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미예수님!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은 ‘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입니다. 성체 성혈 대축일에 대해 궁금한 것이 많습니다. ‘교회가 언제부터 성체 성혈 대축일을 지냈을까요?’ ‘성체 성혈 대축일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어떻게 해야 성체 성혈 대축일을 올바르게 잘 지냈을 수 있을까요?’
원래는 교회가 그리스도의 성체 축일과 그리스도의 성혈 축일을 따로 지냈습니다. 그러다가 제2차 바티칸 공의회(1962-1965) 이후 1970년에 그리스도의 성체 축일과 그리스도의 성혈 축일을 하나로 합쳐서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로 지내고 있습니다.
그럼 먼저, 그리스도의 성체 축일이 언제 시작되었는지 알아봅시다. 1246년에 ‘벨기에’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벨기에의 ‘리에주’라는 도시에서 처음으로 성체 축일이 시작되었습니다. 벨기에는 경상도 크기의 아주 작은 나라입니다. 인구는 약 1,100만 정도입니다. 벨기에는 4나라(네덜란드, 프랑스, 룩셈부르크, 독일)에 둘러 싸여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가장 거룩한 몸’을 기념하는 ‘그리스도의 성체 축일’은 13세기에 시작되었습니다. 벨기에의 코르닐롱 山 수도원의 성녀 율리아나 수녀가 리에주의 주교에게 제안해서 1246년 교구의 축일로 그리스도의 성체 축일을 지내기 시작했습니다. 18년 뒤인 1264년에 교황 우르바노 4세가 그리스도의 성체 축일을 모든 교회가 지키도록 했고, 빈 공의회(1311~1312)에서 교황 클레멘스 5세가 전임 교황의 결정을 승인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가장 귀한 피(Sanguis Preciosissimus Christi)’를 기념하는 ‘그리스도의 성혈 축일’은 19세기부터 지내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가 1970년부터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을 지내고 있습니다.
우리는 자주 성체조배를 합니다. 성체조배는 초대 교회 때부터 해왔던 가장 오래된 가톨릭교회의 전통 가운데 하나입니다. 초대 교회에서는 미사가 끝나면, 미사에 참석하지 못한 환자들에게 성체를 모시고 가서 봉성체를 해주었습니다. 순교자 유스티누스(-165?)와 테르툴리아누스(155?-240?)가 이런 사실을 증언합니다.
박해 시대에는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성당’이 없었습니다. 박해 시대에 오늘날처럼 성당이 일정한 장소에 있었다면, 그것은 ‘나 잡아가시오. 우리 잡아가시오.’라고 외쳐대는 것과 같았기 때문입니다. 박해 시대에는 성체를 특정한 장소에 모셔둔다는 것이 불가능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성체조배는 313년 박해가 끝나고 나서 약 350년경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성체를 성당에 특별하게 모셔둔 것에 대해 카이사리아의 대 바실리우스(+379)가 최초로 증언합니다. 박해가 끝난 뒤, 고대 교회에서는 수도원이 크게 번성했습니다. 왜냐하면 수도자가 된다는 것은 박해 시대의 순교자들의 순교 영성을 이어받는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카이사리아의 주교 대 바실리우스의 증언에 따르면, 수도원에서 미사를 거행할 때, 성체를 성합 3개에 나누어 넣었다고 합니다. 첫 번째 성합의 성체는 미사에 참석한 신자들이 받아 모셨고, 두 번째 성합의 성체는 수도자들에게 주었고, 세 번째 성합에 있는 성체는 제단 위에 매달아놓은 황금색 비둘기 모양의 용기에 보관해두었습니다.
왜 제단 위에 매달아놓은 황금색 비둘기 모양의 용기에 성체를 넣어 두었을까요? 두 가지 목적 때문입니다. 첫 번째 목적은 신자들로 하여금 성체조배를 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오늘날 감실에 해당합니다. 두 번째 목적은 환자들에게 봉성체를 해주기 위해서 여기에 보관해두었습니다.
성체에 대해 안티오키아의 이냐티우스와 리옹의 이레네우스가 이렇게 말합니다.
그리스도의 몸과 피는 … 불사불멸의 약입니다.(안티오키아의 이냐티우스 『에페소 신자들에게 보낸 편지』 20.)
성체를 받아 모실 때 … 우리는 영생에 이르는 부활의 희망을 갖는다.(이레네우스, 이단논박」Ⅳ.18,5.)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 모두 성체를 ‘영생에 이르는 부활의 희망을 갖게 해주는 불사불멸의 약’으로 받아모시려고 노력합시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