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수대첩을 검토한 이유는 진감선사 선조가 고구려 백성이 되었다가 고구려 멸망 후 금마저(金馬渚)에 정착했다는 <진감선사대공탑비문> 때문이다. 따라서 금마저로 내려온 고구려 유민(遺民)을 검토하지 않으면 안 된다.
진감선사의 선조는 누구인가? 『삼국사기』<고구려본기 총장 2년(669)>에는 “2월에 임금의 서자 안승이 유민 4천여 호를 거느리고 신라로 투항했다.” {영인}
또 <고구려본기 함형 원년(670)>에는 “여름 4월에 검모잠이 나라(고구려)를 다시 일으키기 위해 당나라를 배반하고 임금(보장왕)의 외손 안순[<신라본기>에는 안승이라 했다]을 왕으로 삼았다. 당나라 고종이 대장군 고간을 동주도행군총관으로 삼아 토벌하도록 명령했다. 안순이 검모잠을 죽이고 신라로 도주했다.”[1]
<신라본기 문무왕 10년(670)>에는 “6월에 고구려 수임성 사람 대형 검모잠이 유민을 모아 궁모성으로부터 패강(대동강) 남쪽에 이르러 당나라 관리와 승려 법안 등을 죽였다. 신라로 향해 가던 중 서해의 사야도에서 고구려 대신 연정토의 아들 안승을 만나 한성으로 맞아들여 왕으로 삼았다. 소형 다식 등을 신라에 보내 슬프게 고했다. ‘망한 나라를 일으켜 세우고 끊어진 대를 잇게 하는 것은 천하의 공평한 도리이니 오직 대국(신라)이 그렇게 해주시기 바랄 뿐입니다. 저희나라 선왕(보장왕)은 도의를 잃어 멸망했으나, 지금 저희는 귀족 안승을 받들어 군주로 삼았습니다. 바라옵건대 신라의 울타리가 되어 영원히 충성하고자 합니다.’”[2]
“임금(문무왕)이 고구려 유민을 나라 서쪽 금마저에서 살게 했다.” {영인}
<고구려본기>와 <신라본기>에서 두 가지 차이가 발견된다.
첫째 안승이 귀부한 시점을 <고구려본기>는 669년 2월이라 했는데, 다시 검모잠(劍牟岑)을 죽이고 신라로 도주한 것은 670년 4월이라고 했다. <신라본기>는 670년 6월이라 했는데, 처음 귀부한 시점과 1년 6개월, 검모잠을 죽이고 신라로 도주한 시점과 2개월 차이가 난다. <고구려본기>는 단편적 사건만 수록했으나 <신라본기>는 검모잠의 출발에서 시작하여 금마저에 정착시키기까지 전체 기간에 대하여 자세하게 모두 서술하고 있다.
둘째 안승(安勝)에 관하여 보장왕 서자(庶子)라고 했다가, 외손(外孫)이라 했다가, 연정토(淵淨土) 아들이라고 하는 등 횡설수설하는 듯하다. 실제 학계에서도 연정토가 보장왕 사위 즉 부마도위(駙馬都尉)고 안승이 그 아들이라는 설이 있다. 그러나 이름마저 안순(安舜)이라고 하기도 했다. 이는 안승에 대한 개인정보가 매우 부정확하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으로, 일단 안승은 고구려 귀족이라는 점을 제외한 나머지는 믿을 것이 못 된다.
종합 추정해 볼 때, 고구려 귀족 안승은 669년 2월 신라에 귀부했고, 검모잠과 함께 당나라에 맞서 싸우다가 서로 뜻이 맞지 않아 내분이 일어났고, 670년 4월 검모잠을 죽이고 신라로 도망치므로 6월에 금마저에서 살도록 문무왕이 조치했다고 정리할 수 있다. 금마저에 고구려국을 세우고 안승을 왕으로 책봉했으므로 안승이 혼자 도망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진감선사 선조는 살수대첩에서 돌아가지 못하고 고구려에 남아서 고구려 백성이 되었으며, 고구려가 망하자 안승을 따라 신라에 귀부하여 금마저에 정착했는데, 살수대첩은 612년 7월에 일어났고, 안승이 금마저에 정착한 것은 670년 6월이므로 두 사건 사이에 58년 차이로 대략 3세대가 흐를 정도 세월이다. 편의상 살수대첩 포로를 수인(隋人), 그 아들을 수인자(隋人子)라고 부른다면 안승을 따라와서 금마저에 정착한 사람은 수인의 손자인데 이른바 당최(唐崔)의 조상이므로 편의상 당최조(唐崔祖)라 부르기로 하겠다. 당최조는 금마저 입향조(入鄕祖)다. 670년이면 수인은 이미 사망했을 것이다. 수인자와 당최조가 함께 금마저로 왔더라도 당최조가 이미 성인이므로 수인자 동행은 중요하지 않다.
유념할 것은 금마저에 정착한 사람이 당최조 한 사람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이다. “안승이 유민 4천여 호를 거느리고 신라로 투항했다.” 했으므로 단신(單身)이 아니고 가족을 데리고 왔을 가능성이 있는데 최대한으로 펼쳐 본다면 당최조를 기준으로 4촌 이내 형제와 아들 그리고 조카들이 함께 왔을 수 있다.
<진감선사대공탑비문>에 의하면 진감선사는 774년에 태어났으므로 당최조가 금마저에 정착한 670년에서 104년이 지난 이후다. 수인자가 615년 무렵에 태어났다고 가정했을 때 당최조는 640년 무렵 태어났을 것이고 금마저에 정착했을 때는 나이가 대략 30세 전후라고 볼 수 있다. 수인자는 나이가 50세가 넘었겠지만, 아들 당최조가 있으므로 금마저까지 함께 왔거나 금마저로 오지 않고 고구려에 남았거나 차이가 없다. 유념하여 살펴보아야 하는 사람들은 당최조의 형제와 사촌 그리고, 조카들이다.
774년에 태어난 진감선사는 640년 무렵에 태어난 당최조와 약 130년 차이가 있으므로 5~6세손 정도 되는 것 같은데, 당최조 일가들이 함께 왔다면 진감선사는 당최조 직계 후손이 아니고 형제나 사촌 후손일 가능성도 없지 않다. 뒤에 자세하게 살펴보겠지만 당최조 후계자는 신라에서 4~5두품 골품(骨品)을 가졌을 것으로 정의(定義)하지 않을 수 없다. <진감선사대공탑비문>에 의하면 진감선사 아버지 최창원(崔昌元)은 살림이 매우 궁핍했으므로 당최조 직계는 아니고 방계(傍系) 후손일 가능성이 있다.
* 각주 ------------------
[1] 夏四月劒牟岑欲興復國家叛唐立王外孫安舜[羅紀作勝]爲主唐高宗遣大將軍高侃爲東州道行軍摠管發兵討之安舜殺劒牟岑奔新羅.
[2] 六月高句麗水臨城人牟岑大兄收合殘民自窮牟城至浿江南殺唐官人及僧法安等向新羅行至西海史冶島見高句麗大臣淵淨土之子安勝迎致漢城中奉以爲君遣小兄多式等哀告曰 興滅國繼絶世天下之公義也惟大國是望我國先王以失道見滅今臣等得國貴族安勝奉以爲君願作藩屛永世盡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