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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아브람의 칭찬 알레르기>의 줄거리:
전쟁에서 이기고 돌아온 아브람을 소돔 왕이 진심으로 칭찬하며 환영합니다. 그리고 그 증거로 아브람이 되 찾운 자기에게 속했던 전리품들을 남김없이 다 그에게 하사 합니다. 그런데 정말 이해가 안 되는 이유를 달면서 차갑고 무례하게 소돔왕의 호의를 거절합니다. 어쨌거나 소돔왕과 아브람 자신과 조카 롯 모두에게 참 기쁜 자리 아닙니까? 그런데 소돔왕의 입장에서는 섭섭할 만큼 냉혹하게 그의 칭찬과 호의를 거절하는 아브람, 대체 그 이유가 뭘까요?
아브람의 칭찬 알레르기
(창14:17~24)
17. ○아브람이 그돌라오멜과 그와 함께 한 왕들을 쳐부수고 돌아올 때에 소돔 왕이 사웨 골짜기 곧 왕의 골짜기로 나와 그를 영접하였고
18. 살렘 왕 멜기세덱이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왔으니 그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었더라
19. 그가 아브람에게 축복하여 이르되 천지의 주재이시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여 아브람에게 복을 주옵소서
20. 너희 대적을 네 손에 붙이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 하매 아브람이 그 얻은 것에서 십분의 일을 멜기세덱에게 주었더라
21. 소돔 왕이 아브람에게 이르되 사람은 내게 보내고 물품은 네가 가지라
22. 아브람이 소돔 왕에게 이르되 천지의 주재이시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 여호와께 내가 손을 들어 맹세하노니
23. 네 말이 내가 아브람으로 치부하게 하였다 할까 하여 네게 속한 것은 실 한 오라기나 들메끈 한 가닥도 내가 가지지 아니하리라
24. 오직 젊은이들이 먹은 것과 나와 동행한 아넬과 에스골과 마므레의 분깃을 제할지니 그들이 그 분깃을 가질 것이니라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말씀 중심으로 <아브람의 칭찬 알레르기>라는 제목의 하나님말씀 증거 합니다.
‘아브람의 칭찬 알레르기’
여러분이 아시는 대로 한동안 유명했던 말이 있었습니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
그런데 최근에 EBS 방송과 SBS 방송에서 “칭찬의 역효과”라는 제목의 다큐멘터리를 방영했습니다.
칭찬이 사람들에게 있어서 그가 갖고 있는 가능성을 최대치로 끌어올릴 수 있는 작용만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아이들을 대상으로 아주 심각한 역효과를 가지고 온다고 하는 내용인데, 결과적으로는 칭찬을 받은 아이들이 칭찬을 받지 못하고 단순히 격려를 받은 아이들에 비해서 창의성이나 모험 정신이나 열의나 정열 같은 것들이 전체적으로 아주 많이 떨어지더라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칭찬 받은 자기 자신의 이미지를 지켜나가기 위해서 아이들이 굉장히 소극적이고 쪼그라든다는 이야기입니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는 말도 그렇고 ‘칭찬의 역효과’를 알아내기 위한 실험에서도 그렇고 칭찬이 우선 불순하지 않습니까? 마음에서 진짜 잘했다고 인정하고 고마워서 하는 칭찬이 아니라, 자기가 목적한 바를 이루기 위해서 다른 사람을 이용하는데, 이용하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의 능력을 극대화 시켜서 이용하자는 이런 나쁜 의도가 들어있어요. 아무리 좋게 이야기를 해도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는 말 속에는 그런 의도가 숨어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소돔 왕으로서는 자기가 패배한 전쟁을 아브람이 북쪽 끝까지 쫓아가서 집요하게 추적하고, 놀라운 능력으로 승리를 이끌고 다시 남쪽 지방으로 내려 왔을 때에, 진심으로 기뻐서 아브람을 칭찬한 것입니다.
사실 칭찬의 내용은 한 마디도 나오지 않아요. 칭찬을 했다고 느낄만한 구절은 한마디도 나오지 않지만, 칭찬을 했다고 느낄 수 있는 이유가 있어요.
북부 4개 연합군 왕들에게 남부 5개 연합군 왕들이 패배하면서 그들에게 있어서 소중했던 소유들을 전리품으로 다 빼앗겼습니다. 그런데 그 전리품을 아브람이 다시 되찾아옵니다.
얼마나 소중한 것들이었겠어요? 북부 4개 연합군의 왕들이 시시한 것을 가져갔겠습니까?
자기들은 5개 연합군을 형성했어도 졌던 전쟁을 아브람이 이기고 다시 빼앗아오고 얼마나 진심으로 칭찬을 하고 공로를 인정했겠습니까?
그러한 칭찬의 마음과 공로를 인정하고 있다는 것의 증거가 무엇이냐?
전쟁 전에는 다 자기들의 것이었던 것을 아브람이 4개국 연합군에게서 빼앗아 온 전리품을 아브람에게 주겠다고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아브람이 얼마나 못되게 반응하는지 몰라요. 정말 사람이 못돼먹은 것 같아요.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는 제목에서처럼 소돔 왕은 무슨 의도가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진심으로 기뻤고 아브람이 참 잘했다고 여겨서 빼앗겼던 것들을 “그거 너 다 가져라”라고 이야기를 한 거예요.
뭐가 잘못 됐습니까?
그 옛날에 전리품을 승리자가 차지하는 것은 일종의 권리입니다.
10개를 빼앗아왔으면 4~6정도 전리품을 나눠준다고 해도 그것을 거절할 이유는 없는 거예요.
그런데 아브람이 소돔 왕에게 거절한 이유를 보면?
“소돔 왕! 네가 아브람에게 재산을 많이 줘서 아브람이 부자가 됐다고 세상에 다 떠벌릴 것 아니냐? 나는 그 소리 듣기 싫어서 너한테 속한 것이라면 신발 묶는 끈 하나도 받지 않겠다.”라고 합니다.
소돔 왕은 진심으로 아브람에게 호의를 베풀고 공로를 칭찬하면서 정말 쿨하게 “아브람! 당신이 이룬 업적과 공로를 생각하면 다 내 것이었지만 거기서 하나도 내가 갖지 않겠으니 네가 다 가져라”라고 이야기를 한 것인데 그걸 싹 거절해버립니다.
이 아브람의 태도가 우리로서는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왜냐?
주석하는 분들은 이렇게 이야기해요.
아브람이 거절한 이유를 소돔이라고 하는 곳이 아주 악명이 높았습니다. 롯이 사는 성읍에 동성애자들이 나타나고, 롯의 가정에 두 천사가 왔을 때에 동성애자들이 나그네를 끌어내라 우리가 상관하겠다고 이야기합니다. 동성애라고 하는 이 썩어빠진 부패함 때문에 악명이 높은데, 그런 도시의 왕이 주는 것이니까 아브람의 신앙적 마음에서 꺼림칙해서 받지 않았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렇게 부도덕한 성읍의 물품이다 보니 괜히 부정한 느낌이 들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런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가나안 땅의 7족속이 우상숭배가 얼마나 왕성하고 부패함이 창궐했던 곳입니까?
그런데 신명기 6:11절에 “네가 채우지 아니한 아름다운 물건이 가득한 집을 얻게 하시며 네가 파지 아니한 우물을 차지하게 하시며…”라고 하나님께서 이야기하십니다.
그러니까 그건 아닌 것 같아요. 물건 자체가 부도덕한 것이 어디 있습니까?
그리고 또 우리가 이해하기 힘든 것은 12장에서 아내 사래를 누이라고 속이면서 바로 앞에서 이야기했고, 사래 때문에 바로 왕이 어마어마한 재산을(낙타, 소, 양) 아브람에게 줍니다. 그건 다 받았어요.
왜 문제가 되느냐?
아내 사래를 누이라고 속여서 받은 것 아닙니까?
그리고 바로 왕 입장에서는 자기 처남이 됐으니 처남에게 많은 물건을 준 거예요.
그런데 이제 하나님이 개입하시면서 사래가 부인이라고 하는 것을 알게 됐잖아요. 그래서 바로가 사래를 돌려줬습니다. 그러면 사래를 아내로 줬다가 받은 물건들은 다시 바로에게 돌려줘야 양심이 바른 것 아닙니까? 그냥 어물쩍거리면서 다 받아가지고 나온 거예요.
바로 왕은 하나님이 개입하시고 재앙을 내리시니까 마음에 두려움이 생겨서 주었던 하사품들을 되돌려 받지를 못합니다. 바로 왕은 하나님의 개입 때문에 무서워서 그랬다고 하더라도, 아브람은 자기가 정말 교양 있고 양심이 있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계약 자체가 성립이 취소된 것 아닙니까? 그것도 자기 거짓말 때문에 계약이 취소된 것인데 받은 물건은 돌려줘야 하는 것 아니에요? 그런데 싹 가지고 나와 버려요. 사래도 안 빼앗기고 사래 때문에 받은 물건도 다 가지고 나옵니다. 이게 사기지 뭡니까?
그런데 본문에서는 자기가 전쟁에 나가서 목숨 걸고 싸워서 이겼어요. 이겨서 가지고 온 전리품들을 전 주인이었던 소돔 왕이 주겠다고 하는데도 받지 않으면서 너무 냉혹하게 야멸차게 사람의 호의를 무시하고, 무례할 정도로 사람을 무시하면서 거절합니다.
하여간 아브람은 우리하고는 종자자체가 다른 사람이었던 것 같아요, 행동하는 것이 다.
왜 그랬을까요?
이 이유를 알기위해서 우리가 앞에 나온 멜기세덱의 예를 보면 좋아요.
지금 멜기세덱과 소돔 왕의 아브라함에 대한 태도를 대비시켜 둔 것입니다.
멜기세덱은 뭐라고 했느냐?
따지고 보면 기가 막힌 말을 했거든요. 멜기세덱은 참 얌체 같아요.
멜기세덱이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와서 대접을 하면서 뭐라고 했느냐?
19절에 “그가 아브람에게 축복하여 이르되 천지의 주재이시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여 아브람에게 복을 주옵소서” 여기까진 제사장으로서 복을 빌어주니 좋아요.
그 다음 구절이 웃겨요.
20절에 “너희 대적을 네 손에 붙이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 하매…”
‘너희 대적을 네 손에 붙이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
이 말은 우리 신앙인으로서는 의례 많이 듣는 이야기 아닙니까? 이상할 것이 없는 것 같잖아요.
그러나 소돔 왕의 태도와 비교를 하면 무슨 이야기인지 이 의미를 다시 한 번 해볼게요.
“아브람! 너 굉장한 일을 했다. 5개국 연합군도 해내지 못한 일을 가신 318명을 데리고 주변의 이웃들의 도움 조금 받아서 북쪽 끝까지 올라가서 4개국 연합군의 왕들을 다 무찔렀네? 그런데 어쩌면 좋냐 사실 따지고 보면 네가 한 게 뭐 있어? 다 하나님이 하신 거잖아. 너희 대적을 네 손에 붙이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 라고 하는 이야기는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장갑 삼아서 직접 그 대적을 다 멸하신 것 아니냐? 너는 하나님의 장갑이었는데, 장갑을 낀 자가 승리하는 것이지 장갑이 전쟁에 승리하는 법이 있느냐? 그러니까 사실 너는 아무것도 한 것이 없다. 네 공로는 제로다.”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아브람! 네가 전쟁에 이겼어? 네 공로는 제로야. 네가 잘한 것 아무것도 없어. 다 하나님이 하신 것이지.’ 이렇게 말하는 거예요. 그런데 이 사람한테는 십일조를 바쳐요.
소돔 왕은 내 물건 네가 가지라고 하는데, 이것은 그만큼 네가 한 일이 훌륭하고 업적이 괄목할만하다는 것입니다. 왕이 하사품을 내릴 때에는 그 업적이 괄목할만하니까 내리는 겁니다.
옛날에 로마의 장군이 전쟁에서 승리를 하고 오면 황제가 땅을 줍니다. 그런 것처럼 공로를 인정하는 겁니다.
그런데 소돔 왕에게는 “네가 나를 칭찬해? 칭찬하면서 네 물건을 다 가지라고 해? 내가 실오라기하나 갖지 않을 것이다”라고 이야기를 해버린 것입니다.
아브람이 속으로 원하는 것이 뭡니까?
이 사람은 칭찬 알레르기가 있는 거예요. 아주 과민하게 반응하는 겁니다.
그러면 멜기세덱에게는 왜 십일조까지 바치는 겁니까? 참 묘하죠.
뭐가 묘하냐?
자기가 세운 공로와 괄목할 만한 업적이 있을 때에, 자기의 공로를 제로로 놓고 전적으로 하나님이 하셨다고 말해주는 그 사람을 좋아하는 겁니다.
“완전히 하나님의 능력으로만 한 일 아니냐? 네가 한 것은 아무것도 없지 않느냐?”라고 말한 사람에게는 십일조까지 주면서 동질감을 갖고 존경하고 좋아합니다.
그런데 “괄목할 만한 일을 이루었는데 아브람, 너는 대단하다. 너는 네가 빼앗아온 모든 내 물건이었던 것을 다 주어도 아깝지 않다”라고 칭찬하면 화를 냅니다. 안 좋아합니다. 대적처럼 여깁니다. 이런 일들이 아브람에게만 나타나는 일들이 아니라는 거예요.
예수님도 보세요.
오병이어 기적을 일으켰어요. 남자만 오천 명에 여자고 애들이고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다가 깜짝 놀라서 예수님의 능력을 인정하는 겁니다.
인정한 결과가 어떻게 나타나느냐?
임금 상태가 되었다는 거예요. 사람들이 다윗왕의 자리로 올려놓겠다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거절하십니다. 쫓아내십니다. 그리고 산으로 올라가버리십니다.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뭐였냐?
내가 대단한 일을 할 때마다 내 속에 아버지가 계셔서 한다는 것을 왜 못 보느냐는 이야기입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키셨는데,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셨다는 사인(Sign)을 보고, 하나님을 봐야지 왜 나를 보느냐는 겁니다.
베드로와 요한도 마찬가지예요.
성전 미문에 앉은 앉은뱅이를 낫게 했어요. 사람들이 그들을 솔로몬 행각에 데려다가 숭배하려고 했을 때 깜짝 놀랍니다.
우리 안에서 예수님이 하셨는데 왜 예수님을 못 보고 우리를 경배하려고 하느냐?
사도 바울도 마찬가지예요.
행16:16-18절에 “점치는 귀신들린 여종 하나를 만나니… 귀신이 쫓아다니면서, 지극히 높은 하나님의 종으로서 구원의 길을 너희에게 전하는 자라”고 합니다.
맞는 이야기고 당연한 이야기 아닙니까? 자기를 좋게 이야기해주니까.
그런데 “바울이 심히 괴로워하여 돌이켜 그 귀신에게 이르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네게 명하노니 그에게서 나오라 하니 귀신이 즉시 나오니라”는 이야기를 해요.
하나님을 사랑하게 된 자들의 특징이 뭐냐?
내가 하는 일이 잘 될 때에 그 속에서 하나님을 보며, 하나님께 칭찬 돌려지는 것을 너무 좋아합니다. 자기에게 칭찬이 돌려지면 아주 지긋지긋해하는 거예요. 이 세상에서 사람들이 자기를 인정하는 것을 그렇게 싫어하는 거예요.
그러면 아브람이 애굽에서는 왜 받았어요?
애굽에서와 지금 이 상황과 다른 것이 어떤 점이죠?
애굽에서는 사래를 빼앗길 수도 있다는 상황, 아름답고 아깝고 사랑스럽기 그지없는 그 아내에 대해서 자기 마음을 죽였습니다. 바로 왕과 대면하고 있는 이 상황에서 아브람 자신은 사래에 대해서 죽어버렸습니다. 그리고 오직 이 사래와 연관된 모든 일에서 하나님만이 주체가 되어서 움직이고 계십니다. 자기는 죽은 상태예요. 죽은 상태에서 하나님께서 바로를 장갑으로 삼으십니다. 바로의 마음을 움직이십니다. 그래서 바로로 하여금 아브람에게 재산을 주도록 하십니다. 그리고 사래도 돌려받게 하십니다. 그리고 바로 왕의 마음을 움직여서 그 하사품을 다시 달라는 소리를 못하게 만드십니다.
영화 중에 “당신이 잠든 사이에”라는 영화가 있죠?
당신이 잠든 사이에 모든 일이 다 벌어지는 거예요. 그런 것처럼 내가 죽어있는 동안에 하나님께서 다 하시고 바로 왕을 하나님께서 장갑 삼으셨습니다. 바로는 원치 않게 하나님의 장갑이 되었습니다.
그런 경우 많잖아요? 나는 죽어있는데 하나님께서 장갑 삼으셔서 믿지도 않는 사람들이 나에게 도움줄 때도 있는 거예요. 그것이 무엇이든지 내가 죽어있는 상태에서 다 받아들입니다.
그런데 지금 소돔 왕을 만나는 이 시간에는 자기 자신이 하나님의 장갑이 되어서 전쟁을 치렀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소돔 왕이 자기를 위한 아브람의 공로로 만들어버리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십니다. 내가 공로를 세우고 업적을 세웠습니다. 그런데 소돔 왕은 자기를 위한 것이라고 생각해서 칭찬을 합니다.
세상이 칭찬 할 때에는 어떻게, 왜 칭찬합니까?
이순신 장군을 대한민국 사람들이 왜 칭찬합니까?
왜냐하면 조선의 안위를 지켜주었고 조선의 백성들을 위해서 공로를 세웠기 때문에 칭찬을 합니다. 우러러보지만 사실은 칭찬하는 거예요. 존경하지만 사실은 공로를 인정하는 겁니다.
그러나 아브람은 이것을 원치 않는 겁니다. 그 공로를 받아들이지 않는 거예요.
“나는 장갑이었다.”
사람들 앞에 비친 나의 모습을 내가 사랑한다고 한다면, 사람들이 나를 칭찬하는 것을 좋아할 거예요.
그런데 아브람이 사랑하는 것은 사람들에게 비친 자기의 모습이 아름다운 모습이 되기를 위해서 사랑한 것이 아닙니다.
누구를 사랑하느냐?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므로 사람들이 하나님을 칭찬하기를 바라는 거예요.
자기의 업적과 공로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은총과 하나님의 역사를 칭찬하기를 바라는 겁니다.
내가 자식을 사랑할 때에 사람들이 내편이 되는 길이 어디 있습니까?
나를 칭찬하지만 자식에 대해서 부모만 못하다고 해버리면 적이 되어 버립니다.
엄마하고 아빠한테 친구가 되려면 “그 아빠도 훌륭하지만 아들은 더 훌륭하게 될 것 같아. 엄마도 예쁘지만 나중에 딸이 크면 엄마는 저리가라겠어” 이래야 엄마 아빠와 친해지는 것 아닙니까?
아브람에게 친구가 되려면 아브람을 칭찬하지 마세요. 하나님을 칭찬하셔야 됩니다.
이게 바로 믿음의 사람의 칭찬 알레르기의 본질이라는 겁니다.
늘 이 세상에 대해서 죽는 이유가 뭡니까? 하나님만을 사랑하기 위해서.
신6:5절의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라”라는 이 말씀이 계명으로 주어지기 전에, 아브람이 믿음의 조상이 된 것은?
믿음이라는 것은 마음을 다 드리는 것이에요. 어떤 행동이 나타나기 전에 마음을 다 드리는 것이 믿음인데…
아브람이 제단을 쌓았다는 것은 결국 이 땅에 사는 인간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방식입니다.
이 땅에 끌려가는 내 마음을 죽임으로써 마음을 하나님께 드리고, 믿음을 이루고,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이루어내는 겁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보이는 모든 것에 대해 죽는 거예요. 날마다 순간마다 죽는 겁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면, 그 사랑의 증거가 어떻게 나타나느냐?
사람들이 날 칭찬하느냐? 내 속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보고 하나님을 칭찬하느냐?
도대체 멜기세덱은 무엇 때문에 아브라함에게 십일조를 받습니까?
이 십일조가 어마어마했을 것예요. 왜냐하면 소돔 왕은 자기에게 속한 것을 다 주겠다고 했지만, 지금 북부 4개국 연합군이 빼앗아간 전리품 속에는 소돔 왕의 물건만 있었던 것이 아니었을 겁니다. 고모라 왕을 비롯해서 5개국 연합군이었으니까 거기 속했던 귀중품들을 다 빼앗겼다가 아브람이 다 가져온 겁니다. 소돔 왕에게 속했던 것은 소돔 왕이 아브람을 칭찬해서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키는 바람에 소돔 왕의 것은 갖지도 않겠다고 하고, 4개국 왕의 것을 되찾아 와서 십일조를 드렸으니까 멜기세덱은 뭘 했다고 이렇게 받는 겁니까?
아무것도 한 게 없어요.
“아브람아! 네가 전쟁에 승리했는데, 너의 공로는 제로다. 오직 하나님의 공로는 100% 다 하나님께 돌려져야 한다.” 이 이야기를 했더니 좋아서 십일조를 바친 거예요.
이게 바로 하나님 사랑의 증거입니다.
내가 무슨 일을 했는데 사람이 날 칭찬하잖아요. 깜짝 놀라는 거예요. 이러면 안 되는데 이 사람들이 왜 이럴까? 칭찬하는 사람이 미운 겁니다.
내 속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은 못 보면서 왜 나를 칭찬하느냐는 겁니다.
그런데 정말 어물쩍거리면서 하나님께서 해주신 것인데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자꾸 나를 칭찬하니까 ‘내가 정말 그런 면이 있기는 한가?’ 그러다가 ‘그런 면이 좀 있지’ 그러다가 ‘내가 그 정도는 돼’ 이러고 있는 사람들이 다 이렇게 넘어가는 것 아닙니까?
신앙의 조상, 믿음의 조상 아브람에게서 유전자를 받은 믿음의 후손이라면 반드시 칭찬 알레르기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상하게 하나님이 나로 인해서 칭찬받는 것이 계명도 책임도 의무도 아닌데, 진심으로 사람들이 나 때문에 하나님을 칭찬하는 것을 보면 좋아서 그 사람한테 다 줘버리는 겁니다. 나를 보면서 하나님을 칭찬하는 그 사람, 나의 공로는 제로로 놓는 사람, 나를 제로로 놓으면 놓을수록, 하나님의 능력을 크게 보면 크게 볼수록 그 사람을 좋아하는 것이 바로 아브람의 유전자를 받은 사람입니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칭찬은 사람을 화나게 만드는 것이어야 합니다. 나를 칭찬하는 사람을 보면 화가 나야 합니다.
하나님을 칭찬해야지 왜 나를 칭찬하느냐고 화를 내는 사람들이 진정한 신앙인이고, 어떻게 우리가 그 정도로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습니까? 십자가를 생활화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어느 순간 나를 칭찬하는 사람들을 향하여 내가 화를 내는 모습을 발견하고 깜짝 놀랄 것이에요.
그렇게 칭찬을 듣고 싶어 하던 내가 어떻게 나를 칭찬하는 사람에게 화를 내고 있을까?
깜짝 놀랄 순간이 십자가 생활화의 귀결로 주어질 날이 올 것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날마다 깜짝 놀라게 해주시옵소서. 나를 칭찬하는 사람들이 야속해보이고 답답해 보이고 싫어지는 나 자신을 보며 깜짝 놀라는 그런 순간들이 이어질 정도로, 우리가 십자가를 생활화함으로 보이는 이 세상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하나님께 마음을 드려서 하나님을 점점 더 좋아하고 하나님과 점점 더 친해져서 하나님만을 사랑할 수 있는 자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