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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윤숙 毛允淑! 이승만 대통령이 건국의 아버지라면 그를 도운 시인 모윤숙은 건국의 숨은 공로자요 어머니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이 나라 건국정부를 수립하는데 그만큼 큰 힘을 기울여서다. 모윤숙! 문학가이자 방송인이고 정치인이며 외교관이다. 그 이름 앞에는 수많은 수식어가 붙었고 가장 바쁘게 살다간 인생이며 대한민국 최고훈장 ‘금관문화훈장’에 빛난다. 1930년대 초부터 방송활동을 했으며 방송을 통해서 그의 문학을 세상에 알렸다. 1940년부터 방송국 편성원 으로 활약하던 중 경찰에 끌려가기도 하면서 항일의식을 길렀다. 6.25로 서울이 함락되던 1950년 6월 27일 밤 하나밖에 없던 KBS중앙방송국이 방송을 끝낼 때 그 마지막 방송은 모윤숙의 애국시 낭송이었다. 모윤숙 국군은 죽어서 말한다. 시 낭송 이서윤 국군은 죽어서 말한다. 오늘날까지 살아 숨 쉬는 애국 시, 그토록 길고 긴 시詩도 드물다. 그 시를 읊고 또 듣노라면 저절로 마음이 숙연 해 진다. 필자는 춘하추동방송에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 부터 모윤숙에 관한 얘기와 함께 ‘국군은 죽어서 말한다.’ 이 시 를 올렸고 그동안 여러 차례의 배경음을 바꾸어 왔다. 2014년 필자가 시낭송의 달인 이서윤을 알면서부터 그 목소리를 담아 배경음을 올리고 싶어 한지 꼭 2년이 되어 오늘 그 시낭송을 들으며 이 글을 다시 올린다. 국군은 죽어서 말한다. 낭송 이서윤 먼저 모윤숙이 대한민국 건국에 어떤 역할을 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 줄 수 있는 당시 유엔 한국위원단 의장 K.S.P 메논이 1965년에 쓴 자서전 한 토막을 인용한다. 메논은 1948년 1월 8일 유엔에서 "남한만의 총선거"를 강력 요구, 5.10 제헌의원 선거를 가능하게 했던 인물이고 모윤숙과는 절친 이었다. 메논의 글 「모윤숙은 시인일 뿐만 아니라 애국자였다. 그녀의 태도는 상당히 단순 했다. 그녀에게는 남한이 한국이었고, 북한은 아데나워의 동독처럼 하나의 저주일 뿐이었다. 그녀의 눈에는 남한에 주권공화국을 세우려 투표하는 것은 나라 전체의 독립을 위해 투표하는 것이고, 그것을 반대하는 것은 나라에 대한 배반이었다. 모윤숙은 모든 희망을 나에게 걸고, 심지어 나를 “한국의 구세주”라고 부르는 몇 개의 시도 읊어 주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만일 나의 나라가 유엔 결의를 거부한다면 그녀는 심장이 터질 것이다. 그리고 나는 한국으로 돌아올 때 그녀의 얼굴을 볼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일들이 되어 가는 대로 내버려 두었다. 이것은 어쩌면 나의 공직 가운데 나의 심장이 나의 두뇌를 지배하게 한 유일한 경우였다.」
1910년 3월 5일 함경남도 원산에서 태어나 1990년 6월 7일 세상을 뜬 영운 (嶺雲) 모윤숙은 1931년 이화여전 문과 졸업하면서 일직이 시단에 올랐다. 모윤숙에 대해서는 널리 알려져 있으므로 이 글에서는 방송과 관련된 얘기를 중심으로 쓴다. 모윤숙이 방송과 인연을 맺은 것은 1932년 12월, 극예술 연구회 회원이 되면서 부터였다. 김진섭, 윤백남, 유치진, 이하윤, 김희창, 홍해성, 한때 세상을 놀라게한 김수임 등 알아주는 연극인 들과 함께 1933년 2월에 방송된 게오르그 원작 "우정" 이라는 연극무대에 서서 연극을 하고 그것이 방송으로 중계되면서 방송활동이 시작 되었다. 1935년에 3회에 걸쳐 방송된 체흡의 앵화원(櫻花園)은 모윤숙,노천명,이헌구 등이출연했다. 문단 특히 시단에서 그리고 방송극에서 이름을 날리던 모윤숙이 방송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것은 1940년 5월 28일 경성방송국 촉탁강사로 발령 받으면서 부터다. 1940년 6월 2일 모윤숙이 어린이 방송을 시작하던 무렵의 조선일보 기사 한편을 인용한다. 오래 된 신문이라 읽으 시기 편하시도록 글의 내용을 옮긴다. (방송어조를 흉내 내어) 여기는 경성중앙방송국입니다. 방금프로는 어린이 신문시간이 시작 되었습니다. 제2방송실 유리 창틈으로 마이크 앞에 앉은 여자의 뒷모양이 보입 니다. 국내의 라디오 청취기에서 이야기가 들려옵니다. “여러분 신문시간입니다, 오늘은 5월 한 달 동안에 생긴 중요한 세상 이야기를 통틀어 해 드리겠습니다. 5월 초 하루 부터 경성에는 급행전차가 생겼습니다......" 그 음성이며 어조는 아름답고 다정하고 이야기는 차근차근합니다. 마치 마이크 앞에 어린이들이 많이 모여 있는 듯 차차 신이 나서 자기 이야기에 재미를 느끼나 봅니다. .......이윽고 30분이 되었습니다. 방송을 마치고 방송실 문이 열리더니 방송하던 분이 나옵니다. 앗 얼굴 갸름하고 안경을 쓴 분 이분은정녕 아나운서가 아니라 모윤숙 씨인가. 봅니다. 그렇습니다. 조선 여류시단의 화형 모윤숙씨 였습니다. 언제부터 어린이 방송을 시작하였는가 물었더니 지난 28일부터 이제 무터는 매일저녁 6시 25분부터 5분 동안 (그믐날만 6시부터 30분 동안)어린이 신문을 마타 보신다는 것입니다. 직명은 방송국의촉탁강사이십니다. 이제 부터는 우리 어린이들도 행복하게되었습니다. 우리말을 시와 같이 아름답고 재미있게 이야기 해 주시는 모 씨을 가졌으니까요. 모씨는 이제 좀더 공부해서 어린이 들과 참으로 친한 동무가 되겠다고 합니다. 여러분 평안히 계십시요.
방송국의 직명이야 어찌 되었든 모윤숙은 해방 될 때까지 방송국에 근무했다. 일제 강점기에 김억, 김진섭 등 문학인들이 방송국 직원으로 근무하던 때다. 모윤숙은 1942년 조선어 방송 전담 제2방송부가 발족 했을 때 편성과에서 일했고 이때 항일 단파방송 해내외 운동의 와중에서 모윤숙도 어려움을 겪기는 예외가 아니었다.
1943년 어느 날 모윤숙도 경찰에 채포 되어 시련을 겪었다. 유병은이 쓴 방송야사를 보면 유일한 여성 관련자 모윤숙님은 방송국 편성과 PD로 종로 경찰서에 채포된 뒤 일주일이 지나서 당시 경성방송국 제2 방송부장 이었던 노창성이 경찰서에 찾아가 무죄석방을 간청해서 다행히 표면적으로는 혐의사실이 안 나타났고 여성이 유치장에 있는 것이 용이하지 않았기에 풀려나와 화를 면할 수 있었다. 당시 비좁은 경찰서 유치장에는 마치 콩나물시루처럼 방송국 직원들이 서서 잠을 잘 만큼 초만원을 이루었다. 모윤숙은 경찰서 사무실 걸상 위에서 새우잠을 자야 하는 곤욕을 치렀다고 했다. 우리나라 최초의 디자이너이기도 한 노창성의 띨 ‘노라노’ (본명 노명자) 여사는 아버지 노창성에 관한 글을 쓰면서 모윤숙과 관련해서 다음과 같이 썼다. - 전 략- 당시 제2방송부 직원으로 근무하던 모윤숙 여사 (시인이자 제2방송부 편성원)도 투옥 됐는데 아버지의 노력으로 무사히 풀려 날 수 있었다. 모여사가 세상을 떠나시기 직전 나를 보시고 “그래 노국장이 감옥으로 나를 풀어주러 밤늦게 오셨었지.” 하며 옛날을 회상하시던 것을 기억한다." 그때는 남편 안호상 박사가 금강산에 들어가 조국의 해방에 대비해 태극기를 만들고 있을 때이기도 했다. 모윤숙이 방송국에 근무하는 동안 해방의 날을 맞이했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항복방송을 들으면서 조선방송인들은 환희의 눈물을 흘렸고 일본인들은 처절함을 느끼며 눈물을 흘렸다. 독립을 맞은 날 모윤숙은 그동안 날마다 남산의 신사참배를 인솔 하는 등 우리방송인을 괴롭히던 일본인 업무과장에게 이제부터는 우리가 하라는 대로 하라고 호통을 쳤다고 한다.
오랜 세월이 지난 뒤 일제강점기 때 모윤숙의 상사이기도 했던 당시의 일본인 편성과장 야마자키 긴 사부로 (山崎 金三郞)는 조방회 (조선방송협회)라는 이름으로 발행한 회상기에서 모윤숙이 해방 될 때 자기에게 한 말을 다음과 같이 인용해 썼다. (1981년 JODK 조선방송협회 회상기) ‘지금까지 직제상 노사관계 혹은 업무를 진행하는 과정에서 필요한 계급제도가 있어 일본인 우위가 확보되어 왔으나 종전을 계기로 그것이 역전되었 습니다. 야마자키씨 지금부터는서로 평등한 관계로 교제 합시다. 라고 했던 말이생각난다. 모씨는 당시 여류 시인 이었으며 방송국원으로서는 교양프로그램 편성을 담당하며 스스로 마이크 앞에 서서 조선어 뉴스해설들을 담당 했다. 지금은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이상은 야마자키 긴 사부로의 회상기에서 인용했다. 해방된 나라에서 모윤숙은 바쁜 나날을 보냈다. 지식인 살롱을 열어 이승만 박사와 한민당의 정치적 입장을 유리하게 만들기 위한 노력을 기울이면서 국내에 온 외국인들에게 호감을 갖을 수 있도록 힘을 기울였다. 앞에서 살펴본 메논도 이렇게해서 유엔에서 우리입장을 옹호하는 쪽으로 생각을 바꾼 사람이다. 이승만 박사의 최측근에서 독립국가의 터전을 마련하기 위해 앞장섰으며 강력한 반공활동을 벌리기도 했다. 우리나라가 정부를 수립하고 처음으로 UN에 대표부를 보낼 때 조병옥 등과 함께 대표로 파견되어 외교활동을 벌리기도 했다. 위 사진은 1948년 대한민국 정부수립 후 같은 해 12월 유엔총회에서 대한민국정부를 승인한 것을 기념해서 촬영한 사진이다. 앞줄 좌로부터 모윤숙, 조병옥, 장면(주미 한국대사), 김활란. 뒷줄 좌로부터 정일형, 김우평, 장기영, 김준구 아래사진은 유엔대표부 회의광경으로 왼쪽부터 조병옥, 모윤숙, 김동성, 장면. 뜻하지 않은 6.25는 모윤숙으로 하여금 마이크를 들고 방송국에서 또는 국군이 싸우는 최 일선을누비면서 눈, 코 뜰 사이 없이 외쳐대야 했다. 6.25가 일어나던다음날 아침부터 문화 예술인들이 문총비상 대책위원회를 결성해서 집단적으로 전쟁에 참여했고 모윤숙이 앞장섰다. 국민들에게 전의를 고취하는 선전전을 폈으며 그 선전전의 일환으로 KBS마이크를 잡고 애국시를 스스로 지어 낭송했다. 모윤숙은 국군 찦차를 타고 아군의 주 저항선인 미아리고개 밑에까지 가 적과 분전하는 국군장병들을 격려했으며 목매인 외침은 밀리 기만 하던 국군의 사기를 높였다. 1950년 6월 27일 심야 ! KBS가 서울에서 후퇴하던 그날 밤종료방송은 모윤숙의 애국시 낭송이었다. 당시 주 일본 전권공사(주일 한국대표부단장)로 UN군 총사령부 방송 창설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셨던 김용주는 "1950년 6월 27일밤 ‘전화통과 라디오 앞에서 밤을 새우던 우리 대표부는 밤 10시경 모윤숙 여사의애국시 낭송을 끝으로 서울 방송이 끊겨 버렸다.‘고 했다. 모윤숙의 애국시 낭송은 서울이 함락되는 순간까지 방송되었음을 말해주는 대목 이다. (필자 주 : 그날 밤 KBS방송은 밤 12시까지 하고 비상방송기기를 군 쓰리커터에 실었다고 했는데 우리나라와 일본의 시차가 있어서 10시라고 표현된 듯하다.)
최후까지 국군의 사기를 올리면서 남침 저지에 힘을 기울이던 모윤숙은 피난길에 오르지 못했다. 위 사진은 유엔군이 공개한 사진으로 서울이 함락된 3개월간 모윤숙자신이 어떻게 재내 왔는지를 얘기하는 장면이라고 했다. 전쟁이 끝나고 모윤숙은 펜클럽 한국본부 회장. 예술원 회원. 유엔 한국대표. 한국문예총연맹 최고위원.국회의원 등 화려한 직책과 이력을 가졌지만 이런 얘기는 약력과 널리 알려진 시 "국군은 죽어서 말한다."를 올리는 것으로 가름한다. 약 력 모윤숙 (毛允淑) (MOH YOUN SOOK)
1910년 3월 5일 함경남도 원산출생, 1990년 6월 7일 사망 아호 : 영운 (嶺雲)
학 력
1925년 함흥영생보통학교 졸업 개성 호수돈 여자고등보통학교 2년 편입 1927년 이화여자전문학교 예과 입학 1931년 이화여전 영문과 졸업 1935년 경성대 영문과 수료 1976년 이화여대 명예문학박사
경 력
1931년 명신여학교(明信女學校) 교사-북간도 용정 1932년 서울 배화여자고등보통학교 교사 삼천리지 기자 1940 ~ 1945 경성방송국 편성원 1945 ~ 낙랑 클럽 운영 등을 통한 활동 1948 ~ 1949 유엔총회 한국문학대표 1948 ~ 문예지 발행인 1950 ~ 대한여청 총본부 단장 1954 ~ 한국펜클럽 부회장 1955 ~ 문총 최고위원 1957 ~ 1981 예술원 회원(시) 1958 ~ 유네스코총회 한국대표 1959 ~ 아시아 여성단체연합총회 한국대표 1960 ~ 국제펜클럽 한국위원회 의장 1962 ~ 국제펜클럽 부회장 1968 ~ 한국인도협회 부회장 1969 ~ 여류문인회장 1970 ~ 서울 세계 펜 대회 준비 위원장 1971 ~ 1972 8대 국회의원(공화당, 전국) 1972 ~ 여류 문인회 고문 1973 ~ 현대 시인 협회장 1974 ~ 1984 국토통일 고문 1977 ~ 1983 국제펜클럽 한국본부 회장 1980 ~ 국제펜클럽 국제본부 부회장 1980 ~ 1986 문학진흥재단 이사장 1981 ~ 1988 예술원 원로회원(시) 1983 ~ 1990 국제펜클럽 한국본부 고문 1989 ~ 1990 예술원 회원(시)
상 훈
국민훈장모란장 예술원상 3.1문화상 세네갈 문화교류공로훈장 금관 문화훈정
주요 작품, 저서 시 당신의 얼골을 (東光, 1931.12.) 시집 빛나는 지역 (朝鮮彰文社, 1933) 시집 옥비녀 풍랑 피로 색인 당신의 얼굴들, 문을 여소서, 조선의 딸, 내 어머니 한 말씀에 정경 빛나는 지역 풍토 논개 모윤숙 시전집Ⅰ‧Ⅱ 렌의 애가 모윤숙전집 국군은 죽어서 말한다. 국군은 죽어서 말한다. 나는 광주 산곡을 헤매이다 문득 혼자 죽어 넘어진 국군을 만났다. 1951년 모 윤 숙
시낭송 이서윤 산 옆 외따른 골짜기에 혼자 누워 있는 국군을 본다. 아무 말, 아무 움직임 없이 하늘을 향해 눈을 감은 국군을 본다. 누른 유니폼 햇빛에 반짝이는 어깨의 표식 그대는 자랑스런 대한민국의 소위였고나. 가슴에선 아직도 더운 피가 뿜어 나온다. 장미 냄새보다 더 짙은 피의 향기여! 엎드려 그 젊은 주검을 통곡하며 나는 듣노라! 그대가 주고 간 마지막 말을 …… 나는 죽었노라. 스물 다섯 젊은 나이에 대한민국의 아들로 나는 숨을 거두었노라. 질식하는 구름과 바람이 미쳐 날뛰는 조국의 산맥을 지키다가 드디어 드디어 나는 숨지었노라. 내 손에는 범치 못할 총자루, 내 머리엔 깨지지 않을 철모가 씌 워져 원수와 싸우기에 한 번도 비겁하지 않았노라. 그보다도 내 핏속엔 더 강한 대한의 혼이 소리쳐 나는 달리었노라. 산과 골짜기, 무덤 위와 가시숲을 이순신같이, 나폴레온같이, 시이저같이, 조국의 위험을 막기 위해 밤낮으로
앞으로 앞으로 진격! 진격! 원수를 밀어 가며 싸웠노라. 나는 더 가고 싶었노라. 저 원수의 하늘까지 밀어서 밀어서 폭풍우같이 모스코바 크레믈린 탑까지 밀어 가고 싶었노라. 내게는 어머니, 아버지, 귀여운 동생들도 있노라. 어여삐 사랑하는 소녀도 있었노라. 내 청춘은 봉오리지어 가까운 내 사람들과 함께 이 땅에 피어 살고 싶었었나니. 아름다운 저 하늘에 무수히 날으는 내 나라의 새들과 함께 나는 자라고 노래하고 싶었어라. 나는 그래서 더 용감히 싸웠노라. 그러다가 죽었노라. 아무도 나의 주검을 아는 이는 없으리라. 그러나 나의 조국, 나의 사랑이여! 숨 지어 넘어진 내 얼굴의 땀방울을 지나가는 미풍이 이처럼 다정하게 씻어주고 저 하늘의 푸른 별들이 밤새 내 외롬을 위안해 주지 않는가? 나는 조국의 군복을 입은 채 골짜기 풀숲에 유쾌히 쉬노라. 이제 나는 잠시 피곤한 몸을 쉬이고 저 하늘에 날으는 바람을 마시게 되었노라. 나는 자랑스런 내 어머니 조국을 위해 싸웠고 내 조국을 위해 또한 영광스리 숨 지었노니 여기 내 몸 누운 곳 이름 모를 골짜기에 밤이슬 나리는 풀숲에 나는 아무도 모르게 우는 나이팅게일*의 영원한 짝이 되었노라. 바람이여! 저 이름 모를 새들이여! 그대들이 지나는 어느 길 위에서나 고생하는 내 나라의 동포를 만나거든 부디 일러 다오. 나를 위해 울지 말고 조국을 위해 울어 달라고. 저 가볍게 날으는 봄나라 새여 혹시 네가 날으는 어느 창가에서 내 사랑하는 소녀를 만나거든 나를 그리워 울지 말고 거룩한 조국을 위해 울어 달라 일러 다고. 조국이여! 동포여! 내 사랑하는 소녀여! 나는 그대들의 행복을 위해 간다. 내가 못 이룬 소원, 물리치지 못한 원수, 나를 위해 내 청춘을 위해 물리쳐 다오. 물러감은 비겁하다. 항복보다 노예보다 비겁하다. 둘러싼 군사가 다아 물러가도 대한민국 국군아! 너만은 이 땅에서 싸워야 이긴다. 이 땅에서 죽어야 산다. 한 번 버린 조국은 다시 오지 않으리라. 다시 오지 않으리라. 보라! 폭풍이 온다. 대한민국이여! 이리와 사자 떼가 강과 산을 넘는다. 내 사랑하는 형과 아우는 서백리아* 먼 길에 유랑을 떠난다. 운명이라 이 슬픔을 모른 체 하려는가? 아니다. 운명이 아니다. 아니 운명이라도 좋다. 우리는 운명보다는 강하다. 강하다. 이 원수의 운명을 파괴하라. 내 친구여! 그 억센 팔 다리. 그 붉은 단군의 피와 혼, 싸울 곳에 주저 말고 죽을 곳에 죽어서 숨지려는 조국의 생명을 불러 일으켜라. 조국을 위해선 이 몸 이 숨길 무덤도 내 시체를 담을 작은 관도 사양하노라. 오래지 않아 거친 바람이 내 몸을 쓸어가고 저 땅의 벌레들이 내 몸을 즐겨 뜯어가도 나는 즐거이 이들과 함께 벗이 되어 행복해질 조국을 기다리며 이 골짜기 내 나라 땅에 한 줌
흙이 되기 소원이노라. 산 옆 외 따른 골짜기에 혼자 누운 국군을 본다. 아무 말, 아무 움직임 없이 하늘을 향해 눈을 감은 국군을 본다. 누른 유니폼 햇빛에 반짝이는 어깨의 표식 그대는 자랑스런 대한민국의 소위였고나. 가슴에선 아직 더운 피가 뿜어 나온다. 장미 냄새보다 더 짙은 피의 향기여! 엎드려 그 젊은 주검을 통곡하며 나는 듣노라! 그대가 주고 간 마지막 말을
모 윤 숙 관련글 보기 영문자 클릭 6.25 모윤숙 그때 그 육성으로 듣는 실상 http://blog.daum.net/jc21th/17781784 모윤숙과 노천명, 6.25와 방송 홍도야 울지마라. 유경환, 이서윤 http://blog.daum.net/jc21th/17782908 이서윤 시낭송(암송) 윤동주 시 내 인생의 가을이 오면http://blog.daum.net/jc21th/17782664 유경환 (유카리나) 여사님 글 2013 년 5월에 댓글을 남겨주신 분의 성함을 이제까지 독고 김이신줄 알았더니, 메논이라는 사람에게 조국을 위해서 몸바쳐 로비를 감행 (?)한 것은 몰랐던 사실인데 젊은 여성이나, 젊은 피와 목숨을 조국을 위해 바친 젊은 청년들이나 다같이 죽어서 말하는 ...... 시의 마지막 연에서 이 시를 읽는 많은 분들이 그 통곡 소리를 들으며 애국심을 잠시라도 느끼시리라 생각됩니다. 시 낭송이란 전혀 모르던 분야이고, 시 한줄 잘 쓰지 못하는 처지 이지만, 국군은 죽어서 말한다. 이 시를 낭독이라도 한번 해보고픈 마음은 해마다 6월이 오면 떠오르던 차에평소 마음이 잘 맞아 활동을 함께하는 시낭송가 이서윤 씨의 낭송으로 듣는 '국군은 죽어서 말한다.' 는, 역시 명시에 명 낭송이라, 더욱 진한 감동으로 듣게 됩니다.
이서윤 (본 詩낭송) 선생님 글 "...질식하는 구름과 바람이 미쳐 날뛰는 나는 숨지었노라..." 흐느끼는 것을 보았습니다 단숨에 읊으느라
흥미롭게 읽었습니다 날개를 달아주셔서 정중히 모셔갑니다 행복하시길 소망합니다. - 이서윤 큰절 - 이장춘의 답글 아! 이서윤 선생님의 이 시 낭송이 있기를 기다린지 2년의 세월이 지나 님의 목소리에 실린 시를 접했습니다. 이서윤 선생님을 알게 된것 행운입니다. 아직도 이선생님의 올리고져하는 시낭송이 있습니다. 그 낭송이 있는날 이서윤 선생님의 목소리가 또 춘하추동방송에 오를것입니다. 부디 건강하시고 행복하소서!, 이서윤 선생님 글 춘하추동방송 기록으로 올립니다. 이장춘 선생님! 정원에 들어서면 시장기가 돌다가도 곧 배가 부릅니다. 없는 민족애가 깊게 쌓여 힘없는 중년 여성이나 새의 발톱 만큼이라마 찍어 내고자 조각 구름일지언정 온전한 모양으로 하늘에 떠 있고 싶었습니다. 임긍수 평화 음악회에 테너로 참여하신 구능회 선생님과 댓글로 이루어지네요...
이렇게 뵈오니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먼저 쓴 글에 올라온 댓글을 기록으로 남긴다. 2011년 4월 14일 고독 김 2013.05.07 06:59 건국의 어머니 모윤숙을 이렇게까지 흠모하는 분이 계실 줄이야...친일파 매국노 청산이 안 되서 일어난 일이겠죠...안타깝습니다. 참고로 건국의 아버지는 메논 UN위원장인데 남한만의 단독 정부 구성을 위한 선거를 반대하던 메논에게 모윤숙이 로비를 벌이죠...결국 메논은 감성이 이성을 흔들었다. 라는 명언을 남기고 단독 선거를 찬성 합니다. 결국 건국의 어머니와 아버지가 이렇게 결정 돼 버린 거죠 ……. ┗ 이장춘 2013.06.19 03:06 아! "감성이 이성을 흔들었다."는 말을 메논이 직접 했지요? 그렇다면 모윤숙이 메논의 이성을 감성으로 바꿀 만큼 대단한 인물이었군요. 결국 그렇게 해서 대한민국이 한반도의 유일 합법정부로 인정을 받게 되었군요. 그런데 그때 단독정부라도 수립되지 않았다면 대한민국이 어찌 되었을가요? 유카리나 2013.06.18 20:43 국장님, 놀랍습니다. 이 거대한 詩를 적는 데만도 수십 분의 시간이 걸렸겠어요. 제 생에 이렇게 길고 거대한 詩는 처음 읽어봅니다. 이분이 여자라고는 느낄 수가 없군요. 6월 22일에 뜻을 함께하는 몇몇 사람들이 몇 년째 6월이면 ‘실미도’에 갑니다. 영화 '실미도'가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 졌던 그 섬에 가서 그냥 우리끼리 잔 한잔 올리고, 시 낭송도하고, 음악도 바치고, ‘실미도’에서 젊음을 바친 영혼들을 위해 해마다 6월에 한번 씩 다녀오는데,올해 각자의 시 낭송을 위해 저는 이 시 '모윤숙 시인의 '국군은 죽어서 말한다.' 를 낭독하고 싶습니다. 때맞추어 이 시를 알게 되어 감사드립니다. 물론 오카리나로 그곳에서 젊음을 바친 영혼들을 위해 'To heaven'과 '섬집아기'도 연주할 예정이여요. ┗ 이장춘 2013.06.19 03:24 그 ‘실미도’를 한번 가보고 싶습니다. 시 낭송에 오카리나 배경음악이 깔리나요? 유카리나님의 시낭송을 녹음으로 남기시면 좋으실 텐데요.녹음을 하셔서 녹음 물로 남겨보셔요. 잘 다녀오셔요. "국군은 죽어서 말한다." 시를 여기서 직접 인쇄 하셔도 되지만 메일로 보내 드렸습니다. 메일을 열어서 인쇄하셔요. ┗ 유카리나 2013.06.19 05:35 제가 컴에 미숙하여 그런 생각을 미처 못 하고, 어제 국장님 블로그에서 읽으며 써 보았더니 시간이 꽤 걸리더군요. 시 낭독은 잘 하지는 못하니............. 노력은 해 보겠습니다. ^0^ 이장춘 2013.06.19 11:08 전화로 연락을 드렸으면 수고를 덜 하셨을 터인데 그리 되셨군요. ┗ 유카리나 2013.06.19 21:26 쓰면서 읽게 되니, 아무래도 더 공부가 되었을 거여요. 그래도 메일로 보내주신 것 몇 부 카피 해다가 나누어 볼 생각입니다. 유카리나 2014.03.10 06:28 국장님 지난해엔 ‘실미도’에서 이 시를 낭송하지 못했습니다. 해마다 현충일이 낀 올해 6월에도 갈 터인데,(6월6일 1박2일 예정) 낭송은 못해도 낭독은 해 보고 싶군요. 작년 보내주셨다는 메일을 찾을 수가 없으니 번거로우시더라도 한번 다시 메일로 보내 주십사하고 말씀드립니다. 낭독하는데 만도 8분정도 소요되는 長詩이군요. 도저히 낭송은 힘들다는 생각이 들어 낭독이라도 잘 해야겠어요. ┗ 이장춘 2014.03.10 07:37 메일로 보내 드렸습니다. 다 외어 하는 것은 암송이라 하던데요. 낭송이라고 썼다가 암송으로 고쳐 달라는 부탁을 받은 적이 있어요1962년 mbc아나운서 지금도 시 암송을 하시는데 11일 또 그 암송이 있으시데요.가 보려고요. 유카리나 2014.03.10 06:44 낭독하는데 만도 8분정도 소요되는 長詩이군요. 도저히 낭송은 힘들다는 생각이 들어 낭독이라도 잘 해야겠어요. ┗ 이장춘 2014.03.10 07:35 유현숙 여사님이나 이서윤 여사님이 낭송 하시면 어떨까요? 그러면................... ┗ 유카리나 2014.03.10 11:41 그날 어디선가 이 시가 낭송 될지도 모르지만,저희 일정과 그분 들의 일정이 서로 다를 수도 있고,이건 그냥 저 혼자의 생각이여요.^0^
앞에서 부터 변영로, 변영태, 모윤숙, 김광섭 모윤숙, 메논 , 김활란 방우회 이사 이장춘 춘하추동방송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