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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상16:14-23) 마티즈 엔진의 10톤 트럭이다.
우리가 함께 읽은 말씀중심으로 <마티즈 엔진의 10톤 트럭이다.> 이라는 제목의 하나님말씀 증거 합니다.
'마티즈 엔진의 10톤 트럭이다'
마티즈 차 좋습니다. 공간이 부족한 우리나라에서는 아주 효율적으로 Transportation의 역할을 잘 해줄 수 있는 능률적인 차입니다. 그런데 그 차의 엔진은 그 차의 body와 맞아야 됩니다. 마티즈 엔진에 10톤 트럭을 장착 했다면 가히 짐작이 갑니다. 아예 엔진이 타버리지 않겠나 생각이 듭니다.
오래 되었습니다. 연예인 교회에서 전도사로 교회를 섬기고 있을 때, 어느 집사님과 함께 방금 나온 소나타 자동차를 타고 평창동인지 상명여중고가 있는 언덕이었습니다. 운동장에서 체육대회가 있어서 저를 태우고 그 집사님이 언덕을 올라가는데 자꾸 차 시동이 꺼져요. 나중에 얘기를 들어봤더니 우리나라 자동차 사업이 원활하지 못하던 때라서 새로 나온 소나타에 그 아래 급 프레스토의 엔진을 소나타에 집어넣어버린 것입니다. 소나타 차체는 무거운데 엔진이 감당을 못하니 언덕길을 올라가다 자꾸 시동이 꺼져서 못 올라가고 말았어요. 옆에 세워두고 걸어서 올라간 기억이 납니다. 이 밸런스가 상당히 중요하지요.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본문 속에도 이런 삶의 언밸런스가 우리들에게 메시지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자, 지금 이야기는 바야흐로 이렇게 전개되고 있습니다. 사울이 하나님께 버림을 받고 여호와의 신, 성령께서 사울에게서 떠나십니다. 반면에 목동인 다윗에게는 하나님의 신이 임합니다. 하나님의 신이 크게 특별한 능력을 보유하는 자로 다윗의 삶에 임하게 됩니다. 그때 사울 왕이 하나님의 신이 떠나자마자 무척 번뇌해서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서 죽을 지경이 됩니다. 15절에 “여호와께서 부리시는 악령이 사울을 번뇌케 했다.”라고 합니다.
‘여호와께서 부리시는 악령’은 하나님의 허용한도 내에서 -마치 욥에게 사탄의 역할을 허용하셨던 것처럼, 그래서 자녀를 데려가고 재산을, 건강을, 다 가져가도록 허락하셨던 것처럼-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하나님의 섭리를 준행하는 악역을 담당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섭리 중에 심판의 섭리가 있고, 또 우리를 바른 길로 이끄시기 위하여 인생채찍이라든지 불행한 일을 당하게 하신다든지 그런 일도 있을 수 있고, 오늘 여호와께서 부리시는 악령은 하나님의 허용한도 내에서 역할을 하는 악령을 말할 것입니다. 이런 악령이 임해서 사울로 번뇌케 했다고 합니다. 그런 과정 속에서 역사는 진행이 되면서, 다윗은 사울 왕의 왕실 안으로 들어오게 되고 왕을 가까이서 보게 하십니다.
이러한 이중의 섭리가 진행되고 있는 가운데 오늘 우리가 함께 집중해 보고 싶은 것은, 이 사울의 번뇌에 착안해서 함께 생각해 보면 좋겠다는 것이에요. 지금 '악령이 사울을 번뇌케 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14절에 “여호와의 영이 사울에게서 떠나고 여호와께서 부리시는 악령이 그를 번뇌하게 한지라”라고 하는데 이 '번뇌'라고 하는 말을 참 잘 번역했다고 봅니다. 왜 사울이 번뇌하게 됩니까? 번뇌는 불화(火)자에 머리혈(頁)자를 써서 번거로울 번(煩)자인데 머리가 타는 겁니다. 머리가 지금 빠작빠작 타면서 연기가 납니다. ‘뇌’자는 괴로워할 뇌(惱)자로 머리가 빠작빠작 타고 지끈지끈 하면서 괴로운 상태를 말합니다. 다 아시는 대로 사울이 왕을 위하여 준비된 사람도 아니고, 왕도의 교육을 받은 사람도 아니고 인격적으로 왕이 될 만한 어떤 구석이 있어서 왕이 된 게 아닙니다. 하나님의 신이 임하고 하나님의 영의 감동함을 통하여 전쟁을 수행하게 되고 왕위를 지금 수행해 나가고 있는 것입니다. 왕의 직능을 수행해나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치 않음을 통하여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 하나님 앞에서의 '나'를 상실함에 따라서 하나님의 버림을 받게 되고 하나님의 영이 떠나시게 됩니다. 그러자 하나님의 영의 힘, 하나님의 신의 힘, 하나님의 신에 감동함을 통하여 왕위를 수행하던 이 사울에게, 갑자기 왕위에 앉아있는 그 자리 왕으로서 수행해야 될 모든 직능이 너무너무 무거운 것으로 느껴지기 시작했다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자기본래의 인간적으로 갖고 있었던 모습을 되찾고 또 하나님의 신이 떠나면서, 이 세상을 지배하고 있는 악한 영들이 하나님의 허용 안에서 사울에게 들어오고 왕위가 너무너무 무겁게 압박을 느끼게 했다는 겁니다. 도저히 수행할 수가 없어요. 사울의 능력은 마티즈 자동차의 엔진인데 왕위는 10톤 트럭이 돼 버린 것이에요. 여기서 10톤 트럭을 마티즈 엔진으로 끌고 가려니 이 엔진이 완전히 불타버리는 것으로 번뇌(煩惱)하는 겁니다. 도대체 내가 어떻게 해야 되고 이 왕위를 어떻게 수행해 나가야 하느냐? 머리가 타는 거예요.
여기서 아주 중요한 신앙의 삶의 모습, 삶의 원리를 우리가 대면할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수행해야 되는 삶의 과제가 있지 않습니까? 직장에 나가서 일을 하지요. 사업을 경영하고 장사를 합니다. 자식을 키웁니다. 또 남편과 아내의 관계를 유지해야 합니다. 시어머니 관계, 시아버지 관계, 시숙과 아니면 시누이와 올케 관계, 그리고 유산, 이런 모든 문제들 정말 마음에 숙제로 주어지는 문제들 있지 않습니까? 이러한 삶의 문제들과 우리의 관계에서 어떤 원리가 작용하고 있을까요?
어차피 하나님을 믿고 사는 사람들은 자기 능력으로 사는 게 아니에요. 하나님의 영이 임하면서 성령이 임하고 성령의 힘으로 살아갑니다. 보혜사 성령께서 오셔서 함께 살아갑니다. 이때 여호와 하나님의 영, 성령으로 충만해질 때 나타나는 일은 일이 작게 보이고 모든 일이 가볍게 느껴집니다. 그러므로 자식을 키운다면 그 자식을 키우는 무게의 절대 질량이 없다는 것이에요. 그 자식을 키우는 일은 어려운 일이다. 무거운 일이다. 가벼운 일이다. 쉬운 일이다. 이런 절대 질량이 없는 겁니다. 상대적인 것인데 나의 상태가 하나님의 영으로 충만해지면, 자식을 기르는 것처럼 쉽고 재밌고, 감사한 일이 없고, 나의 상태가 하나님의 영이 가득차지 않고, 이 세상의 영으로 지배돼 버리면 그보다 무거운 일이 없게 느껴지게 되는 겁니다.
지금 태승철에게 대통령의 일을 맡기면 정치 모릅니다. 경제 잘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이 임하시면 대통령직조차도 너무너무 가볍게 행할 수 있고, 반면에 내가 밥 먹고 사는 일조차도 하나님의 영이 임하시지 않으면 한없이 한없이 무겁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이 '모든 인생의 문제에 절대 질량은 없다.'라는 것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삶의 과제, 삶의 문제, 삶 자체의 절대 질량은 없다. 언제나 상대적이다. 내가 성령이 충만하면 가벼워지고 아무것도 아닌 것이 돼 버리고, 세상의 영이 들어와서 나를 지배해 버리면 한없이 무거운 것이 돼 버리고, 도저히 내 힘으로 할 수 없어서 맨 날 하는 게 고민입니다. 고민, 번뇌, 머리가 탑니다. 머리가 타요. 왜냐하면 모든 삶의 문제 크고 작은 모든 것들이 얼마나 무거운지, 10톤 트럭만큼 무거워서 내 역량은 마티즈 엔진처럼 돼 버리고 엔진이 자꾸 꺼지는 거예요. 불타버리거나 꺼지는 겁니다.
여러분! 특징이 있어요. 하나님의 영이 우리에게 충만하면 일이 작게 보입니다. 일이 가볍게 보입니다.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보입니다. 너무 쉽게 여겨집니다. 또 하나 특징은 아주 작은 일도 성실하게 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영이 충만하게 임한 사람에게는, 큰 일도 작게 보이지만 또 하나의 특징은 작은 일, 다시 말해서 세상 사람들이 작다고 여기는 일, 그 일에도 너무나 충실하게 성실하게 임합니다.
룻기에 보면 룻이 이삭을 주우러 갔다가 보아스를 만납니다. 보아스를 만나서 다윗의 왕가에 끼어들게 되지 않습니까? 요셉이 보디발의 집에 노예로 팔려서 노예로 태어난 것처럼 충실하게 임합니다. 감옥에 들어가서는 죄수로서 충실하게 살아가는데 이게 특징이에요. 예수님이 대단한 일 하셨습니까? 기껏해야 갈릴리 지역을 중심으로, 나사렛 동네를 중심으로 3년 동안 사람 1:1로 만나는 전도생활 하시다가 세상 뜨셨습니다. 하나님의 영이 충만한 사람은 특징이 있다고요. 큰일도 작게 보이고 반면에 세상 사람들이 작다고 여기는 일에도 아주 충성을 다합니다.
또 거꾸로 악한 영이 임하고 세상 영이 임하면 일을 굉장히 크게 느낍니다. 너무너무 무겁게 느낍니다. 그래서 우울해집니다. 도저히 내가 할 수가 없습니다. 해야 된다는 생각과, 할 수 없다는 생각사이에서 머리가 타버리는 겁니다. 오늘 본문의 사울처럼 10톤 트럭의 무게를 느끼면서 마티즈 엔진의 힘을 가지고 번민하며 불타버리고 마는 겁니다. 반면에 또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세상의 악한 영이 우리에게 들어오면 세상 사람들이 크다고 여기는 일만 쫓아갑니다. 지금 내게 주어져 있는 일을 성실하게 하지 못하고, 마음이 계속 떠서 세상 사람들이 크다고 여기는 일, 세상 사람들이 높다고 여기는 일, 세상 사람들이 위대하게 여기는 일만 계속 쫓아가게 돼 있어요. 사업을 해도 뭐 허황되게 크게 생각하는데 이게 문제라는 것이에요. 하여간 세상 사람들의 기준으로 무엇이든지 큰 것을 마음으로 소원하면 백발백중 안 될걸요? 백발백중 안돼요. 오히려 작은 일에 작은 소원을 갖고 성실한 사람이, 결과적으로 세상 사람들의 가치관으로 봐서도 큰일을 행하지, 세상 사람들의 가치관에서 큰 것을 마음으로 소원하는 사람치고 그것을 이루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것은 신앙적 원리가 아니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가 없어요. 하여간 악한 영이 임하고, 악한 영의 지배를 받게 될 때 아무것도 아닌 일도 크고 버겁게 느껴질 뿐 아니라, 세상 사람들 눈에 작게 보이는 일은 다 시시하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 눈으로 보면서 큰일을 향하여 발동을 걸고 시작을 하는데 이게 위험한 얘기입니다. 절대로 이러시면 안돼요.
하나님의 신에 감동이 될 때는 큰일도 작은 일도 없어요. 그리고 세상 사람들 눈에 작게 보이는 그 일에 있는 힘을 다합니다. 다윗이 지금 목동 일을 합니다. 왕 앞에서 수금을 탑니다. 이 수금을 타게 될 때에 악령이 나간다고 하는 얘기는 이렇게 볼 수가 있습니다. 악령이 지금 무엇을 가지고 사울에게 압박을 가해 갑니까? 이 '번뇌한다'는 얘기는 ‘압박을 가한다. 놀라게 한다.’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영이 떠나자마자 사울의 능력과 한계가 마티즈 엔진이 돼 버렸는데, 갑자기 10톤 트럭을 딱 얹어 놓으니 압박이 되고 놀라는 겁니다. 그런데 다윗이 수금을 탑니다. 수금을 타면 그 소리에 빠져 있다 보니 사울의 마음이 왕위를 붙잡지 않고 빠져 나오는 것이에요. 빠져 나와요. 빠져나오도록 통로가 되어주는 것이에요. 거기서 빠져나올 때는 그 소리에 이끌려 나올 때는 번뇌에서 놓임을 받게 되고 그 소리가 없으면 다시 그 자리에 마음이 붙어 버리는데 이게 참 문제지요.
우리가 그런 말 합니다. ‘맡긴다. 버린다. 내려놓는다.’라고 하는데 우리가 못해요. 이 악한 영이 우리에게 갖다 붙이고 있기 때문에, 이 짐을 우리에게 씌우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할 수 없어요. 그러면 어떻게 빠져나올 수 있습니까? 어떻게 이 번뇌로부터 삶의 무게로부터 빠져나올 수 있습니까? 오직 한 가지 다윗의 수금대신에 영원히 유효한 하나님의 길이 있다는 것이에요. 그게 십자가사건 아닙니까? 십자가사건은 내가 죽었음을 시인하는 것이고 고백하는 것이면서 동시에 하나님의 말씀이에요. 십자가에 달린 주님을 우리가 보면 그게 이런 말씀입니다. ‘이게 바로 너다. 이렇게 십자가에서 손이 못 박혀 손을 뗄 수 없고, 발이 못 박혀 발을 뗄 수가 없고, 배에 창이 들어와서 힘을 쓸 수가 없고, 머리에 가시면류관이 씌워있어서 머리를 쓸 수 없는 것, 번뇌할 수 없는 것이 바로 너다.’라고 하는 하나님의 음성이 계속 들려오는 겁니다. 그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거예요. 내가 죽는 게 아니고.
우리는 ‘내가 죽어야 돼.’라고 하는데 내가 어떻게 죽어요? 자살합니까? 그게 아니라 십자가를 바라보고 있는 동안에, 모세가 구리 뱀 장대를 바라보라고 했잖아요. 마찬가지로 주님의 십자가를 마음으로 바라봅니다. 바라보고 있는 동안에 계속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거예요. ‘이게 바로 너다. 이게 바로 너다.’ 자, 자식이라는 삶의 과제 앞에 있습니다. 아이고, 힘들어 죽겠습니다. 이때 그 자식의 문제를 번뇌한다는 것은 붙잡는 것이거든요. 붙잡기 전에 십자가를 먼저 바라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십자가에 달려 죽은 주님의 모습이 바로 너다. 너다.’라고 자꾸 이 말씀을 하세요. 내가 마음에서 십자가를 기억해내면 자꾸 하나님이 ‘이게 너다. 이게 너다.’라고 말씀하시잖아요. 이 하나님의 말씀이 나를 사로잡아 가는 겁니다. 진짜 그게 나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죽음이 내 죽음이 되는 겁니다. 내가 죽는 게 아니라 말씀을 듣는 가운데 죽어지는 거예요. 우리가 어떻게 죽어요? 우리가 어떻게 맡겨요? 우리가 어떻게 내려놓아요? 내려놔 집니까? 안 돼요. 내려놔 지지가 않아요.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고 있노라면 하나님이 계속 말씀하시는데 ‘이게 너다. 이게 너다. 이게 너다.’라고 말씀하시는 가운데 내 마음이 하루 지나, 이틀 지나, 삼일 지나면서 점점 그렇게 설득이 돼 가는 거예요. 그 말씀에 사로잡히는 거예요. ‘그래 나는 죽었다. 아, 내가 죽은 것이구나.’라고 실지로 삶의 과제 앞에서 내가 죽어버립니다. 이때 행2:38절에 “십자가의 주님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들에게 하나님이 성령을 선물로 주신다.”라고 하시지 않습니까? '선물로 주신다.'는 것은 성령이 임합니다. 성령이 임하자마자 그 성령의 감동으로 일을 해 나가는 것이에요. 이게 뭡니까? 갈2:20절에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시는 것이라”라는 것입니다.
보혜사 성령이 사시는 것이에요. 보혜사 성령이 그리스도의 영 아닙니까? 그 성령이 사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너무너무 가벼운 삶이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 하나님의 신이 내게 임하게 될 수 있는 유일한 길이 뭡니까? ‘주님의 십자가를 보고 이게 너다.’라고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겁니다. ‘이게 너다. / 아멘. 이게 납니다. 맞습니다.’라고 하나님의 말씀을 계속 아멘으로 받아들이는 겁니다. 자식 앞에서 ‘손이 못 박혀 있는 것이 바로 너다.’ 라고 할 때 자식이 무슨 일을 하든지 간에 나는 꼼짝 못하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사업이 망해 가는 것 같아도 ‘이게 너다.’라는 말씀 거부해 버리고, 내가 붙잡고 번민해 버리는 거예요. 자식 앞에서 ‘이게 너다.’ 라는 십자가의 말씀 거부해 버리고 내가 번민하는 겁니다. 내가 번민하는 거예요. 선교회 앞에서 하나님의 말씀 ‘이게 너다.’ 라는 말씀 거부하고, 태 목사가 이 선교회 붙잡고 번민하는 겁니다. 불이 타는 거예요. 마치 10톤 트럭을 끌겠다고 마티즈 엔진을 가지고 시동을 걸고 가는 겁니다. 그러니 편할 날이 있겠으며 행복할 날이 있겠으며 감사와 기쁨의 날이 있겠느냐는 겁니다.
중요한 것은 여러분! 꿈을 갖는 것도 아니고 목표를 정하는 것도 아니에요. 제발 착각하지 마세요.
목표를 정해놓고 비전을 갖고 10톤 트럭을 이끌어 가려고 하지 마세요. 비전이 10톤 트럭이 돼요. 목적이 10톤 트럭이 돼요. 목표가 10톤 트럭이 돼요. 그런 말에 속지 마세요. 여러분이 바라볼 것은 목표가 아니라 주님의 십자가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영이 임하시고 그 영이 목표를 갖습니다.
아니 십자가에 죽은 자들에게 무슨 비전이 있어요? 무슨 꿈? 무슨 목적? 오직 십자가에서 죽은 자에게 임하시는 하나님의 영이, 비전을 가지시고 목적이 있으시고 우리에게 힘이 되신다는 거예요. 우리가 힘을 받아서 행하는 게 아니라, 우리 안에 들어오셔서 우리가 행하는 것 같지만, 하나님이 직접 행하시는 것입니다. 10톤 트럭에 맞는 엔진이 장착되고, 마티즈에 맞는 엔진이 장착되고, 이렇게 해서 삶이 밸런스가 맞게 되고 거기에 평강이 임하고 기쁨과 감사가 임하게 되는 것입니다.
기도하십시다.
하나님!
하나님의 신이, 하나님의 영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너무나 아무것도 아닌 일도 천만근, 만만근이 됩니다. 아버지! 주님의 십자가 바라보고 있는 동안에 ‘이것이 너다.’라고 하신 말씀이 내 마음에 들어오고 내 마음을 설득하셔서 온전히 세상 앞에서 죽게 하시고 그러므로 하나님의 영이 충만히 임하시사 하나님의 영이 내게 주어지는 모든 삶의 과제들을 당신의 뜻대로 행하시는 복된 삶을 오늘 하루도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첫댓글 잠시 세상일로 아무것도할수없을만큼 마음을빼았겨서 지난밤에는 십자가에말씀을 외면하고 밀어냈습니다 하지만 다음날아침 제자신도모르게 다시십자가에말씀을 붙잡는 저를보았습니다 하나님에자녀임을 하나님께서 함께하심을 십자가만이정답인것을 미련한제가 다시깨달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