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최초 침례교회 - 강경침례교회 남현자 사모
침례교역사- pic
2018-04-11 11:18:21
추석을 앞두고 영글어 가는 가을풍경은 우리들 마음의 영원한 그리움의 그림이다. 그러한 행복한 풍경화 속에서 갑자기 48시간의 제한부 전쟁선포에 나라 전채가 검은 구름에 쌓여 “이땅을 전쟁 위기에서 구하소서” 교회마다 기도소리 하늘을 향하여 울려 퍼졌고 목함지뢰와 포격 도발로 야기된 남북간 대치로 긴장감이 흘렀을 때, 주님의 뜻은 어디에, 여러 가지로 번민 속에 평화를 위해 기도하던 남한 성도들의 기도에 응답을 주심에 감사드린다.
여름의 꽃 7월에서 9월까지 아름다운 꽃을 피우는 배롱나무는 3개월동안 꽃이 피고 지고를 반복하여 오랫동안 피기 때문에 “백일홍”이라고도 부른다.
나무껍질을 손으로 긁으면 잎이 움직이기 때문에 “간지럼나무”라고도 부른다. 이 꽃이 많은 곳은 논산과 강경 근처이기 때문에 침신대가 목동에 있을 때 교정 안에서도 여름이면 분홍색 백일홍 배롱나무를 잊을 수가 없다. 교정의 푸른 나무들과 푸른 잔디의 배경으로 그리움의 꽃이기도 하였다.
새로 시작되는, 필리핀의료선교회 컨퍼런스 참석을 위해 오랜만에 고향의 땅을 밟게 되었다. 길가에 피어있는 배롱나무꽃이 핀 숙소는 논산교회 근처 갑동호수가의 아름다운 전경으로 모두 행복한 미소가 흘렀다. 이튿날 선교역사의 발자취를 따라 강경으로 향했다.
“우리나라 최초의 침례교회” 이 제목은 논산시 강경읍에서 만든 기독교성지 순례코스다.
기독교 성지 순례코스를 중심으로 본 강경지역 역사문화 탐방코스로 “우리나라최초의 강경침례교회” “최초의 사립 만동학교와 최초 유치원 설립제일 감리교회” “최초 신사참배를 거부한 성결교회” “한국 현존의 한옥 북옥감리교회” “6.25전쟁 66명 순교현장 병촌성결교회” 5교회를 성지순례코스로 2005년 논산시 강경읍 소도시 가꾸기 사업으로 복원해 놓았다고 하였다.
강경교회의 연혁에서 1896년 2월에 파울링 내외분 아만다 가데린 선교사가 인천에서 배를 타고 오가며 포목장사를 하던 지병석씨를 1895년에 전도하여 서울에서 침례를 주고 겨울철 금강의 결빙이 풀려 뱃길이 열리자 강경으로 내려와 1896년 2월 9일 주일에 강경 북옥동 136번지 지병석성도의 자택에서 강경침례교회를 세우고 파울링 선교사 부부와 아만다 가데린 양과 지병석성도와부인 천성녀 성도 다섯 분이 예배를 드림으로 한국침례교회의 첫 교회로 설립이 되었다고 기록되었다.
1897년에 파울링 선교사가 지병석성도집 바로 옆 137번지에 교회를 신축 하였는데 그 시절에는 남자와 여자 좌석이 분리되어 예배를 보았다고한다.
1906년 10월 6일에 최초의 침례교단 발족 대화회총회가 있었고 1943~1945년 8월까지 일본인들이 신사당 건축으로 교회를 강제 철거하여 폐교하고 토지를 몰수(4732평)했다. 해방이 되어 1945년 10월9일 홍교동 114번지 일본인들의 사찰을 매입하여 교회당으로 사용하였다.
펜윅 선교사는 3대 담임목사님으로 현 기독교한국침례회총회의 출발점을 만들어 주었고 1935년 12월8일 26세에 한국에 선교사로 오시어 45년 동안 한국기독교회의 초석을 놓아 주시고 일생을 헌신하시었다고 기록되어있다.
펜윅선교사 후임으로 조국광복 후 이종덕 목사님께서 강경교회 4대 담임목사로 취임하시어 6.25동란에 순교하셨다. 이런 시(詩)가 있다. “금강에서” 미루나무 줄지어 선 강가/밤마다 달맞이꽃/가득 피어 있는 내 고향/나루터에는 뱃사공 아저씨/배 떠난다 부르는 소리/겨울이면 강물이 꽁꽁 얼어/얼음 사이로 노저어 갔고/여름이면 홍수져 배가 떠내려가는/갈대숲 둔덕에 앉아 시를 적었다/어느해 이른 봄날/고향에 가니 모두 떠난 빈 자리에/나루터는 보이지 않고/차량들이 줄지어 콘크리트 다리를/넘나들고 있었다. 나의 고향 강경과 세도의 금강을 이야기한 글이다.
이번 성지순례의 길에서 오랜만에 다시 찾은 소녀시절의 꿈 많은 풍광 속에 언제나 그리워하던 강경산(江景山) 옥녀봉의 그 옛 동산의 느티나무를 볼수 있음에 감개무량하였다. 그 옥녀봉 공원에 최초의 침례교회가 있었다는 것도 놀라운 사실이었다. 부여군 세도면의 사람들은 이십리 길을 걸어서 금강 나룻터에 와서 나룻배를 타고 강을 건너서 중학교나 고등학교를 매일 통학해야했다.
여유가 있는 가정은 다행히 여학생은 학교 안에 기숙사가 있어서 숙식을 하면서 공부할 수가 있었다. 기숙사가 아니면 강경에 하숙하거나 자취를 하기도 하였다. 기숙사에는 200명이란 인원이 제한되어서 부여나 서천 한산 양화 금강 건너 있는 면소재지의 여학생들은 기숙사를 선호하였다. 하나님의 은혜로 기숙사에서 6년동안 생활하면서 토요일에 고향집으로 가지 않을 때는 강경침례교회에 출석하였다. 토요일에는 학생회를 출석하였다. 그때 여학생회장은 2년 선배인 인기 연기자 강부자 언니였었다.
교회당이 절을 변경 시켰기 때문에 기와지붕이 절모양 이어서 교회당 모양세 치고는 잊혀 지지 않는다. 1971년 11대 유흥태 목사님때 지금의 교회 터로 이전되었다고 기록되었다. 여중때는 내 옆자리에 연혁으로 보니 7대 김장배 목사님 따님 김계자 친구가 있었고 지금은 미국에 살고 있다.
여고시절에는 같은 반으로 8대 윤덕훈 목사님의 딸 윤정자가 있었다. 친구도 간호사가 되어 미국에 살고 있다. 그러고 보니 한국침례교의 최초 교회에 출석하였다는 것이 자랑스럽게 느껴진다. 우리 세도침례교회는 칠산침례교회에 다니시던 김만근 장로님께서 개척하신교회이다.
그 장로님은 어릴 때 우리는 심방오시면 “하나님이 오신다”고 할 정도로 신앙심이 모든 사람들의 존경을 받으셨다. 신학시절에 그 어른의 아버님이 김희서 순교자이라는 것을 구전으로 들었다.
아침 저녘으로 선선한 바람이 불고 있다. 가을이 우리 곁으로 다가오고 있다. 계절의 변화를 막을 수 없는 것처럼 주님의 섭리를 거슬려 나갈 수는 없다. 우리는 하나 된 한국교회의 기도로 ‘평화’의 응답을 이끌어냈다.
그러나 언제까지의 잠정적인 평화일까란 물음표가 붙는다. 그래도 우리 기독교인들이 할 수 있는 한 가지 그것은 ‘북한선교’이다. 복음의 빚 진자로써 복음증거 사명을 다하기 위해서 우리 침례교 총회와 목회자들이 선교에 올인(AII IN)하시는 사역에 하나님의 사랑이 넘치는 아름다운 공동체의 행복한 동행이라 생각한다.
남현자 사모 /목산문학회 전 회장
고침) 1935년은 펜공부가 돌아가신 해이다. 펜공부는 1889에 내한했고 1893년 고든 박사에게 신학공부와 선교보고차 미국 보스턴의 클라랜돈가 침례교회의 집회로 이교회의 씽 집사가 자신의 딸 엘라를 기념한 「엘라 씽 기념선교회」가 조직되고 이선교회가 "파울링 선교사 부부와 아만다 가데린 양"를 조선 코리아에 파송하기로 결정한다.
혹 많은 사람들이 펜위익선교사와 파울링 선교사 선교팀을 서로 다른 별개의 조직?으로 생각하는데 전혀 그렇지 않다.
파우링선교사팀은 펜위익선교사에 의해서 세워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어찌꺼나 새로 쓰여진 우리의 자랑 대전 침례신학 대학의 기원은 울 오마니가 졸업하시고 펜위익선교사 부인이 세운 원산성경학습원(사실은 여성들만 위한, 어떤분김성녀권사는 여성찬양팀이 있었다고 들었다고 간증.. 안대벽목사 부인 이순도여사가 리더) 과 이 강경침례교회 성경공부반을 그 기원으로 한다고 공식적으로 쓰여져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