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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위대한 전사 조원제
마루에 햇볕이 반나마 젖어들어 있었다. 울타리를 치고 있는 탱자나무들 윗가지마다 해맑은 연초록빛 새순들이 한 뼘 길이로 솟아오르고, 그 연하디 연한 새순들에는 또한 연한 가시들이 서로 엇갈림하며 돋아나 있었다. 그 연초록 새순들은 한 해를 지낸 바로 밑가지와, 여러 해를 지낸 더 아래쪽 밑가지들이 띠고 있는 진초록빛과 확연하게 구분되었다, 그 연한 새순들이 여름을 지내고, 너무 진해 검은빛이 도는 초록빛 탱자들이 샛노랗게 익어 가는 가을이 오면 믿을 수 없도록 억세고 단단하게 변해버렸다. 물론 그 빛깔도 밑가지들과 구분할수 없도록 하나가 되어버리고, 가시들도 언제 부들거리며 휘어지고 구부러졌나 싶게 가지를 닮아 억세고 단단해져 있었다. 울타리를 이루며 촘촘하게 늘어선 탱자나무들의 가지가지마다 작고 하얀 탱자꽃들이 수없이 피어나 있었다. 그 작고 하얀 꽃들은 갓 돋아나기 시작한 초록빛 잎들 사이사이에서 눈송이들이 얹힌 것처럼 흰빛의 정갈함을 깔끔하게 드러내고 있었다. 탱자나무울타리는 토담이나 싸리나무울타리, 대발울타리 같은 것들과는 달리 계절을 따라 그 모습을 다양하게 바꾸는 정취를 지니고 있었다. 봄이면 꽃울타리였고, 잎 무성한 여름이면 으레 위통을 벗어제치고 등물도 하고, 그런 모습인 채로 감나무 그늘아래 놓인 평상에 나앉기도 했다. 그런데 무성해진 탱자나뭇잎들은 그런 모습들을 자연스럽게 가려주는 초록비단이 아닐 수 없었고, 그런 흉스런 모습을 안 보여도 되는 겨울이 오면 탱자나무 울타리도 잎 다 떨군 가시울타리로 바뀌어있었다. 남도의 농가에 싸리나무울타리나 대발울타리보다 탱자나무울타리가 더 많은 것은 무슨 까닭일까. 싸리울타리나 대발울타리는 몇 년 간격으로 새로 울을 쳐야하는 번거로움이 있지만 탱자나무는 한번 심어놓기만 하면 해가 갈수록 싱싱하고 실한 울타리가 되는 평생묵기라서 그런 것만은 아니었다. 절기가 바뀜에 따라 변하게 되는 농가생활의 지나친 노출을 서로간에 살짝살짝 가리는데 탱자나무는 안성맞춤이었던 것이다. 그건 생활과 자연을 적절하게 조화시켜 활용한 슬기고 지혜였던 것이다. 그리고 또 한가지, 토담이든 싸리울이든 탱자나무울이든 모두가 일치된 공통점을 지니고 있었다. 토담을 쌓되 그 높이는 고샅을 걸어가는 보통 키의 어른 눈높이 정도로, 그냥 걸어갈 때는 집안이 안 들여다보이고 무슨 볼일이 생겨 사람을 부르거나 인기척을 낼 때는 발뒤꿈치를 들어 목을 늘이면 집안이 다 들여다 보이도록 했다. 나머지 울타리들도 아무 때나 눈길만 돌리면 집안을 들여다보이도록 했다. 네 가지 울이 갖는 공통점은 모든 집들이 개방되어 있다는 점이다. 그것은 한 마을이 한 집안처럼 감추는 것 없이 터놓고 살며 서로서로 정을 나눈다는 친족의식과 집단의식의 표현이었다. 그러니까 울타리들은 도둑을 막자고 친 것이 아니라 경계의 표시일 뿐이었다.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서민들의 삶의 모습이었고, 예로부터 부자면 부자일수록 권세가 크면 클수록 담은 두껍고, 높아지게 마련이었다.
하얀 꽃 곱게 핀 탱자나무 울타리를 따라 암팡지게 생긴 암탉이 느릿느릿 발을 옮기다가 한바탕씩 땅을 헤집어 파고는 했다. 그 뒤를 예닐곱 마리의 병아리들이 종종거리며 따라가기도 하고, 쪼르륵 달려가기도 했다. 그런 병아리들이 연방 삐약삐약 그 맑고 고운 소리들을 내고 있었다. 병아리들이 서로 다투어 쪼르륵 달려가는 것은 암탉이 한바탕씩 땅을 헤집어판 다음이었다. 서로 앞서려고 삐약거리며 몰려간 병아리들은 새로 파헤쳐진 땅에 주둥이들을 대고 정신없이 먹이를 쪼아댔다. 그러다가 어떤 놈들은 지렁이 한 마리를 서로 양쪽에서 물고 싸움판을 벌이기도 했다. 서로 먹이를 뺏으려는 그 싸움은 한치 양보도 없이 맹렬하고도 치열했다. 어떤 놈은 큰 지렁이를 삼키느라고 목을 뺀 채 뺑뺑이를 돌며 애를 썼고, 어떤 놈은 지렁이를 물고 다른 놈들이 덤비는 것을 피해 제 어미의 반대쪽으로 줄행랑을 치고 있었고, 어떤 놈은 어미닭이 파헤친 곳으로 너무 빨리 달려나가다가 넘어져 뒹굴어지거나 코방아를 찧기도 했다. 그럴 때면 삐약거리는 소리는 더 유난스러워졌다. 그러나 그 병아리들은 금방 몸을 일으켜 다시 기를 쓰며 달려가는 것이었다.
"참말로, 삥아리새끼덜도 묵고 살겄다고 저리 난리판굿인디... 사람이야 당연지사제." 외서댁은 병아리들의 그런 모양을 마루에 걸터앉아 하염없이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암탉은 병아리들이 어쩌거나 간에 거들떠보지도 않고 그저 땅만 헤집어파며 느린 걸음을 옮겨놓고 있었다. 새끼들을 먹여살리고자 하는 암컷의 진지하고 충실한 모습이었다. 장닭은 어디서 무엇을 하는지 보이지 않았다. 외서댁은 무심결에 콧물을 들이켰다. 떼놓고 온 두 자식의 모습이 왈칵 밀려들며 가슴을 흔들었고, 콧등으로 물줄기가 찡하니 내리뻗쳤던 것이다. 딸년은 딸년대로 애비없어져 가엾고, 아들놈은 아들놈대로 애비한테 버림받아 불쌍했다. 새끼정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애비는 흉물로 꿈에 볼까 무서우면서도 그 새끼는 젖꼭지 물리다보니 딸년한테나 마찬가지의 정이 홈통을 대게 되었다. 곡식이 땅이 없고 씨만 있어 가지고는 소출을 못 보듯이 사람 목숨이라는 것도 마찬가지라서 그것을 뱃속에 넣고 키워낸 정은 뗄래야 뗄수가 없는 모양이었다. 그것이 허벅지게 먹어대면서도 어쩐 일인지 살이 실하게 오르지 않았고, 이상하게도 달수가 겨워도 목을 잘 겨누지 못했다. 친정어머니 말로는 늦되는 애들이 있다고 했지만 마음 한구석은 영 께름칙했었다. 기둘려, 이 엠씨가 존 시상 맹글어 기엉코 느그덜헌테로 갈 것잉께. 고상 되드락도 이 엠씨 원망은 말어. 이 엠씨도 호강 날라리로 사는 것이 아닝께로. 외서댁은 또 콧물을 들이키며 손등으로 코밑을 썩 문질렀다.
구굴 꿀꿀, 구구구...
암탉이 갑자기 이상스런 소리를 내며 두 날개를 늘어뜨렸다. 그 소리는 알을 품을 때 내는 소리와는 달랐고, 장닭을 등에 업거나 알을 낳고나서 내는 소리와는 더욱 거리가 있었다.
그러자 병아리들은 제각기 하던 동작들을 멈추고는 일제히 어미닭을 향해 내닫기 시작했다.
병아리들의 달리기는 그 어느때 없이 다급하고 빨랐다. 그러다보니 나뒹굴어지는 놈, 한쪽다리가 헛짚어 기우뚱하는 놈, 흙더미에 머리를 박치기하고 구르는 놈, 가지각색이었다. 넘어지고 뒹굴어진 놈들은 지체없이 일어나 또 달리기 시작했다. 어미닭에게 당도한 병아리들은 늘어뜨린 두 날개 속으로 쏙쏙 자취를 감추었다. 워메, 솔갱이가 떴는감네! 외서댁은 괜히 마음이 다급해져 마당으로 내려섰다. 그리고 고개를 젖혀 하늘을 두리번두리번 살펴보았다. 하늘에는 실구름이 놓고 길게 떠 있을 뿐 어디에도 솔개는 보이지 않았다. 요상시러라...
외서댁은 이상스럽게 생각하며 고개를 되돌렸다. 그런데 귀에 들리는 소리가 있었다. 탱자나무들 가지사이에서 짹짹거리는 참새들 소리였다. 참새들이 태평하게 짹짹거리며 푸득푸득 자리옮김을 하고 있는 것을 보면 솔개가 뜨지 않은 것이 틀림없었다. 솔개가 떴다하면 참새나 병아리들은 말할 것도 없고 들쥐나 두더지까지도 찍소리를 내지 못하고 숨을 데를 찾아 허둥지둥하는 법이었다. 외서댁은 더욱 이상한 생각이 들어 암탉 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암탉은 두 날개를 늘어뜨렸을 뿐 아니라 몸의 모든 털들을 부풀려 곤두세운 채 병아리들을 품고있었다. 솔개가 떴을 때와 똑같은 모습이었다. 저것이 미쳤다냐, 노망얼 헌다냐! 외서댁은 또 하늘을 쳐다보았다. 그때였다. 아까와 비슷한 소리가 들렸다. 외서댁이 눈길을 돌렸을 때 병아리들이 암탉의 양쪽 날개 속에서 쪼르륵 달려나오고 있었다. 병아리들이 다 나오자 암탉은 두 다리를 쭉 뻗치고 목을 뽑아 늘이며 두 날개를 퍽퍽퍽 털어댔다. 그제서야 한가지생각이 외서댁 머리를 스쳤다.
"음마, 염병하네웨. 긍께로 저것도 새끼덜헌테 미리 학습얼 시키는 것 아니라고?" 외서댁은 기가차기도 하고, 희한하기도 해서 헛바람 새는 웃음을 흘렸다. 그녀는 암탉이 병아리들을 데리고 그런 연습을 시키는 것을 목격하긴 처음이었다. 달구새끼가 저러는디 빨치산덜이 날마동 학습허고 토론허고 허는 것이야 당연지사제. 이나저나 목심 보존허자는 것이야 달블것이 하나또 웂는 일잉께. 외서댁은 토방으로 올라서고 있었다. 햇발이 더 안으로 밀려든 마루에서는 천점바구가 무릎을 꺾고 바짝 엎드려 무엇인가를 쓰고 있었다. 고개를 삐딱허니 틀고 연필을 놀려대다가 멈추고 무슨 생각인가를 하고, 연필을 다시 놀리고 하는 그의 모습은 주위의 이런저런 움직임들을 전혀 의식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가 그렇게 엎드려 글을쓰기 시작한 것은 꽤나 오래 되었다. 그는 오늘만이 아니라 벌써 며칠째 글쓰기에 열중해 있었다. 그는 꼭 적과 맞서 싸움을 하고, 야간작전을 수행하는 식으로 글쓰기에도 열성을 부리고 있었다. 작전을 주로 밤에 하게 되니까 아침나절에는 대개 간밤의 작전에 대한 비판, 평가와 학습을 두세 시간하고, 오후에는 번갈아가며 보초를 서면서 학습의 복습을 하거나 총기청소 같은 것을 하며 보냈다. 장기작전을 하지 않는 한 해방구 안에서는 누구나 그런시간의 여유를 누리고 있었다. 거처도 부대별로 인민들의 방을 하나씩 빌려 교대로 들고 있어서 낮잠자기도 편안했다. 천점바구는 그 오후 시간을 며칠째 글쓰기에 바치고 있었다. 글을 쓰다가 시간이 되면 야간작전에 나서고 다음날 오후에 또 이어서 쓰고 하는 글이었다.
"워따메 참말로 징상시럽게 찔기고 찔기요이, 천 동무!" 천점바구를 오랫동안 물쓰러미 바라보고 있던 외서댁이 마루에 철퍽 앉으며 큰 소리로 말했다.
"야아?" 천점바구가 고개를 들었다. 외서댁을 쳐다보는 그의 눈은 졸음이라도 찬 듯 초점이 잘 맞지 않았고, 멀뚱한 그의 얼굴은 무슨 일이냐고 묻고 있었다.
"무셔라, 을매나 정신얼 폴았으먼 그리 크게 소리질른 그 쉰 말얼 못알아묵는다요?" 목소리를 더 키워 말을 한 외서댁이 어이없어하는 웃음을 지었다.
"무신 말 혔는디라?" 천점바구는 여전히 엎드린채 눈을 껌벅거렸다.
"글쓰는 일이 워째 그리 징상스럽게 찔기고 찔기냐고 혔소." "이, 그랬구만이라. 글먼 워쩔것이요, 포도시 깨친 글로 자서전얼 쓰잔께 글언 지대로 안되야묵고 심만 짠득 들제라." "아, 재미진 춘향전이나 삼국지럴 쓰는 것도 아니겄고, 다 아는 자기 이약 쓰는 것인디 그리 뼈대쌓지말고 퍼뜩퍼뜩 씨뿌씨요." "금메 말이요." 그제서야 천점바구는 굼뜨게 몸을 일으키면서, "말이야 외서댁 동무 말이 맞는디, 워낙에 글쓰는 재주가 웂어논께 고것이 워디 맘대로 뜻대로 되간디라? 나가 젺은 일잉께 맘에야 훤헌디 워쩌크름 생게묵은 것이 글로 쓰자고 들먼 생각이 싹 다 미친년 머리크락맹키로 헝클어져뿔고, 아새끼가 물고뜯은 실패맹키로 헝클어져뿐단말이요. 나가 똑 미쳐뿔겄소." 그는 뒷머리를 득득 긁어댔다.
"와따, 늘라는 글은 안 늘고 말만 늘었는갑네. 안창만 동지가 뭐랍디여? 말허디끼 쓰면 된다고 안 그럽디여? 에롭게 생각덜 말고 그리 술술 잘허는 말얼 그대로 글로 쓰먼 안되겄소? 엉치 작은 여자 아그 낳기 심들어 밤낮 사흘 삐대는 것맹키로 끙끙 삐대싼께 옆에서 보는 사람도 심이 들어 못젼디겄소." "외서댁 동무, 그럼 동무가 그런다고 소대장 동무를 돕는 것인 줄 알아요? 동무가 그러는건 글쓰는 걸 방해하는 것이고, 소대장 동무를 더 힘들게 만들고 있다는 걸 알라구요." 갑자기 끼여든 여자의 카랑하게 울리는 빠른 말이었다. 외서댁의 눈이 소리나는 쪽으로 빠르게 옮겨갔다. 어깨에 얹히는 머리를 쌍갈래로 땋아내린 여자가 방문에 등을 기대고 앉아 있었다. 그녀의 얼굴은 목소리만큼 상기되어있었다.
"이, 혜자 동무, 고것이 무슨 소리당게라?" 외서댁의 어조는 묘하게 꼬이고 있었다.
"무슨 소리긴요? 그 쉬운 말도 못 알아들어요?" 김혜자의 말도 꼬이고 있었다.
"이, 나넌 낫 놓고 기역자도 몰르는 무식쟁잉께 식자든 사람이 허는 유식헌 말은 하나또 못 알아묵는 귀먹쟁이요." 외서댁의 말은 새끼를 꼬듯 해놓은 엿가락처럼 완전히 겹꼬여 있었다. "소대장 동무가 하는 일을 방해하지 말라는 거예요." 김혜자가 눈에 힘을 모으며 허리를세웠다.
"이, 인자 알아묵겄구만." 외서댁은 자리를 고쳐앉으며 비웃음 문 입술을 야무치게 훔치고는, "말이 난김에 나가 혜자 동무헌테 한마디 꼭 찍어서 허겄는디, 나가 소대장 동무 허는 일 방해헌다고 간섭허덜 말고, 혜자 동무나 소대장 동무 투쟁심 약혀지게 달근마시험스로 꼬랑댕이 치덜 말라 그것이여. 여그넌 목심덜 내걸고 투쟁허는 빨치산 해방구제 연애치고 놀아나는 예배당이 아닌께로!" 그녀의 말은 가차없이 상대방을 후려치고 있었다.
"동무 그게 도대체 무슨 말이에요!" 얼굴이 하얗게 변한 김혜자가 울부짖듯 소리쳤다. 천점바구는 난처한 얼굴로 고개를 숙임막하고 있었다. "워째, 나가 틀린 소리 혔소?" 외서댁은 토론의 발언을 할 때 같이 가다듬어진 얼굴로 김혜자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건 너무 심한 말이에요. 난 같은 동지로서 소대장 동무를 돕고 싶은 것뿐이에요. 그건 오해예요." 한풀이 꺾인 김혜자의 말은 약간 떨리고 있었다.
"혜자 동무, 기왕지사 탁 털어놓고 말이 된 것인디, 동무가 그리 속에 든 맘허고 달브게 말허먼 못쓰요. 혜자 동무가 소대장 동무헌테 갖고 있는 맘이야 우리 대원덜이 다 아는 것인디, 그리 말혀서 쓰겄소? 나가 허는 말은 젊은 남자 여자가 눈맞고 맘맞는 것이야 하늘이 시키는 일인께 서로 좋아라 허는 것이야 다 존디, 동무넌 소대장 동무가 대원덜 앞에서 옹색시러바지고 궁색시러바지게 맘얼 표식낸다 그 말이요. 소대장 동무가 그런 혜자 동무럴 피해 슬라고 애쓰는 일이 자꼬 생기는디, 소대장동무가 소대장질 지대로 허게 헐라먼 그래서야 쓰겄소? 긍께로 좋아라 혀도 그리 야하고 숭허게 표식내지 말고, 그저 바람 불듯말듯허게, 비 온듯말듯허게 숨키고 개레감스로 진득허고 끈허게 허리 그런 말이요. 나 말이 으쩌요? 접수헐 만허요?" 외서댁의 말은 그대로 비판토론이나 마찬가지였다. 더욱이 끝에 단 "접수헐 만허요?" 한 말이 그녀의 말에 무게를 가하고 있었다. 그리고, 김혜자의 그 동안의 태도는 정식으로 비판토론에 올려지기에 모자람이 없기도 했다. 그것은 대원들간에 이성관계를 금하고 있는 당규에 저촉되기 시작한 것이다.
"예, 외서댁 동무 말씀 잘 알아들었습니다. 제가 잘못했습니다." 김혜자는 고개를 떨어뜨리며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자신의 마음을 대원들이 다 알아버릴 정도로 자신의 언행이 표났다는 것에 그녀는 전신이 뜨거운 부끄러움을 느끼고 있었다.
"되얏소, 혜자 동무. 우리 소대장 동무넌 전사로도 장허고, 남자로도 실헌께 혜자 동무 눈이 볽기는 볽소. 나 말 알아들어준께 아즘찬이요." 외서댁은 김혜자의 어깨를 토닥여주었다. 그러면서 자신이 퍽 나이들고 철이 든 것처럼 느끼고 있었다.
"와따, 소쿠리 비행기 태우지 마씨요. 어질어질혀서 정신이 웂소." 얼굴이 달아오른 천점바구는 연필 끝에 침을 묻히며 얼른 엎드렸다. 그가 가진 연필은 손가락 두 매듭 정도의 길이의 몽당연필이었다. 그런데 그것은 반 뼘 길이의 대나무에 끼워져 있었다. 그 몽땅연필은 몽당숟가락처럼 빨치산이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휴대품이었다. 그 몽당연필들을 가지고 날마다 실시되는 학습을 받았다.
"소쿠리 비행기가 아니라 진짜배기 비행긴께 안심 푹 허씨요. 나도 남자 보는 눈이야 쪼깐 있는디, 소대장 동무야 모지랜 것 하나또 웂는 총각이요. 맘씨 넓겄다, 인물 훤칠허겄다, 몸 건장허겄다, 거그다가 출신 성분 좋겄다, 쪼깐 있으면 당원꺼지 되겄다, 머시가 모지랜 것이 있소. 나도 처녀람사 소대장 동무헌테 달근마시험스로, 당신언 나 맘에 오아시스요 등대입니다 허느 연애편지럴 멋떨어지게 쓰고 잡은 맴이 동혔을 것이요." 외서댁은 손짓까지 해가며 감정을 묻혀내고 있었다.
"아이고메, 외셔댁 동무넌 워째 그리 말이 술술 나옴시로, 찰지고 그요. 나야 못 당허겄소." 천점바구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이, 나가 입산혀서 달라진 것이 먼지 아요? 달라진 것이야 쌔고쌧제만, 나가 알게 딱 표나게 달라진 것이 세 가지가 있소. 말허는 것이 장마에 물외 크대끼 늘어뿌렀고, 산 타는 것이 토깽이맹키로 빨라져 부렀고, 겁만 나든 총질이 널뛰대끼 재미지게 되야뿐 것이요. 참말로 나가 나럴 생각혀도 생판 딴 사람이 되야부렀는디, 나가 요런 시상얼 살아볼 줄이야 꿈이나 꿔봤간디라. 우리 냄편이 그 고상혀감스로 워째 산사람으로 살었는지 알게 되얏소. 나겉은 무식헌 촌년이 출세혀뿐 것이요." 그런 변화를 겪는 것은 외서댁만이 아니었다. 그런 배움이 없는 입산자들의 공통된 변화였다. 특히 나날의 학습과 토론을 통해서 그들은 사회에 대한 인식을 갖게 되었고, 스스로의 생각을 조리정연하게 말로 엮어내는 능력을 갖추게 되었다.
"나가 새살얼 너무 깠소. 요러다간 참말로 소대장 동무가 헐일 망쳐 놓게 생겼소. 글먼 자서전 잘 쓰씨요." 외서댁은 천점바구와 김혜자에게 눈웃음을 보내고 자리를 떴다. 천점바구가 쓰고 있는 것은 당원심사에 필요한 자서전이었다. 그는 그리도 바라던 당원이 될 기회를 맞았던 것이다. 그는 당원이 되는 기본조건인 글을 깨침과 동시에 학습내용의 해득능력을 인정받았고, 절대조건인 투쟁을 통한 당성을 또한 인정받았던 것이다. 당에 제출해야 될 서류는 추천서와 자서전이었다. 추천서는 당원 두 명의 추천을 받는 것이고, 자선전은 말뜻 그대로 본인이 쓰는 것이었다. 입당자의 사상적, 인간적인 연대책임을 지는 추천인은 안창민과 하대치가 되어주었다. 천점바구는 오래 전부터 염상진 대장의 추천을 받아 입당하고 싶은 욕망을 간직해오고 있었다. 그러나 염 대장은 총사에 가 있어서 그 꿈은 이룰 수가 없었다.
그렇지만 천점바구는 그것을 서운하게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로서는 안창민과 하대치도 언제나 높게 우러르는 대상이었던 것이다. 당원이 된다는 것은 한마디로 당사업에 복무하는 사람들이 바라마지 않는 최고의 영예였다. 당원이 되는 것은 조직원으로서 새로운 탄생을 의미했고, 새 생명을 얻는 것이었다. 당조직은 그 기초기반을 중시했으므로 당원의 입당절차는 아래서부터 위로 올라가는 상향식이었다. 그래서 입당 대상자의 선정과 심사는 당의 초급조직인 다섯 명 이상의 당원들로 구성되는 세포회의에서부터 시작되었다. 그 세포회의는 대개 중대단위로 형성되었다. 거기를 통과하면 연대, 연대에서 지구사령부를 거쳐 도당에서 최종결정이 내려졌다. 천점바구는 어린날부터 지금까지 살아온 그 빤한 이야기를 쓰는데 며칠째 진땀을 빼면서, 많은 사람들 앞에 나서서 연설을 하는 것보다 더 어려운 것이 글쓰기라는 것을 뒤늦게 깨닫고 있었다. 말로 하면 술술 풀려나올 이야기가 어째서 글로 쓰면 마음먹은 대로 안되는 것인지 모를 일이었다. 그래서 궁여지책으로 김혜자 동무에게 도움을 청할 수 밖에 없었다. 날마다 조금씩 쓴 것을 김혜자 동무에게 보이고 뜻이 잘 통하지 않는 대목을 수정받곤 하는 것이었다. 물론 그 결정을 쉽게 한 것이 아니었다. 몇번이고 망설이다가 가까이에 김혜자 동무만큼 학식이 든 대원이 없어서 어쩔수 없이 내린 결정이었다. 김혜자 동무는 순천여중의 졸업반에 다니다가 입산한 지식계급이었다. 수수한 생김에 말솜씨가 있는 그녀는 언제부터인지 모르게 자신을 소대장으로만 대하는 것이 아님을 천점바구는 느끼게 되었다. 그건 얼떨떨하면서도 난처한 문제였다. 그 어느때라고 여중학생을 자신의 상대로 생각해본 일이 없었고, 남녀대원들 사이의 사랑문제는 당에서 금하고 있는 것인데 소대장으로서 그 규율을 어길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녀의 눈치를 모르는 척해왔고, 그녀가 표나게 뒷수발을 하고드는 것도 적당하게 피하고는 했다. 그러나 문제는 자신도 그녀가 싫지 않다는데 있었다. 그녀에게 끌리는 마음 때문에 투쟁의욕에 무슨 이상이 생길리는 전혀 없었지만, 날이 갈수록 그녀에게 마음이 감기고 있는 것은 스스로 속일 수가 없었다. 혁명을 이룩하고 함께 살면 어떨까... 가끔 그런 상상을 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는 불덩이라도 잘못 집은 것처럼 화다닥 놀라 그 생각을 떼치고는 했다. 그는 어디까지나 혁명투쟁이 먼저였고, 만약 그녀 때문에 자신의 혁명의지에 손상이 오거나 그녀가 자신의 혁명의지를 손상시키려 한다면 그때는 가차없이 그녀를 다른 부대로 보내버릴 작정을 확고하게 하고 있었다. 그는 염상진 대장처럼 되고 싶은 꿈을 여자와 바꿀 수 없었던 것이다.
"되얐소, 작전 나갈 시간이 을매 안 남었응께 오늘 몫아치넌 요걸로 혀야 쓰겄소. " 천점바구는 연필을 끼운 손으로 마룻바닥을 치며 윗몸을 세웠다. 옷을 꿰메고 있던 김혜자가 옷을 옆으로 치웠다.
"많이 쓰셨군요." 김혜자가 종이로 눈길을 주며 밝게 웃었다. 한쪽 볼에 보조개가 살짝 패었다.
"몰르겄소, 말이 되얐는지 워쩌는지. 나헌테로 질로 쉰 것은 산 탐스로 총질허고 싸우는것이오. 글이란 것을 써봉께로 사나흘거리로 신문 맹글어내는 출판사 동지덜이 하늘맹키로 높아뵈요. 고것이 신선놀음인 줄 알었등마." 천점바구는 두 팔, 한 다리를 내뻗으며 늘어지게 기지개를 켰다.
"그렇지도 않아요. 글이란 것도 자꾸 써보면 늘어요. 전투를 자꾸 하면 요령이 늘 듯이 말예요." 김혜자가 종이를 집어들며 천점바구를 바라보았다. 그 그윽한 눈길에는 촉촉한 따스함이 어려 있었다. 천점바구는 눈길이 마주치자 얼른 고개를 돌리며 벌떡 일어났다.
"몰르겄소, 늘란지 워쩔란지." 마루를 내려서며 천점바구가 뚱하게 한 말이었다. 그런 천점바구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김혜자의 눈길은 더 그윽해지고, 얼굴에는 연분홍 웃음이 잔잔하게 번지고 있었다.
화아, 하늘도 참 기맥히시. 가을 하늘만 존지 알었등마 인자 봉께 봄하늘도 아조 그만이시. 근디 가을 하늘허고 봄 하늘이 그 맛이 달털 않다고? 달브기는 달분디 워쩌크름 달븐고? 가만 있어라 보자, 가을 하늘이 시퍼렇고...... 봄 하늘도 시퍼렇고...... 요상허시? 시퍼런것은 똑겉은디...... 그려, 시퍼렇기로 친다면야 여름 하늘도 시퍼렇고, 겨울 하늘도 시퍼렇제.
하늘이야 본시 껌댕이 하늘이야 웂는 법이고, 그 시퍼렇기는 시퍼런 하늘이 요상시럽게 달브기는 달브단 말이여. 근디 고 야라꾸리허게 달븐 차이가 딱 잽히덜 않는단께로. 요런 답답헌 인종아, 손에 딱 잽히덜 않고, 말로 딱 짤라서 안된께 야리꾸리가 아니겄냐. 잉, 그렇기사헌디, 그 달븐 차이럴 속 씨언허게 찾어야 쓰겄는디. 참말로 요상허단께로...... 근디 고것이...... 이, 알겄어! 가을 하늘은 물 속맹키로 투명험시로 먼 것이 싸아허게 추운 기색이고, 봄 하늘은 아조 흐린 안개가 사르르 낀 것맹키로 덜 투명험시로 잠푹허게 따땃헌 기색이 도는 것이 서로 달븐 차이 아니라고? 아이고메 못해묵겄다, 나가 무신 음풍농월허는 시인이라고 이래싼다냐. 고것얼 간딴허게 과학적으로 말해뿔먼, 고기압과 저기압이 교류하는 기류변화에서 기인한 것이다, 아니겄어. 근디, 고것이 유물론자답기넌 헌디, 역시 멋대가리넌 웂단말이여. 좌우간 하늘이란 것이 먼디 하늘을 보고 있으먼 맘이 편안허니 가라앉고, 고단헌 몸이 풀리는 것일까? 혁명이 성취된 시상이 저 하늘 겉을랑가? 근디, 보리풀때죽도 목 낋이는 철에 하늘만 저리 징허게 시퍼렇고, 배곯는 인민덜이 저 하늘을 쳐다보먼 더 배만 고플 것아니라고. 혁명은 기엉코 완수혀야 될 것인디, 골백 분 생각혀도 혁명 웂이는 이눔에 시상얼 바로잡을 방도가 웂응께로. 근디 다 돼간 잔치에 코 빠쳐뿐 그 양키눔에 새끼덜......
"중대장 동무, 여그 기셨구만이라." 느닷없는 소리에 조원제는 생각에서 깨어났다. 그리고 팔을 베고 누웠던 몸을 일으켜세웠다. "아니, 최 동무. 워쩐 일이오?" "야아, 연대장 동지가 모시고 오라고 허느만이라." 연락병들이 언제나 그렇듯 최 대원도 말하는데 숨이 가빴다.
"무신 일 생겼소?" 조원제는 땅을 밀어차며 일어났다. "잘 몰르겄구만요." "싸게 갑시다." 조원제는 앞장섰다. 그의 하얗던 얼굴은 겨울 산생활을 거치면서 흑갈색으로 변해 있었고, 포동하게 올랐던 살도 다 빠져버려 양쪽 볼이 패일 정도였다. 그러나 눈만은 여전히 또렷하고 날카로웠다. 아니, 눈도 그전의 눈이 아니었다. 그전의 눈이 남다르게 날카롭기는 했지만 초롱초롱한 그 속에 소년적 호기심과 나약이 들어 있었다. 그런데 이제 그의 눈은 초롱초롱함이 부리부리하게 바뀌어 있었고, 그 부리부리함에서는 무엇인가를 노리고 있거나 찾고 있는 것 같은 탄력적인 힘이 뻗쳐나오고 있었다. 그런 눈과 함께 흑갈색의 마른 얼굴은 그를 더없이 강인하게 보이게 했다.
"연대장님, 불르셨는게라?" 조원제는 연대장에게 경례를 붙였다. "이, 어여 오씨요." 연대장이 들여다보고 있던 신문을 치우며 반색을 했다. "무신 일 있는게라?" 조원제는 연대장을 주의깊게 쳐다보며 느리게 엉덩이를 빼고 앉았다. 그의 부리부리하고 날카로운 눈이 상대방의 대답에 앞서 무엇인가를 찾아내려 하고 있었다.
"이, 아조 기분 존 일이 생겼소." 언제나 웃는 얼굴인 연대장이 더 환하게 웃었다. 조원제는 연대장에게 눈길을 둔 채 무슨 일인가를 묻고 있었다. "배고픈디 요것부텀 묵고 신문은 찬찬히 보드라고이." 연대장이 무엇인가를 불쑥 내밀었다. 그의 손에 들린 것은 고구마였다.
"워쩐 고구매다요?" 신문에 무슨 좋은 일이 났을까 생각하며, 조원제는 고구마를 받을 생각을 않고 물었다. "이, 돌른 물건 아닝께 싸게 묵드라고." 연대장이 손을 내밀었다. "지야 배 안 고픈께 연대장님이나 드시씨요." 조원제는 고개를 저었다. "어허! 또 그 고집이여? 나야 참말로 배 안 고프시. 중대장 오기 전에 폴세 배불르게 묵었응께로." 연대장이 입맛을 다시며 입을 훔쳐보였다.
"일로 주씨요." 고구마를 받은 조원제는 그것을 반으로 자르더니 한쪽을 연대장 앞으로 불쑥 내밀었다. 그런 그의 눈은 연대장을 똑바로 쳐다보고 있었다. "그려, 항꾼에 묵드라고." 연대장이 빙그레 웃으며 고구마 반쪽을 받아들었다. 그때서야 조원제도 마주 웃었다. 곡식이라고는 완전히 바닥이 난 오월에 연대장이 배불리 먹을 고구마가 있을 리 없었고, 연대장의 성품을 아는 터라 어떻게 손에 들어온 고구마 하나를 입도대지 않고 통째로 내놓는 것을 보지 않고도 환하게 알 수 있었던 것이다.
조원제는 고구마를 베어물었다. 철 지난 고구마답게 껍질은 끈적이고 속은 물컹거렸다. 그러나 단맛은 가을 고구마에 그것이 아니었다. 삶으면 껍질로 내배는 진이라는 것은 계절의 변화에 따라 고구마의 성분이 변해 나타나는 당분이었다. 입춘을 지낸 그런 "물고구마"는 아이들보다 이빨 부실한 노인네들이 더 좋아했다.
"신문에 무신 소식 났습디여?" 조원제는 고구마를 꿀꺽 삼키고 물었다. "이, 자네 이약이 아조 근사허게 나부렀네." 연대장은 흡족한 웃음과 함께 고개를 끄떡거리며 신문을 내밀었다. 연대장이 단둘이 있으면서 직책을 부르지 않고 "자네"라고 할 때는 아무 스스럼 없이 정을 나타내는 경우였다. 그때는 조원제도 "강철"이란 별명을 가진 연대장 이태식이 아니라 인정 많고 마음 넓은 인간 이태식으로 대했다.
조원제는 신문을 들여다보았다. 그건 도당신문이었다. 그런데 그 첫머리에 크게 쓰인 자신의 이름이 퍼뜩 눈에 띄었다. 그는 순간적으로 긴장하며 숨을 들이켰다. "백아산 지구의 위대한 전사 조원제", 이것이 큰 제목이었고, "재귀열 예방의 위생투쟁에서 중대원 중 단 한명의 희생자도 내지 않은 혁혁한 과업성취", 이것이 두 줄로 된 작은 제목이었다.
그 내용은 지구신문에 이미 실렸던 것과 같았고, 다만 "본 지구 내에서 유일한 중대"가 "본 도당 내에서 유일한 지구"로 바뀌어 있었다. "지구"라는 낱말이 "도당"으로 바뀌었을 뿐이지만 실제로 그 차이는 어마어마한 것이었다. 지구 안에서 인정된 공적이 다시 도당 차원에서 인정된다는 것은 그 공적이 다섯 배로 확대되었다는 수치적 계산일 수가 없었다. 도당이 단순히 다섯 개의 지구로만 이루어진 것이 아니듯이 그 정치적 의미는 수치로 계산되는 것이 아니었다. 도당으로부터 투쟁공적을 인정받는 전사 - 그것은 무한량의 영광이고 영예였다. 조원제는 몸이 화끈화끈 달아오르는 것을 느끼면서 주체하기 어렵게 가슴 벌떡거리는 감격에 휩싸이고 있었다.
"자네가 해낸 일은 이리 장헌 일이었구먼." 이태식은 조원제의 어깻죽지를 턱 치면서 잡고는, "자네 나이 생각허면 더 장허고 장헌 일이제. 앞으로도 그 나이 잘 눌르고, 축대겨감서 더 장헌 일 많이 허소이!" 무게 실린 얼굴로 조원제의 어깨를 흔들었다. "야아, 명념허겄구만이라." 조원제는 이태식을 마주보며 위아랫입술이 말려들도록 입술을 꾹 다물었다. 그러면서 그는 몸 뜨거운 흥분과 가슴 벌떡이는 감격이 찬 기운으로 가라앉아가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그 나이 잘 눌르고, 축대겨감서......" 이태식의 충고가 알 수 없는 힘으로 흥분과 감격을 눌러았던 것이다. "젊은 혈기로 방자하지 말고 더 겸손하면서 이를 계기로 더욱 분발해서......" 좀 배웠다는 사람이면 필경 이런 식으로 말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태식은 그런 문자를 쓸줄 몰랐다. 아니, 굳이 쓰려고 하지 않았다. 그런데 언제나 그의 꾸밈없는 말이 오히려 더 진실하고 무게있고 마음을 그러잡고는 했다. 그래서 그의 앞에서는 공부 좀 했다는 것이 무슨 중뿔난 자랑일 수가 없었고, 대답까지도 자연히 "예"가 아니고 "야"로 나오게끔 되었다.
도당신문이 지구당신문의 보도를 받아 재게재하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니었다. 그것은 유행병 재귀열의 피해가 그만큼 심각하다는 반증이었다. 그 위세가 꺾여든 재귀열의 희생자들은 도당 전체 병력의 사 할 정도로 추산되고 있었다. 그러니까 한 달이 조금 넘는 기간에 팔천여 명이 죽어간 것이었다. 그건 투쟁력의 상실과 아울러 약화를 초래한 결정적 계기가 아닐수 없었다. 그런 막대한 희생자를 낸 돌림병의 소용돌이 속에서 철저한 예방으로 중대원들중에서 단 한 명의 희생자도 내지 않았다는 것은 지구 안에서 떠돌다가 말 단순한 화젯거리가 아니라 도당 차원에서 인정받을 만한 투쟁공적이기도 했다. 특히 중대장 조원제가 약관 스물이라는 데에서 그 공적은 더욱 빛을 발하고 있었다.
조원제는 정보과 분트에서 후방부대장 연락병을 거쳐, 입당을 하면서 문화부중대장으로 자리를 옮겼던 것이다. 그때 마침 이름 모를 열병이 들불처럼 번지면서 도당에서는 본격적인 위생투쟁 전개를 지시하고 있었다. 그 지시에 대한 책임은 어디까지나 정치일꾼인 문화부중대장에게 있었다. 조원제는 난감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정치일꾼으로서 첫 번째로 수행해야 할 임무가 너무나 벅차고 무거웠던 것이다. 사람을 마구잡이로 죽이고 드는, 눈에 보이지 않는 세균을 막아내서 중대원들의 목숨을 보호해야 한다는 책임감은 산더미 같은 중압이었다. 그러나 그 중압감을 떠밀어내고자 하는 의욕 또한 가슴을 뜨겁게 하고 있었다. 그는 머리를 싸잡고 궁리에 몰두했다. 그러나 선뜻 좋은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답은 이미 나와있었다. 이와 벼룩, 빈대의 박멸이었다. 도당에서 제시한 그 답에 어떤 방법으로 도달하느냐가 문제였던 것이다. 적과 무력투쟁을 계속하면서 이를 박멸해야 하는 방법, 그것은 결코 쉬운 문제가 아니었다. 그는 어느 순간 군사일꾼인 중대장을 부러워하기도 하면서 그 문제의 해결에 집요하게 매달렸다. 그렇다고 군사일꾼인 중대장에게 의논하지도 않았다. 전투시에 부대의 지휘책임을 맡을 뿐인 그에게 어떤 묘안이 있을 것 같지 않았고, 설령 그가 제시하는 무슨 방법이 그럴듯해서 시행하게 되더라도 그 결과에 대한 책임은 전적으로 정치일꾼인 자신이 지게 되어 있었다. 그 무한책임은 군대에 대한 당 우위에서 비롯되는 것이었고, 그 원칙에 따라 군사일꾼은 당원이 아니라도 될 수 있었지만 정치일꾼은 당원이 아니고서는 절대 될 수가 없었다. 그러니까 정치일꾼의 책임은 평상시 부대원들의 사상교양에서부터 돌발사태에 직면한 작전수립에까지, 그 범위는 실로 넓었다. 그러면서도 그 행위가 돌출되지 말아야 하고, 군사일꾼인 중대장과 마찰이나 갈등을 일으켜서는 안 되었다. 그 이원조직은 기묘하게 조화를 이루어야 하는데, 당에서는 그것을 "예술적 조화"라고 일컬었다.
조원제는 머리를 앓은 끝에 마침내 대책을 강구하였다.
첫째, 전부대원이 머리를 완전히 깎을 것.
둘째, 전부대원이 주기적으로 일제히 옷을 삶을 것.
셋째, 다른 부대원들과 여하한 경우에도 접촉을 하지 말 것.
넷째, 인민들과의 접촉은 물론 어느 집이건 마루에도 앉지 말 것.
이 네 가지 사항은 돌림병을 옮기는 이나 벼룩, 빈대를 박멸함과 동시에 옮겨오는 것도 근절하는 방법이었다. 조원제는 그 네 가지 방법을 명시해 중대장에게 넘겨주었다. 그래서 그날부터 부대원 전부가 머리를 빡빡 깎는다. 옷 삶을 솥을 구하려고 보투에 나선다, 분주하게 돌아갔다. 결국 그 무자비한 돌림병에 부대원을 한 명도 잃지 않았던 것은 그 네 가지 사항을 철저하게 지킨 결과였다.
"히! 시무 살 나이 갖고 고런 일 해낸 것이 장허다고 혔음사 나 진짜 나이 알었으먼 더 야단났겄소이?" 신문을 옆으로 치우며 조원제는 이태식을 보고 히죽 웃었다. "하먼, 열야답 나이로 고런 일 혀부렀다 허먼 생판 난리굿이 일어났겄제." 이태식은 얼결에 거침없이 말해놓고는 찔끔해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사실 조원제의 실제 나이는 이제 열여덟이었던 것이고, 두 살을 더 먹게 된 연유는 그들 몇몇만 아는 비밀이었다. 조원제는 입당을 해야 했는데 나이가 모자랐다. 그 결격사유는 그의 당성이나 투쟁경력 이전의 문제였다. 그런데 문제는 그가 입당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조직이 그의 능력을 필요로 하고 있었던 것이다. 당이론에 밝고, 말재주가 뛰어난 그를 나이가 모자란다는 이유로 언제까지 연락병을 시킬 수는 없었던 것이다. 무학의 농민들이나 기본출들의 사상, 교양의 진작은 하루가 시급한 형편이었다. 그래서 그의 나이를 두 살 올려 입당절차를 밟기로 했던 것이다. 그런데 그 묵계는 정작 본인한테 알려지면서 말썽이 되었다.
"택도 웂는 소리 허덜 마씨요. 멋났다고 당규를 어김스로 고런 일얼혀라. 나넌 안헐라요." 조원제의 첫마디였다. "어허, 워째 그리 생각혀보도 않고 무참허게 말해뿌요. 요 일이 긍께......" "이, 원리원칙에 어긋나는 일얼 갖고 멀라고 생각허고 말고 혀라. 나도 당원 되고 잡은 맘이야 하늘 겉애도 그리 원칙에 안 맞게는 되고 잡지 않당께라." 이태식은 마른침을 삼키며 조원제 앞으로 다가 앉았다.
"알겄소, 조 동무 맘 알겄소. 원리원칙 지키잔 것 다 좋고, 조직생활에서 원리원칙은 꼭지켜야는디, 요 일언 원리원칙을 안 지키는 일이 아니고 외려 조직을 위허는 일이다 그 말이오." "아이고 땁땁허게 그 말 허고 또 허먼 머헐 것이요. 원칙에 어긋나는 것이야 자명헌디. 나넌 그리 껄쩍찌근허니 입당 못허겄고, 그냥 아는 그대로라면 고맙게 입당허겄소." "어허, 요론 소 잡아묵을 고집통머리가 있는가! 그리 될라면 당규럴 고쳐야는디, 고것이될 일이겄소?" "아, 긍께로 입당 안허겄다 그 말 아니요." "참말로, 배왔다는 사람이 워째 이리 말귀럴 못 알아묵고 벽창호까? 긍께, 조직이란 것도, 원리원칙이란 것도 사람이 살자고 맹글어진 것이고, 사람이 살다가 보먼 특별한 경우에넌 고것얼 피해가는 수도 있는디, 고것이 나쁘게 쓰잔 것이 아니라 좋게 쓰자는 것잉께 맘 돌리씨요." "나가 시무 살 될 때꺼정 이약허고 또 혀도 나 맘언 똑겉으요." 조원제의 단호한 말이었다. 그의 판판하고 견고하게 생긴 이마와, 그 가운데 돋은 핏줄이 남다른 의지와 고집을 드러내고 있었다.
"아이고 그 고집!" 이태식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자리에서 일어났고, 돌아서다가 "남자답기넌 헌디......" 혼잣소리를 흘렸다.
결국 이태식의 설득으로는 안되어 출판과장까지 동원되어 조원제는 마음을 바꾸게 되었다. 출판과장은 그의 중학교 교장이었던 것이다. 당이 정한 원리원칙에서 한치라도 벗어나지 않으려는 조원제의 순진무구한 진실성도 그렇고, 그런 무리까지 해가며 쓸 만한 재목을 쓸만한 자리에 찾아놓으려고 애쓴 이태식도 어지간한 사람이었다. 이태식은 연락병으로 오가는 조원제를 눈여겨 보았다가 뒷조사까지 해보고 그런 일을 추진했던 것이다. 그는 머슴 출신으로 구빨치였다. 스물일곱인 그는 항시 웃음기 도는 부드러운 인상과는 달리 "강철"이란 별명을 가질 정도로 싸움에 강인했고, 통솔력이 뛰어났다. "강철부대"로 불리는 그의 부대는 백아산지구의 최강부대이기도 했다.
"어이 말이시, 자네 혹여 그간에 요상시런 연판장에 손도장 눌른 일 웂는가?" 이태식이 갑자기 목소리를 낮추어 물었다. "뜽금없이 연판장이고 손도장은 머시다요?" 조원제는 좋잖은 예감을 직감하며 고개를 저었다. "이, 그렸으먼 우선에 되얐고." 이태식은 고개를 빠르게 끄덕이며 귀에 꽂은 꽁초를 뽑아 부싯돌을 쳐서 불을 붙이고는, "글먼 자네 중대서 연판장 도는 눈치는?" 담배연기를 코로 내뿜으며 물었다.
"고런 일도 웂는디요." 조원제는 대답을 하면서도 고개를 갸우뚱했다. "딱 짤라 장담은 못허겄는가?" 이태식일 미심쩍은 눈으로 물었다. "금메요, 장담 못허겄다면 지가 허깨비 노릇 혔다는 것이제라. 장담허겄구만요. 근디, 무신 안 존 일이 생긴 모냥이제라?" "그렇구마. 나가 자네헌테 요리 묻는 것은 자네가 집이 동북이기 땜시여. 동북 출신덜 멫멫이 말이여, 인자 가망웂이 진 쌈인께로 손들고 나가자 하는 연판장얼 즈그덜 마실사람덜얼 중심으로 돌리다가 꼬랑댕이가 잽힌 것이란 말시." "머시라고라! 워떤 넋빠진 새끼덜이!" 조원제는 아랫입술을 힘껏 물며 눈을 부릅떴다. 그의 부리부리한 눈에 불길이 일고 있었다.
"시방 정보과에서 조사럴 벌이고 있응께 메칠 안으로 끌탕이 빠질 것잉마." 이태식이 언짢은 얼굴로 혀를 찼다. "워떤 잡녀러 새끼덜이 고런 빙신 팔푼이 같은 짓거리 허는지 몰르겄소. 고것이 다 그 새끼덜 정신상태가 틀려묵어 생긴 일이지만, 또 한가지, 신문덜이 전황을 너무 세세허게 알리고 있는 것에도 문제가 있다고 보요. 민주주의 허는 것이야 존디, 상황에 따라 알릴 것, 안 알릴 것은 개레야 되지 않겄는가요? 알면 병이고 몰르는 것이 약이란 말이 공연시 생게났겄는게라?" "허! 원칙론자가 그리 말헐 때도 다 있능가? 그리 말허는 걸 봉께로 아조 묵직허니 뵈는디?" 이태식이 피식 웃고는, "맞어, 그 말도 중헌 말이시. 초기에 민주주의 잘허자고 작전도 공개토론에 부쳤다고 자꼬 정보 새나가 피해본 것이나 매한가지 일이제. 정식으로 제기혀야헐 문제시." 그는 신중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조원제는 이태식과 헤어져 돌아오며 기분이 영 언짢았다. 조직 안에서 그런 동요가 일어나고 있다는 것은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었다. 비록 그 수가 얼마 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또 완전히 적발을 해낸다 하더라도, 그 사건이 파급시킬 나쁜 영향은 돌림병 재귀열만큼 고약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런 동요는 이 백아산지구에서만 일어나는 것이라고 할 수가 없었다. 다른 지구들에서도 그럴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었다. 입산투쟁 여덟 달, 고생과 굶주림이 따른 그 세월은 결코 짧은 것이 아니었다. 사상무장이 빈약하거나 소홀한 사람들의 경우 사기가 떨어지고 마음이 흔들릴 수 있는 기간이었다. 투쟁이 장기화될수록 사상무장은 강화되어야 하고, 지나치게 자세한 신문보도도 통제되어야 한다고 그는 생각했다.
등사판 신문들은 여러 곳에서 발행되었다. 도당, 각 지구당, 단위당(시당)에서 각기 발행해서 조직마다 선요원들을 통해 배달되었고, 나머지는 해당지역의 인민들에게 배포되었다. 그 신문들의 발행은 조직간의 활동보고이면서, 대민 선전, 선동공작을 겸하는 중요한 정치행위였다. 신문들의 이름도 노동신문, 인민일보, 민청신문, 여맹신문 등으로 다양했다. 그런데 원지에 철필로 긁은 글씨들은 그야말로 깨알같이 작으면서도 놀랄 만큼 또렷또렷했고, 등사도 흠잡을 데 없이 선명했다. 필경솜씨도, 등사기술도 전문적이었던 것이다. 적지의 신문들도 선요원들을 통해 사나흘씩 늦게 다 들어왔다.
조원제는 천천히 걸음을 멈추었다. 저 멀리, 원리 쪽으로 나가는 길목 첫 마을 당산나무옆의 게양대에 인공기가 유유하게 펄럭이고 있었다. 해방구는 아직까지도 이렇듯 건재한데 주전선은 천리 밖, 너무나 멀었다. 기분 언짢은 소식을 들은 다음이라서 그런지 조원제의 심정에는 그 유유하게 펄럭이고 있는 인공기가 오늘따라 눈물겹게 느껴졌다. 그는 어금니를 꾸욱 맞물었다.
며칠이 지나 그 사건에 연루된 열세 명이 공개재판에 회부되었다. 그들은 모든 지구대원들의 격분을 샀다. 그들은 총살처형을 면할 수가 없었다.
염상구의 결혼식날이었다. 일요일인 남국민학교로 아이들 대신 어른들이 꾸역꾸역 밀려들고 있었다. 결혼식 장소가 신부집이 아니고 국민학교 강당인 것은 염상구가 결혼식을 "신식하이칼라"로 하고자 한 때문이었다. 염상구의 그 생각에 신부 윤옥자도 반색을 했던 것이다.
"그 몬지 탱탱 쓸고, 이눔저눔이 걸쳐 땟국 쩔은 사모관댄가 지랄인가 귀신단지맹키로 입고 쓰고 근천떨지 말고 양복 쪽 뽑아입고 신식하이칼라로 멋떨어지게 혼례식 올리드라고!" 염상구는 단도집입적으로 말했고, 윤옥자는 즉각적으로 환영했던 것이다.
"워메, 참말로 멋지요이. 지도 말언 못혔어도 그 구식 혼례식이 영 정떨어졌는디라. 아그덜도 아님스로 색동저구리 치렁치렁 닐이고 근천떠는 것보담이야 흰 드레스 받쳐입는 것이 을매나 더 멋지다고라." 두 손을 모아잡은 윤옥자는 부끄러운 웃음을 입에 물었다. 그러나 그녀의 얼굴은 곧 시무룩하게 변하고 말았다.
"아니, 워째 금방 똥 집어묵은 상호가 되는 겨?" 염상구가 눈치빠르게 잡아챘다. "신랑 양복은 신부 쪽에서 해주고, 신부 드레스는 신랑 쪽에서 해주는 법이라는디...... 드레스가 영판 비싸서." "아, 시끄럿!" 염상구가 버럭 소리치며 담뱃갑을 방바닥에 떡을 쳤다. 그 서슬에 윤옥자는 화닥닥 놀라며 두로 얼른 물러나 앉았다.
"아아니, 이 염상구럴 멀로 보고 허는 소리여, 시방? 니도 느그 엄씨맹키로 나럴 썩은 홍어좆 보디끼 무시헐 참이여! 나가 붕알 두 쪽밖에 찬 것이 웂는 줄 아는 모냥인디, 카악 그냥!" 염상구는 담뱃갑을 집어들어 던질 듯한 몸짓을 했고, 윤옥자는 반사적으로 두 팔을 들어올려 얼굴을 가리며 몸을 옆으로 트는데, "사람 시퍼보덜 말어라. 이 염상구가 맥엄씨 주먹질만 허고 산지 아냐. 드레쓴가 머시깽인가가 지아무리 비싸도 나가 요러타께 혀줄 수 있응께 니넌 맘 푹 놓고 있으면 되야?" 그는 사뭇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
"나야 거그럴 무시혀서 헌 말이 아니고 거그가 엄니헌테 체면 깎일까 걱정시러서 헌 말이제라." 언제 겁나서 방구석으로 몰렸나 싶게 윤옥자가 배시시 웃고 있었다. "니기럴, 느그 엄씨가 나럴 맘놓고 무시허고 앉었는디, 그 코 납짝허니 맹글어뿔고, 나 체면 당당허게 세움서 니 시집 잘 간다는 것을 온 시상에 다 봬줄 팅께 니넌 찍소리 말고 기둘려." 염상구는 담배 연기를 기운차게 내뿜었다. 그건 그가 주먹패의 헛기세를 부리는 큰소리가 아니었다.
그의 장모가 될 오씨는 그를 노골적으로 무시했다. "이년아, 쥐도 새도 모르게 뒤져뿔 일이제 그 꼬라지로 시집가겄다고 나서서 집안 우세시키고 엄씨 애간장 요리 긁어파냐." 오씨는 염상구를 외면한 채 이런 식으로 욕해댔던 것이다. 그러나 염상구는 그런 면전박대를 꾹꾹 눌러참았다. 어차피 한번은 넘겨야 할 고비였던 것이다. 오씨가 그럴수록 그는 윤옥자를 살붙게 감싸고 들었다. 결혼을 하기로 마음을 굳히고 학교도 그만둔 처지의 윤옥자는 하루가 다르게 그에게 끌려들고 있는 판이었다.
염상구는 과연 광주까지 윤옥자를 데리고 가서 그 비싼 드레스라는 것을 맞춰입었다. 순천에서는 만드는 데가 없어서 광주까지 가게 된 것이었다. 결혼식 때만 잠깐 입고 마는 그 예복이라는 것이 쌀 열 가마니 값이니, 열다섯 가마니 값이니, 읍내 안통의 여인네들 입을 떠돌았다. 특히 처녀들은 모여앉으면 그 이야기들을 하느라고 입에 침이 말랐다. 그 소문으로 가슴에 열불난 처녀가 교환수 영자였고, 말없이 눈물 떨어뜨리며 벌교를 떠난 것이 남원장 기생 경월이었고, 가슴에서 모과 떨어지는 소리르 들은 것은 아버지도 죽고 장사에 맥을놓고 있는 책방의 정님이었다.
염상구는 신부에게 드레스만을 맞춰준 것이 아니었다. 양효석의 어머니네 포목점의 고급비단들이 바닥이 날 정도로 채단을 끊어 보냈다. 그런데 거기에는 신부의 것만이 아니고 장모의 몫이 따로 준비되어 있었다. 그뿐이 아니었다. 신부에게 예물을 해주었는데, 그것이 또 사람들 귀를 의심하게 하는 엄청난 것이었다. 옥 쌍가락지, 금 쌍가락지, 홍산호 반지, 금 브로치, 홍산호 브로치, 호박 브로치, 스위스제 시계 등속이었다.
사람들의 의문과 놀라움은, 예쁜 데라고는 없이 그저 덤덤하게 생긴 윤옥자의 어디에 미쳐 염상구가 그 비싼 예물을 해주느냐는 것이었고, 껄렁패로만 알았던 염상구가 그 많은 돈을 어떻게 지닐 수 있었느냐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가장 정신없이 놀란 사람은 바로 장모가 될 오씨였다. 그저 주먹패 건달이요, 사람 못된 빈털터리가 딸년 신세 망쳐놓고, 집안 재산까지 덮치려 든다고 눈 부릅뜨고 있던 오씨는 그 값진 예물들을 앞에 놓고, 날벼락을 맞은 기분이었다. 그리고 그 놀라움은 그전의 불신을 신뢰로, 미움을 사랑으로, 의심을 믿음으로 바꿔놓았다. 염상구의 말마따나 높았던 코가 납작해진 것이었다.
염상구는 그 계획추진을 위해 수중에 있는 돈을 다 털기로 했던 것이다. 그래서 장터 바닥에 깔아놓고 있던 돈을 다 끌어들인 것은 물론이었다. 그가 돈을 다 털어내서 그리 엄청나게 결혼준비를 한 것은 단순히 장모의 콧대를 꺾으면서 자신의 능력을 보여주고자 해서였던 것은 아니었다. 그렇게 함으로써 나타나는 이중삼중의 효과까지 노리고 있었다. 예물을 많이 받은 당사자가 제일 기분좋고 행복한 것은 더 말할 것 없는 일이고, 그 예물들을 친정에 묻고 오는 것이 아니라 다 가지고 올 것이니 어차피 자신의 재산이었다. 그러면서도 온 읍내 사람들, 특히 기관장들이나 유지들에게 자신의 재력을 과시할 수가 있었다. 장가를 들기만 하면 솥공장이고 정미소가 굴러들어와 어엿한 유지가 될 판인데, 그러기 전에 자신의 재력을 확인시킬 필요가 있었다. 그래야만 처가덕 보았다는 어줍잖은 소리를 피하고, 당당하게 유지행세를 할 수 있게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옥자가 그저 벙글거리고, 그 어머니 오씨가 독기 간데없이 나긋나긋해지고, 읍내가 떠들썩해지는 것으로 염상구가 노린 목적은 결혼식 전에 완벽하게 달성되었다.
결혼식장은 사람들로 터져나갈 듯했다. 읍내에서 한다 하는 사람들은 다 모여든데다, 모처럼 벌어지는 신식결혼식을 구경하자고 안통 사람들, 특히 여자들이 떼지어 몰려들었던 것이다.
군수를 주례로 내세운 결혼식이 시작되었다. 풍금 소리가 울리면서 신랑이 입장했다. 검정양복에 머리에 기름을 반들반들 바른 염상구는 전혀 딴 사람처럼 말쑥했다. "저리 채리고슨께 아조 하이칼라 신사 아니라고?" "긍께 의복이 날개라고 안허등가?" "음마, 말 그리 허덜 말어. 인자 저 사람이 주목 쓰는 청년단장이 아니시. 윤가집 재산 한손에 몰아쥔 읍내 유지여, 유지." "잉, 그야 그렇제. 아들 하나 있든 것이 죽어뿔고 남치기가 딸만 싯인디다가, 큰사운께." 여자들의 숨죽인 수군거림이었다. 다시 울리는 풍금 소리를 따라 신부가 입장하고 있었다. 드레스를 곱게 차려입은 신부 앞에는 두 소녀가 꽃바구니를 들고 가고, 옆에서는 들러리가 손을 받쳐주고 있었다. 흰빛 화사한 드레스는 마룻바닥에 깐 옥양목 위를 길게 끌리고, 여기저기서 여자들의 탄성이 꼬리를 잇고 있었다.
원앙새 금슬로 아들딸 많이많이 낳고, 검은 머리 파뿌리 되도록 백년해로하고...... 긴 주례사가 이어지고, 신랑 염상구씨로 말할 것 같으면 반공전선의 일선에서 좌익 공산당들을 척결함에 있어서 혁혁한 공훈을 세운 반공투사일 뿐 아니라...... 염상구를 끝없이 치켜올리는 축사가 연설조로 장황하게 계속되고 있었다.
그런데 그 축사를 들으며 가슴 미어지는 사람이 있었다. 맨 앞줄에 앉아서 굽어지는 허리를 자꾸 펴려고 애쓰고 있는 호산댁이었다. 아들이 제 체면 살리느라고 해준 비단 치마저고리를 얻어입고, 아들의 체면을 상하게 될까봐 굽어버린 허리를 어떻게 해서든 펴보려고 애쓰고 있던 호산댁은 그렇잖아도 동생의 결혼식에 참석 못하는 큰아들 생각에 마음이 젖어있던 참인데 그런 축사를 듣게 되자 자신의 신세 기구함이 사무치고, 평생 한 번 있는 경사에도 오지 못하는 형제간의 처지가 새롭게 서러워져 아무리 참으려 해도 자꾸만 눈물이 솟고 있었다.
염상구는 신부와 함께 하객들을 향해 돌아섰다. 그리고 절을 했다. 마침내 결혼식이 끝났다. 들러리가 신부의 팔을 그의 팔에 끼웠다. 풍금 소리가 다시 울리고, 그는 앞을 똑바로 바라보며 한 발짝 한 발짝 발을 옮기고 있었다. 그의 눈앞에는 쇳물덩이 이글거리던 솥공장과, 피댓줄 맹렬하게 돌아가던 정미소가 떠오르고 있었다. 그는 빙그레 웃었다.
"워쩌끄나! 신랑이 웃는다, 첫딸 낳겄다." 어떤 여자의 상쾌한 외침이었다. 그는 더 환하게웃었다. 여기저기서 색색의 줄종이가 날아들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