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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정주 (1915-2000) 시인
1915년 5월 18일 전라북도 고창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달성()이다. 호는 미당()·궁발()이다. 1924년 3월 전라북도 부안의 줄포공립보통학교에 입학하여 5년 만에 수료한 뒤 1929년 경성의 중앙고등보통학교에 보결생으로 입학했다. 1930년 11월 광주학생운동 기념 시위를 주도해 퇴학과 함께 구속되었으나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기소유예되었다. 1931년 고창고등보통학교에 편입했으나 권고자퇴를 당했다. 1933년 겨울 박한영 대종사 문하생으로 입문하여 동대문 밖 개운사 대원암 내 중앙불교전문강원에 입학했다. 같은 해 12월 『동아일보』에 시 「그 어머니의 부탁」으로 등단했다. 1935년 4월 중앙불교전문학교에 입학했다. 1936년 1월 『동아일보』신춘문예에 시 「」이 당선되었다. 5월 중앙불교전문학교를 중퇴했다. 5월부터 8월 이후까지 합천 해인사 소속 초등과정 해명학원 교원을 지냈다. 11월부터 다음 해 12월까지 시가중심의 문예모임인 시인부락 동인으로 활동했다.
1939년 만주로 이주하여 양곡주식회사 젠다 오성(간도성) 연길시 지점 경리사원으로 입사했고, 겨울에 용정출장소로 전근해 근무하다 1941년 2월 고향으로 돌아왔다. 같은 해 첫 시집 「화사집」을 발간하고 동대문여학교 교사로 부임하여 1942년 봄까지 근무했다. 1943년 10월 17일부터 23일까지 최재서와 용산 주둔 조선군이 김제평에서 진행한 전쟁연습에 조선군 보도반원 자격으로 종군했다. 11월 전후로 죄재서가 경영하던 친일노선의 문예지인 「국민문학」과 「국민시가」를 편집했다.
서정주는 주로 시·소설·잡문·평론 등을 통해 일제에 협력했다.
1942년 7월 13일부터 17일까지 『매일신보』에 평론 「시의 이야기-주로 국민시가에 대하여」를 발표하면서 본격적으로 친일 대열에 합류했다. “대동아공영권이란 또 좋은 술어가 생긴 것이라고 나는 내심 감복하고 있다. 동양에 살면서도 근세에 들어 문학자의 대부분은 눈을 동양에 두지 않았다. 몇몇 동양학자들이 따로 있어 자기들의 일상 사용하는 한자의 낡은 문헌들을 자의적으로 해석해 내는 정도에 그쳤었다. ……시인은 모름지기 이 기회에 부족한 실력대로도 좋으니 중국의 고전에서 비롯하여 황국의 전적들과 반도의 옛것들을 고루 섭렵하는 총명을 가져야 할 것이다. 동양에의 회귀가 히 제창되는 금일”이라고 주장한 이글은 미요시 다쓰지의 국민시론에서 영향을 받았다. 이글에서 가리키는 국민시가는 표면적으로 “동방 전통의 계승과 보편성에의 지향”을 추구하고 있으나 내면적으로는 대동아공영권의 논리에 함몰된 것이라 평가된다. 이러한 국민시가론에 입각하여 일련의 친일시를 창작·발표했다. 『국민문학』1943년 10월호에 발표한 「항공일()에」는 친일시의 향방을 잘 보여준다.
이 작품은 일제가 침략전쟁을 미화하고 전쟁동원을 독려하기 위해 제정했던 항공일 행사에 맞춰 쓴 기념시다. “아아 날고프구나 날고 싶어 부릉부릉 온몸을 울려 사라진 모든 것 파랑게 걸린 저 하늘을 힘차게 비상함은 내 진작 품어온 소원!” 여기서 ‘하늘’을 천황의 상징으로 해석할 경우, 이 작품의 시적 화자가 동경하는 ‘하늘’로의 비상은 ‘천황’정점으로 형성되는 대동아공영권의 질서에 동화되고 싶은 욕구에 다름아니다.
1943년 11월 16일자 『매일신보』에 「헌시」를 발표했다. 이 시는 ‘반도학도 특별지원병 제군에게’라는 부제를 달고 있다. 학도지원병제도는 일제가 1943년 8월 실시한 징병제와 함께 조선의 청년들에게 황국신민의 의무로 강요된 대표적인 전쟁동원령이다. “교복과 교모를 이냥 벗어버리고 모든 낡은 보람 이냥 벗어버리고 주어진 총칼을 손에 잡으라! 적의 과녁 위에 육탄을 던져라! 벗아 그러나 벗아 성장의 군모 아래 새로 불을 켠 눈을 보자 눈을 보자 벗아…¨오 백년 아닌 천 년 만에 새로 불 켠 네 눈을 보자 벗아…¨아무 뉘우침도 없이 스러짐 속에 스러져 가는 네 위엔 한 송이의 꽃이 피리라 흘린 네 피에 외우치는 소리 있어 우리 늘 항상 그 뒤를 따르리라: 이와 같이 일제의 침략전쟁과 학도지원병의 영웅적 전투행위를 그려내면서 조선 학생들에게 학도지원병 출정을 독려했다.
「무제-사이판 섬에서 전원 전사한 영령을 맞이하며」 『국민문학』 1944년 8월호-는 태평양전쟁 말기에 사이판 등지에서 일어난 일본 병사들의 옥쇄()를 찬양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특히“어머니여 저 용맹스런 함성은 저곳이리 푸른 혈조가 끊임없이 내려와 커다란 목소리 나를 부른다 아아 기쁘도다 기쁘도다 희생 제물은 내가 아니면 달리 없으리 어머니여 나 또한 창을 들고 일어서리 배를 띄우리 사이판으로! 메킨 타와라로 아투로!”에 나타난 바와 같이 옥쇄를 감행한 병사들과 하나가 되어 적과 맞서 싸우자고 선동했다.
1944년 12월 9일자 『매일신보』에 발표한 「송정오장송가」는 1944년 11월 24일 한국인 출신 소년비행병으로 제일 먼저 가미카제특공대로 전사한 인재웅(창씨:송정수웅)을 추모하는 내용이다. “마쓰이 히데로! 그대는 우리의 신풍특별공격대원 정국대원 정국대원의 푸른 영혼은 살아서 벌써 우리게로 왔느니 우리 숨 쉬는 이 나라의 하늘 위에 조용히 조용히 돌아왔으니 우리의 동포들이 밤과 낮으로 정성껏 만들어 보낸 비행기 한 채에 그대, 몸을 실어 날았다간 내리는 곳, 소리 있이 내리는 고운 꽃처럼 오히려 기쁜 몸짓 하며 내리는 곳, 쪼각쪼각 부서지는 산더미 같은 미국 군함!”이라고 하여 미국과 영국에 대한 적개심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면서 조선 병사의 죽음을 대동아공영권 건설을 위한 영광스런 자기희생인 양 노래했다. 그러나 인재웅은 미군의 포로로 있다가 1946년 1월 10일 미국포로수송선을 타고 인천으로 입항했다.
수필 「인보정신」(『매일신보』 1943.9.1.-9.10)에서는 이웃간에 일어난 촌극을 통해 일본 국기에 대한 흠모의 정을 그렸다. 「스무살 된 벗에게」(조광 1943년 10월호)와 「징병적령기의 아들을 둔 조선의 어머니에게」(춘추 1943년 10월호)에서는 일제의 징병에 젊은이와 어머니들이 적극 부응해햐 한다고 선전했다. 특히 「스무살 된 벗에게」는 “이보단 앞서서 이미 우리들의 선배의 지원병들은 우리들의 것이요 동시에 천황 폐하의 것인 그 붉은 피로써 우리들 앞에 모범을 보이여 우리들의 나갈 길을 보여주었습니다. 이미 야스쿠니신사의 영령이 된 한 사람의 이인석상등병의 피는 절대로 헛되이 흘려져 버리고 말 성질의 것은 아닙니다. 가나우미, 땅에 흘려진 피는 또한 늘 귀 있는 자를 향하여 외치는 것이라는 것도 총명한 그대는 잘 알 것입니다. 지원병들의 뒤를 이어서 인제부터 젊은 사람들은 스물한 살만 되면 부절히 일어서서 일본제국 군인으로서의 자기를 단련해 갈 것”이라 하여 지원병의 모범을 따라서 장병에 적극 참여할 것을 강조했다.
1943년 11월호 『조광』에 ‘최’씨 성을 가진 조선인 우체부가 군속을 지망하는 과정을 다룬 소설 「최체부의 군속지망」을 발표했다. 친일의식이 가장 직접적으로 드러난 부분은 작품의 결말 부분이다. “덴노헤이까 반자이!라고 큰 획으로 맨 처음 줄을 아로새긴 밑에, 신문지를 두 쪽에 낸 것만한 백로지위에 탄원의 문구가 가득히 쓰이어 있었다.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최 체부의 소원은 마침내 관계 관원들을 울린 바 있어서, 그의 벗인 해리면 사무소의 가네무라 군과 같이 얼마 후에 두 사람은 군속이 되어 먼 남녘 나라로 떠났다. 최 체부는 떠날 달부터 꼭꼭 그의 집에 돈을 부치어, 집안은 전보다 살기에 궁색치 않았고, 마을 사람들의 끝없는 호의와 존경속에서 최 체부의 어머니도 손자를 따라 아침해가 떠오를 때면 규-조-요하이(궁성요배)를 하는 갸륵한 습성이 생기었다”라고 하여 침략전쟁에 복무하는 것이 부와 명예를 누리는 첩경임을 노골적으로 표현하였다. 1943년 10월에 조선군 보도반원 자격으로 조선군의 추계연습에 종군한 체험을 기록한 종군기 「경성사단 대연습 종군기」(『춘추』1943년 11월호), 「보도행-경성사단추계연습의 뒤를 따라서」 (『조광』1943년 12월호), 「나의 보도종군」(『국민문학』1943년 12월호)을 잇따라 발표했다.
해방 후, 1946년 부산 남조선대학교에서 전임강사로 학생들을 가르쳤으며, 조선청년문학가협회를 결성하여 시분과위원장으로 활동했다. 같은 해에 시집 「귀촉도」(선문사)를 발간했다. 1948년 『동아일보』에 입사, 사회부장과 문화부장으로 활동하다가 정부수립과 동시에 문교부 초대 예술과장으로 근무했다. 1949년 한국문학가협회 창립과 함께 시분과위원장으로 활동했고, 「이승만박사전」(삼팔사)를 발간했다. 1950년 6.25전쟁이 일어나자 종군문인단을 결성했다.
1951년 전주 전시연합대학 강사 겸 전주고등학교 교사를 지냈다. 1952년부터 1953년까지 광주 조선대학교 부교수를 지낸 뒤 1953년 상경했다. 1954년 예술원 회원에 올라 문학분과 위원장을 지냈으며, 이해 서라벌예술대학 교수로 부임하여 1960년까지 재직했다.
1955년 미국 아시아 재단 자유문학상을 받았으며, 시집『서정주시선』(정음사)를 발간했다. 1956년부터 1960년까지 한국문학가협회 최고위원으로 활동했다. 1960년 동국대학교 교수로 부임했고, 시집「신라초」(정음사)를 발간했으며, 1961년 이 시집으로 5·16문예상을 받았다.
1968년에 시집 『동천』(민중서관)을, 1972년 『서정주문학전집』(전5권,일지사)를 발간했다. 전집 제 3권에 수록된 자전적 성격의 글인 「천지유정」의 제7장 ‘흑석동 시대’와 제9장 ‘창피한 이야기들’에서 자신을 ‘친일파’ 혹은 ‘부일파’로 부르는 것에 이의를 제기하면서 자신은 다만 일본의 “욱일승천시세”밑에서 “종천순일파”로 체념하면서 살아간 것에 지나지 않았다고 강변했다.
1974년 고향인 전라북도 고창 선운사 입구에 고창 라이언스클럽 주관으로 ‘미당시비’가 건립되었다. 1975년 시집 「질마재 신화(일지사)」를, 1976년 『떠돌이의 시』(민음사)를 발간했다.
1977년 11월 한국문인협회장에, 1978년 9월 동국대학교 문리대학장에 취임했다. 1979년 8월 동국대학교 교수직을 퇴임했다. 1980년 10월 중앙일보사에서 문화대상본상 개인상을 수상했다. 1981년 당시 전두환 대통령 후보를 위한 텔레비전 지원연설을 했다. 1983년 5월 『미당서정주시전집』(민음사)이 처음 나온 이후 1994년까지 시전집 3권, 자서전 2권으로 『서정주전집』(민음사)이 발간되었다. 1984년 범세계)한국예술인회 이사장을 지냈다. 1987년 1월 18일 당시 전두환 대통령의 생일 축하장에서 자작시 「전두환 대통령 각하 제56회 탄신일에 드리는 송시」를 낭독했다. 1992년 4월 『신동아』에 발표한 글 「일정 말기와 나의 친일시」에서 다시 한 번 자신의 친일행적을 변명했다. 2000년 12월 24일에 사망했고 금관문화훈장이 추서되었다. 2001년 6월 「중앙일보」에서 미당문학상을 제정했다. 2001년 11월 3일 고창군에 미당시문학관이 건립되었으며, 이곳에서 2005년 이후 매년 가을 미당문학제가 열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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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험한 세상을 양지만 누리며 살다 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