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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17-29
그대 하나님의 기쁨을 아는가? / 은혜목회정보
하나님께서 결코 용납지 않는 죄가 사람을 죽인죄입니다. 심지어 짐승이 사람을 죽여도 그 짐승을 죽이겠다고 창9:5에서 말씀하십니다. 하물며 사람은 말할 것도 없지요. 하나님께서 왜? 사람을 죽인자에 대해 그토록 엄격하셨을까요? 창 9:6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무릇 사람의 피를 흘리면 사람이 그 피를 흘릴것이니 이는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지었음이 나"
사람은 피부색깔이나 남녀노소나 가진자 못가진자를 불문하고 모두가 하나님의 형상 대로 창조되었습니 다. 이것이 인간의 천부적 위대성입니다.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인간을 위대한 존재로 대접하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타락한 인생은 인간의 생명을 스스로 짓밟아 왔습니다. 돈과 권력! 이 둘은 인간에게 인간성을 빼앗아가는 원흉입니다. 사람들은 돈을 거머쥐기 위해 권력을 찬탈하고 지키기위해 수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빼앗았 습니다. 이것이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한결같은 인간의 본성입니다.
엘리야 선지자가 활동하던 시기에 이스라엘 권력의 정상에는 아합왕과 그의 아내 이세벨이 있었습니다. 이미 살핀 것처럼 아합왕은 이스라엘 역사상 악한왕 챔피언이었습니다. 이 전에도 그런 왕이 없었고 이 후에도 그런 왕이 없었다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왜? 그랬을까? 오늘 읽은 왕상 21장 25절의 증언을 다시 보십시오.
"예로부터 아합과 같이 스스로 팔려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한 자가 없음은 저가 그 아내 이세벨에게 충동되었음이라."
아합왕이 악한왕 챔피언이 된 이유가 꼭 아내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그의 아버지 오므리왕 역시 악한왕으로 책망받았습니다. 아버지에게 배울 것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아마도 아합왕은 마마보이처럼 자라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왜냐하면 그는 아내 이세벨에게 완전히 조종을 당했는가 하면 이세벨을 마치 어머니처럼 의지했기 때문 입니다.
사실은 21장 전체내용이 오늘 설교 본문입니다.
한 사건이기 때문에 나눌 수가 없는 본문입니다. 왕궁 근처에 참 아름다운 포도원이 있었어요. 주인이 나봇이란 사람이었기 때문에 우리에게 나봇의 포도원이라고 알려져 있지요. 아합왕이 그 포도원을 욕심냈습니다. 나봇을 불러서 그 포도원을 내게 팔아라 돈을 주라면 돈을 주고 다른 포도원을 원하면 환지를 해 주겠다. 그랬는데 나봇이 거절합니다.
사실 이스라엘에서는 땅을 사고 파는 일이 금지되어 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계명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나봇이란 사람은 참으로 신실한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왕의 요청보다 하나님의 계명을 더욱 존중히 여긴 사람이지요. 환지를 통해 경제적 유익도 구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 자체가 율법을 위반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법을 지키기 위해 왕의 명령을 불복하는 용기를 가진 사람 경제적 불이익을 자초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법을 지키는 데 오히려 모범이 되어야 할 아합왕 아닙니까?
그러나 아합은 자기 욕심을 성취시키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법을 어기는 것이 이미 습관화되어 버린 타락한 인생입니다.
나봇을 설득시킬 수 없다는 생각이 들자 아합이 낙심합니다. 침상에 누워 얼굴을 돌이키고 식사를 아니했다그랬습니다. 이세벨이 보니까 왕이 자기도 알지못한 근심에 가득차 있거든요!
왕이여 어찌된 일입니까 물었더니 여차여차한 일로 속이 상해있다고 말합니다. 꼭 어린아이가 엄마에게 일러바친 것 같은 분위기예요.
이세벨이 어처구니 없어 하지요. 아니, 당신이 이 나라를 다스리는 왕인가요! 조소 비슷한 말을 하면서 내가 그 밭을 왕께 드리겠다고 호언을 합니다.
이세벨이 책략을 꾸미지요.
나봇이 사는 동네 장로들과 유지들에게 왕의 이름으로 편지를 보냅니다. 금식을 선포하라고 그럽니다. 금식은 국가에 위기라 닥칠 때 전 국민이 전심으로 하나님께 기도하는 관습이었습니다. 또한 백성들을 한 곳에 모이게 했어요. 포도원의 주인 나봇도 거기 나오게 했습니다. 그리고 장로들 가운데 깡패 두 사람을 끼어 넣었습니다. 국가가 금식을 선포하고 문무백관과 유지들이 한자리에 모였으니까 백성들이 매우 긴장하고 흥분되 있었겠지요
그 때 동원된 깡패들이 나서서 큰 소리로 외칩니다. 이 사람 나봇을 보라! 이 사람이 거룩한 하나님과 하나님의 종 왕을 저주하였도다! 그랬더니 예외없이 군중심리가 불동합니다. 저놈 때려 죽여라 하더니 나봇이 군중들의 돌에 맞아 죽고 말았습니다.
이세벨이 아합왕에게 의기양양하게 말하지요.
"나봇이 죽었나이다 임자없는 그 포도원을 취하소서"
이렇게 사건은 종결되었습니다.
아니 종결되는 것 같았습니다.
나봇의 억울한 죽음 그 내막을 안 사람은 몇 사람 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계명을 왕의 명령보다 존귀히 여겼던 신실한 하나님의 사람 나봇은 이렇게 억울한 최후를 맞았습니다.
그런가하면 아합은 그토록 갖고 싶었던 포도원을 간단히 소유했고 이세벨은 승리의 개가를 높이 불렀습니다.
이세벨은 그 악한 책략을 성취시키기 위해 사악하게도 하나님의 이름을 동원했습니다. 이와같은 기막히도록 원통한 역사는 어디에나 비일비재 합니다. 이것이 타락한 인생들이 겉으로는 정의를 외쳐대면 만들어낸 인본주의 역사의 본질입니다.
우리 현대사에서도 국가 전복 죄라는 이름으로 독재자들의 칼 끝에 쓰러져간 사람들이 얼마나 많았는지 그 진실을 아시는 분은 하나님뿐입니다. 그런데 나봇의 비통한 죽음이 과연 그렇게 종결되었을까요.
하나님께서 역사의 진실을 알고 계신다는 것!
이것은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여호와의 말씀이 다시 엘리야에게 임했어요. 일어나서 다시 아합왕을 만나라고 명하십니다. 갈멜산에서 아합의 거대한 권력과 대결하면서 장엄한 승리를 이끌어냈던 엘리야였습니다.
그러나 이세벨의 협박앞에 맥없이 무릎을 꿇고 로뎀나무 밑에 쓰러져서 이젠 지쳤습니다.
이젠 살아야할 이유가 없습니다.
제발 나를 데려가 주옵소서라고 하소연하던 엘리야 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셨습니까?
피곤하고 지친 엘리야를 치유하신 후 그를 다시 호렙산에 서게 하시더니 역사의 위인이 아합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인 것을 깨닫게 하십니다.
아직 그가 할 일이 있다는 것 그래서 엘리야에게 살아야할 이유가 있다는 것을 가르치십니다.
이렇게 엘리야를 회복시키신 하나님은 엘리야 선지자를 다시 아합에게 보냅니다. 갈멜산의 하나님은 보이는 하나님이었습니다.
그러나 호렙산의 하나님은 보이지 아니하신 하나님이었습니다. 오늘 엘리야는 그분의 진리의 말씀을 가지고 다시 아합에게 왔습니다.
갈멜산에서 아합을 만날 때는 불을 가지고 나왔습니다. 엘리야는 갈멜산에서 불로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아합에게 보여줄 수 있었습니다. 그 능력을 보고 무릎 꿇지 않는 인생은 없었습니다. 불을 가지고 나온 갈멜산의 엘리야 그는 당당했습니다. 신명났습니다. 조금도 아합왕에게 꿀리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지금 엘리야는 아합에게 불을 가지고 나가지 않습니다.
말씀을 가지고 나갑니다. 그 말씀은 지금 당장 성취되는 말씀이 아닙니다. 엘리야의 입에 주어진 하나님 말씀은 갈멜산의 불이 아닙니다. 믿음이 없이는 아무런 흔적도 경험할 수 없는 하나님의 그 말씀을 가지고 아합에게 나갑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신뢰 그것이 아합을 이기는 무기입니다.
네가 쥐도 새도 모르게 나봇을 죽이고 나봇의 포도원을 빼앗았느냐! 그래 쥐도 새도 모를 줄 알았느냐! 아니다 내가 있다. 내가 알고 있다. 개들이 나봇의 피를 핥은 그곳에서 네 몸의 피도 핥으리라. 너 뿐이겠느냐. 나봇이 죽은 그곳에서 개들이 이세벨도 먹을 것이다.
옳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봇의 원통함을 아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아합과 이세벨의 죄악을 보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왜? 선한 나봇의 생명을 지켜주시지 않았을까?
하나님게서 왜? 나봇의 원통한 죽음이 있은지 바로 그 다음날 아합과 이세벨의 생명을 취하지 않으셨을까?
이런 의문은 여전히 남아있습니다.
안타까움은 여전히 남아있습니다.
그러나 한가지 확실한 진리가 있습니다.
나봇의 눈물을 하나님께서 아십니다.
아합과 이세벨의 사악한 거짓 그들의 책략도 하나님께서 아십니다.
그리고 그 죄악은 반드시 댓가를 치룬다는 진리를 우리는 압니다.
아합과 이세벨의 최후는 엘리야의 예언대로 성취되었습니다.
그들은 선지자의 예언대로 비참하게 인생을 마쳤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의 눈물을 아십니다. 우리의 원통함도 아십니다. 그런가 하면 우리가 무슨 일을 했는가도 죄다 알고 계십니다. 그래서 원수갚는 일을 하나님께 맞기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원수갚는 것 하나님께 맞기고 너희는 모든 이들과 평화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을 못 믿는 죄보다 더 큰 죄는 없다는 사실을 알고 계십니까?
하나님께서 원수를 갚으신다는 것을 아는 것은 오히려 소극적 교훈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날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도 엘리야처럼 행동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지금 아합에게 나가라고 말씀하십니다.
"내 백성이여 내게 주의하라! 내 나라여 내게 귀를 기울이라. 이는 율법이 내게서부터 발할 것임이라. 내가 내 공의를 만민의 빛으로 세우리라"(사 51:4)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들이 당신의 공의를 만민에게 드러내는 빛이 되길 원하십니다. 하나님의 공의를 위해 아합과 싸우십시오. 아니 내 자신이 지금 아합의 자리에 서 있는지 두려움과 떨림으로 자신을 성찰하십시오. 아합은 반드시 그 댓가를 받기 때문입니다. 아합의 길에 서 있는 자는 아합과 함께 반드시 멸망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조영남씨를 아주 비겁하고 야비한 사람으로 생각해 왔습니다.
그가 한 때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찬송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 사람입니까? 그런데 지금은 심각하게 타락한 사람입니다.
지난주에 그 영혼이 왜? 그렇게 타락하게 되었는가를 이해할 수 있는 이유를 발견하고 참 안타까웠습니다.
그의 어머님께서는 권사였습니다. 자신을 위한 어머님의 기도가 애끓는 기도였다는 것을 그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조영남씨가 아는 어머님의 신앙 조영남씨가 아는 어머님의 기도는 황금의 위력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10년동안 당신의 집에서 세 들어사는 사람의 가짜 꿀 만드는 일을 도왔습니다.
가짜 꿀 만드는 일을 도우면서 어머님은 늘 찬송가를 불렀습니다.
왜? 예수믿는분이 가자 꿀을 만드는 일을 돕느냐고 물었더니 이렇게 하지 않으면 집세를 못받는다고 대답하셨습니다.
조영남씨를 위한 어머님의 기도는 늘 돈 잘 벌게 해달라는 기도였습니다.
조영남씨가 어떻게 그 어머님한테 신앙적 감동을 받았겠습니까?
그 어머님이 구원받은 신앙이었을까?
저는 모릅니다. 물론 구원받은 신앙일 가능성이 더 많습니다. 그러나 애처러운 사실은 그 어머님의 신앙의 열매는 오늘날의 조영남씨로 나타난 것입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갈 6:7-8)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소홀히 여김을 당하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
두리라 자기의 육체를 위해 심는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 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작은 일에 정직하십시오. 아니 모든 일에 정직하십시오. 정직함이 하나님의 공의의 기초입니다. 눈앞의 이익에 현혹되어서 눈앞의 쾌락에 도취되어서 하나님 두려운줄 모르고 살면 반드시 그 댓가를 거둡니다. 지금은 아합이 엘리야보다 훨씬 돋보입니다. 아합이 엘리야보다 훨씬 화려해 보입니다. 그러나 아합의 길은 멸망의 길이고 엘리야의 길은 영광의 길입니다. 작은일에 정직하십시오. 모든일에 정직하십시오. 하나님의 공의를 만방에 드러내는 빛으로 살아가시길 축원합니다.
아합은 한번도 엘리야를 자신의 동지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갈멜산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함께 목격한 후에도 엘리야에 대한 아합의 시각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이처럼 인간의 아집과 편견은 변하지 않습니다.
오늘도 엘리야를 만나자 나의 대적이여!라고 말하지 않습니까?
엘리야에 대해서 그처럼 편견과 미움을 가지고 있었던 아합왕에게 너무도 이상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아합이 엘리야의 말씀을 듣고 회개했다고 성경은 증언하지 않습니까! 이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의외의 일이었습니다. 아합이 엘리야의 말씀을 듣고 회개를 하다니 그것은 천지가 개벽되는 것 같은 놀라운 사건이었습니다.
이처럼 복음의 역사에는 예측불가한 일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능력입니다.
말씀의 능력앞에서 인간의 편견과 아집은 무너집니다.
도무지 회개할 것 같지 않은 사람이 복음을 들고 회개합니다.
저 사람은 절대 회개치 않을 사람이다는 단정은 인간의 오만이요 무지일 뿐입니다.
"아합이 이 모든 말씀을 들을때에 그 옷을 찢고 굵은 베로 옷을 동이고 금식하고 굵은 베에 누우며 행 보도 천천히 한지라."
그렇습니다. 우리의 편견을 거두어야 합니다. 아예 복음을 들을 자격도 없는 인생은 아무도 없습니다. 복음을 전해야 할 사람을 마음에 정하십시오. 그 영혼을 위해 간절히 기도 하십시오. 복음 전할 계획을 세우시고 관계적으로 실행하십시오.
아합의 기적이 일어나고야 말것입니다. 안타까운 것은 아합의 회개가 진실하고 깊은 것 같지는 않습니다.
아합이 회개이후 어떻게 살았는가를 살펴보면 그런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반응을 보면 참 놀랍습니다. 하나님께서 너무 좋아하십니다. 인간적으로 표현하면 뭘 좀 모르시는 분처럼 보입니다. 아니, 그 알량한 회개좀 했다고서니 아합같은 인간을 용서하실 수 있습니까? 다른 것 다 제쳐두고라도 아합이 나봇에게 한 짓만 생각해 보십시오. 모든 것을 아신다고 하셨던 하나님께서 어떻게 그런 인생을 용서하신다는 말씀입니까? 그런데 아합이 조금 회개하는 모습을 보이자 하나님께서 너무 기뻐하십니다. 28-29절 다시 보십시다.
"여호와의 말씀이 디셉 사람 엘리야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아합이 내 앞에서 겸비함을 인하여 내가 재앙 을 저의 시대에 내리지 아니하고 그 아들의 시대에야 그 집에 재앙을 내리리라 하셨더라."
아합의 회개로 인하여 하나님의 심판이 연기되었지요. 심판이 취소되지 않는 것을 보면 아합의 회개가 철두철미한 회개가 아니었음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그런 정도의 회개도 하나님은 기뻐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엘리야 선지자를 특별히 부르십니다.
왜요? 아합을 주목하라고 말씀하시지요.
아합이 내 앞에서 겸비함을 네가 보느냐! 왜? 아합의 회개를 주목하라고 하셨을까요?
문맥으로 보면 틀림없이 이런 정황이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엘리야에게 명하십니다. 아합에게 가서 내 메시지를 전하라. 그때 엘리야가 이런 자세를 가졌을거예요.
하나님 전할 것이 무엇입니까? 당장에 요절을 내 버리시죠. 저런 인간에게 무슨 경고가 필요합니까?
말해 보아야 쓸 데 없는 일입니다.
저 인간이 하나님 말씀을 듣고 회개할 리가 있습니까. 이런 자세가 엘리야의 태도 아니었겠습니까? 그런데 엘리야의 말씀을 들은 아합의 태도가 달라집니다. 비록 완벽한 회개에 이르지 못했습니다. 그래도 문제는 그 가 달라졌다는 사실입니다.
그가 회개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엘리야를 급히 부르셨어요.
엘리야야, 보라! 네 생각과 다르지 않느냐! 지금 아합이 회개하고 있지 않느냐! 엘리야는 말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하신 일인데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제 속좁은 생각으로는 엘리야가 이랬을 것 같아요. 하나님 너무 하십니다. 하나님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아합같은 인간을 용서하시다니요.
하나님 과연 당신은 어떤 분입니까?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분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인간이 감히 깨달을 수 없습니다. 그 분이 나를 속속히 아십니다. 그분이 나의 앉고 일어섬을 아십니다. 나의 속 생각까지 죄다 아십니다.
그분이 나를 아신다면 어떻게 날르 용서하실 수 있다는 말입니까.
그런데 그분이 나를 용서하셨습니다. 용서하시는 정도가 아닙니다. 나를 사랑하십니다.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은 나를 인해 기뻐하신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거든요.(스바냐 3:17)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시라 그가 너로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인하여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진실로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회개를 기뻐하십니다. 작은 회개라도 기뻐하십니다. 아합과 같은 인생에게도 인애와 긍휼을 베푸시기를 기뻐하시는 하나님입니다. 우리 하나님 그 분을 저는 도무지 알 수 없습니다. 다만 확실한 것은 나 같은 놈을 하나님께서 아무런 조건없이 용서하시고 사랑해 주신다는 사실입니다. 많은 것이 여전히 신비이고 여전히 많은 것을 모르지만 이 한가지 사실은 확신 합니다.
주께서 저를 사랑하사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주께서 여러분을 사랑하사 자기몸을 버리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진실입니다. 이 엄연한 진리를 믿지 못한다는 말씀입니까? 그러므로 우리 모두는 이렇게 고백할 수 밖에 없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 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몸을 버리신 하나 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이 거룩한 고백이 있는 신앙공동체의 한 지체입니다. 주를 위해 더욱 열심히 살아가시길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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