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밀항의 상상력과 재일조선인 사회
<화산도>는 그동안 한국소설이 충분히 형상화하지 못한 몇 가지 사건과 장면을 참으로 인상적으로 형상화하고 있는데, 그 중의 하나로 ‘밀항’(密航)을 들 수 있다. <화산도> 곳곳에는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탄압을 피해 제주도에서 일본으로 밀항하는 장면이 등장한다. 그 밀항 과정에 대한 묘사가 매우 놀랍고 신선하게 다가왔다. 나는 그것을 ‘밀항의 상상력’이라 부르고 싶다. 주인공 이방근은 스스로 밀항선을 타고 제주에서 부산으로, 목포에서 제주로 이동하며, 혁명(항쟁)의 변절자 유달현을 밀항선에서 심문한다. 또한 배를 구입하여 밀항업자 한대용과 함께 게릴라들의 섬 탈출을 돕는 과정에 깊이 개입한다. 이방근의 여동생 유원은 일본유학을 위해 부산에서 밀항선을 탄다. 밀항선을 타기 위한 준비와 주선과정, 밀항선을 탄 사람들의 내면에 서식하는 불안과 초조감, 밀항선내의 풍경과 느낌, 구체적인 항해과정, 일본에 상륙한 후의 난관 등등이 풍부한 소설적 육체를 통해 치밀하게 묘사된다. 특히 또 한 명의 주인공 남승지가 조직의 리더인 강몽구와 함께 항쟁에 필요한 자금과 물품을 조달하기 위해 심야밀항선을 타고 일본으로 향하는 대목은 흥미진진하기가 그지없다.
내 과문한 정보 내에서 보면, 그들이 제주와 일본을 왕복 밀항하여 재일조선인의 도움을 얻는 과정은 한국현대문학사에서 아직 그 소설적 육체가 충분하게 묘사되지 않은 전인미답의 영역이 아닐까 싶다. 남승지와 강몽구는 오사카, 도쿄, 고베 등지에서 일본에 귀화한 이방근의 형 하타나카를 비롯한 여러 재일조선인으로부터 봉기를 위한 자금과 물품을 후원받게 된다. 가족(어머니와 여동생)과 함께 하는 일본에서의 안온한 삶을 등지고 항쟁을 위해 다시 고향 제주로 돌아오는 남승지는 그야말로 순수하고 고결한 혁명가의 면모를 지니고 있다. 남승지와 강몽구의 일본 밀항 왕복과정을 통해, <화산도>는 당시 재일조선인의 일본생활과 정착과정, 일상적 감각, 차별의 실태, 귀화의 정황, 조국에 대한 복잡한 감정을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다. 이 스토리만으로 한 편의 매력적인 장편소설에 충분히 부합한다고 할 수 있으리라.
재일 조선인의 근거지인 오사카의 조선인마을은 아래와 같이 묘사되어 있다.
<조선인마을이라는 별명이 붙어 있는 이카이노 일대는 같은 지역에 살고 있는 일본인이 싫어할 뿐 아니라, 이카이노에 살고 있는 조선인 청년들도 한 번쯤은 이카이노에서의 탈출을 시도한다. 재일조선인으로 태어난 반발심 때문에, 그들에게 ‘이카이노’는 민족차별과 치욕을 집약한 지역으로 여겨지는 탓이었다. 과거에 양준오도 그런 시기가 있었다는데, 그것을 극복하고 난 후에 그는 열렬한 이카이노 예찬론자가 되었다.> (3:212)
한 사람의 독립적인 디아스포라가 된다는 것은 ‘이카이노’에 대한 혐오와 환멸을 극복하는 과정, 궁극적으로 이카이노를 마음속에 떳떳하게 받아들이는 과정이지 않을까. 저 조선인마을 구성원의 태반은 제주에서 밀항해온 사람들이다. 밀항은 곧 망명을 위한 과정이다. 밀항은 자신이 살아온 땅에서 모든 걸 포기한 사람의 목숨을 건 인생의 마지막 선택이자 도박이다. 이방근은 여동생 유원에게 “밀항하는 청년들도 모두 똑같다. 망명이야”(11:355)라고 말한다. 김석범 역시 해방 직후 일본으로 밀항한 체험이 있기에 이토록 밀항에 대한 농밀하고 핍진한 묘사를 할 수 있었으리라. <화산도>를 읽는 시간은 곧 “많은 ‘불법’ 출국자에게는 가슴에 묻어 둔 비밀도 있고 치유하기 어려운 심신의 상처도 있을 터였다.”(12:254)는 사실을 이해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또한 그것은 “돼지와 같은 삶이 되더라도 살아남지 않으면 살육자를 이겨낼 수 없다.”(12:266)는 생각 끝에, 죽음과도 같은 고독과 공포 속에서 그 컴컴한 바다를 건넜던 밀항자들의 내면을 가슴 깊이 아로새기는 과정에 다름 아니다.
5. 주인공 이방근의 다면적 캐릭터
과연 무슨 이유로 인해 대하소설 <화산도>를 시종일관 몰입하며 읽을 수 있었던 것일까. 무엇보다 인물의 심리와 내면에 대한 형상화가 대단히 섬세하게 이루어져 있다는 점을 들 수 있겠다. <화산도>의 미덕은 인간의 내면을 획일적으로 바라보지 않는다는 점에 있다. 주요 등장인물 이방근, 이유원, 남승지, 양준오, 이태수, 문난설 중 어느 인물도 단순한 전형적 캐릭터에서 가깝지 않은데, 그들의 복합적인 심리와 생동하는 내면이 소설 속에 성공적으로 스며들어 있다. 특히 주인공 이방근의 심리에 대한 치밀하기 그지없는 형상화는 <화산도>의 미학적 성공에 가장 핵심적인 요인이 아닐까 싶다.
소설은 대체로 이방근의 시점으로 전개된다. 이방근은 누구인가? 그는 한마디로 혁명(항쟁)의 동조자이면서 비판자이다. 이방근은 혁명의 가능성에 대해 회의하면서도 혁명에 깊이 관여하며 마음속으로 혁명을 응원한다. 그는 “나는 말하자면 혁명의 한가운데 있지 않은 게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혁명 투쟁을 부정하지는 않네.”(5:326), “난 지는 싸움이 될 게릴라 투쟁에 찬성하지 않지만, 무저항주의는 아니야.”(11:324)라고 말한다. 그렇기에 “그는 반혁명적 인물이고, 그러면서 가장 혁명적인 인물이라고 말이지.”(6:285)라는 평판을 얻는다.
이방근은 서북청년단을 필두로 한 우익세력과 게릴라를 위시한 좌익세력 양쪽과 두루 통하는 <화산도>의 중심 매개인물 역할을 수행한다. 말하자면 그는 모든 사상적 입장을 빨아들이는 용광로와 같은 존재이다. 이방근은 표면적으로 서북청년단에 자금 지원도 하고 경찰을 비롯한 우익세력으로부터 기본적인 신뢰를 얻는다. 그러나 그가 더 깊이 마음을 내주는 인물은 남승지나 양준오 같은 항쟁 조직에 참여한 투사이다. 이방근은 그들 조직에 거금을 지원하기도 하며, 그들의 주장과 행동에 공감하기도 한다.
문화적으로 보면 이방근은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을 사랑한 남자”(11:119)이며 “난 신을 믿는 사람은 아니지만”(11:323)이라는 고백에서 보듯 무신론자이자 도저한 허무주의자이다. 그는 한편으로는 허무주의에 마음을 깊이 빼앗기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혁명의 언저리에 발을 담근다. 이 같은 이중적 심리는 작가 김석범의 면모와 매우 유사하다. 그는 시인 김시종과의 대담에서 이렇게 말한 바 있다.
<더구나 사회주의적인 지향이 한 편에 있었고, 한 편으로는 아주 니힐리스틱한 생각, 인생사는 게 가치 없다는 생각이 나에게도 아주 농후하게 있었어. 하지만 살지 않으면 안 되지. 무언가 자신을 긍정하고, 지금 있는 현실을 긍정하는 게 아니라, 인간의 존재, 산다는 것을 긍정하기 위해 어떻게 할 것인가, 니힐리즘을 극복하려고 혁명을 위해 싸우는 것도 그 하나였어. 어쨌든 인생의 허무감이라는 것은 굉장해. (…) 그러니까 당으로부터도 조직으로부터도 탈락해 버린 자신에 대한 절망과 고독은 정말 깊었어. ‘4·3’을 씀으로써 겨우 ‘고독을 밀어내어’ 생에 머물 수 있었지. 그렇기 때문에 4·3에 대해 쓰고 있지만, ‘허무에서 혁명으로’가 나의 진정한 테마인지도 몰라. 현실의 혁명은 패배했지만, 허무를 극복하는 혁명.>
“허무를 극복하는 혁명”, 그것이 김석범에게는 다름 아닌 글쓰기가 아니었을까 싶다. 그가 <화산도>에 매달린 20년이 넘는 세월은 4.3의 잔혹한 상처와 처연한 허무를 극복하기 위한 기나긴 여정이었으리라.
이방근은 개인의 자유와 혁명의 관계에 대해 대단히 인상적인 사유를 전개한다. 가령 “개인의 자유는 혁명에 종속된다. 그것이 혁명이라는 역사적 과도기이며 우리들 존재의 역사성이 된다. 그러나 나는 개인의 자유가 그 절대적인 과도기의, 역사의 청류가 아닌 탁류에 삼켜지는 것을 좋아할 수 없다.”(11:442)는 언명은 근본적으로 자유주의자이자, 동반자(sympathizer)에 가까운 이방근의 실존적 정체성을 보여주고 있다. 그는 혁명의 위대함과 대의를 존중하지만, 승리 가능성이 없는 비현실적 항쟁으로 인해 개인의 자유가 억압당하는 것에 커다란 문제의식을 느끼는 것이다.
이방근이 문난설, 부엌이, 단선, 조영하, 신영옥 등의 여성을 둘러싸고 보여주는 성과 육체에 대한 퇴폐적이며 도발적인 탐닉도 매우 흥미로운 대목이 아닐 수 없다. 이방근은 퇴폐와 허무의 심연을 정면으로 응시하면서도 혁명의 심부에 깊은 시선을 던진다. 히토츠바시대학[一橋大學] 우카이 사토시[鵜飼哲] 교수는 이방근의 캐릭터에 대해 이렇게 적고 있다.
<『화산도』의 이방근에게는 어딘가 제주도의 햄릿과 같은 분위기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윤리적 요청을 기묘한 방법으로 계속 회피하는 귀공자. 광기에 가까운 기지(機智)에 의해 인습을 웃어넘기는 유머의 소유자. 살인과 자살이 결코 서로 다른 것이 아니라는 진리를, 몸소 경험할 운명을 짊어진 정신.>
적절한 표현이다. 그러나 내 생각에 이방근은 그 이상으로 복합적이며 신비하고 이중적인 인물이다. 그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 속에 등장하는 다면적 캐릭터의 인물을 닮았다. 이방근의 복잡다단한 심리에 대한 섬세한 장악 없이 대하소설 <화산도>를 제대로 이해했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6. 독서의 쾌락과 혁명/반혁명의 사유
다른 점을 제쳐 놓고, 단순히 독서의 쾌락이라는 면에서 보아도 <화산도>는 대단히 매력적인 소설이다. 무엇보다 작가의 깊은 내공과 출중한 역량, 그리고 박진감 넘치는 이야기 전개가 책읽기의 묘미를 자연스럽게 선사한다. 여기에 덧붙여 남승지, 양준오, 유달현 등 게릴라, 즉 항쟁 참여자 내부 시점을 통해 그들의 심리와 내면이 매우 깊이 있게 묘사되고 있다는 점을 빼놓을 수 없겠다. 그들의 열망, 공포, 절망, 희망, 비관, 신뢰, 환멸, 배신, 전향, 도피, 우정, 유대감, 연애감정……. 그 모든 것들이 작품 속에 생생하게 스며들어있다. 예를 들어 아래 문장을 읽어보자.
<남승지는 어젯밤 헛간의 어둠 속에서, 유원과의 포옹 사실을 놓치지 않겠다는 듯이 가슴에 품은 채, 앞으로의 게릴라 전투의 전망에, 어떤 균열 같은 의심이 스쳐 지나가는 것을 느꼈는데, 그것은 ‘투항주의’적 생각이었다.>
이 단 한 문장은 정말 많은 것을 함축하고 있다. <화산도>에서 가장 순정한 혁명가이자 투사로 등장하는 남승지(그는 일본에 거주하는 어머니와 여동생의 함께 살자는 간절한 바람을 뿌리치고 제주도로 돌아와 항쟁에 참여한다)는 이방근의 여동생 이유원에 대해 연애감정을 느낀다. 몰래 잠입한 이방근 집 헛간에서 이유원과 포옹한 그 애틋한 느낌을 되새기면서도 그는 언뜻 항쟁에 대해 비관적 전망을 떠올린다. 사랑의 달콤함 다음에 언뜻 떠오르는 혁명의 슬픈 미래, 충분히 그럴 수 있으리라. 연모하는 여인과의 포옹의 추억을 생생하게 간직한 남승지의 마음을 스쳐 지나가는 투항주의적 생각, 바로 이 같은 깊이 있는 내면 묘사가 남승지라는 인물에 몰입하게 만드는 것이다. 연애와 혁명을 단순히 이분법적으로 파악하는 사고 속에서는 이러한 묘사가 도저히 나올 수 없다. <화산도>에 등장하는 유격대들은 상투적인 캐릭터에 멀찍이 벗어나 각자의 살아 있는 개성과 성정을 발산한다. 아울러 유격대 내부의 정황과 풍경들, 예를 들어 죽창을 제조하는 장면, 스파이로 의심되는 인물에 대한 심문 장면, 동지간의 접선 방식, 해방구 마을의 정경, 혁명의 성공 가능성에 대한 대화에 대한 세밀한 묘사가 독서의 흥미를 배가시킨다.
서북청년단이나 경찰, 군인 등 유격대의 반대편에 서 있는 인물들에 대한 묘사 역시 단순치 않다. 예컨대 서북청년단의 폭력적 행동과 연관하여 “‘북’에서 쫓겨난 실향민인 ‘서북’들의 고립감, 증오, 무력감이 그들의 사디즘의 밑바닥에 똬리를 틀고 있는 것이다. ‘서북’들은 늘 공포에 노출된 채 ‘타향’에 산다.”(11:233)고 묘사되어 있는데, 이 문단은 서북청년단이 행사하는 폭력의 심리적 내력을 예리하게 짚어내고 있다. 화산도의 등장인물은 작가의 의도에 의해 조종되는 기계적인 형상이 아니라, 각기 그들의 욕망과 기질에 부합되는 내적인 필연성을 지닌 존재로 묘사된다.
<화산도>를 읽으며 가장 흥미롭게 다가왔던 혁명과 반혁명에 대한 다채로운 사유와 단상에 대해 언급하고 싶다. 되새길 만한 문장과 사유들이 많지만 다음 예문을 다시 읽어본다.
<‘혁명’이 일종의 풍속인 것처럼 공산주의에 가담하여 무슨 주의자나 되는 양 거드름을 피우는 것은 액세서리라며, 그 ‘유아독존’의 형태를 조소하고, 공산당 단세포 동물이라며 독을 품던 그가, 지금 조직의 요청을 받아들여 당원이 될 의사가 있다고 한다.> (5:214)
<어젯밤 양준오는 잠들기 직전 잠자리에서, 만약 확실한 승산이 있을 경우에만 싸움에 응한다면, 세계사를 만드는 건 매우 편안한 일일 것이다……라고, 마르크스가 파리코뮌에 즈음하여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 썼던 구절을 이야기했다. 그렇다, 나도 그 말은 좋아한다, 그건 잘 알려져 있는 말이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다, 그건 승산이 없더라도 싸우라는 말은 아닐 것이라고, 이방근은 말했다.> (10:296)
우선 첫 예문을 보자. 조직이나 항쟁과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있던 양준오가 끝내 당원이 되면서 항쟁에 참여하는 과정은 화산도에서 기억할만한 대목이다. 속류 공산주의자를 비판하던 양준오마저 당원이 될 수밖에 없었다는 묘사는 당시 급박한 정국의 반영이 아닐까. 이 문장에 기대, 인간의 선택과 변화의 무한한 가능성에 대해 생각해본다. 실상 당시에도 각기 다른 이유와 처지에 따라 누구는 조직을 떠나가고, 누구는 새롭게 합류했으리라. 그 각각의 내면에 새겨진 고민의 흔적이 여실히 드러나 있다. 두 번째 예문은 이방근의 단상이다. 설사 승산이 없더라도 항쟁에 참여할 수밖에 없지 않느냐는 양준오의 주장에 비해 이방근의 생각은 보다 복합적이다. 항쟁의 패배가 궤멸적인 피해와 엄청난 학살을 야기했을 때, 그 싸움의 대의는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인가라고 되묻는다. 하나의 해답이 있을 수 없는 역사의 아포리아일 것이다. 이방근은 끝까지 남승지와 양준오를 투쟁의 대열에서 빼내 일본으로 밀항시키기 위해 노력한다. 어쩌면 주인공 이방근의 마음 밑자리에 마지막까지 남은 것은 혁명(항쟁)에 대한 대의보다는 친구들의 고귀한 목숨을 구해야 한다는 가장 원초적인 휴머니즘일지도 모른다.
7. 망명에 대한 성찰: <화산도>와의 만남을 다시 기약하며
<화산도>와 함께한 한 달은 ‘나는 이토록 슬프고 참혹한 이야기를 소설의 형식을 통해서 편안하게 만났다’고 생각되는 묘한 안도감과 송구함으로 채워진 시간이었다. 문득 “망명에 대해 상상하는 것은 기이할 정도로 흥미롭지만, 그것을 직접 체험하는 것은 끔찍한 일이다.”(「Reflections on Exile」)라고 갈파했던 에드워드 사이드의 아포리즘이 떠오른다. 그렇다. 나는 망명에 대해 단지 상상했을 뿐이다. 소설에 묘사되어 있는 망명, 밀항의 장면을 흥미의 대상으로 바라보고 있는 나 자신은 도대체 어떤 존재인가? 모든 독서의 숙명이라고 말하면 다일까. 망명이 그토록 고통스럽고 지난한 삶이라는 것을, 목숨을 건 밀항자의 내면에 오롯이 간직된 슬픔의 무늬를 아마도 나는 영원히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화산도>에 대해 정말 하고 싶은 얘기가 많이 남아 있지만, 일단 이 글은 여기서 맺는다. 물론 <화산도>와의 비평적 대화는 이 글로 종결되지 않을 것이다. 작품을 읽는 내내, 앞으로 아주 오랜 시간 동안 <화산도>에 대해 공부하고 글을 쓸 것 같다는 어떤 운명과도 같은 예감을 받았다. 나중에 기회가 된다면 <화산도>에 드러난 친일문제, 정치와 예술, 허무주의와 고독, 조직과 자유, 혁명과 반혁명에 대한 사유, 지극히 문학적인 묘사와 표현, 제주도의 인문지리, 해방 직후 서울 도심의 문화적 풍경, 등장인물들의 꿈, 문학적 한계 등에 대해 글을 쓰고 싶다. 여기서 더 나아가 <말의 주박>(1972), <입 있는 자는 말하라>(1975), <민족·언어·문학>(1976), <고국행>(1990), <전향과 친일파>(1993), <신편 재일(在日)의 사상>(2001) 등 여섯 권의 비평집을 남긴 김석범의 비평과 언어론에 대해서도 정치한 글을 쓰고 싶은 바람이 있다. 그 열망을 조용히 마음에 간직하기로 한다.
김석범은 “기억이 말살 당한 곳에 역사는 없다”고 말했다. 한국의 현대사, 그 절망과 희망, 식민과 해방, 상처와 영욕을 온몸으로 통과한 인간 군상을 접하며 내 스스로가 한 뼘 성장했다는 느낌을 받았다. 4.3의 슬픔을 온전히 기억하는 것은 역사뿐만 아니라 문학을 위해서도 필요하다. <화산도>는 평생 동안 이국에서 조국의 해방과 자유, 민주주의를 염원하고 제주를 그리워해온 한 망명자가 고향땅 제주의 슬픈 현대사에 바치는 문학적 위령비이자 추모의 대서사시이다. <화산도>와의 대화를 통해 이 시대 한국문학은 한 걸음 앞으로 나갈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제주도 4·3 사건의 과정에서 세상을 떠나신 모든 분들의 명복을 빈다. (2016
첫댓글 3월부터 문학모임이 화산도를 읽는다. 화산도에 대한 애정을 끊임없이 표출하시는 권성우교수님의 글을 퍼왔다. 먼저 읽어야하는지, 다 읽고 나서 읽어야하는지, 고민이지만...이 펌으로 화산도 읽기에 두 명 정도 더 참가하면 좋겠다는 소박한 바램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