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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아굴의 기도
성경본문 : 잠언 30: 7-9
7. 내가 두가지 일을 주께 구하였사오니 나의 죽기 전에 주시옵소서
8. 곧 허탄과 거짓말을 내게서 멀리 하옵시며 나로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내게 먹이시옵소서
9. 혹 내가 배불러서 하나님을 모른다 여호와가 누구냐 할까 하오며 혹 내가 가난하여 도적질하고 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까 두려워함이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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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상률 목사
기도는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진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자녀의 신분으로 아버지에게 다가갈 수 있는 특권을 행사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기도는 성도의 신앙 행위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성도의 기도가 신비로운 능력을 행사한다고 하였습니다(마 21:22). 엘리야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지만 기도를 통하여 하늘에서 불이 떨어지고, 물이 쏟아지는 등 기적을 이루어냈습니다(약 5:17-18). 많은 사람들은 엘리야처럼 기도를 통하여 기적을 이루고 신비를 행사하려고 합니다. 그렇다고 기도가 마냥 기적적인 신통술의 수단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건전한 기도는 그의 삶과 이어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를 모범으로 삼아야 됩니다(마 6:9-13). 여기 아굴의 기도문도 매우 평범하면서도 의미 있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교훈해 주고 있습니다.
1. 진실을 추구하는 기도입니다.
아굴은 자기의 기도를 하나님께서 거절하지 마시고 죽기 전에 꼭 이루어 달라고 하였습니다. 그 이루어지는 기도가 평생 동안 자기의 삶으로 이어질 것입니다(7절). 그것은 헛되고 거짓되지 않는 삶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1) 하나님의 얼굴을 의식하는 사람입니다.
모세는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그 얼굴을 비추사 은혜와 평강을 주신다고 하였습니다(민 6:25). 기도의 의미를 아는 사람은 하나님의 얼굴을 의식하는 자입니다. 히브리서 11:6에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청결한 마음을 가진 자가 하나님을 본다고 하였습니다(마 5:8). 청결한 마음은 거짓이 없는 진실된 마음입니다. 그런 마음의 눈으로 하나님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진솔한 기도를 하게 됩니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그 얼굴을 자기에게로 향하고 계시기 때문에 자기의 앉고 일어서는 것도 아시고 심지여 마음속의 생각까지 알고 계신다고 하였습니다(시 139:1-2).
2) 하나님의 성품을 아는 사람입니다.
우리에게 기도의 대상이 되는 하나님은 신실하신 분입니다(신 7:9).
로마서 3:4에 “사람은 다 거짓되되 오직 하나님은 참되시다 할지어다.”고 하였습니다. 참되신 하나님께서는 진실하지 못한 말이나 행위를 싫어하십니다.
시편 15:2에 보면 하나님의 성산에 오르는 자는 정직하게 행하며 그의 마음에 진실을 말하는 자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입에서 나오는 말이나 움직이는 행위 가운데 진실하지 못한 것을 쉽게 감별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외식하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고 사람의 눈만 의식하는 나머지 거짓된 기도를 하는데 대하여 매우 못마땅하게 여겼습니다(마 6:5-8). 다윗은 하나님을 향하여 “거짓되지 아니한 입술에서 나오는 나의 기도에 귀를 기울이소서.”하고 부르짖었습니다(시 17:1).
3) 자신을 속이지 않으려는 사람입니다.
사람마다 양심이 있습니다(고후 1:12). 본래 하나님께서 자기의 형상을 따라서 사람을 지으셨기 때문에 사람의 마음속에는 진실을 추구하는 본성이 잠재되어 있습니다. 로마서 1:19에 “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그들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그들에게 보이셨느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헛된 것과 거짓말을 서슴없이 행하게 될 경우 그 마음속에서 이를 거부하는 반응이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로마서 2:15에 “이런 이들은 그 양심이 증거가 되어 그 생각들이 서로 혹은 고발하며 혹은 변명하여 그 마음에 새긴 율법의 행위를 나타내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진실한 마음으로 거짓되지 않는 삶을 실천하는 사람은 양심에 거리낌이 없이 자신에게 당당할 수 있습니다.
2. 가난하게도 부하게도 말게 해 달라는 것입니다.
가난한 것이나 부요하게 되는 것이 인간의 노력만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아굴은 가난한 사람이 겪어야 되는 고통과 시험을 알았습니다. 또한 부요할 때 교만하고 방종하는 인간의 본성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가난하게도 부하게도 말게 해 달라고 하였습니다.
1) 범죄한 인간의 실상을 아는 자입니다.
아굴의 기도를 보면 가난한 사람도 문제가 있고, 부요한 사람도 문제가 있다는 것입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은 창조주 하나님을 의식하며 인간의 한계를 인정하기 때문에 물질의 많고 적음에 좌우되지 않습니다.
신약의 야고보는 “낮은 형제는 자기의 높음을 자랑하고 부한 자는 자기의 낮아짐을 자랑할지니 이는 그가 풀의 꽃과 같이 지나감이라.”고 하였습니다(약 1:9-10).
옛날 선비들은 청빈함을 자랑했고 인간의 실상을 아는 사람은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간다고 하여 무소유(無所有)의 삶을 실천하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범죄한 인간의 마음에는 욕심이 있어서 물질을 보게 되면 거기 노예로 전락하곤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고 하였습니다(마 6:24).
2) 부요할 때 오는 문제를 아는 자입니다.
9절에 “혹 내가 배불러서 하나님을 모른다 여호와가 누구냐 할까 하오며”라고 하였습니다.
일반적으로 물질이 부요하여 배부르게 먹고 사는 사람은 하나님께 복을 받은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가난하고 배고픈 사람은 하나님께 물질의 복을 달라고 매달립니다. 그렇지만 막상 재물이 많아지고 부요하게 되면 교만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모른다 여호와가 누구냐”고 하면서 하나님을 무시하게 됩니다. 그뿐 아니라 자기가 겪었던 어려운 시절은 생각하지 않고 가난한 사람을 멸시합니다. 옛날 마온 땅에 사는 나발이 그런 사람입니다.
자기는 매일같이 호화판으로 잔치하면서 다윗의 사환들이 찾아갔을 때 “다윗은 누구며 이새의 아들은 누구냐”하고 폭언을 하며 멸시하였습니다(상상 25:10-11).
3) 가난할 때 오는 문제가 있습니다.
“혹 내가 가난하여 도둑질 하고 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까 두려워함이니이다.”고 하였습니다. 옛말에 “삼일 굶으면 남의 집 담장을 뛰어넘지 않을 사람이 없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배고픔을 참기가 어렵다는 뜻입니다. 요즘에는 ‘생계형 도둑질’이라는 말도 유행합니다. 아무리 하나님을 잘 섬기고 자기 관리를 잘하는 사람이라도 너무 가난하여 가족들의 생계가 어렵게 되면 원치 않는 과오를 저지를 수도 있다는 뜻입니다. 빈부가 섞여 사는 세상이지만 사람들은 소유의 많고 적음에 따라서 사람의 능력이나 인격을 비교하는 것 같아서 자존심이 상하고 좌절감을 가지기도 합니다. 이런 때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신앙에 상처를 입게 되기도 하고 하나님의 이름에 욕을 돌릴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3. 분수에 맞게 해 달라는 소원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에 충만하신 분입니다(엡 3:19). 그러나 하나님의 충만하심이 인간의 욕심을 채우는 것으로 악용되어서는 곤란합니다. 예수님께서 오병이어의 이적으로 오천 명을 먹이고 열두 광주리나 남았지만 그 부스러기 하나도 허비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요 6:12).
1) 일용(日用)할 양식으로 만족하는 사람입니다.
사람이 살아가는데 먹고 입고 사는 의식주(衣食住)문제는 매우 절실한 요소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기도문을 가르쳐 주실 때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라는 대목을 일러 주셨습니다(마 6:11).
본문 말씀 8절에도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나를 먹이시옵소서.”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기도입니다. 조금도 허황되지 않고 가장 합당한기도입니다. 그러면서도 과하지도 않고 모자라지도 않게 꼭 필요한 만큼 달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소원은 하나님께서도 만족하게 여기십니다. 옛날 애굽에서 올라온 이스라엘이 광야 여행을 하는 동안 매일 아침 하늘의 양식 만나를 내려 주셨습니다. 그때도 한 사람당 한 호멜씩 그날그날의 양식을 주셨습니다. 많이 거둔 사람도 남지 않고 적게 거둔 사람도 모자라지 않게 채워주셨습니다(출 16:4).
2) 자족하며 감사하는 사람입니다.
야고보서 1:15에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고 하였습니다. 마음속에 있는 욕심을 제어할 수 있는 사람은 경건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디모데전서 6:6에 “자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은 큰 유익이 되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이런 사람은 물질의 있고 없음에 상관없이 받은 것으로 만족하며 감사하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는 “우리가 세상에 아무 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 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욕심을 부리며 부하려고 무리수를 쓰게 되면 시험과 올무에 걸리게 되고 급기야 파멸을 가져오게 된다고 하였습니다(딤전 6:7-10).
3) 최상의 축복을 누리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자기의 부요함을 자랑하는 라오디게아 교회를 두고 “곤고하고 가련하고 가난한자”라고 하였습니다(계 3:17). 그렇지만 환난과 궁핍이 극심한 서머나 교회는 “사실상 부요한 자“라고 하였습니다(계 2:9).
예수님께서는 “삼가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고 하였습니다(눅 12:15). 세상의 모든 것을 다 가지고도 하나님을 소유하지 못한 사람은 불행합니다.
한편 가진 것이 없어도 하나님을 모시고 사는 사람은 모든 것을 다 가지도도 남을 만큼 행복한 사람입니다. 선지자 하박국은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고 하였습니다(합 3:17-18).
(2) 오직 필요한 만큼만
성경본문 : 잠언 30: 7-9
저는 어린 시절 수퍼 영웅들이 좋아했습니다. 수퍼맨, 원더우먼, 배트맨 등 TV를 통해 만날 수 있었던 수퍼 영웅들에 대한 동경은 지금 그런 종류의 외화들을 보면 유치하기 짝이 없지만 그 당시에는 나도 저렇게 힘있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했습니다.
예전에 방영되었던 600만불의 사나이나 쏘머즈라는 외화도 슈퍼 영웅들의 이야기입니다. 그들은 힘만 셀 뿐 아니라 최첨단 장치들이 그들 몸의 일부를 이루고 있어서 멀리 있는 것도 "뚜뚜뚜뚜"라는 배경 음악과 함께 쉽게 들을 수 있는 귀가 있고, 눈도 아주 멀리 있는 작은 것까지도 볼 수 있는 눈이 있습니다.
사람의 눈의 시력이 제일 좋은 것이 2.0이 아니라 5.0쯤 되서 아주 작은 것도 볼 수 있다면 좋을 것 같습니까? 청력이 좋아 미세한 소리까지 잘 들을 수 있으면 좋을 것 같습니까?
언젠가 우리 눈으로 보는 것보다 여러 배 확대해서 볼 수 있는 특수 촬영기를 가지고 서울의 한 아파트에 사는 어떤 가정을 살펴본 것이 TV를 통해 방영된 적이 있습니다. 찾아간 집은 깨끗하게 청소가 잘 된 깔끔하고 정갈하게 정돈된 집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특수 카메라를 갖다 대니 얼마나 많은 세균들과 벌레들이 집 안 구석구석에 우글우글 거리는 지요.
우리가 매일 씻고 닦는, 손과 얼굴 그리고 매일 깨끗이 감는 머리털 속에는 수많은 세균들이 가득 있었습니다. 깨끗하게 청소해 둔 카페트 위를 들여다 봤을 때 사람 몸에서 떨어진 피부 부스러기들을 먹으며 얼마나 많은 세균과 벌레들이 활동을 하고 있으며, 심지어 여기 저기 알을 까 놓았는데 역겨워 더 볼 수가 없었습니다. 소파와 침대 밑, 심지어 덮고 자는 이불 속은 세균과 각종 작은 벌레들의 가장 좋은 번식처였습니다.
그 장면들을 보면서 우리의 눈이 지금의 상태보다 더 밝아, 이런 미세한 것도 보면서 살아야 한다면 얼마나 끔찍할까라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우리 눈을 너무 좋지 않게 만드신 하나님께 절로 감사가 나오더군요.
똑 같은 예로 우리의 귀가 지금보다 두 배만 소리를 더 잘 듣게 된다해도 사람들은 모두 다 신경 쇠약과 노이로제, 스트레스 환자가 될 것입니다. 여러분! 지구 돌아가는 소리 들어보셨습니까?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지구는 시속 1,670Km로 돌고 있답니다. 하다 못해 아이들이 세 발 자전거만 타도 삐걱 삐걱 소리가 나는데 어찌 이 큰 지구 땅 덩어리가 1,670Km로 돌아가고 있는데 아무 소리가 나지 않겠습니까?
물론 어마 어마한 소리가 나겠죠. 그러나 그 소리는 너무 커서 사람이 들을 수 없답니다. 사람의 귀로는 그렇게 큰 소리를 들을 수 없다는 겁니다. 그러니 살죠. 사람의 귀는 초당 20회에서 2만회로 진동하는 음파를 듣는답니다. 박쥐는 5만 회까지 듣는다네요. 미국에서 사람은 듣지 못하고 개만 듣고 달려올 수 있는 신호용 호루라기가 나왔답니다. 이는 개가 들을 수 있는 청력의 범위와 사람이 들을 수 있는 청력의 범위를 이용해서 만든 호루라기였습니다. 아무 소리나 들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들을 수 있는 범위의 소리만 들린다는 겁니다.
우리 청력이 좋아 지구 돌아가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면 시끄러워 살 수 있겠습니까? 아니면 더 작은 소리도 들을 수 있는 귀가 되어서 개미들이 기어다니는 소리까지 듣고 살아야 한다면 어찌 살 수 있겠느냐 말입니다. 우리가 들을 수 있는 소리만 듣게 된 것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얼마 전 관리 집사님이 기르시던 검둥이가 새끼를 6마리 낳습니다. 갓 태어난 강아지들을 어미 개가 핥아 주는 광경을 보죠. 새끼들의 몸을 깨끗하게 유지하고 신경 계통을 자극하여 어미 개와 강아지 사이에 없어서는 안될 중요한 교감이 이루어진답니다. 그런데 그 때 어미 개의 행동을 주의 깊게 살펴보면 아무렇게나 핥고 있는 것 같아도 꼭 일정한 순서로 고루 핥아 준다네요.
젖을 먹느라 어지러울 정도로 자리를 바꿔가며 들락날락해도 어미개는 순서를 틀리지 않고 모두 꼭 같이 고르게 핥아준답니다. 그 때 그 방법은 새끼들의 채취로 식별한다는거예요. 개는 코가 발달한 동물로 이름이 나 있습니다.
지구에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물질이 존재하는데 거의 모든 물질은 고유의 냄새를 가지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가려낼 수 있는 냄새는 10만가지 정도 된답니다. 그러나 개의 후각은 인간의 1백만 배라고 하는데 만약 우리가 진돗개나 세퍼트처럼 예민한 후각을 가지고 있다면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맡지 않아도 될 좋지 못한 온갖 냄새와 주변 곳곳에서 풍기는 악취와 역겨움에 정신을 못 차릴 것입니다.
우리의 눈도, 귀도, 코도 적당하게 볼 수 있는 것만 보고, 들을 수 있는 것만 듣고, 맡을 수 있는 것 만 맡을 수 있다는 것 진정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적당한 분량만큼 필요한 은총을 주셨습니다. 지나쳐서 좋을 것은 세상에 아무 것도 없습니다. 지나치다, 넘친다는 뜻을 나타내는 한자어 "과(過)"자가 붙으면 좋은게 하나도 없더라구요.
사람이 먹어야 살지 않습니까? 그런데 너무 치나치게 먹으면 "과식" 그 다음엔 무슨 말이 나오나요. 소화불량... 위궤양... 이렇게 이어지잖아요? 자동차는 사람들이 편하게 이동하기 위해 타고 다닙니다. 그런데 적당히 달려야죠. 여기에 "과"자가 붙으면 "과속" - 교통사고의 지름길. 몇 일 전에도 과속에 미끄러진 트럭이 시청 앞 육교 아래 가로수 대 여섯 그루를 뿌리채 뽑아 버리고 반대쪽 차선으로 넘어가 공중전화 박스를 박살을 내 버렸습니다. 여러분 과속하지 마십시오.
욕심이 지나치면 "과욕", 너무 지나치게 예민하면 "과민", "과격", 커도 너무 커서 "과대", 작아도 너무 작아 "과소" 일도 적당히 해야지 너무 지나치면 "과로", 분에 너무 넘치면 "과분" 의약분업을 해야 하는 이유 중에 약물을 너무 "과용" 한다지 않습니까? 술을 마셔도 "과음"을 합니다. 보십시오. "과"자가 붙어 너무 치나치는 순간 모든 것이 다 망쳐지고 맙니다.
특히 물질에 있어서 지나침은 곧 우리 영혼까지도 망하게 합니다. 여러분! 지혜로운 삶을 가르쳐 주시는 잠언의 교훈과 같이 기도합시다. 오늘 본문 말씀이 바로 그것입니다. "나로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내게 먹이시옵소서. 혹 내가 배불러서 하나님을 모른다 여호와가 누구냐 할까 하오며 혹 내가 가난하여 도적질하고 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까 두려워 함이니이다"
여러분! 정말 물질을 향해 이런 마음 자세를 가지고 있습니까? 물질의 복도 감당할 수 있을 만큼만 받는 게 복인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가난했을 때 평안했던 가정이 부해지면서 그 평안이 깨어지는 경우를 많이 보았습니다. 돈이 없을 때 별 문제없던 사이도 돈이 생기니까 서로 아웅다웅 다투는 사이가 되는 경우도 많이 보았습니다.
내게 주어진 것에 만족할 수 있고 감사 할 수 있는 것, 우리가 이미 받은 복을 세어보고, 하나님 앞에서 기뻐 할 수 있는 것, 이것이 바로 진정한 믿음입니다.
여러분! 약한 게 좋습니까? 강한 게 좋습니까? 이왕이면 다홍치마라구 약한 것보다는 강한 게 좋지요. 그러나 약한 게 더 좋을 때가 있는 게 인생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후서 12장 9절에서 '나의 여러 약한 것에 대해 자랑한다'고 했습니다. 약한 것을 기뻐한답니다. 왜요? 약할 그 때가 곧 강함인 걸 알았기 때문입니다.
바울에게는 고통을 주는 육신의 약함이 있었습니다. 그 육체의 가시를 놓고 하나님께서 고쳐주시기를 바라며 기도했다가 '네 은혜가 네게 족하다'라는 응답을 받습니다. 그리고는 감사함으로 기도를 드립니다. 하나님 나로 너무 자고하여 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몸에 육체의 가시를 주셨군요. 감사합니다. 바로 이겁니다. 약한데 그게 감사의 조건이래요.
기도하며 소망 중에 시작한 새 천년이 벌써 육개월 지났습니다. 여러분들의 가정에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합당한 감사와 영광을 돌리시기를 바랍니다.
아파봐야 건강의 소중함을 안다죠? 제 아내가 뇌에 출혈이 있어 중환자실에 일주일이나 있었지만 수술하지 않고 몸의 마비나 언어 등 장애를 일으키지 않고 회복되었으니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물론 감사할 일이죠. 거의 죽었다 살아난 사람들 보면 얼마나 감격스럽게 감사드립니까? 그런데 왜 여러분들에게는 그런 감사가 없습니까?
중환자실에 들어가지도 않고 멀쩡하게 건강히 산 우리들은 왜 감사를 못 드리느냔 말입니다. 중환자실에서 죽다 살아난 사람하고, 아프지 않고 멀쩡하게 잘 지낸 사람하고 사실은 누가 더 감사해야 할까요? 그걸 모르기 때문에 아파봐야 감사가 나온다니까요? 진짜 감사는 건강할 때 감사할 수 있는 겁니다.
서양 격언에 "만족의 나무에 감사의 꽃이 피고 감사의 꽃에 행복의 열매가 맺힌다"는 말이 있답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환경과 여건에 만족하는 사람이 감사하는 사람이고, 감사하는 사람이 가장 복된 사람입니다. 그러니 감사하는 자가 가장 부유한 사람이죠. 바울은 이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러기에 그는 이런 고백을 드립니다.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고린도후서 6:10) 그렇습니다. 스스로 만족할 수 있는 자족하는 마음을 가진 자는 모든 것을 가진 자입니다.
오늘 맥추감사절을 맞아 맥추감사절의 영적 의미를 깊이 되새겨 보기를 바랍니다. 맥추절은 보리의 첫 수확을 하는 때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시내산에 도착하여 모세가 하나님으로부터 십계명을 받은 감격스러운 날이기도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애굽에서 종 되었던 것을 기억하고 반드시 맥추절을 지키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애굽에는 열가지 재앙으로 온 나라에 곡소리가 가득했습니다. 그들이 죽은 맏아들을 앞에 놓고 슬피 통곡할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을 빠져 나왔던 것입니다. 이 출애굽의 역사를 기억하며 구원에 감격하여 맥추절을 지키라는 것입니다.(출23:16)
맥추절은 보리의 첫 열매를 거두는 때이므로 '초실절'이라고도 부릅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그 영적인 의미를 살펴볼 때 보리 추수의 첫 열매는 무엇을 의미할까요?
먼저 그리스도께서 모든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고(고전15:20),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성령이 오순절에 마가의 다락방에 임함으로 성령을 받은 그 성도들이 첫 열매가 되었습니다. 이들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 40일 동안 이 땅에 계시며 승천하실 때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 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는 말씀대로 간절히 모여서 기도했고, 성령을 받음으로 초대교회의 첫 열매가 된 사람들입니다. 베드로와 사도들이 성령의 힘에 의지하여 외칠 때 3천명이 가슴을 치며 회개하는 역사도 일어났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맥추감사절을 지키는 우리들은 하나님 앞에 나아올 때 전도의 열매를 가지고 나와야 합니다. 올해 우리 교회의 표어는 "증인의 삶"입니다. 그런데 지난 육개월 동안 여러분들은 얼마나 열심히 증인의 삶 사셨습니까? 충성된 증인으로 살았다면 우리는 전도의 열매를 하나님 앞에 드릴 수 있어야 합니다. 고전16:15절 말씀을 보면 "스데바나의 집은 곧 아가야의 첫 열매요. 또 성도 섬기기로 작정한 줄을 너희가 아는지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우리 주변의 이웃들과 그 가정을 하나님 앞에 열매로 드릴 수 있어야 합니다. 열매 맺는 삶 사시기를 바랍니다. 죄인 하나가 회개하여 새 사람되고 하나님의 구원 섭리를 깨닫고 감사 감격할 때 하나님께서 가장 기뻐 받으시는 열매될 줄 믿습니다.
감사의 절기를 맞이하여 귀한 예배를 드리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들의 가정 위에 너무 많이도 말고, 너무 적게도 말고, 오직 필요한 만큼 채워 주셔서 만족할 수 있는 믿음으로 범사에 감사하는 삶이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출처:은혜목회정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