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고구려-의주 검산령 평양 高句麗 (義州 劔山嶺 平壤) 3
鷄立山前漲戰塵
丹㫌依戀沁園春
平生慷慨愚溫達
自是龍鍾可笑人
鶴立山 앞에 戦塵이 漲하였으니
丹旌이 沁園春을 생각하도다.
平生에 懐概하 愚温達은
스스로 龍鍾한 可笑로운 人이더라.
鶴立山은 舆地勝覽에 聞慶県 北二十里에 있으니 俗称에 麻骨山이다. 丹旌은 今에 銘旌과 같으니 霞輋를 引導하는 旗라 沁園은 禁園 곧 王의 동산이니 温達大人이 平崗王의 여질인 故로 그 魂이 王宮을 생각한다 하였다.
愚温達은 高句麗 平崗王 時人이니 容貌가 竜鍾(粗悪한 모양)하여 가히 웃음이 나온다. 家貧하여 乞食하여서 母를 養하니 헤어진 적삼과 헤어진 신으로 市井間에 往來하니 時人이 지목하여 愚温達이라 하였다.
平崗王의 少女가 항상 울거늘 王이 희롱하여 가로되 네가 항상 체하여 내 귀를 요란하게 하니 자라면 士大夫의 妻가 될 수 없고 마땅히 愚温達에게 보낼 것이라 하였더니 차차 女年이 二八에 上部高氏에게 下嫁하고자한대 公主가 가로되 大王이 항상 말씀하시기를 반듯이 愚温達의 妻가 되라 하시더니 何故로 前言을 고치시나이까.
王이 怒하여 曰 네 가고 싶은데로 가라하니 公主가 이에 寶銀數十으로서 肘後에 매고 宮을 出하여 溫達에게 帰하였다.
後 周武帝가 潦東을 犯하였는데 王이 隷山의 野에서 싸울 때 溫達이 先鋒이 되어 疾鬪하여 功이 第一에 居하였다.
王이 이에 嘉歎하여 가로되 이는 나의 사위라 하고 禮로서 맞고 벼슬 大兄을 주었더니 차차 陽崗王이 위에 나아감에 溫達이 新羅를 伐하고자 하니 王이 許하였더니 臨行에
温達이 誓하여 曰 雞立峴과 竹嶺以西를 我에께 돌리지 않으면 返하지 않겠다 하고 드디어 羅人으로 더불어 戦할 때 流失에 맞아 死하였다.
葬에 臨하여 柩이 動하지 않거늘 公이 棺을 撫하여 曰 死生이 決한지라 鳴呼라 帰할지어다 하고 드디어 棺을 挙하여 空하였다.
- 한글
학립산 앞에 전진이 일어났으니
홍기가 왕궁의 봄을 그리워했다.
평생 어리석고 서툴렀던 온달은
스스로 용동한 웃음거리 인물이었다.
학립산은 여지승람에 따르면 흥경현 북쪽 20리에 있으며, 속칭 마골산이다. 단궐은 지금의 명궐과 같이 기치를 인도하는 깃발이고, 침원은 금지된 동산, 곧 왕의 동산이다. 온달 대인이 평강왕의 서자라 그의 혼이 왕궁을 그리워한다고 하였다.
어리석고 서투른 온달은 고구려 평강왕 때의 인물로, 용모가 거칠고 흉악하여 보기에 웃음이 난다. 가난해서 걸식하며 어머니를 부양했는데, 해어진 옷과 신발로 시장 골목을 오가니 당시 사람들이 지목하여 어리석고 서툰 온달이라 불렀다.
평강왕의 공주가 항상 울어서, 왕이 희롱하며 "네가 늘 울음을 그치지 않아 내 귀를 시끄럽게 하니 자라면 사대부 집안의 아내가 될 수 없고 마땅히 어리석고 서툰 온달에게 보내겠다"고 했다. 점차 공주의 나이가 28세가 되자 상부 고씨 가문에 시집가려 했더니, 공주가 "대왕께서 항상 어리석고 서툰 온달의 아내가 되라고 하셨는데 어찌 그 말씀을 고치십니까"라고 했다.
왕이 노하여 "네 가고 싶은 데로 가라"고 하자, 공주가 보은 수십으로 허리에 맨 채 궁을 나와 온달에게 돌아갔다.
후에 주무제가 낙동강을 침략했을 때, 왕이 여산 들판에서 싸울 때 온달이 선봉이 되어 격렬히 싸워 1등 공신이 되었다. 왕이 기특히 여기며 "이는 내 사위다"라고 하고 예로써 대접하고 대웅의 벼슬을 주었다. 차차 양강왕이 왕위에 오르자 온달이 신라를 치고자 하니 왕이 허락했다. 임행할 때 온달이 "계립현과 죽령 이서를 내게 돌리지 않으면 돌아오지 않겠다"고 맹세하고는 결국 신라인과 싸우다 전사했다.
장례에서 관이 움직이지 않자 왕이 관을 쓰다듬으며 "생사가 갈렸구나. 아아, 돌아가거라" 하고 관을 들어 공중에 띄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