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의 성지, 국립현충원은 어떤 곳인가?
1. 국립서울현충원 개황
이곳은
國家 社會를 위해 犧牲하거나 獻身 奉仕하신 분들을 모시고, 그 崇高한 精神을 기리는 우리나라의 가장 聖스로운 지역으로 서울 동작구에 소재
冠岳山 기슭 아래 孔雀峰을 主峰으로 그 능선이 병풍을 치듯 3면을 감싸고,
앞에는 漢江이 굽이쳐 흘러 그야말로 ‘左靑龍 右白虎’의 형세를 이루고 있는 명당 중의 명당
총 면적은 143만 ㎡로 약 40만평
지금까지 안장되신 분은 전몰장병, 애국지사, 국가유공자 등 약 5만 여분이 조금 넘고 있음
<참고 1>
ㅇ 근거 : 국립묘지의 설치 및 운영에 관한 법률
ㅇ 안장절차 : 법상 당연히, 안장심사위원회 심사를 거쳐 등 2가지
ㅇ 개인별 묘 면적
- 대통령 역임 : 264㎡(80평)
- 그 외 사람은 3.3㎡(1평)이 원칙이나 예외적으로 애국지사 등 26.4㎡
ㅇ 안장 제한
- 형사자, 자해자
- 도망 및 탈영 중 사망자,
- 순직자 이외의 변사자
<참고 2, 지형 지세>
국립서울현충원은 뒤로는 冠岳山을, 앞으로는 한강을 바라보며 공작봉(孔雀峰)을 주봉으로 병풍처럼 3면을 감싸고 있음.
전체의 형국은 공작이 아름다운 날개를 쭉 펴고 있는 모습(孔作張)이며, 장군이 군사를 거느리고 있는 듯한 장군대좌형(將軍對座形)이다.
즉, 좌청룡(左靑龍)의 형세는 웅장한 산맥의 흐름이 용이 머리를 들어 꿈틀 거리는 듯 한강을 감싸 호위하는 형상이고,
우백호(右白虎)의 형세는 힘이 센 호랑이가 엎드려 머리를 조아리는 듯하며 전후좌우로 솟은 사방의 봉우리와 산허리는 천군만마(千軍萬馬)가 줄지어 서 있는 형상과 같다.
여기에다 한강물은 동쪽에서 나와 서쪽으로 흘러들어 마치 명주 폭이 바람에 나부끼듯 하늘거리며 공작봉을 감싸 흘러 내려가고 있다.
이와 같이 국립서울현충원이 위치한 공작봉은 산수의 기본이 유정(有情)하고, 산세가 전후좌우에 펼쳐져 흐르는 듯 하나의 산봉우리, 한 방울의 물도 서로 조화를 이루지 않은 곳이 없으며,
마치 목마른 코끼리가 물을 마시는 듯한 형상(渴形象)으로 그야말로 명당 중의 명당이다.
2. 우리나라 국립현충원 현황
우리나라에 국가가 관리하는 ‘국립묘지’는 모두 모두 8개소임.
이 가운데 그 역사성이나 상징성 면에서 가장 먼저인 이곳 서울(동작동)과 대전의 국립현충원 2곳,
또 우리나라 민주화 과정에서 세워진
- 서울 강북구 水踰里의 ‘국립 4.19민주묘지’
- 경남 昌原(옛 馬山)의 ‘국립 3.15민주묘지’
- 光州의 국립 5.18민주묘지’ 등 민주묘지 3곳,
그리고, 전몰장병을 주로 안장하는
- 경북 永川, 전북 任實, 경기 利川, 경남 山淸 등
네 곳의 국립호국원
이렇게 해서 모두 9개소의 국립묘지를 두고 있음.
3. 국립서울현충원 연혁(沿革)
6.25전쟁 때 서울 수복 후에도 계속되는 격전으로 전사자가 크게 증가하자 처음엔 ‘육군묘지’로 추진하다 1952년 5월, 국방부가 ‘3군 종합묘지’로 하되, 명칭을 ‘국군묘지’로 변경하였는데,
국방부는 여러 후보지를 물색하다 당시 서울 외곽으로 비교적 한적했던 동작동 현 위치(143만㎡, 약 40만평)를 후보지로 확정.(1953. 9.29, 이승만 대통령 재가)
이후 ‘국립묘지’로 승격되고,
지난 2006년부터는 ‘국립서울현충원’으로 명칭이 바뀜
<세부 연혁>
조국 광복과 더불어 국군이 창설되어 국토방위 임무를 수행하여 오다 6.25전쟁 초기에 전몰장병의 영현은 부산의 금정사(金井寺)와 범어사(梵魚寺)에 안치, 봉안하다
계속되는 격전으로 전사자의 수가 점차 증가하자 1952. 5. 6. 국방부에서 육군묘지 설치문제에 대하여 논의한 결과,
(육군묘지만 설치하게 되면 다른 해군, 공군에서도 별도 군 묘지를 만들어하고, 그렇게 되면 영현관리의 통일성을 기할 수 어렵게 되는 문제가 우려되어)
‘3군 종합묘지’설치를 추진하되, 명칭은‘국군묘지’로 변경
1952. 5. 26. 국방부 주관으로 동작동 현 위치(143만㎡, 약 40만평)를 후보지로 선정
1953. 9. 29. 이승만 대통령의 재가를 받아 공사 착수하였는데 당시에는 인적이 드문 변두리 지역이었음..
1956. 4. 13. 대통령령으로 ‘군 묘지령’을 제정하고,
전사 또는 순직한 군인, 군무원이 안장되고, 순국선열 및 국가유공자는 국무회의 의결을 거쳐 안장토록 함
1965년부터는 전몰장병 등 군인위주에서 벗어나 애국지사, 경찰관 및 향토예비군까지 대상이 확대됨
2006. 1. 30부터 명칭을 "국립서울현충원"으로 변경하고 소방관, 義死傷者 등도 안장대상에 포함
“국가와 민족을 위해 고귀한 삶을 희생하고, 아울러 국가발전에 커다란 발자취를 남긴 분들의
그 숭고한 충의와 위훈을 후손들에게 영구히 보존, 계승시킬 수 있는 국가의 聖域으로서 국립묘지 위상을 갖추게 되었다”.
4. 국립현충원 안장 대상
1953년 당시에는 ‘국군묘지’로 출발하였지만
후에 애국지사나 국가유공자도 안장할 수 있도록 하였는데, ‘안장심의위원회’의 까다로운 심사절차를 통과해야 함
오늘날에는 전사한 군인과 애국지사 외에도 순직 경찰관과 향토예비군, 화재진압 중 순직한 소방관,
위험에 처한 사람을 구하고 자신을 희생한 의로운 사람(義人) 등
국가사회를 위해 한 몸 바친 분들도 안장 대상이 될 수 있음.
5. 현충원 묘역별 주요 안장자
이곳 동작동 서울현충원은 크게 국가원수 묘역, 임시정부요인 묘역, 애국지사 묘역, 무후선열제단(無後先烈祭壇), 국가유공자 묘역, 장병 묘역 등 6개 묘역으로 나뉨.
여기에는 모두 5만이 넘는 순국선열과 호국영령들이 모셔져 있는데요,
묘역별로 살펴보면
국가원수 묘역에는 이승만, 박정희(부부), 김대중 대통령
애국지사 묘역에는 박은식 임시정부대통령, 의병장으로 항일독립투쟁을 이끈 이인영, 신돌석 장군 등 230분,
국가유공자 묘역에는 애국가를 작곡한 안익태 선생 등 63분,
군인/군무원 묘역에는 장군부터 사병까지 약 5만여 분
그리고 독립운동으로 순국하였으나 유해도 없고, 후손도 없는 분이 모서져 있는 무후선열제단에는 유관순 열사 등 133분이 있고,
이외에도 국가사회에 헌신하신 경찰관, 소방관, 의사상자, 일반공헌자, 외국인묘역도 있음.
<참고자료>
묘역별 주요 안장자 현황
<국가원수 묘역>
- 李承晩 대통령(1965.7.19 하와이에서 별세, 7.27 가족장)
(프란체스카여사 : 1992년 3월 별세, 합장)
- 朴正熙 대통령(1979.10.26. 별세, 11.3 國葬)
(육영수 여사 : 1974.8.15 별세, 8.19 국민장)
- 金大中 대통령(2009.8.18. 별세, 8.23 國葬)
<애국지사 묘역>
- 임시정부 2대 박은식 대통령
- 외무총장 역임 신규식 선생 등 18위
- 의병장으로 항일독립투쟁 지휘 이인영, 신돌석 장군
- 만주에서 독립군 양성에 앞장 지청천 장군
- 구한말 독립협회 창설, 독립운동 앞장 서재필 박사,
외국인(캐나다)으로 우리 독립운동에 크게 기여한 스코필드 박사 등 순국선열 및 애국지사 212위
<무후선열 제단(無後先烈 祭壇)>
- 독립운동을 하다 순국하였으나 유해도 찾지 못하고 후손도 없는 유관순 열사, 구한말 고종황제의 밀서를 갖고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참석하였던 이위종, 이상설 열사 등 130여위
<국가유공자 묘역>
- 1983.10 순국외교사절 합동국민장 17위(서석준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장관 등)
- 장택상 前국무총리(국민장), 허정 내각수반, 이은상 박사
- 만주 등 해외에서 항일독립운동에 헌신, 또는 조국 광복후 국가발전에 이바지 하신분로서 철기 이범석 장군, 김홍일 장군, 조만식 선생, ‘애국가 작곡’ 안익태 선생
- 1968. 1.21 사태때 종로경찰서장으로 김신조 일당을 제지하다 피살당한 최규식 경무관 등 60여위
<장병 묘역>
ㅇ 장군 묘역
- 6.25 때 육해공군 총사령관으로 전쟁을 지휘하다 ‘하동전투’에서 전사한 채병덕 장군을 비롯한 350여위
ㅇ 장교묘역 : 영관, 위관급 장교 등 약 4,500여위
ㅇ 사병묘역 : 부사관이하 약 46,000여위
6. 전직 대통령 묘소 면적
ㅇ 전직 대통령의 墓所가 크기에서 각기 차이가 나는데 대해
이곳 동작동 국립현충원에 모셔져 있는 전직 대통령들의 묘소 면적은
- 초대 李承晩 대통령 1,600㎡ (약 480평),
朴正熙 대통령 3,600㎡(약 1,100평)인데 비해
- 金大中 대통령은 264㎡(약 80평)은 상대적으로 적음
여기에는 주차장, 진입로를 합친 면적으로서
李承晩, 朴正熙 두 대통령이 서거할 때 까지는 국립묘지내 국가원수 묘역에 대한 면적 규정이 없었으나 국립묘지가 포화상태를 우려하여
- 2006년부터 지금과 같은 규정을 시행함으로써 金大中 대통령의 묘소가 그 전의 두 대통령보다는 상대적으로 적게 되었음.
- 2015.11.24, 현대의전연구소장 정현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