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노트/이승우의 생의 이면
신상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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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든 소설은 허구이다. 그러나 진실을 드러내기 위한 허구이다. 혼돈의 삶에 형태를 부여하기 위한 인공의 혼돈. 소설적 진실은 허구의 입을 통해서 말해진다. -작가의 말 중에서<br><br>* 소설가는 소설을 쓰기 전에 이미 한 편의 소설을 가지고 있었다고 시작하면 어떨까. 17.<br><br>* 불행에 익숙해진 사람은 쉽게 운명의 무게를 받아들인다. 19.<br><br>* 사람이 노출 본능 때문에 글을 쓴다는 말은 거짓이다. 더 정확하게는 위장이다. 사람은 왜곡하기 위해서 글을 쓴다. 현실이 행복해 죽겠는 사람은 한 줄의 글을 쓰고 싶은 충동도 느끼지 않는다. 오직 불행을 자각하고 있는 사람만이 글을 쓰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힌다. 23.<br><br>* 아름다움에 대한 반응이 전적으로 인간 종족의 본능이며 따라서 선천적이라는 생각에 나는 동조하지 않는다. 그 감각 역시 상당 부분은 길러지는 것이다. 113.<br><br>* 생각이 많은 것은 무언가가 모자라기 때문이다. 그 모자라는 부분을 보충하려는 욕망이 많은 생각을 만든다. 하지만 생각은 생산 능력이 없다. 그래서 결핍의 정도는 더욱 심해지고, 세상과의 불화감은 더욱 증폭된다. 그 증폭된 불화감은 또 더 복잡한 생각의 밑천이 된다. 끝도 없는 악순환. 생각이 많은 사람은 세상을 쉽게 믿지 않고, 세상은 그 사람을 신뢰하지 않는다. 따돌림의 대상이 된(되었다고 느끼는), 생각이 많은 사람은, 복수하듯 세상을 따돌릴 채비를 한다. 거기서 다른 사람에 비해 자기가 너무 크다는 생각이 돌출한다. <br> 물론 오만이다. 모든 오만의 기본적인 정서는 슬픔과 울분, 또는 슬픈 울분이고 그 뿌리는 좌절감임을 나는 안다. 116.<br><br>* 어떤 책에서 나는 이 세상에서의 삶을 우리가 빠져나오려고 발버둥치는 악몽이라고 비유한 글을 읽었다. (중략) 제임스 조이스를 빌려 내 말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제임스 조임스에게서 내 말을 발견한 것이다. 그가 내 말을 먼저, 대신해 버린 것이다. 139,140.<br><br>* ‘거듭 말하지만, 그것은 전혀 예정된 일이 아니었다. 예정된 것이 있다면, 그것은 상황일 것이다.’ (중략) <br> 보다 확고한 기반 위에 자신의 행운을 올려놓고 싶은 욕망이 신적인 초월자를 요청한다. 145.<br><br>* 나는 그때 알았다. 순수야말로 가장 큰 유혹이라는 것을. 순수한 것일수록 못 참을 유혹이라는 것을. 수도자들은 어떤 사람들인가. 가장 큰 유혹에 매혹당해 작고 사소한 유혹들을 버린 사람들이다. 그들은 유혹과 싸우는 자들이 아니라 유혹에 투항한 자들이다. 151.<br><br>* 문제는 그것이 운명이 아니라, 운명적이라는 데 있다. 우리는 운명을 보여줄 수 없다. 그러나 운명적인 것은 얼마든지 보여줄 수 있다. 운명은 여기 있거나 저기 있는 것이 아니라, 운명이라고 발음하는 그 자리에 있다. 운명으로 인식하는 자리에, 그 순간에 그 사람의 운명이 깃드는 것이다. 삶은 인식과 해석의 장(場)인 것이다. 152.<br><br>* 인도인들은 평범한 바윗덩이에 붉은 고리를 걸어놓음으로써 그 바위를 성별(聖別)시킨다. 붉은 고리에 무슨 특별한 힘이 있어서는 아니다. 그것은 그냥 붉은색의 평범한 고리일 뿐이다. 그러나 그 붉은 고리는 그 바위를 성역이라고 선언한다. 그리하여 그 바위는 거룩한 바위로 화한다. 성은 속(俗)의 한복판에, 하나의 문으로 구별되어 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면 전혀 다른 세계가 나타나는 것이다. 154.<br><br>* 자기 자신을 착오 없이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있으랴. 근거 없는 행동이야 있을 리 없겠지만, 자기 행동의 근거를 똑바로 설명하기란 쉬운 일이 아닐 터, 나는 나 자신이면서 나를 좀처럼 이해하지 못한다. 그것은 내가 하나의 단순한 내가 아니기 때문이다. 나는 얼마나 많은가. 나는 누구인가, 나의 행동의 근거는 무엇인가, 하고 질문하고 설명하려고 시도하는 나 또한 그 수많은 나 가운데 하나의 나에 불과할 뿐이다. 156,7.<br><br>* 이름을 쓰는 것이 인식의 방법이긴 하지만, 그것은 최악의 방법이다. 이름을 붙이는 것은 구별하기 위해서지 인식하기 위해서는 아니다. 구별을 통하지 않고는 인식할 수 없을 때, 사람들은 이름을 사용한다. 그러면 구별할 필요가 없을 때는 어떤가. 구별함 없이도 이미 총체적인 인식에 이르러 있을 경우에 이름을 알고 부른다고 하는 것은 무슨 유익이 있을까. 오히려 그 새로운 이름이 참된 인식을 방해할 수도 있지 않을까. 163,4.<br><br>* 완벽한 말을 얻으려는 욕심은 결국 아무 말도 선택하지 못하게 했다. 말을 가지고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말을 하는 순간 진실은 탈락되고 마는 것을. 165.<br><br>* “우리가 우리의 불행을 스스로 선택했다는 생각만큼 교묘한 위안은 없다.” (보르헤스, <독일 진혼곡>) 186.<br><br>* 사실 그대로 쓴다고? 누가 그럴 수 있을까? 기억되거나 말해진 사실은 결국 발췌된 사실일 뿐이다. 선택과 배제를 통해 ‘사실’이 구성된다. 거기에 굴절과 왜곡이 끼어든다. 그것이 작품이다.189.<br><br>* 때로는 감추기 위해서 표현하기도 한다. 그러나 어쨌든 표현된 것들을 통해서만 진실에 이를 수 있다는 것도 사실이다. (중략) 역사는 결국 해석이다. 우리는 그 진실을 안다. 196.<br><br>* 고향이란, 주지하는 바와 같이 한낱 산천(山川)이 아니라 사람인 것이다. 207.<br><br>* 믿어지지 않은 일이야말로 감격의 조건이다. 믿어지지 않았다고 하는 것은 전혀 기대하지 않았다는 뜻이고, 기대하지 않았던 일의 뜻밖의 실현은 사람을 감격의 회오리 속으로 몰아붙이기에 충분하다. 감격의 요인은 실현된 일의 내용(크거나 중요한)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일이 실현된 형식에 있다. 212.<br><br>* 깨달음이란 언제나 너무 빠르거나 너무 늦게 온다. 그것이 바로 모든 깨달음이 괴로움을 동반하고 있는 이유다. 남자의 죽음이 처리되는 과정에서 비로소 가혹한 인식이 그를 찾아왔다. 215.<br><br>* 똑같이 유한한 한 인간을 숭배에 가까운 맹목적인 사랑으로 사랑한다는 것은 벼랑에 맨몸으로 서는 것과 다르지 않다. 저 아래로 뛰어내려 보라고 악마가 유혹한다. ‘네가 뛰어내린다고 하더라도 너의 사랑이 너를 받아 털끝 하나 다치지 않게 해줄 것이다.’ 이 경우 사랑의 맹목성에 빠져 든 자에게는 사랑을 시험하지 말라고 악마를 꾸짖을 지혜와 여유가 없다. 자신의 사랑을 과시하기 위해서라도 그는 뛰어내릴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사랑은 그를 받아주지 않는다. 사랑은 벼랑에서 몸을 던지는 무모한 연인을 받아낼 능력이 없거나, (능력이 있다면) 그런 식의 시험 대상은 되고 싶지 않아한다. 어느 경우든 비극이기는 마찬가지다. 218,9.<br><br>* 형식이 내용에 끼치는 영향은 무시되어선 안 된다. 대체로 행동은 의식의 사주를 받지만, 의식이 행동에 의해 결정되어지는 수도 종종 있다. 반복된 행동은 의식의 방향을 틀기도 한다. 222.<br><br>* 시대는 우리의 인생을 방치하지 않았다. 우리가 시대를 만든 것이 아니라 시대가 우리를 만들었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의 시대가 불행한 이유였다. 시대가 결코 무책임한 방청객이 아니라는 사실을 우리는 이제 안다. 226.<br><br>* 눈앞에 산이 있으면 그 뒤에 있는 산들은 가려서 보이지 않는다. 낮은 산도 높은 산을 가릴 수 있다. (중략) 높이에 우선하는 것은 거리다. 230.<br><br>* 종교를 탐구와 해부의 대상으로 취급하는 자가 빠지게 되는 함정이 여기에 있다. 그 함정은 깊고 허무해서 여간해서는 빠져나오기가 어렵다. 사람을 해부하면 무엇이 나오는가. 해부된 사람의 내부에는 몇 킬로그램의 기름과 몇 리터의 수분과 몇 미터의 내장, 그리고 똥이 가득 들어있다. 해부자는 이제 선언한다. 이 사람은 몇 킬로그램의 기름과 몇 리터의 수분과 몇 미터의 내장과 그리고 엄청나게 많은 똥으로 이루어져 있다. 기름과 물과 내장과 똥이 사람이다. 정신이나 영혼은? 그런 것은 1밀리그램도 없다……. 이것이 진질일까. (중략) 그것은 부분적인 진실이고, 부분적인 가치이다. 그리고 과학―이성과 합리라는 이름의―이 얻어낼 수 있는 진실이란 언제나 부분적이다. 사람은 해부하지 않고 보아야 한다. 전체를 보아야 제대로 보인다. 235,6.<br><br>* 싫어한다는 것은, 그러니까 부러워한다는 뜻이 아닌가. 어떤 사람이 가장 비난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면 그 사람이 가장 크게 욕망하는 것이 무엇인지도 저절로 알게 된다. 253.<br><br>* 생각이 한쪽으로 몰리면 다른 출구들이 닫혀 버린다. 이게 아닌데, 이럴 필요가 없는데, 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그 길로 밀고 나갈 수밖에 없는 절박한 상황이 있다. 그곳 말고는 달리 길이 보이지 않기 때문에 갈 길이 아닌 줄 알면서도 막무가내로 내달린다. 그리하여 도무지 상식적이지 않은 일이 발생한다. 254.<br><br>* 사랑에도 기술이 있다. 살아가는 데 필요한 기술들을 배우고 익혀야 한다면, 사랑이야말로 그래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사랑보다 더 소중하고 가치 있는 것은 없기 때문이다. 사랑을 배우지 않을 때, 종종 사랑은 흉기가 되어 사람을 상하게 한다. 258.<br><br>* 에로스는 그 대상 속에서 가치를 먼저 인식한다. 그래서 그것을 사랑한다. 그러나 아가페는 먼저 사랑한다. 그래서 그 대상 속에서 가치를 창조한다. (니그렌,《아가페와 에로스》)259.<br><br>* 조건이 없으며, 자발적인, 아래로 내려오는, 자기 자신을 추구하지 않으며 오히려 자기 자신을 내 주는 비동기적이며 넘쳐흐르는……사랑. 그리하여 마침내 아가페는 ‘인간에게 이르는 신의 길’이다. 260.<br><br>* 어둠 속에 오랫동안 몸과 의식을 잠근 채 꼼짝하지 않고 있다보면 사물이 나름대로의 형상을 빚어보이기 시작한다. 그런 뜻에서 어둠도 빛이다. 292.<br><br>* 그는 감추기 위해서 드러낸다. 그가 읽은 대부분이 신화들이 그러한 것처럼. 299.<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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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착한여자 님, 끝없는 독서에 박수를 보내며 또 이렇게 좋은 글을 발췌해 올려주시는 것에 늘 감사!<br><br>내 생활의, 내 말의, 내 글의 어떤 것을 이렇게 발췌해 낼 수 있을까...발췌해 낸 것이 시가 되는 것일까...그렇다면 그 시는 과연 나를 표현하는, 내 마음을 드러내는 가장 엑기스적인 것일까...뭐 이런 생각이 드는 오전입니다.<br><br>어제, 오늘 총기 사건으로 인한 흉흉한 뉴스...한 학생의 발췌된 생이 참으로 가슴 아프고 끔찍합니다. 그래도 우리는 밥을 먹고, 잠을 자고 또 시를 토론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