끊겨진 위문편지(2024.12.30. 수정) -초안이라고 합니다.
미송 송유창
냇가 살얼음 숨구멍으로 물방울이 동그란 원을 그렸다 타원을 그렸다, 쪼르륵 쪼르륵 소리를 내며 자갈 위로 흐른다. 해 뜰 무렵 버들강아지 나무 아래에서 겨울 운무가 도랑 따라 스멀스멀 기어오른다. 제방을 덮자 금새 하얀 세상으로 변하니, 아침 해는 포멜로 색을 하고 비스듬히 냉정고개에 걸린다. 아무리 춥다 해도 소대장 때의 포천(包川) 백운계곡만큼이나 추울까. 이런 날이면 문득 소대장 시절 면회 온 한 여대생이 생각난다.
펜팔 하는 여대생이 면회 오는 날이다. 휴대전화도, 카톡도 없었던 ‘70년대 후반 11월 말이었다. 토요일에 수업이 있다며 오후 5시쯤 일동에 도착하겠다는 편지를 주초에 받았다. D 대학의 석사 과정을 알아보느라 보낸 편지(?)가 우편함에 뒹구는 것을 전달해줬다는 내용의 엽서가 왔다. 고맙다는 답장을 보내니, 전방이 어딘지 보고 싶다면서 엽서가 또 왔다. 밤하늘의 별빛 그림에 문학소녀의 감성을 담은 내용은, MBC 방송의 ‘밤을 잊은 그대에게’ 프로에 보내도 뽑힐 만한 솜씨였다. 중대 행정병이 먼저 보고, 약혼녀가 보낸 편지로 알고 씨익 웃으며 주고 갔다.
몇 주씩이나 걸리는 대대 전술훈련은 소대장과 병사가 함께 걷고, 뛰고, 쏘며 일체가 되는 시간이었다. 풀 속의 철조망을 포복으로 통과하면 ‘포탄 낙하’ 신호에 구덩이를 뒹구는 병사들과 찌든 땀을 백운계곡 물에 씻고 나면 세상 소식이 그리웠다. 두 쪽의 텐트 사이로 별들을 새며 어제·오늘·내일이 같은 일상에 질리어, 미래의 꿈이 뭔지를 스스로에 되묻곤 했다. 낮은 계급에 책임 만 줘진 직책이지만, 나만 바라보는 60여 개의 눈동자와 전령 외 말 걸 사람이 없었다. 텐트 안에 쌓인 군사 서적과 사관학교의 교재들은 당번병만 귀찮게 한 짐이 되었고, 뜀걸음, 선착순과 유격훈련에서 단련된 체력만 있으면 되었다. 예지력은 병사의 안전 교육에만 필요했고, 오로지 오늘만 존재하는 야전 울타리 속에서도 녹색 집단의 미래를 걱정하는 장교가 되려 했다. 하지만 야전 적응에 서툰 초자의 내면은 황폐화가 진행되고 있었다. 인간이기를 추구하는 문제는 품격이나 질의 문제가 아니라, 있느냐 없느냐(有無)가 사람다움의 척도가 되는 세계였다. 누군가를 생각할 수 있다면, 생각해주는 누군가가 있다면, 그것은 오직 녹색 천지에서 사치와 같은 삶이었다. 이 틈새를 밀고 들어오는 여대생의 위문편지는 겉보기보다 여린 초급장교를 감성이 있는 사람으로 만들어 주는 복음서와 같았다. 소대원 한 사람 한 사람을 사랑으로 보듬게 했고, 식어가는 직업의식을 열정으로 변화시켰으며, 현실보다 미래를 품는 장교가 되게 했다.
군단 예비인 오뚜기 부대는 주둔지에서 생활하는 기간은 1년에 반 정돈데, 마침 야외 훈련이 끝나 주둔지에 머무는 시간이었다. 중대장이 토요일인데 늦게 결산을 끝내 4시가 넘은 퇴근이었다. 빠른 걸음으로 부대 앞 길명리로 나가니 일동 가는 시외버스가 금방 왔다. 터미널에 내리자마자 대합실로 먼저 들어가 왔는지를 살펴보고, 서울 가는 막차 시간을 확인했다. 텅 빈 대합실에서 나오려는데, 문을 열고 들어오는 젊은 여성이 보였다. 군복의 이름표를 보더니 “송 소위님 아니세요” 하고 먼저 다가왔다. 부대 앞에서 버스를 탈 때부터 같은 차를 타고 온 듯한 그녀는 버스 속에서 이미 나를 알아봤을 것 같았다.
그런데...세상에 이럴 수가? 편지 속에서, 꿈속에서 그렇게 그리던 그미가, 상상하던 그미가 아니었다. 외모로만 사람의 가치를 판단하는 건 부당하고 실례되는 일이지만 몸매는 일자형, 작은 키에 얼굴 곳곳에 검은 점이 찍혀 있는 아줌마같았다. 직구로 산 중국산 반품 안 되는 물품을 택배로 받자마자 실망을 해도 이 정도는 아닐 것이다. 편지를 볼때의 상상과 너무 다른 모습에 당황하면서도 전방까지 찾아온 그녀에게, “먼 곳 오느라 수고했어요”하고 인사말을 먼저 할 수밖에 없었다. 못 만날까 마음 졸며 왔을 그녀를 보니 측은지심이 들었다. 서울로 돌아갈 시간을 맞추려 얼른 자주 가는 식당으로 데리고 갔다. 여자의 외박을 부모가 허락 한다는 것은 당시 불가능한 시대였다. 고기를 굽고 식사를 하려는데 자꾸 술을 마시고 싶어 했다. 한 모금의 소주는커녕 맥주 반 잔의 주량도 안 되는 나는 망설였지만, 여대생은 학교 동아리 활동 때 자주 마셨다며 소주를 시켰다. 반 잔의 소주를 입술만 적시고 있는데, 단숨에 몇 잔을 여대생은 들이켰다. 일동서 7시에 시외버스를 타면 포천, 의정부를 거쳐서 밤 10시경에 종로 5가에 도착해서, 통행금지 2시간 전이라 집에 갈 수 있었다. 식사 후 빨리 서울로 되돌아가게 하려는 나와, 그럴 생각이 없는 듯 술을 마시는 그녀 사이에 이미 내가 ‘을’이고 그녀가 ‘갑’이 되어 있었다. 몇 잔의 술이 더 들어가자 통금 전에 집에 가기 어렵다며 자고 가야겠다 했다. 그 말에 놀란 나는 저녁에 부대 들어갈 일이 있다고 둘러대자, 이젠 혼자서라도 자고 가야겠다며 맞섰다. 자고 갈 속셈으로 왔는지, 여학생의 계획에 이미 나는 말려던 상태였다. 장교 신분에 결혼 상대도 아닌 여자와 잘 수 없다는 양심보다, 솔직히 말해서 외모 때문에 더 되돌려보내려 했는지 모르겠다.
생각과 현실의 괴리가 크면, 도피하거나 아예 포기하게 된다. 소주 힘을 빌린 여학생이 일부러 7시 차를 놓치자, 나도 포기하고 2차로 맥주집으로 갔다. 몇 잔을 더 마신 그녀는 마음속의 이야기라며 편지 받는 순간이 가장 행복했다나. 그건 그렇다 치고 군인 가족이 되고 싶다는 말을 갑자기 꺼내어 그 자리에서 혼절할 뻔했다. 고교 때 연애편지 대필한 경험 많은 나의 편지는 그렇다 치고, 초면에 군인 가족이란 말이 왜 나온단 말인가. 그렇지 않아도 못 먹는 술이 확 깨면서, 가지 않은 그녀가 갈수록 부담이 됐다. 막 차로 보내지 못한 일이 그렇게 후회될 수가. 이제 ‘밤을 어떻게 보내야 할지’ 하는 걱정에 술 맛은커녕 두통까지 생겼다. 내일 출근 준비를 핑계로 취한 여대생을 데리고 일동 여관으로 갔다. 그때까지 성적 매력 없는 여자와 같이 누워 자도, 4년간 3금(三禁: 여자, 술 ,담배)을 지킨 나는 문제 없을 것 같은 확신에 차 있었다.
면회 온 연인으로 보았는지 여관주인은 반갑게 맞으며 방을 내줬다. 취하긴 했지만 조심하는 그녀는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눈치를 자꾸 살폈다. 방에 들어가서부터는 서로 말이 없었다. 연인도 아니니 따로 할 이야기도 없었고, 목욕도 필요 없었으니 옷 벗을 일도 없었다. 따뜻한 온돌방 윗·아랫 목에 각자 이불을 펴고 입은 옷 채로 그냥 누웠다. ‘아침 7시까지 출근해야 하고, 첫차는 내린 곳에서 7시에 타면 된다‘ 는 말을 하고는 불을 껐다. 잠이 오질 않았다. 여학생도 마찬가지인지 가끔 뒤척이느라 방안의 정적을 깼다. 밤이 깊을수록 의식은 더 또록또록 해지고, 어둠 속에서 규칙적으로 유지하려는 숨소리 끝에 간간이 침을 삼키는 소리만 들렸다.
프로이트(Sigmund Freud)가 성적 본능 에너지인 ’리비도(libido)는 인간의 자아(ego)에 의해 통제받을 수 있고, 상황에 따라 리비도를 억누를 수 있다‘고 주장한 사실을 사관학교 심리학 시간에 배웠다. 도덕성과 리비도가 대립하게 될 때 전의식(前意識)이 이를 조절하고 억제, 억압하는 방어기제가 있어 이를 통제한다는 주장도 했다. 성적 호기심도 풍기지 않고, 학생에다 장교 신분이 도덕적 기준이 되어 방어기제가 될 것이라는 확신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론은 이론일 뿐이었다.
불이 꺼지자 상상의 저편에서 본능의 리비도가 서서히 밀려 오는가 하면, 반대쪽에서는 ‘네 인생의 반려자로 이 여자를 택할 것인가’ 하는 슈퍼 에고(super ego)가 더 강한 방어기제로 달려들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리비도의 역할이 강했다. ‘아니다’ 하면서도 주체할 수 없는 욕망이 솟고, 눌리면 눌릴수록 더 튀어나오는 게임기의 두더지처럼 20대 청춘은 참을 수 없는 고통에 시달려야 했다. 방 한가운데가 철책으로 갈라진 DMZ도 아니고, 몸부림 한 번 치면 여학생에게 닿을 수 있는 거리였다. 뒹굴까 하다 참고, 구를까 하다 멈추고, 술 취한 여학생이 ‘혹시 원해 오면...’ 하는 장교답지 못하게 책임을 전가하려는 얄팍한 구실만 찾고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갓 임관한 소위가 4년간 몸에 밴 ‘명예’와 ‘책임’이란 말을 단번에 끊기는 어려웠겠지만, ‘주말 5시에 전방까지 찾아 온’ 여학생 진의를 한 번쯤 생각하지 않고, ‘책임! 책임!’ 그놈의 책임 하면서 청춘의 특권을 그냥 포기한 것은 아니었는지. 잠 못 자고 끙끙 고생한 것도 싸다는 생각이 든다. 어차피 인생은 혹시나 하는 조바심의 기다림과 절호의 기회를 놓친 후회로 점철되는 시간의 이음이 아닌가.
리비도와의 밤샘 싸움에서 이기기는 했지만 리비도를 통제하는 나의 전의식이 아니라, “얘야, 여자 건디리면 데리고 살아야 한다”고 하신 ‘엄마빨’의 승리라 씁쓸하기만 했다. 같은 여자로서 하신 말씀이었을까. 미래를 내려다보며 현명한 며느리감을 얻게 하려고 미리 양밥을 지어신 것일까. 그러나 그날만큼은 아니었다. 숨을 죽이며, 숨을 세어가며, 숨을 삼켜가며 한 사내는 뜬눈으로 밤을 새어야 했다.
전방의 겨울밤은 빨리 왔지만 새벽은 느리게 왔다. 그래도 닭 울음소리에 창문이 우유빛으로 변하면 아침이 된다. 으스름한 어제저녁부터 면회 온 그녀와 나는 반 하루 만에 각자의 길을 선택할 시간이었다. 삼라만상에게 주어지는 시간은 같지만, 얻는 것이나 이룬 것은 사람마다 천차만차이다. 보통 면회객의 하룻밤은 만족 뒤에 오는 아쉬움이겠지만, 날 밤샌 나는 다시 찾아오지 말았으면 하는 형벌 같았다.
전투복에 고무줄을 끼는 소리로 일어날 시간이라는 기별을 냈다. 입은 채로 잠자는 채 한 그녀도 그때서야 깨는 척했다. “부대에 출근하시게요” 하는 그말은 방에 들어 온 후 첫 마디였다. “네, 첫차 타고 조심해서 가세요” 하고는 방을 나섰다. 새벽 공기는 생각보다 차고 코끝이 시렸다. 밤새워 따지던 ‘책임’질 일 없어 마음은 가벼웠지만, 몸은 찌뿌둥하고 무거웠다. 무어라 할 말을 찾았지만 혀끝에 잡히는 것이 없었다. 그로써 위문편지는 끊겼다.(끝)
첫댓글 허허허..."아프면 청춘이다"라는 말이 떠오르네요.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추억을 소환하셨네요. 할까? 말까....
네ㅡ 감사합니다 ᆢ 글을 보완ㆍ수정할 평을 좀 달아 주시면ᆢ 더 좋은 글이 될 듯 핪니다ᆢ 항상 고맙습니다 ㆍㄴ
등단의 기운이 이런 건가요? 원로 작가의 추천작을 넘어선 신춘문예 당산작인 듯싶습니다. 즐감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