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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 2: 22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하게 되었느니라. - 약 2: 24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약 2: 22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하게 되었느니라. -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하게 되었느니라. (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었느니라. )
본 절은 아브라함이 행함으로 의롭다 함을 받았다는 사실에 대한 논증으로 '믿음'과 '행함'과의 관계성을 보여준다.
1]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하게 되었느니라.
'네가 보거니와'는 '누가 보아도 알 수 있는 증거가 명백할 정도로 충분한 것'을 가리킨다(Robertson). 이것은 '네가 보느냐'라는 의미로 다시 한 번 믿음만을 강조하는 자들을 향한 야고보의 권고를 나타낸다.
야고보는 본 절에서 '의롭다 함'의 근거가 오직 행함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하게 제시해 주고 있다.
아브라함의 의롭다 하심은 오직 행함만이 아니라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믿음'과 '행함'은 불가분리의 근본적인 속성을 지니고 있음을 나타낸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온전한 믿음이 아닌 죽은 믿음이며, 반대로 믿음이 없는 행함은 올바른 행함이 아니다.
믿음은 행함의 원칙으로 행함과 함께 역사하며 믿음의 바탕 위에서 자연스럽게 나오는 결과가 행함이다(Burdick).
그러한 의미에서 아브라함의 믿음도 행함으로 온전케 된 것이다(Manton, Calvin).
이처럼 믿음의 필연적인 결과로 행함이 나타날 때 믿음은 온전케 될 수 있다.
약 2: 23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 - 이에 성경에 이른 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이 이루어졌고, 그는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나니 ( 이에 경에 이른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이 응하였고, 그는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나니 )
야고보는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는 성경말씀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그는 아브라함의 의롭다 하심이 그의 순종의 행위로 인해 확고해졌으며 그는 하나님의 벗이라고 불림을 받았다고 말한다.
야고보는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 아니니라.'고 다시 말한다.
그것은 행함이 없는 죽은 믿음으로는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을 수 없다는 뜻이다.
1] 이에 성경에 이른 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이 이루어졌고,
'성경에 이른바'는 창 15: 6을 가리킨다. 그런데 창 15: 6에서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의로 여기시고 나서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치는 창 22 장의 사건까지는 30년의 시간이 흐른다.
이러한 시차로 인해서 혹자는 아브라함의 믿음이 완전하였기에 '응하였다'고 볼 수는 없다. 이 말 속에는 예언적 의미가 함축되어 있기에 하나님의 섭리로 인하여 이루어졌음을 분명하게 해주고 있다고 주장한다(Tasker).
또 다른 이는 이삭이 출생하기 전에 이미 하나님이 의롭다고 여겼기 때문에 이삭을 드리는 사건으로 인하여 '응하였다' 즉 의로 여김을 받았다고 하는 사실은 모순이라고 지적하고 있다(Luther).
더군다나 카톨릭주의자나 소키니안들(Socinians)은 아브라함을 하나님이 '의로 여길 때'의 아브라함의 의는 불완전한 것이었으나 이삭을 드리는 행함을 통하여 비로소 완전한 의가 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창 15장에서의 아브라함의 의는 이미 '완전한 의'였다.
'응하였고'(에플레로데)는 '플레로오'에서 온 말로서 성경 말씀을 '실행 하다'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드릴 때 이미 믿음이 전제되어 있었으며 그러한 아브라함의 믿음 자체가 창 22 장의 사건을 낳는 근거가 된 것이다.
그러기에 창 15: 6의 아브라함의 의는 이삭을 드릴 때 비로소 완전해진 것이 아니라 이미 15 장에서 완전한 '의'였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제물로 바쳤을 때 이러한 믿음의 모습을 구체적으로 보여준 것이다(Burdick).
따라서 야고보의 주장과 바울의 주장은 서로 상반되고 모순되는 것이 아니다. 다만 서로 다른 측면 즉 행함과 믿음의 측면을 각각 강조한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창 22: 1-14은 창 15: 6을 응하였다는 것이다.
2] 그는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나니
'하나님의 벗'(필로스 데우)이라는 칭호는 야고보가 사용하기 이전에도 이미 일반적으로 사용된 칭호이다.(Phillo).
* 대하 20: 7 - 우리 하나님이시여 전에 이 땅 거민을 주의 백성 이스라엘 앞에서 쫓아내시고 그 땅으로 주의 벗 아브라함의 자손에게 영영히 주지 아니하셨나이까?
* 사 41: 8 - 그러나 나의 종 너 이스라엘아! 나의 택한 야곱아! 나의 벗 아브라함의 자손아!
야고보는 이 칭호를 사용함으로 '믿음'과 '행함'을 통해서 '의'로 여김을 받은 아브라함이 하나님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였고 깊이 교제를 나누었음을 나타내고 있다.
하나님과 아브라함이 친밀한 교제를 유지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자신을 숨기지 않았음을 의미한다.(Tasker).
* 창 18: 17 -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나의 하려는 것을 아브라함에게 숨기겠느냐?
예수께서도 십자가의 비밀을 안 제자들에게 '이제부터는 종이라 하지 아니하고 친구라 하리라'고 하셨다(요 15: 15).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친구라 함은 아브라함이 이삭을 제물로 드렸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을 성취하는 것으로 아브라함에게 전적으로 특권을 부여하신 하나님의 은혜이다(Knox).
약 2: 24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 이로 보건대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은 아니니라. ( 이로 보건대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 아니니라. )
본 절에서 야고보는 아브라함의 예를 통하여 전체적인 결론을 맺고 있다.
진정한 믿음이란 정적인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역사에 대한 올바른 반응인 행함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믿음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응답으로서 순종으로 나타난다.
1] 이로 보건대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은 아니니라.
'믿음으로만 아니니라.'(우크 에크 피스테오스 모논)은 믿음도 우리가 가져야 하는 필수적인 것이고, 또한 아브라함처럼 행함으로써 나타내 보여야 하는 것임을 시사한다.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는 것은 믿음으로만이 아니다. 믿음을 통한 행동으로써 의롭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본문은 바울이 엡 2: 8-9에서 주장한 것과는 의미상의 차이가 있는 것처럼 보이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 엡 2: 8-9 – 8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9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
야고보의 주장은 진실된 믿음으로 인하여 행함이 산출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22절)
바울 또한 우리의 구원이 행함으로써가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오직 믿음이 있는 자는 선행을 무시하지 않는 자라고 주장하기 때문에 결코 믿음과 행함은 분리될 수 없다.
바울은 다만 율법을 지킴으로써 구원을 얻는다고 주장한 율법주의자들을 대상으로 말하였다.
* 롬 3: 20, 28 - 20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28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
야고보는 그리스도인 가운데 행함과 믿음은 별개라고 주장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말하고 있다(Martin). 따라서 바울과 야고보의 주장은 동일한 것이다(Burdick).
2] 3가지 잘못된 믿음 : 김정남 목사
< 믿음과 행함 >
오늘 우리가 읽은 부분은 <믿음과 행함>의 문제를 가장 직설적으로 다루고 있는 부분입니다. 즉 행함이 없는 믿음은 헛된 것이라는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20절). 그리고 그 실례로 아브라함의 예를 들어 설명하고 있습니다. 본문 21절 말씀을 보십시오.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드릴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그리고 24절 말씀을 보십시오. “이로 보건대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 아니니라.”
이 아브라함의 예를 면밀히 분석해 보면 기독교에서 말하는 행함의 정의를 알 수 있습니다. 이 정의를 분명히 알아야 행함에 관한 각종 오해를 풀 수 있습니다.기독교의 행함은 ‘의로운 행위를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그런데 사람들은 행함과 관련하여 ‘의로운 행위를 통해 구원받는 것’을 연상하여 오해를 합니다.
루터도 그랬습니다. 그래서 루터는 이 구절을 대단히 싫어했습니다. 그러나 이 구절에 대한 루터의 태도는 오해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믿음을 강조한 바울은 <구원의 길>에 대해서 더 강조했고, 야고보는 <구원의 결과>에 대해서 더 강조한 것입니다. 즉 바울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의로워질 수 있는 방법(칭의)’을 강조했고, 야고보는 ‘사람과의 관계에서 보이는 증거로서의 행위(성화)’를 강조한 것입니다. 헤이즈(D. H. Hayes)가 믿음과 행함의 문제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바울은 뿌리를 보고, 야고보는 열매를 보았다.”
< 3가지 잘못된 믿음 >
야고보는 오늘 부분에서 몇 가지 스타일의 잘못된 믿음을 지적합니다. 그것을 무엇일까요?
1. 믿음이 있노라 하는 믿음(14절)
본문 14절 말씀을 보십시오.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이러한 형태의 믿음은 말만 있고 행함이 없는 믿음입니다. “내가 그래도 유아세례를 받은 사람입니다”라고 말만 하고, 세례 받은 사람으로서의 모습은 전혀 보여 주지 못하는 믿음입니다. 특히 이 믿음은 입은 있는데 손은 없는 믿음입니다. 본문 15-16절 말씀을 보십시오.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더웁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흔히 거짓 사랑은 혀끝에 있고, 참 사랑은 손끝에 있다는 말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믿음에 실천적인 사랑의 손길이 있기를 원합니다.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은혜와 축복과 은사를 좋아합니다. 그런데 가장 큰 은혜와 축복과 은사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사랑의 손길을 베푸는 것’입니다.고린도전서 12장에는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9가지 은사가 나옵니다. 지혜, 지식, 믿음, 병 고침, 능력 행함, 예언, 영 분별, 방언, 방언 통역의 은사입니다.
그 9가지 은사를 말하고 나서 고린도전서 12장 31절은 말합니다.“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내가 또한 제일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그 9가지 은사보다 더욱 큰 은사, 가장 큰 은사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그 말을 하고 바로 이어서 고린도전서 13장의 사랑장으로 들어가 사랑의 중요성을 말하고 있습니다. 즉 가장 큰 은사는 ‘사랑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구체적인 사랑의 실천자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진정 복된 존재가 되기를 원하면 항상 사랑을 받으려고만 하는 채권자 의식으로 살지 마시고 이제는 사랑의 빚을 갚으면서 살겠다는 채무자 의식으로 살아야 합니다.
2. 믿고 떠는 믿음(19절)
본문 19절에는 아주 의미심장한 말씀이 나옵니다.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 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이 말씀을 보면 귀신들도 하나님의 유일성을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믿음은 영접의 믿음이 아니기 때문에 오히려 두려움을 생기게 합니다. 이 믿음은 머리는 있는데 가슴은 없는 믿음을 말합니다. 그래서 지식적으로는 아는데 가슴으로는 그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이런 믿음을 가진 사람은 두려움의 병에 걸릴 확률이 높습니다. 그래서 조금만 안 되는 일이 있어도 그들은 이렇게 생각합니다. “내가 이래서 이렇구나”하고 연관시키며 죄책감과 두려움에 빠집니다.
예를 들어, 길을 가다가 자동차 사고를 만났습니다. 그러면 믿고도 떠는 믿음을 가진 사람은 대뜸 이렇게 연관을 짓습니다. “내가 이렇게 행동하여 하나님을 섭섭하게 해서 그래!” 정말 그럴까요? 솔직히 얘기하면 하나님을 섭섭하게 한 것이 그것뿐일까요? 이런 믿음을 가진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도 그런 식으로 연관시킵니다. 특히 무당 섬기던 사람들은 그처럼 떠는 믿음을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무당은 협박 공갈을 하면서 사람들에게 두려움을 심어주는 선수입니다. 그래서 무속적 신앙, 기복적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하나님의 도우심을 믿지 못하고 늘 움츠려 삽니다.
제가 인천에서 목회할 때 열심히 나오던 집사가 나오지 않았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까 그 전에 있던 교회의 한 전도사가 그분에게 도저히 하지 못할 말을 했던 것입니다. “교회를 옮겨서 당신 자녀가 5년 안에 큰 사고를 만날 줄 알라.” 결국 그 말이 겁이 나서 원래 있던 그 교회로 돌아갔습니다. 그때 얼마나 안타까운 마음을 가졌는지 지금도 그때 기억이 생생합니다. 여러분! 귀신과 같이 떠는 믿음을 가지고 살지 마십시오. 그 시간에 선하고 인자하신 하나님을 가슴으로 받아들이십시오. 그리고 어떤 사건으로 하나님의 메시지를 깨달았으면 그때 두려움과 죄책감에 빠져서 수렁으로 빠져들지 말고, 하나님을 더욱 신뢰하고 말씀대로 살겠다는 다짐을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3. 죽은 믿음(26절)
한때 생명이 있었지만 지금은 생명이 없는 믿음을 말합니다. 시체도 사람은 사람이지만 생명이 없는 사람인 것처럼, 행함이 없는 믿음은 ‘믿음이 시체가 된 것’이란 말입니다. 이 믿음은 처음부터 완전히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이제까지 속은 믿음으로 살아 왔다는 말도 아닙니다. 전에는 믿음이 있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지금은 믿음이 없는 것을 말합니다.
어떤 분은 기독교 교리를 아주 잘 알고 있습니다. 성경 지식이 상당합니다. 웬만한 교인들보다 성경 말씀을 더 많이 알고 있습니다. 믿음을 부인하는 것도 아닙니다. 어떤 교리를 믿고 있습니다. 그런데 생활은 엉망인 사람이 있습니다. 유흥적인 생활을 하고, 도박과 게임에 몰입하고, 한과 미움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처럼 진리가 삶의 변화를 일으키지 못하는 것이 죽은 믿음입니다. 사실상 이것이 더 골치 아픈 것입니다.
생명을 낳는 것보다 죽음 사람을 살리는 것이 어렵듯이 죽은 믿음을 살려 내는 것은 아주 어렵습니다.그래서 첫 사랑은 그리 쉽게 회복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첫 사랑이 희미해졌음에도 불구하고 일단 하나님의 일에 뛰어 들어 보십시오. 그러면 하나님이 믿음을 회복시켜 주시는 역사도 반드시 있게 될 것입니다.
야고보는 이와 같은 여러 가지 잘못된 믿음의 형태를 지적하면서 26절에서 행함이라는 열매의 중요성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그래서 본문 26절은 2장 전체의 내용을 반영하는 말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성숙한 신앙인과 성숙하지 못한 신앙인의 차이는 행함의 차이입니다. 성숙하지 못한 사람일수록 진리를 말로만 합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믿음에 실천이 있느냐 없느냐를 살피는 것이 중요합니다. 말로만 떠들면 아무도 좋아하지 않고 결국 믿음의 축복도 없습니다. 여러분들의 믿음을 행함이 있는 행동하는 믿음으로 다듬어 가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