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시: 2026년 10월 24일
장소: 전남 보성 · 장흥 일원(한승원문화학교-봉강 정해룡생가(거북정)-열선루공원-꿈꾸는 숲 선유원-보성의병기념관)
인원:41명
한승원문화학교(달긷는집-낭월암(浪月庵): 소설가 한승원(韓勝源, 1939~ )은 바다와 남도의 한(恨), 인간의 생명력을 서정적인 문체로 풀어내는 한국 문학의 거장이다. 1968년 등단한 이후 《아제아제 바라아제》, 《불의 딸》, 《포구》 등 수많은 명작을 썼으며, 현대문학상, 이상문학상 등 주요 문학상을 받았다. 자녀들 역시 모두 예술의 길을 걷는 문학가 집안으로 유명하다. 장남 한동림(한규호) 소설가를 시작으로, 둘째 딸은 2024년 한국인 최초로 노벨문학상을 받은 소설가 한강이다. 막내인 차남 한강인도 예술 기질을 물려받았는지 만화가로 활동 중이다. 아버지와 딸이 모두 '이상문학상'을 받은 대기록을 세웠으며, 한승원 작가는 딸에 대해 "나를 뛰어넘은 작가"라며 자랑스러운 마음을 전하기도 했다. 고향인 전남 장흥의 '해산토굴(海山土窟)'에 머물며 끊임없이 글을 써온 그는 한국 현대문학을 빛낸 대표적인 작가이다.
비가내리는 가운데도 장흥지역의 역사 · 문화 탐방에 즐거운 하루를 보내는 남역원 회원님들!
한승원 작가가 작품을 구상하고 집필하는 해산토굴(海山土窟) 전경
봉강 정해룡 생가(거북정)에서 봉강의 아들 정길상 선생님(가운데)과 함께 단체 사진 촬영하는 회원님들!
봉강(鳳岡) 정해룡(丁海龍, 1913~1969) 선생은 임진왜란에서 이순신(李舜臣, 1545~1598) 장군의 종사관(從事官)으로 활약한 반곡(盤谷) 정경달(丁景達, 1542~1602) 선생의 13대손이다. 전남 보성의 명문가이자 천석꾼 가문에서 태어난 봉강 정해룡 선생 일가는 노블레스 오블리주와 민족의식을 온몸으로 실천하였다. 일제강점기 동안 가문의 재산을 내놓아 보성인쇄소와 사설 교육기관 '양정원(養正院)'을 설립하고, 민족 인재 양성과 독립운동 자금 지원에 힘썼다. 흉년이 들때마다 수백 석의 쌀을 풀어 지역민을 구휼했으며, 해방 후에는 부리던 노비들을 신분에서 해방시키고 토지를 사실상 무상 분배하는 대단한 애민정신을 보였다. 해방 정국에서는 여운형(呂運亨, 1886~1947) 선생과 함께 좌·우합작 및 통일정부 수립에 앞장섰고, 한국전쟁 당시에도 이념 대립 속에서 주민 보호와 화해에 힘썼다. 그러나 분단과 독재 정권 아래서 좌익 낙인이 찍히며 8명이 목숨을 잃고 37명이 옥고나 고초를 겪는 등 가문 전체가 비극적인 현대사의 수난을 겪어야 했다. 헌신적인 애국·애민의 삶에도 불구하고 이념의 그늘에 가려졌던 선생과 가문의 삶은 후대에 재조명받으며 참된 우국지사 가문의 모범으로 기억되고 있다.
정해룡(왼쪽)과 안용섭(가운데-정해룡 매제), 정해진(오른쪽) 사진. 아래는 모친 윤초평 여사( 도서출판 길 )
보성가족간첩단 사건(1980년 11월): 한국전쟁 중 월북했던 동생 정해진이 북한 조선노동당 대남사업부 부부장이 되어 1965년과 1967년 고향 봉강리를 몰래 찾아온 것이 사건의 발단이다. 봉강은 아우 해진의 월북 요청에 자신을 대신하여 아들(정춘상)을 북에 다녀오게 했고, 보름가량 북에 머문 뒤 김일성 친서, 소련제 기관단총, 난수표, 공작금을 들고 돌아왔다. 그러나 봉강이 사망(1969년)하면서 공작임무는 유명무실하였다. 봉강 사후 6년이 지난 뒤 정길상은 뒤늦게 이 사실을 형 으로부터 들었고, 1980년 정해진의 남파 사실이 공안당국에 드러나게 되었으며, 1985년 춘상은 사형을 당했다. 또한, 빨치산 활동 중 실명했던 정해룡의 숙부 정종희는 징역 12년, 춘상의 동생 정길상은 징역 7년형을 선고받았고 30여명이 체포되어 조사받는 과정에서 집안은 풍비박산이 되었다.
광주이씨효열문 (왼쪽) 역사에 죄인이 되지 말자(가훈) 설명에 집중하는 회원님들!
거북정 안 사당(祀堂)모습 [사진-봉강 정해룡(왼쪽), 봉강어머니 윤초평 여사) ]
우리나라의 무궁한 발전과 통일을 염원하는 거북이 모습과 한반도 모양의 연못있는 정원
정길상 선생님이 거북정의 해방 전후 역할에 대해 설명하는 모습
거북정 안채에서 바라본 모습(위쪽) 거북정 외관(아래쪽)
열선루 누각에서 오늘의 의미를 다지며 남도역사연구원의 발전을 기원하는 회원님들!
보성 열선루(列仙樓)는 정유재란 당시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호국 결의가 서린 역사적인 누각이다. 1597년 수군 폐지 명령을 내린 선조 임금에게 이순신 장군이 “신에게는 아직 12척의 배가 남아있사옵니다(今臣戰船尙有十二)”라는 그 유명한 장계(상소문)를 작성하여 올린 장소가 바로 이곳이다. 장군은 열선루에서 나라를 구하겠다는 단호한 결의를 다진 후, 12척의 배로 133척의 왜선을 물리친 명량대첩의 기적을 이루어 낸다. 세월이 흘러 사라졌던 열선루는 최근 보성군에 의해 웅장한 모습으로 중건되었으며, 이순신 장군의 호국 정신과 조선 수군 재건의 역사를 품은 대표적인 문화공간으로 조성되어 있다.
이순신이 바다를 지킬당시 뒤편에서 마을과 나라를 지킨이들은 꺼지지 않는 불꽃이었다.(오른쪽)
열선루 누각에서 회원들에게 임진왜란 당시 보성지역의 활약상을 소개하는 노성태 원장
보성의병기념관에서 죽천 박광전(朴光前)의 활약상을 설명하는 노성태 원장
죽천 박광전(竹川 朴光前, 1526~1597) 선생은 조선 중기의 학자이자, 나라가 위기에 처했을 때 몸을 사리지 않고 솔선수범한 호남 의병의 정신적 지주이다. 퇴계 이황 선생의 문하에서 학문을 익힌 유학자로, 왕자사부(광해군 스승)와 현감 등을 지내며 백성을 자식처럼 아끼는 목민관으로 칭송받았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67세의 고령에도 불구하고 격문을 작성해 700여 명의 의병(전라좌의병)을 모았으며, 1597년 정유재란 당시에는 72세의 나이로 직접 의병을 이끌고 화순 동복 등에서 싸우다 군영에서 장렬히 생을 마쳤다. 선생의 숭고한 애민·호국 정신은 두 아들과 손자, 증손자에까지 이어져 대를 잇는 의병 가문을 이루었으며, 현재 보성 용산서원(龍山書院)과 보성의병기념관에서 그의 활약상을 기리고 있다.
의병기념관 내 죽천문집(竹川文集) 목판본(아래 오른쪽)
돌아오는 버스안에서 가칭-남역원 원가(院歌)를 불러보는 회원님들! 남역원은 원가도 있다!!
꿈꾸는 숲 선유원 에서 심신을 달래는 회원님들!
즐거운 식사 및 차담(茶談)시간으로 여유로움을 즐기는 회원님들!
가을 나그네 - 소리새
이번에도 모두 멋졌습니다.
좋은 사진 올려주신 회원님들! 감사합니다.
다음기회에도 우리 함께 해요^^
남역원! 사랑합니다^^
첫댓글 가을비가 종일 자락자락 내리는 날..
멋진 회원님들과 함께한 즐거운 가을나들이였습니다.
답사내용을 일목요연하게 사진과 함께 정리해서 올려주셔서 너무 너무 감사드립니다♡
항상 격려의 말씀을 주셔서 힘이 납니다^^
어제 우중雨中답사가 파노라마 전개되는 듯 빠짐없이 기록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민초역사의 질곡 속에서 지키려 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를 생각해 보는 시간였습니다..
카페지기님의 기록 능력에 다시 한번 감탄입니다...
과찬이십니다..앞으로도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재능과 시간을 아끼지 않은 선생님의 훌륭한 자료들은 남역원 역사에 길이길이 보존되겠습니다. 늘 감탄스럽습니다. 보성의 역사와 문화를 새롭게 재조명할 수 있었던 답사였네요. 감사합니다.
언제나 좋은 사진 많이 올려주셔서 고맙습니다. 많은 도움이 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