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그릇 心椀과
함께 배우는 불교
제 1126편
* 한국불교(韓國佛敎)
역대 선사(歷代 禪師(祖師))
오도송(悟道頌)
오도송(悟道頌)이란 무엇인가 ?
불교(佛敎)를
공부(功夫)하는
수행자(修行者)가
자신의 깨달음을 읊은
선승(禪僧)의 게송(偈頌)
가운데(中) 하나를
오도송(悟道頌)
이라고 한다.
오도송(悟道頌)과
열반송(涅槃訟)은
게송(偈頌)의 하나로써
구체적으로
비교해서 설명하면
고승(高僧)이
자신만의 깨달음(覺)을
노래(歌, 句)한 것이
바로
오도송(悟道頌)이며
고승(高僧)이
자신의 임종(臨終) 전에
남겨놓고 가는 노래(歌, 句)를
열반송(涅槃訟이라고
한다.
게송(偈頌)이란
불교의 가르침(敎義)을
함축(含縮 집약)하여
표현(表현)하는
운문체(韻文體)의
짧은 시구(詩句 문자)를
말하는데
곧 선시(禪詩) 내지
또는 선어(禪語 문장)를
이르는 말이다.
본래(本來)
게(偈)와 송(頌)은
같은 의미로
《게(偈)》
라는 글자(字)는
산스크리트어(梵語)
《가타(gatha)》의
음을 빌려와(音借) 따서
만든 말이고
《송(頌)》
이라는 글자(字)는
《가타(gatha)》를
한문(漢文)으로 번역한
것이다.
이렇듯
자신의 깨달음(正等覺)을 읊은
선승(禪僧)의 게송(偈頌)
역대(歷代)
조사(佛祖師 선사)
스님(高僧)들의
게송(偈頌)
즉,
오도송(悟道頌)과
열반송(涅槃訟)은
오랫동안
수련과정(修練過程)을
통해 함축된 의미로
세속(사바세계)의
사람(大衆)들에게
무엇인가를 전(傳)하고
말(說法 이야기)하고저
하는 것이며
후세(후학)들 우리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역사적(歷史的)
문헌 기록상(文獻記錄上)
오도송(悟道頌)을
가장 먼저 남긴 이(僧侶)는
조동종을 일으킨
동산 양개(洞山良价,
807∼869) 선사(禪師)
이다.
생사일여(生死一如)의
구분이 부질없는 일임에야
사람들은
태어남을 기뻐하고,
헤어짐은 슬퍼한다.
오랜 세월
훌륭한 선승(禪僧)이나
선사(禪師) 스님들의
깨달음의 길(佛道行)이
매우 힘들고 어려우며
지난(至難)하듯이
역대(歷代)
조사(佛祖師 선사)
스님(高僧)들의 남겨진
오도송(悟道頌)과
열반송(涅槃訟)은
일반인들은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많은 것이 사실이다.
이렇듯
깨달음의 노래는
다시 한번
자신(수행자)의 삶(人生)을
돌이켜보게 하고
느슨해졌던 마음을
추스리게 한다.
여기
역대(歷代)
조사(佛祖師 선사)
스님(高僧)들의
오도송(悟道頌)과
열반송(涅槃訟)을
올려놓으니
그 깊은 뜻이야
어찌 우리가 모두 다 헤아려
알 수 있겠는가마는
행간(行間)의
곳곳(處處)에 숨겨져 있는
깊고 깊은 심오(深奧)한 뜻을
함께 발견(發見)하고
공부(功夫)하며
오늘을 사는
지혜(반야 보리 광명 智慧)를
찾아보시길 바램해 본다.
본론(本論)
불교(韓國佛敎)
역대 선사(歷代 禪師(祖師))
오도송(悟道頌)
"
달마 서래의(西來意,
달마가 서쪽에서 온 까닭 )
着火廚中眼忽明
착화주중안홀명
從玆古路隨緣淸
종자고로수연청
若人問我西來意
약인문아서래의
巖下泉鳴不濕聲
암하천명불습성
부엌에서 아궁이 불 붙이다
홀연히 눈이 밝았네(眼忽明)
깨달은 후 본래 자리에서 보니
인연 따라가도 물(染)들지 않네.
만일 누가 나에게 달마가
왜 서쪽에서 왔냐고 묻는다면
바위 밑 샘 소리, 그 소리는
물에 젖지 않는다고 답(答)하리.
– 한암선사(漢岩重遠) –
"
※
한암 중원(漢岩重遠)
1876~1951) 대종사는
조계종 초대 종정으로
서울 강남 봉은사
조실이던 때에 일본 불교와
통합을 꾀하던
친일 승려가
도움을 요구하자
“
차라리
천년 동안 자취를 감추는
학(鶴)이 될지언정
백년 동안 말 잘하는
앵무새(鸚)의 재주(術)는
배우지 않겠노라.
”
라는 말을 남기고
오대산에 들어갔다.
그 뒤
열반(涅槃)할 때까지
26년 동안 한번도 산문 밖을
벗어나지 않았다.
21살 때
금강산에서 출가한
한암 중원(漢岩重遠) 선사
스님은
대도인(大悟道人)
경허 선사의 소문을 듣고
그를 찾아 헤맨 끝에
23살 때 경북 금릉 청암사
수도암에서 경허 대사를
친견한다.
경허 성우(鏡虛 惺,
1849~1912) 대선사는
“
범소유상개시허망
凡所有相皆是虛妄
무릇 형상 있는 것은
모두 허망(虛妄)하다.
”
라는
[ 금강경(金剛經) ]
한 구절(一句節)로써
아직 외형만을 향하던
청년(靑年) 한암(漢岩重遠)의
심안(心眼 마음의 눈)을
열어주었다.
위에서도
언급했듯이
친일 승려 도움 구하자
“ 앵무새는 되지 않겠다. ”
단호하게 거절의 말을 하고
오대산
깊숙한 곳으로 들어가
6. 25 전쟁 중에
총알 날아들어도 꼿꼿한
좌선(坐禪修行)을하며
26년간
산문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또한
보름간 곡기끊고
좌탈열반 한암(漢岩重遠)은
근대 한국 불교에서
가장 승려다운 승려로
첫손에 꼽힌다.
그만큼
일상사에서 그의 삶은
털끝만큼의 흐트러짐이
없었다.
이런 삶의 자세는
스승 경허에 대한 태도에서도
잘 나타난다.
경허는 바람이었다.
한 곳에 머무는 법이 없었다.
그래서 한암도
4개월이나 그의 뒤를 좇아
이 절 저 절을 다닌 끝에야
경허를 만날 수 있었다.
경허는
누구에게도 집착하는 법이
없었다.
말년에
홀연히 함경도 삼수갑산에
머리를 기르고 숨어든 그를
애제자
수월이 찾아왔을 때도
방문을 열지 않은 채
“ 나는 그런 사람 모른다. ”
말 한마디로 돌려보낸 경허가
아니던가
그런 경허가
한암에게만 예외적인 모습을
보였다.
수도암과
해인사에서 1년을 함께한 뒤
경허는 한암과 헤어짐을
너무나 아쉬워했다.
“
그의 성행은 진실하고
곧았으며 학문은 고명했다.
함께 추운 겨울을
서로 세상 만난 듯 지냈는데
오늘 서로 이별을 하게 되니
보내는 회포를
뒤흔들지 않는 것이 없다.
옛사람이 말하기를
서로 알고 지내는 사람은
천하에 가득하지만
진실로
내 마음을 아는 사람은
과연 몇이나 되랴.
"
하지 않았던가.
슬프다.
그윽한 한암이 아니면
내가 그 누구와 더불어
지음이 되랴 !
”
그러나
한암은 오히려
"
만고에 빛나는
마음의 달 있는데
뜬구름 같은
뒷날의 기약은 부질없어라.
"
라는 시로 화답한 채
스승을 좇지 않았다.
경허와 한암은
그 뒤 다시 만나지 못했다.
한암은
경허의 천거로
불과 29살의 나이에
통도사 내원선원 조실로
추대됐다.
그러나
자신의 부족을 자각하던
그는 평양 맹산 우두암에 들어가
정진하던 중
아궁이에 불을 붙이다가
8만4천 번뇌 망상을 찰나에
연소했다.
이때가
그의 나이 36살
그러나
이 깨달음조차 인증해줄 스승
경허가 이미 없음을 슬퍼하고
탄식했다.
한암은 훗날
사형 만공이 주도한
《선사 경허 화상 행장》을
쓰면서
“
오호라 !
슬프도다.
대선지식이
세상에 출현함은
실로 만겁에 만나기
어렵다.
”
한탄하면서도
“
당신의 본분사는
일체 허물이 없으나
뒷사람이
(행동을) 배울까
두렵다
”
라고 염려했다.
한암은
법랍으로는 말할 것도 없고
세랍으로도 여섯 살 연상이던
사형 만공 선사가
1946년 입적했을 때
문상하지 않았다.
너와 나
아름답고 추악함의
경계를 넘은 그들의 견처를
의심하지 않았으나
후학들이
술과 고기를 먹고
기생집에 드나드는 행실을
미화하고 본받는 것을 차단해
청정 승가의
전통을 세우기 위한
결단이었다.
한암은
온종일 좌선하면서도
다리를 펴는 법조차
없었다.
그는 어떤 경계에서도
화를 내는 법이 없었다.
한국전쟁으로
오대산 상공에서
수없이 총탄이 날아들어
대중들이 혼비백산해도
그는 움직이지 않았다.
그런 그도
어느 날 두 승려가
술(酒)의 절집 은어인
[ 반야탕 ]을 마시고 돌아오자
직접 회초리를 들어 무섭게
내리쳤다.
한암(漢岩)은
15일 동안 곡기를 끊으며
좌선(坐禪)하다
그대로 열반에 들었다.
열반을
미화하기 위해
일부러 좌탈열반을 조작하는
일까지 생기는 세태 속에서도
그의 삶을
지켜본 선승들은
그의 좌탈열반에 대해서만은
의심하지 않는다.
흐트러지는
삶의 자세를 곧추세우는
한암(漢岩重遠)의
서릿발이 매섭지 않은가
적멸보궁에서
몰아치는 칼바람이
서릿발처럼 살을 에이며
미망(迷望)을 베고 지나간다.
※
ㅡㅡㅡㅡㅡㅡㅡㅡ
마음그릇 心椀과
함께 배우는 불교
《= 다음편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