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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김봉수 목사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는 과거의 어느 때보다도 참 살기에 편리하고 과학과 기술이 발달한 시대입니다.
우선 교통수단을 보아도 우리의 조상들이 살던 시대와는 아주 판이하게 다른 시대입니다.
급하면 비행기를 타고 순식간에 날아가는 시대 아닙니까?
과거에는 물건을 구입하려면 장날을 기다려야 했지만 이제는 백화점이나 대형 마트라는 곳에 가면 모든 것이 다 있습니다.
정말 과거에는 꿈과 같았던 일들이 오늘날 과학문명의 발달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현실로 다가온 편리한 시대입니다.
그러나 이상하게 점점 편리해지는 환경에도 불구하고 인간들은 더욱 안식을 찾지 못하고 참된 안식처를 찾아 헤매고 있는 시대입니다.
가정에서 안식을 찾지 못한 청소년들이 길거리를 배회합니다.
밤이면 오토바이를 타고 질주를 하고, 본드를 통해 안식을 얻어보려고 합니다.
어디 청소년들만 그렇습니까?
너무나 많은 가족들이 이리 저리 배회합니다.
오늘날 우리 인생은 어느 비오는 날 자기가 돌아가야 할 둥지를 잃어버린 참새가 이 처마에서 저 처마로 정처없이 방황하는 것 같은 모습입니다.
안식처를 찾지 못한 사람들의 모습이 인간들의 모습입니다.
우리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생들의 그런 모습을 보셨습니다.
안식일 제도를 허락해 주시면서 인간들이 참된 안식을 누리기를 원하셨지만, 인간들은 자기들의 사고방식과 욕심에 이끌려서 진정으로 누려야 할 안식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이 오셨습니다.
그리고 우리 주님은 우리에게 참된 안식을 주시었습니다.
그리고 그 주님께서 우리에게 초청의 말씀을 주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참 누려야 할 안식을 잃어버리고, 영적, 정신적, 육적으로 피곤한 여러분에게 오늘 우리 주님이 주시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을 통해서 룻에게 찾아오는 안식과 관계된 말씀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그리고 우리들도 서로에게 참 안식을 주는 길로 인도하며 진정한 안식의 자리에서 살아가는 삶이 되기를 원합니다.
먼저 안식할 곳이란 어떤 곳을 가리킵니까?
안식할 곳이란 단어는 히브리어로 '마노아흐' 라고 합니다.
이 안식처라는 것은 먼저 참된 애정이 있는 곳을 가리킵니다.
정말 사랑하는 그 사랑이 있는 곳이 안식할 곳이라는 뜻입니다.
나오미는 불평하는 사람이었고, 소망을 잃어버렸던 사람이었습니다.
그에게 참된 안식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나오미가 변화되었습니다.
룻과 나오미가 하나님과 바른 관계에 들어서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할 때 거기에 참된 사랑이 있었습니다.
나오미는 룻을 사랑하였습니다.
더 이상 의무적인 가족이 아니었다는 말입니다.
본문에서 나오미가 룻에게 권면하는 것은 룻을 생각해서 하는 권면이었습니다.
나오미는 이타적인 사랑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골고다의 사건을 생각해 보십시오.
만일 우리 주님께서 자기 자신만 생각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우리 주님은 십자가에서 바로 우리를 위해 순수하신 그 사랑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분의 사랑이 있는 곳,
우리 주님의 사랑이 머무는 그곳에 참된 안식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들에게 잘 알려진 유명한 예화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천국과 지옥을 차례로 구경을 갔는데, 마침 두 곳이 다 식사시간이었습니다.
먼저 지옥에 갔습니다.
젓가락, 숟가락이 아주 깁니다.
그런데 그 긴 것으로 자기만 먹으려고 다들 아우성을 치니까, 식사시간이 아니라, 칼싸움 시간입니다.
얼마 후에 천국에 도착했는데, 역시 식사시간입니다.
그런데 그 천국에도 숟가락 젓가락이 아주 긴 것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거기에는 지옥과는 아주 대조적으로 서로 먹여줍니다.
'어이 김 집사님 이것 좀 드셔보셔요' '아 장로님 이것 좀 드셔 보세요'
서로를 생각하면서 먹여주니까 숟가락 젓가락이 길어도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이 짧은 예화는 물론 허구입니다.
실제 이야기가 아니라 꾸며낸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천국적인 삶의 방식과 지옥적인 삶의 방식의 차이가 무엇인지 아주 잘 보여 주는 예화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시민된 사람들의 삶의 특성은 이기심을 버리는 삶입니다.
정말 서로를 위해주는 사랑이 있는 곳, 서로를 아껴주는 마음이 있는 사람들의 만남, 그곳이 바로 안식할 곳, 마노아흐입니다.
룻과 나오미에게는 보아스에게 가기 전에, 이미 이 마노아흐가 이루어지고 있었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가정 가정마다 이런 안식할 곳이 되기를 원합니다.
또한 우리 상암교회가 이런 안식할 곳이 되기를 원합니다.
여러분 가정을 위해 늘 기도합시다.
그리고 우리 상암교회를 위해 늘 기도하십시다.
서로를 위해 주는 참 아름다운 사랑의 만남이 있는 곳,
서로 아껴주는 참 사랑이 있는 곳,
우리 주님의 그 귀한 사랑이 가족들과 성도들의 가슴에 있고, 주님을 사랑하는 뜨거운 사랑이 있는 가정과 교회,
이런 안식할 곳이 되도록 같이 기도하며 노력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 마노아흐라는 말, '안식할 곳'이라는 단어는 '쉴만한 곳, 소망이 이루어지는 곳'이라는 또 다른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나오미의 마음속에 룻에게 쉴만한 곳으로 인도되기를 원하는 마음이 있었던 것입니다.
쉴만한 곳, 소망이 이루어지는 곳이란 영적인 쉼 뿐 아니라, 육적인 쉼의 뜻도 포함되어 있는 말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우리 주님이 우리에게 참 쉴만한 곳으로 인도하십니다.
우리 주님 안에서 우리의 소망이 이루어집니다.
여러분의 가정이 그렇게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 주님이 머리되신 우리 상암교회가 그렇게 나아가야 합니다.
온 가족들이 가정에 들어와서 쉴만한 곳이 되도록,
뭇 심령들이 상암교회에 와서 쉴만한 곳이 되도록,
뿐만 아니라 여러분 가정에 참된 소망이 있고, 사람들이 우리 상암교회에 와서 하나님께 향한 그들의 귀한 소망이 이루어지는 곳이 되도록 말입니다.
영과 육의 쉼을 얻는 가정과 교회, 기도의 응답이 이루어져서 소망이 이루어지는 가정과 우리교회가 되도록,
진정한 마노아흐 '안식할 곳'이 되도록 기도하며 함께 이루어가며 살기를 바랍니다.
이제 안식할 곳을 위한 나오미의 권면을 살펴보겠습니다.
이 마노아흐, '안식할 곳'을 위해서 룻에게 나오미가 권면하는 말이 있습니다.
먼저 그것은 참된 안식처를 제공하는 권면이었습니다.
1절을 보면 '내가 너를 위하여 안식할 곳을 구하여 너로 복되게 하여야 하지 않겠느냐?' 라고 나오미가 말을 합니다.
이제 나오미는 좋은 안내자의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나오미의 처음 불신앙의 상태와 얼마나 다른지 모릅니다.
룻1:9에 '여호와께서 너희로 각각 남편의 집에서 평안함을 얻게 하시기를 원하노라'라고 되었는데, 우리 번역 성경에는 분명하게 나타나지 않아서 잘 모르지만 히브리어 원어성경에 보면, 그 단어가 바로 오늘 본문의 '안식할 곳' 마노아흐와 같은 단어입니다.
이것이 무슨 말입니까?
과거에 나오미는 두 자부에게 잘못된 안식처를 제공했던 것입니다.
'그 모압 땅에서 불신 남편 만나서 안식해라'하는 말이었습니다.
한 잔의 술을 가지고 누리는 안식,
본드를 흡입하거나 오토바이를 타고 질주하면서 얻는 쾌감을 통해 갖는 만족함,
마약을 통해 누리는 안식 그것은 참된 안식이 아닙니다.
얼마 전 심방을 하고 오다가 어느 술집 간판이 <취중 천국>이라고 씌어진 것을 보았습니다.
사람들이 술에 취하면 모든 괴로움을 잊는가 봅니다.
그런 방법으로 안식을 얻어보겠다는 것이겠지요.
하지만 그 술기운이, 그 마약기운이 떨어지면 함께 사라져 버리는 안식입니다.
그러다가 언젠가는 더 이상 세상의 그 어떤 술로도 혹은 어떤 마약으로도 누리지 못하는 불안의 세계로 접어들게 됩니다.
이 세상의 것들은 우리에게 진정한 안식을 주지 못합니다.
그래서 어거스틴은 '우리가 아버지의 나라에 가기까지 우리에게 참된 안식이 없다'고 까지 표현했습니다.
오직 우리 주님을 통해서만 우리에게 참 안식이 주어집니다.
나오미는 모압 땅에서도 안식이 있다고 생각을 했었습니다.
그래서 두 자부에게 모압 땅에서의 '안식할 곳', 곧 가짜 안식처, 거짓 마노아흐를 권면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진정한 안식의 길을 룻에게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 안에 진정한 마노아흐가 있습니다.
우리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요14:27입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이 주님 안에서 여러분과 여러분의 가정이 참 안식을 누리시고, 또 수많은 심령들을 이 참된 안식의 처소로 인도하시는 나오미와 같은 좋은 안내자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두 번째로 나오미가 룻에게 권면하는 그 권면의 특징은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한 권면이었다는 것입니다.
과거에 나오미는 하나님의 말씀을 완전히 무시한 행동들을 많이 했습니다.
그러나 오늘 룻에게 권면하는 이 권면은 신25:5-6을 근거로 권면하는 것이었습니다.
고대사회에서 자식이 없이 남편이 죽어서 후사가 끊어지는 것은 완전히 안식을 잃어버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귀한 말씀으로 안식을 잃은 자들을 살리는 제도를 만드신 것입니다.
그것은 참 안식과 행복의 길이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중에 참 은혜의 역사들이 나타나기도 합니다.
괴롭고 답답했던 마음이 평안함을 얻고, 거할 성을 찾지 못하고 방황하던 심령이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안식의 자리에 들어섭니다.
그러므로 주의 말씀을 사랑하는 자들에게 참 안식이 주어집니다.
여러분에게 더욱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기를 원합니다.
여러분의 가정에 늘 하나님의 말씀이 있기를 바랍니다.
또한 우리 상암교회가 더욱 하나님의 말씀이 잘 선포되는 장소가 되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그 말씀을 통해 온 가족들과 성도들이 그리고 뭇 심령들이 참 안식을 누리는 그런 은혜가 있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안식할 곳을 얻기 위해 극복해야 할 장애가 있었습니다.
그 첫째는 보아스가 가장 가까운 친척이 아니었기 때문에, 나오미의 가장 가까운 친척이 기업 무를 권한을 포기해야만 했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결혼의 우선권이 나오미에게 있었으므로 나오미가 그 권리를 먼저 포기해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분명한 것은 그 참 안식의 세계로 하나님께서 인도하셨다는 사실입니다.
보아스보다 가까운 친척이 그 기업 무르는 것을 포기하도록 하십니다.
뿐만 아니라, 나오미가 자기에게 주어진 우선권을 포기합니다.
우리가 참된 안식의 세계로 나아가는 데, 때로는 참 넘기 어려운 장벽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우리보다 우리의 주님께서 더욱 우리의 안식, 우리가 평강을 누리기를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예례미야애가l3:32-33에 보면 '저가 비록 근심케 하시나 그 풍부한 자비대로 긍휼히 여기실 것이라. 주께서 인생으로 고생하며 근심하게 하심이 본심이 아니로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우리를 향하신 그 귀하신 뜻은 먼저 우리가 참 안식을 얻는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시편기자는 시119:165에서
'주의 법을 사랑하는 자에게는 큰 평안이 있으니 저희에게 장애물이 없으리이다.'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찾아오는 수많은 장애물도 주의 법을 사랑하는 우리에게는 결코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마침내 룻에게는 그 안식할 곳으로 들어가는 길이 열리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이런 주님을 의지하는 은혜가 있기를 원합니다.
우리의 가정과 교회에 안식을 주시기를 원하시는, 우리를 사랑하시는 주님을 의지하는 믿음을 가지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주의 법을 사랑하는 자에게 장애물이 없으리라는 그 주님의 은혜를 맛보면서 살기를 바랍니다.
이제 우리는 그 안식할 곳으로 들어서는 데 룻의 순종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새로운 문화권속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닙니다.
룻에게 있어서 어쩌면 이 나오미의 권면은 충격적인 것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5절을 통해 룻의 순종의 태도를 볼 수 있습니다.
'룻이 시모에게 이르되 어머니의 말씀대로 내가 다 행하리이다. 하니라'
이와 같은 룻의 아름다운 순종은 좋은 결과를 가져 온 것입니다.
사실 보아스는 나이가 상당히 된 것으로 나타납니다.
본문 10절을 보면 '네가 빈부를 물론하고 연소한 자를 좇지 아니하였으니'라는 말씀에서 그것을 볼 수 있습니다.
결국 룻의 순종하는 태도를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순종이라는 단어를 생각할 때, 우선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순종이란 그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일절 이의가 없어야 합니다.
말씀에 대한 절대적인 순종 그것이 신앙입니다.
그런데 인간과 인간과의 관계에 있어서의 순종을 성경은 언제나 '주안에서'라는 조건을 걸고 있습니다.
부모에 대한 순종도 주안에서, 국가에 대한 충성도 주안에서입니다.
룻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참된 안식이 자리로 권면하는 나오미의 말에 순종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결과는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의 선물이었습니다.
이렇게 서로를 생각해주는 자들의 상태에서 참된 안식은 이미 시작되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들에게 참된 안식이 사라졌습니다.
우리의 조상 아담이 범죄함으로 이미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어지고 그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어지면서 안식도 깨어진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리시면서 채찍에 맞으시면서 우리가 평화를 누리는 곧, 참 안식을 찾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오늘도 우리 주님께서 우리를 향하여 말씀하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하리라'
우리 주님께서 쉬게 하실 것입니다.
우리 주님으로부터 여러분과 여러분의 가정, 그리고 우리 상암교회에 안식이 임하기를 바랍니다.
참된 사랑이 머무는 안식이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동시에 쉴만한 곳, 소망이 이루어지는 그 은혜가 임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진정한 안식처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한 안식이 임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에게 장애가 있고, 문제가 있어도 우리 주님이 참된 안식의 세계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늘 순종함으로 안식을 누리는 삶이 되도록 더욱 기도하며 살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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