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8장 중보자 그리스도
5항 주 예수께서는 완전히 순종함으로써 그리고 영원하신 성령을 통하여 하나님께 단번에 자신을 제물로 드림으로써 그의 아버지의 공의를 완전히 만족시키셨으며 성부께서는 그에게 주신 모든 자들을 위하여 화목뿐만 아니라 천국의 영원한 유업까지 값을 주고 사셨다.
1. 예수그리스도의 완전한 순종과 단번에 이루신 대속의 죽음
우리를 구원하기 위한 예수님의 사역은 두 가지로 말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완전한 순종과 단번에 이루신 대속의 죽음입니다.
예수님의 완전한 순종은 예수께서 율법의 요구를 완전히 충족하셨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은 율법의 기준에 완전히 합한 삶을 사셨다는 뜻입니다. 어떻게 그러실 수 있느냐?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성령으로 잉태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사람으로 태어나셨지만 여전히 신성을 지니셨고 그분 안에 성령은 완전히 충만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죄가 없으며 죄를 짓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그것만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우리와 같은 사람이셨고 따라서 순종하려는 의지가 없었다면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 적극적으로 순종하셨습니다. 이것을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이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이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을 고려해야 하는 이유는 우리의 구원이 단지 그리스도의 십자가 때문만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완전한 순종의 삶이 없다면 구원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예수님의 삶을 따라 그 본을 따라 살아야 할 이유가 분명해집니다. 물론 우리의 순종이 율법의 요구를 완전히 충족하고 구원에 이르게 한다는 뜻이 아니라 구원에 있어 삶의 중요성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삶은 분명 구원에 대한 증거요, 열매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이 있다면 수동적 순종이 있습니다. 수동적 순종은 예수께서 고난받으시고 죽임을 당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십자가의 속죄로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이 순종은 수동적일 수밖에 없는데, 만약 능동적이라면 예수님의 죽음은 자살이라고 봐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이것은 다소 사변적이어서 조심스럽기는 합니다만, 이런 그리스도의 능동적, 수동적 구분은 분명 유익이 있습니다. 그러나 R.C 스프로울이 말하는 것처럼 수동적 순종은 우리의 죄를 대속하고 다시 말해 십자가는 속죄를 능동적 순종, 즉 예수님의 삶이 의를 준다는 식의 극단적인 구분은 사실 의문입니다. 그런 식으로 수동과 능동을 구분하는 것이 의미가 있을까? 왜냐하면 예수님은 한 인격체로서 전인으로서 하나님께 순종하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삶도 십자가에 달리신 것도 서로 다르지 않은 순종입니다. 그래서 이런 구분은 의미가 없거나 지나친 사변으로 보입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은 이런 구분이 아니라 예수님의 완전한 삶에 주목하게 합니다. 십자가 사건만이 아니라 예수님의 삶 또한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하게 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신앙 또한 삶과 분리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구원은 기계적인 것이 아니라 유기적이며 인격적입니다. 예수님의 삶과 죽음이 곧 내게 속죄와 의가 되는 것입니다.
2. 예배
R.C 스프로울은 그의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강해에서 “단번에 자신을 제물로” 이 부분을 예배와 연관해서 해설합니다. 쉽게 말해 예수님의 완전한 순종과 십자가의 죽음이 곧 예배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예배가 무엇인지를 설명합니다. 저는 그의 이런 견해에 전적으로 공감하면서도 이견이 있습니다. R.C 스프로울은 아담의 타락 이후에 예배는 희생제물의 차원을 가지게 되었다고 바르게 지적합니다. 그렇다면 타락 이전의 예배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 여기에는 많은 함의가 있고 성경 전반에 걸쳐 추적해야 할 내용들이 있습니다. 여기서 자세한 사항들을 풀지는 않을 것입니다. 이후에 교회론에서 다시 다룰 것입니다. 여기서는 기본적인 몇 가지 것을 중심으로 다루겠습니다.
창세기 2장 8절에 하나님은 에덴이라는 특별한 장소를 만드시고 그곳에 아담을 두십니다. 여기 창설이라는 단어는 나무를 심거나 천막을 친다는 뜻입니다. 이 단어는 주로 나라와 민족을 하나님이 세우신다는 뜻으로 사용됩니다. 따라서 이 단어는 에덴이 하나님 나라의 중심적 장소이며 이곳이 곧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장소라는 걸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곳은 성전입니다.
하나님은 그곳에 아담을 두시고 에덴을 경작하게 하셨습니다. 경작은 단순히 농사를 의미하는 게 아니라 성전에서 제사장들이 섬기는 일과 같은 것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아담은 에덴에서 제사장으로써 삶을 살아야 했는데, 성전의 일이란 하나님의 임재하심에 반응하는 예배를 드리는 곳입니다. 그렇다면 에덴에서 아담의 삶은 그 자체가 예배라 할 수 있습니다. 이 점이 매우 중요합니다. 이때 하나님과 아담 사이에 막힌 담이 없었고 그의 삶과 예배가 분리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타락한 후에 예배는 큰 변화를 겪게 됩니다. 아담과 하와는 에덴에서 쫓겨났습니다. 우리는 돌아갈 에덴이 없습니다. 한 마디로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성전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리고 아담과 하와에게 이 예배의 회복이 여자의 후손에게 있을 거라는 약속이 주어졌습니다. 이런 일련의 과정을 이해한다면 요한복음 4장의 우물가의 여인과 예수님의 대화가 얼마나 의미심장한 의미를 지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타락 이후 예배는 속죄를 뜻하는 희생이 없이는 드릴 수 없게 됩니다. 그래서 예전이라는 쉽게 말해 예배의 형식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가인과 아벨은 각기 자신의 소산으로 하나님께 번제를 드림으로 예배의 형식적 면을 충족하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가인의 예배는 받지 않으셨습니다. 왜일까? R.C 스프로울은 그것을 믿음의 문제로 봅니다. 물론 저도 가인이 바른 믿음을 지니고 있었다고 생각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보다 가인 자신이 예배드리기에 합당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가인의 예물만이 아니라 가인 자신도 배척하신 것입니다. 그것은 가인의 삶이었습니다.
타락한 이후 겪어야 하는 예배의 가장 고질적 문제는 바로 예배형식과 삶이 일치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방해하는 것은 바로 죄입니다. 가인에게 이 문제는 분명했고 하나님은 말씀으로 경고하셨습니다. 그리고 가인이후 예배는 더 심각한 문제로 번져 갑니다. 사람들이 형식적 예배마저 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배형식은 하나님의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을 구분하게 했습니다. 이 분리는 곧 거룩함의 본질이기도 합니다. 예배의 형식은 세속인 것들로부터 분리하게 합니다. 따라서 타락한 세상에서 예배의 형식은 필수 불가결하며 부정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예배의 형식은 구약만이 아니라 신약에서도 같습니다. 단순화되고 보다 자유로워졌을 뿐 본질에서는 다르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삶이 곧 하나님께 예배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절대 간과해서도 안 됩니다. 형식이 있고 내용이 없다면 그것은 거짓될 것입니다. 반대로 형식이 없고 내용만 있다면 분별할 수 없고 구분도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두 극단의 잘못된 태도를 지니면 안 됩니다.
창세기에서 주목해 볼 점은 이 형식적 예배의 구분이 점점 사라지기 시작했다는 겁니다. 에노스에 이르러서 공동체적 예배가 소수에 의해 드려졌으며 시간이 더 흐르자, 노아의 가족에게 한정되어 버렸습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지게 된 걸까? 그것은 예배가 본래 공동체적으로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무슨 말인가? 아담과 하와가 타락하기 전 그들의 낳을 자손들은 모두가 함께 공동체로서 하나님 앞에 서 있습니다. 그래서 땅에 충만하고 다스리고 정복합니다. 그들이 살았던 에덴과 같은 곳으로 온 세계를 만들어 가야만 합니다. 그들 개개인이 하는 것이 아니라 아담을 대표로 하는 공동체가 이 일을 감당하는 것이고 아담과 하와가 에덴을 경작하는 그 삶이 예배이듯이 모든 사람의 삶은 공동체적 예배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타락 이후 이것은 각자로 파편화되었고 가인은 아벨의 제사를 함께 기뻐하지 못했습니다. 각자는 각자가 원하는 길로 향하게 되어 버립니다. 사사시대는 이것이 가장 두드러졌습니다. 그 시대의 예배는 각자의 소견대로였습니다. 그래서 예배는 반드시 하나님 백성으로서 한 몸으로서 공동체적입니다. 구약시대가 옛 언약으로 한 몸으로서 예배 공동체라면 신약에서는 새 언약의 백성으로 예배 공동체입니다. 신약시대 이 예배 공동체가 도전받았었는데, 그것을 히브리서가 언급합니다. 어떤 자들은 모이기를 폐하는 습관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성경은 이에 대해 경고합니다.
예배는 타락 이후 큰 변화를 겪을 수밖에 없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가장 큰 변화는 형식과 내용의 분리입니다. 예배형식과 삶이 일치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복음 안에서 우리는 이 문제가 해결되어야 합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사는 동안 이 문제가 완전히 극복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아직 영원한 안식에 들어가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삶이 곧 예배가 되어야 함에도 그렇지 못함을 인정하고 형식적 예배를 통해 세속과 구별된 거룩한 공동체를 지속해 나가야 한다는 성경의 명령을 무시하는 잘못을 범하면 안 되며 동시에 복음 안에서 삶이 곧 예배가 되기 위해 늘 분투해야 한다는 것도 무시하면 안 됩니다.
예배는 하나님 나라, 성전, 안식과 종말이라는 각각의 관점을 중심으로 볼 수 있고 이에 대한 세부적인 사항들을 살펴봐야만 전체적인 그림을 그릴 수 있습니다. 예배는 그 자체가 거대한 담론입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바로에게 전하기를 내 백성이 광야에서 예배할 것이라 전해라고 하셨습니다. 구원은 그 자체가 예배를 위함입니다. 예배는 단지 종교적 형식으로 제한 할 문제가 아닙니다. 예배는 신자에게 궁극적으로 삶의 이유이며 목적이기 때문입니다.
질문
1. 예수그리스도의 삶과 죽음이 나의 구원과 어떤 연관이 있습니까?
2. 예배가 무엇입니까? 자기 말로 설명하세요.
3. 형식적 예배, 예전으로서 예배와 삶의 예배가 균형을 이루어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요?
4. 공동체적 예배가 구원과 어떤 연관성이 있습니까? 교회의 관점에서 보자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