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 리 글
2001-10
품 위 유 지
박병민목사(새터공동체)
우리에게 오신 어느 목사님과의 얘기 중에 “우리 사람들에게는 먹는 일이 다들 큰 관심사입니다” 하고 가벼운 이야기를 드렸더니, 그 목사님 말씀이 “사람에게 먹는 것처럼 즐거운 일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하고 반문하신 말씀이 생각난다. 그리고 한번은 잘한다는 분과의 얘기 가운데서 한 달에 품위유지를 위해서는 일이백은 보통으로 사용되고 있다고, 그는 주위의 사람들에게 말하였다. 주위 사람들은 다들 크다는 기색들이었다. 어떻게 보면 잘 먹고 살자고 하는 일인데..... 그러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을 만나 먹는 자리를 자주 만들어야 될 것이다. 그래서 품위(品位)의 품(品)자가 입구(口)가 세 개 모여서 이루어진 것 같다. 그렇지만 품위는 사람이 지닌 좋은 인상이다. 국회의원도 아닌 우리가 누구와 잘 먹고 마신다하여 좋은 품위가 생겨지는 것은 아닐 것이다. 품위는 모습이나 몸가짐이 흐트러진 데 없이 얌전하고 깔끔한 어쩌면 단정(端正)한데가 있어야할 것이다. 그리고 있어야될 자리에서 벗어나지 않고 정(定)히 그곳에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품위가 흐트러지지 않은 몸가짐만으로 이겠는가?
사람들은 행차 시에 품위 있는 행색을 갖추려 한다. 나는 다른 사람을 볼 때에 옷 입은 매무새가 말쑥하고 조촐해 보이는 것이 좋다. 내가 마음 써가며 몸에 걸쳐 가야 될 부분이기도하다. 나는 차림새보다는 간편하게 입고, 신기를 좋아한다. 지금보다는 더욱 광을 내던 어떻게 하던, 겉부터 품위가 있으면 좋겠다. 그러나 번지르르하게 말만 늘어놓거나 차려입기만 한 사람을 보면 구색을 모두 갖춘 사람이 아니라, 드러나서 보여지려고 하는 속을 가린 사람 같다. 표리부동(表裏不同)하지 않은 사람이 참 품위 있는 사람일 것이다. 아니 어떻게 보면 겉보다는 속일 것이다. 약대 털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띠를 띠고 음식은 메뚜기와 석청(石淸)을 먹으며(마태복음 3:4), 광야(廣野)에서 살았던 세례(洗禮) 요한에 관하여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물어보며 이야기를 하셨다.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그러면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부드러운 옷 입은 사람이냐? 부드러운 옷을 입은 자들은 왕궁에 있느니라. 그러면 너희가 어찌하여 나갔더냐? 선지자를 보려더냐? 옳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先知者)보다도 나은 자니라”(마태복음 11:7-9). 행색(行色)이 좋다고 품위 있는 사람이던가?
나이 사십이 넘으면, 자기 얼굴에 책임을 져야 한다는 말을 한다. 얼굴은 그 사람이다. “身體髮膚(신체발부)는 受之父母(수지부모)라” “내 몸과 피부 등은 부모에게서 받은 것이다”라 하여 그 전에까지는 내 모습을 이루지 못하고 부모로부터 받은 대로 익혀가며 살아가는 삶이었을 것이라면, 내 것이 들어 가면서는 더더욱 내 얼굴에 아름다운 것으로 배어내어야겠다. 이제 세상 온갖 것 거두어들인 가을에는 내 얼굴을 가꾸어 가며 살아야겠다. 이것이 인품(人品)이리라.
공동체 이야기
공 동 체(共同體)
아침에 테레비를 함께 보았다. 그 곳에서는 술을 너무 먹어서 가정사를 돌보지 못할 지경에 이른 남편과 그리고 아내가 문제를 해결 받기 위하여 출연한 방송이었다. 오랫동안 남편의 모습을 보면서 옆에서 견디지 못한 부인은 요즘 들어 때로는 밖으로 나다니게 되고, 그러면서 부인은 남편에게 여러 차례 헤어지자는 말까지 하는 단계에 이르렀단다. 그 예전에 남편은 해결해보고자 스스로 병원을 찾아 입원까지 했었는데, 그러나 그 곳에서 술과 단절시키는 방법으로 사람들을 감금시키는 것이 그는 너무 괴롭고 싫었다고 말했다. 이것을 같이 보고 계시던 사모님께서는 이런 병실에 입원되어 있는 사람들의 심리는 갇혀 지낸다는 것으로 인하여 악하고 모진 생각들만이 자리잡게 된다고 이야기했다. 그리고 그 방송에서 들려진 의사의 실질적인 말을 하자면, 알콜중독은 간경화로 그리고 알콜성 치매로 이어진다는 말이 자리잡혀 기억된다. 옆에 있으신 사모님께서 알고 계신 어느 신경정신과 병원에 관해서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그 곳의 병원은 작은 병의원인데 두 명의 의사에 여러 명의 간호사가 함께 근무하였다. 그런데 많은 환자들을 진료하지 않고, 입원한 20명의 환자들만을 전담 치료하였단다. 그러면서 환자들과 함께 하는 진료 체계를 갖고자 환자들과 같이 놀이도 가고, 한 달이 지나가면, 의사선생님과 환자 분들이 함께 모여 그간의 병원생활에 대하여 회의모임도 갖는 등 환자본위의 병원이 되려고 힘쓰는 곳이란다.
나는 우리 모임인 공동체(共同體)를, 다른 사람들이 이와는 다르게 밖에서 요양기관(療養機關)이니, 복지시설(福祉施設), 수용시설(收容施設) 등으로, 분류(分類)하는 성격(性格)으로 불러주는 것을 좋아라 하지 않는다. 수용시설하면 우선 얼마나 거부감이 드는가? 그리고 우리 공동체 모임은 어떠한 시혜(施惠)를 준다는 뜻을 가진 시설(施設)은 아닐 것이다. 속 들여다보이는 얘기를 하자면, 우리 공동체의 구성원이 모두 열 명인데, 안팎으로 소위 건강하다고 하는 사람은 유치원에 다니는 막내 딸아이 하나이다. 어쩌면 다들 불편(不便)한 가운데의 사람들인데 누가 시혜자(施惠者)가 되고, 누가 수혜자(受惠者)가 될 수 있겠는가? 우리들은 밥상의 네 모서리를 떠받들고있는 네 개의 다리와 같은 구실들을 하는 구성원(構成員)들이다. 혼자서는 서있지를 못한다. 마치 우리들은 상(床)을 받들면서 동시에 그 밥상에 의존하여 서가는 공동체이다. 그리고 그 한 상위의 밥을 함께 나누니 밥상공동체이다. 우리들의 삶이 매한지 이다. 함께 받들며, 받들려진 것에 의지하여 사는 것이 이 세상 모든 사람들 아니겠는가? 이런 곳에 시혜(施惠)니, 수혜(受惠)니 하는 말이 뭐 필요하겠는가?
80년대 학생 때에 나에게 배움을 준 말이 있다. 빈민대상, 노인대상, 장애인대상하는 대상 더 나아가 대상화(對象化)라는 말이었다. 위에서 말한 시혜자(施惠者)라고 하는 사람들이 수혜자(受惠者)들을 대상으로 여기며 무엇무엇을 하겠다 할 때에는 수혜자가 대상화가 된 것일 것이다. 어느어느 사람들이라고 대상으로 구분 지울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일지는 모른다. 그렇지만 세상은 이 사람 저 사람 여러 사람이 모여서 산다. 편협(偏狹) 된 사회가 아닌 다원화(多元化)의 사회 속으로 깊숙이 가고 있는 이즈음에 능히 극복되리라 본다. 우리들이 말들을 하는 무슨무슨 “시설방문”이니 하는 “방문객”으로 그치는 말보다는, 가는 사람이나 있는 사람이나 하나를 이루게 되는 “함께 한다”는 등의 뜻을 가진 어떠한 말을 찾아야 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대상화가 아닌 공동체의 시작이 된다.
공 동 체 소 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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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터 공동체 가족
이유범
차현선
김귀숙
정무래
박종만
어귀녀
박병민.진선미.한솔.진솔
☻ 기도하며 함께 하신 분들
성남교회안수집사회.이정애.튼튼영어대전동구(연월순외16인).임경빈.추부파출소.통계청(임명선외3인).대전서노회사회부.판암제일교회.어귀녀.주식회사EG(이성철).추부면사무소(손숙희).이정애.남전교회(박병준).김영창.채윤기(박현실).박종만.왕지교회.옥천동부교회.박정도.추부보건진료소(이현순).대덕교회.예수마을.대전서노회.추부파출소.진수정.찬미교회.대덕교회(이중삼).정주래.이근웅(박현혜).한삼천교회.평강교회(김경엽).이정애.무명.정하섭.정현진.이종국.유인숙
(호칭은 생략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