이 성선생 하고 불러. 밥 먹고 가라고. 사모님이 수재비를 잘했어. 그걸 한 그릇씩 먹고 오곤 했지.
유년 주일학교 다닐 때는 군문초등학교 앞에 있다가 6.25 후에 통복동으로 옮겼고, 휴전되고 나서인가 지금 경찰서 뒤로 옮긴 거지. 그 때 교회 상황이 비참했어요. 그래도 ‘한광’이라는 게 있기 땜에 한광하고는 자매였지. 홍성영 교장이 서울교회에도 다녔는데 교회에 무슨 일이 있으면 학교에서 와서 아코디언도 연주하고 어려운 학생은 전액 학비 면제 입학도 시켜주고 그랬어. 교회서 무슨 일이 있으면 학교서 와서 함께 했어. 그때 한광학교에서 전액 학비면제해가지고 서울대학교 치과대학에 들어간 이광석도 있지. 이광석 치과 했던 사람. 이광석이 마누라 잘못 만나서 친구들과 의가 다 끊기고 했지만 한광 출신으로는 대표적인 인물이여. 부인이 잘 못해서 집안이 다 망했잖어. 평택에서 서울대 나오고 그러니까 그 집(치과)으로 다 몰린 거야. 그 사람도 본래 원평동 사람이야.
어르신은 중학교를 어디 나왔어요?
평중 나왔지. 그 땐 입학이 굉장히 어려웠어. 중학교도 시험보고 들어갔는데 전 과목 다 봤지.
평중 못가면 어디로 갔어요?
한광갔지. 한광은 한 학급뿐이었어. 우리(평중)는 180명이었는데. (학교가) 커진 것은 평성중학교라고 성결교회에서 세운 건데 합쳐지면서 커진 거야.
한광학교는 지금 그 자리였나요?
지금 그 자리 맞어. 평성중학교는 성동초등학교 분교 있던 데 거기 있었지. 잠깐 운영되다 통합되었어.
어르신은 고등학교에도 진학했나요?
나는 중학교만 나왔어. 그 때는 고등학교도 무시험제야. 시험은 형식적이었어. 중학교 졸업하고 고등학교 못 가는 사람 많아서 그랬지. 중학교는 180명 모집에 600명 넘게 지원했는데 고등학교는 몇 명 지원 안 했어. 그래서 학생이 모자라가지고 시험도 보는 둥 마는 둥하고 입학했지.
평택중학교 자리가 일본 신사 터잖아요?
글써 그건 못 봤는데. 일반 가정집 안에 있는 것은 봤어.
학교 졸업 후에는 뭘 했어요?
학교 졸업하고는 뭐 할 게 없는 거야. 서울 가서 제화공장 다녔고, 그럭저럭 군대 갈 때까지는 집에서 농사일도 하고 직장도 다니고 그랬지. 전역 후에는 신문에 종사했어. 1960년대 중반쯤 군대 갔는데 1970년경부터 조선일보 평택지국 총무를 했어. 배달원 데리고 일했지. 그러다가 1971년도에 지국을 인수해서 74년까지 운영했지.
당시 신문구독율은 어땠어요?
조선일보는 논설이 좋아서 많이 봤어. 공직자들하고 선생님들이 많이 봤지. 동아일보는 비판적이어서 보는 사람이 적었고.
당시에는 한문 못하면 신문 못 봤잖아요?
한문 많이 알아야지. 중학교 때 얻어터지면서 한문공부 했는데 그거 기억이 나지 않더라고. 잘못 쓰면 뒤에서 종아리 맞고 그랬는데.
1974년 경 신문지국을 그만둔 뒤에는 뭐했어요?
신문사 그만두고는 반건달이었지 뭐. 내외신문도 하고 경제지도 좀 하고 하다가 1978년에 광립운수에 입사해서 총무계장으로 들어갔지.
당시 택시는 광립운수밖에 없었나요?
광립에서 삼산, 파고다, 인원택시가 갈라졌지. 지금도 파고다택시도 있고 인원은 안중에서 하고. 1981년도에 분리 독립해서 쪼개진 거지. 인원은 광립에서 갈라진 거고 삼상은 파고다에서 갈라졌고.
여기서 오래 근무했네요?
그럼 오래했지. 1999년 12월 31일에 이사로 퇴임했으니까.
회사하고 같이 발전한 셈이네요?
입사해서는 처음에 총무과, 관리과에서 총무를 맡았지. 그러다가 1999년에 회사 그만두고 두 달 만에 개인택시를 샀어. 딱지 값이 비싸서 1억 500만원이나 줬지. 요즘에는 1억 7천만 원까지도 했어. 개인택시 면허가 잘 안 나와서 비싼 거지. 인구에 비례하니까. 평택시는 그전에 3개 시군이 분리 됐었잖아. 통합되고 민선시장 되면서 민원을 내니까 막 증차를 시켜준 거야. 그래서 너무 많아지니까 지금은 안 내줘.
1970, 80년대 택시운전은 수익이 어땠어요?
1970년대 말에는 아주 사정이 나빴어. 그 때는 지입차들이 많았거든. 회사가 자산 없이 운영되다보니 어려웠지. 그러다가 1988년 올림픽을 대비해서 이래서는 안 된다 해서 제복을 입게 하고 시트도 하얀 것을 하게하고 기사들 영어공부도 시키고 하면서 확 달라졌지.
택시회사에 대한 지원도 달라졌겠네요?
그 때는 우수업체, 수범업체 해서 점수가 1등급은 몇 점 이상, 2등급, 3등급으로 나눠서 지원했어. 1등급은 보유 대 수의 100%를 증차해준 거야. 그러니까 그 때 증차된 사람들은 대박났지. 1등급은 어렵고 3등급이 많았는데 그 때부터 택시회사가 크게 달라진 거야. 군대식으로 차 나갈 때 두발 복장 검사를 해서 내보내고 엄격했어요. 나중에 휘발유에서 LPG로 바뀌면서는 영업이 아주 잘 됐어. 1980년대 일한 사람들은 택시운전 하면 가전제품도 쉽게 사고 집도 사고 그랬지. 그 때는 합승도 많이 하고 장거리가 많았으니까 돈 좀 벌었지. 안중 갈 때 5명씩 태우고 한 사람 당 5백 원씩 받으면 2,500원이니까 얼마가 남는 거야. 1980년대가 전성기였는데. 88올림픽 이후가 피크였고. 어째든 그 때 이후 10년, 15년간은 호황이었어. 당시에는 자율입금이란 게 있었어. 그러다보면 고참하고 신참하고 입금이 1만원씩 차이가 나. 경력 많은 놈은 다 떼먹고 입금 얼마 안 하고, 신입들에게는 많이 시키고 다 내게 하고. 추석 대목에는 20만 원 이상 벌면 다 떼먹고 사납은 4만 원, 5만원만 하고 그랬다고.
어르신은 화촌에서만 살았어요?
그렇지. 나는 회사 다닐 때도 화촌에서만 살았어.
분위기를 바꿀 께요. 어르신 젊은 시절 원평동은 어떤 모습이었어요?
지금 단위농협 옆에 군청하고 경찰서가 있었고, 세무서가 군청 뒤쪽으로 있었고. 세무서는 6.25 때 유일하게 폭격당하지 않았어. 다 부서지고 평화병원하고 세무서만 남았어. 6.25 뒤에는 좌익들 잡아다가 세무서에 가둬 놓고 때리고 해서 벽이 온통 피투성이였어. 평화병원 옆으로는 시장이었고. 지금도 거기는 반듯반듯하잖아. 여기 장(평택장)은 소사장이 없어지고 생긴 거야. 철도역 아래가 혼마찌고, 그 앞으로는 1번 국도가 지났고. 읍사무소하고 등기소는 나도 기억이 나지 않더라고. 가물가물 해.
곡물회관 위치 기억나세요?
혼마찌 입구 근처에 2층 건물이었어. 거기서 연극도 공연하고 그랬었지.
6.25 후에 연탄공장은 어디에 있었어요?
땡땡거리에 대동연탄 있었고, 여기 역 옆으로 광신연탄 있었고. 또 하나는 삼리 쪽에 있었고. 역전육회 있는 데가 역 광장이었어.
상업은행하고 금융조합은 어디에 있었어요?
역 광장 우측에 금융조합(농협)있었고 우리은행(상업은행)이 비스듬히 맞은편에 있었고. 1번 국도 변은 번화가였었고.
나사렛교회가 본래 평택장로교회였나요?
농협 원평지점이 나사렛교회 자리여. 그게 저 쪽으로 이사 갔어.
왜정 때 평택장로교회가 있었는데 그건 잘 모르시네요?
기독교 평택장로교회? 그건 모르겠네. 경찰서 뒤에 있는 평택장로교회는 기억나도.
6.25 전 통복시장 자리는 뭐였어요?
거기는 드문드문 집들이 있었지. 여기 시장로터리는 서삼거리, 위쪽 개전로터리는 동삼거리라고 그랬지. 개전로터리 옆에 성북파출소 있잖어, 그 쪽에 옹기 굽는 화구가 있었고. 저기 교육청 옆 산쪽으로 굴뚝이 올라갔어. 굴뚝이 두 갠가 있었어. 그거 있을 때는 청솔가지 때가지고 연기가 엄청 올라갔지.
제가 듣기로는 (통복시장 자리에)사과과수원이 있었다는데요?
있었을 거여, 집이 없었으니까. 그리고 내가 옹기 구웠다는 데에 큰 연못이 있었어. 거기에 마름이라고 알어? 마름이 자라고 있었다고. 물을 정화한다고 하는데 우리는 열매 따다가 쪄 먹었지.
6.25 후에 시가지가 동쪽으로 넘어갔단 말예요. 구시가지 상황은 어땠어요?
폐허였지. 시가지 내에 일본인들이 세운 것은 다 때려 부순 거여. 전체가 파괴된 거지. 오죽했으면 세무서하고 평화병원만 남았겠어.
영단방앗간은 폭격을 피했나요?
그렇지. 여기 군문주공아파트 105동 자리에 있었지. 윤경희씨 아버지가 운영했는데, 윤경희씨가 와세다대학 체육과를 나왔어. 그래서 축구심판을 했었지.
원평동의 최고의 유지는 누구였어요?
진청학원 세운 이민도. 그분은 내가 세배도 다니고 그랬지.
그 분 정식 이름이 이민훤이예요. 이민도라고 많이 부르더라고요.
내 친구가 옛날 경찰서 자리에다가 24인용 군용 천막을 치고서 5칸으로 나눠 계명공민학교라는 것을 세웠어. 인가는 군사혁명(5.16 군사정변) 나고서 받았고. 학교 세운 사람이 이계호인데. 이계호가 교장을 했고 내가 교감을 하고 그랬지.
교사는 두 명 뿐이었어요?
많았었지. 우리 동창생인데 유태호라고 교장으로 퇴임했는데 그 사람도 한 때 교사를 했지. 학교를 세우려니까 교사자격증을 가진 사람이 필요했어. 그래서 처음에는 이민도(훤)씨를 교장으로 모시려고 했는데 그 분이 자격증이 없더라고. 그래서 유태호를 데려다가 가르치게 한 거여.
이민도씨가 이름을 여러 개 썼던 가 봐요?
그래서 내가 헛갈렸어. 그런데 정존수 국회의원 할 때 출마하는 것 보니까 이민훤이더라고. 정존수한테 졌지. 안재홍은 1950년에 당선됐는데 고덕면 쪽에 빨갱이가 많았어. 그래서 안재홍보고 빨갱이라고 그랬지. 안재홍은 (알아주는)인물이니까, 대단한 인물이었지.
원평동에서 이민훤씨 말고는 누가 유명했어요?
이영수씨가 평택초등학교 설립하는데 공을 많이 세웠어.
평택초등학교는 어떻게 세우게 되었어요?
우리가 공민학교를 세우고 하니까 이계호가 그래. 우리는 명예나 이익을 위해 하는 것은 아니라고. 우리학교 이야기가 서울신문에 무지하게 크게 났는데 이계호가 상록수상도 타고. 그게 향토문화상하고 같은 거여. 자매결혼을 했어. 교감이 윤정록이라고 하는 작가야. 아동문학 작간데 월간중앙에 글을 썼어요. 계명공민학교에 대해서. 그 은석초등학교 4학년 3반인가, 거기하고 우리하고 자매결연을 맺은 거야. 그래서 백묵, 칠판 그 학교서 쓰다 남은 것은 죄다 가져왔지.
한 번은 그 학교에서 도와주는 걸로 돼지를 한 마리 샀어. 한 마리 사준 돼지를, 당시 우리 학교에는 식모하는 애들도 있고 그랬는데 그 애들이 학교 올 때 구정물, 음식물 남은 것 같은 거 들고 와. 그거로 키워서 팔았어. 팔아서 남은 돈으로 송아지를 사기로 했는데 부족해서 또 은석초등학교에 도와달라고 했지. 그랬더니 또 도와줬어. 나중에는 KBS에서 방영도 해줬어. 어린이 방송 시간에. 윤정록 교감이 작가도 했으니까 나중에 우리를 초청해서 가봤는데 대단하더라고. 1969년인가 그 무렵에.
계명공민학교는 학생 수가 몇 명이었어요?
그 때 70~80명이나 되었나. 많지는 안았어. 6개 학년 다 있었는데.
그러면 공민학교는 꽤 오래 운영했네요?
오래했지. 한 20년은 했을 거여. 지금도 건물이 있잖어. 3집이 세 들어 사는데. 그 건물이 군사혁명(5.16 군사정변) 나고 1963년인가 그 때에 지은 거여. 목재는 안정리 헬레콥터부대에서 대줬고 송탄의 고사포여단의 박홍수 대위인가 그사람이 나중에 향토문화상을 탔더라고. 그 분이 도와줘서 성환 안성천에서 모래를 퍼다가 브로꾸를 내가 할 줄 아니까 시멘트는 박홍수 대위가 월급 탄 걸로 10포 도와줘서 학생들 데리고 모래를 퍼 다가 찍어가지고 운동장에 쌓아 놓니까. 그 당시에 혁명정부에 평택읍장 했던 사람이 있었어. 그 사람 열정이 무척 대단했어. 그런데 젊은 사람들이 교육 사업을 한다니까 그 분이 군부대하고 연결시켜줬어.
그럼 신문지국을 하기 전인가요?
신문지국은 1970년대고 이건 1960년대 이야기고.
그럼 월급도 없었겠네요?
월급이 어딨어. 거기가 군청 경찰서 자리인데 군청에서 우리한테 관리권을 준 거여. 사람들이 들어와서 무허가로 막 집을 지으니까 우리보고 말리고 관리하라고. 그게 몇 천 평이여. 경찰서하고 군청 청사가 네모반듯했어. 우리가 관리하는데도 밤중에 몰래 들어와서 몰래 짓는 거여. 나중에 보면 그 사람들이 친구 부모님이고 학부모야. 그걸 어떻게 헐어버려. 그냥 놔두는 거지. 그러다보니 무허가 집들이 많아졌어. 그걸 군사혁명(5.16정변) 나서 관리청에서 국유지를 관리할 때 무단 집 짓고 한 사람들은 분할해서 샀어. 우리는 돈이 없어서 못 샀지만. 브로꾸 찍어다가 교실 2칸을 지어서 교육청에다 헌납했지.
어르신은 돈도 벌어오지 않았는데 어떻게 샀어요?
그러니 사는 게 엉망이었지 뭐.
택시회사 들어가기 전에는 경제적으로 힘들었네요?
신문 해봐야 무자기 어려운 거야. 그 때만 해도 신문 값을 제대로 주나. 몇 달 보다가 이사가버리면 그만이지 뭐. 그래도 조선일보는 나아요. 교사, 공무원들이 많이 봐서.
계명공민학교 자리가 나중에 평택초등학교 분교가 되더라고요. 어떻게 된 거예요?
거기가 분교가 되었지. 여기(원평동) 애들이 성동초등학교를 가려면 저기 땡땡거리라고 철둑너머로 돌아서 걸어 다녀야 혀. 거기 화차라도 잔뜩 세워 놓으면 그 밑으로 기어 다니고 그랬어. 얼마나 위험해. 그래서 이영수씨라고 있어. 그 분이 평택초등학교 만들려고 선생님들 죄다 막걸리 먹이고 해서 허가 냈지. 그 사람이 평택초등학교, 중학교 만들 때 최고로 공헌한 사람이여. 1960년대 중반쯤에 건축하고 우리가 교육청에다 헌납했으니까 저학년 2개 반을 공부하게 했어. 낮에는 성동초등학교 저학년 2개 반이 배우고, 저녁이면 우리 계명공민학교에서 야학으로 배우고.
계명공민학교는 1970년경까지는 운영했네요? 1969년에 서울 은석초등학교에 학생들 데리고 갔이니까 그 때까지는 일했어요?
이름만 올려놓고 나는 가르치지는 않았어.
평택초등학교는 어떻게 생겼어요?
평택초등학교는 이영수씨가, 그 때는 여기를 철둑너머라고 했잖어. 여기는 하수구가 엉망이라 비오면 장화 없이는 못살았어. 또 저학년들이 철길을 목숨 걸고 넘어 다니니까 학교가 있어야겠다고 생각했지. 이영수씨가 주축이 돼서 설립했어.
이영수씨는 무슨 일을 했던 분이예요?
농사를 많이 지었어. 그분에 대해서 알려면 저기 비전동 경남아너스빌 아파트 근처에 이대감이라는 동태탕집이 있잖아. 그 집 주인이 이영수씨 딸이여. 그 사람한테 물어봐.
평택초등학교 설립 전에는 우시장였다면서요?
그렇지, 쇠전.
지금도 우시장 흔적이 있어요?
6.25전쟁 끝나고 한참 뒤에 시장이 저 너머(통복동)로 넘어갔어. 기차역이 넘어가면서 1번 국도도 바뀌니까 시장사람들이 1번국도 변에 앉아서 장사를 했어. 여기 우시장은 시장이 넘어가고 그냥 방치됐다가 학교가 들어선 거여. 여기 비오면 순전히 웅덩이들이었지. 이 근방이 다 논이었어. 저기 삼성아파트 옆에는 초가집 큰 게 있어서 진청학원을 했지. 거기는 초가집이 굉장히 컸지.
원평동에는 군문포, 신덕포, 화포, 삽교포 같은 포구들이 있었잖아요. 해방 직후에 그곳으로 배가 들어왔나요?
조개젓배, 새우젓배. 초겨울에는 굴배. 먹을 게 없으니까 새우젓 퍼 먹고, 조개젓 퍼 먹고 물켜고. 먹을 게 없으니까 그것을 퍼 먹고 그랬어. 뱃터에 내리면 말마차들이 와서 시장의 황도가, 백도가에다 실어다 주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