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이괄이 모반
인조(仁祖) 2년 정월에 이괄과 및 그 아들 이전(李栴)과 한명연(韓明璉)이 모반하였다는 소문이 경성에 들림에 왕이 선전관 김지수(金智秀)와 금부도사 심대림(沈大臨) 2인을 보내어 이전과 한명연을 체포할 새 그들이 이 체포의 기별을 듣고 부하 제장들에게 명하여 가로되 나의 한 아들이 잡혀 죽으면 아비가 성할 리가 없으니 죽음을 각오하는 것이 남자의 일이다. 차라리 머리를 숙이고 죽을 땅에 나아가는 이 보다 저 임금 곁에 악한 자를 덜기 위하여 거병함이 어떠뇨. 제장들이 다 향응하는지라.
이에 금부도사를 죽이고 한명연과 같이 거병하다. 때에 도원수 장만이 평양에 있어 병으로 상에 누웠더니 괄이 동병함을 듣고 제장을 모아 의논하되 적은 부원수로서 일만 병을 거느리고 지금 경성을 치려 하니 그 형세 용이치 않은지라. 나는 이름은 도원수라도 부병은 수천에 지나지 못하니 도저히 저를 대적지 못할지라.
그러나 장만은 이괄이 평양으로 오지 않을 줄 알고 이에 제장과 의논하고 출병하기로 결정하고 만주방어사 정충신(鄭忠信)으로 선봉장을 삼고 평양판관 진성일(陳誠一)로 후군장을 삼고 총군 일천 팔백으로 평양을 떠나 황주에서 이괄 군과 싸워 이롭지 못하고 2월 2일에 괄은 승승장구하여 수안에 관군이 요색을 지키는 소문을 듣고 돌아서 다른 길로 경성을 함락하여 올라오다.
정월 24일에 장만의 장계가 서울에 들어왔다. 서울의 인심이 별안간 흉흉하여 왕이 이원익으로 도체찰사를 삼고 이시발(李時發)로 부사를 삼고 이수일로 평안병사 겸 부원수를 삼아 나아가 막을 새 장만은 다시 패병을 수습하여 가지고 괄을 치려 올라오고 이수일도 서흥까지 와서 장만 군과 합하여 가지고 이괄 군을 추격하여 평산까지 당도하였다. 2월 6일에 저탄(猪灘)에 와서 각처 관군과 합하여 괄군과 싸웠으나 또한 이롭지 못하였다.
저탄 패보가 경성에 들어옴에 왕이 중신들과 의논하고 적과 내응한 자 기자헌(奇自獻) 김원량(金元亮) 등 40여인을 주육하고 이귀를 보내어 임진을 지키더니 괄군이 개성에 와 임진이 막음을 듣고 다른 길로 파주에 들어가 박효립(朴孝立) 군과 싸워 파하니
이귀 이 소문을 듣고 도주하여 경성에 이르니 왕이 중신회의를 또 열고 의논한 결과 왕은 공주로 피하고 장만 군이 경성에 들어와 이괄 군과 싸울 새 이괄과 한명연이 군사를 연하여 경성에 들어와 선조의 제 10자 흥안군(興安君) 제(瑅)를 세워 왕을 삼고 괄은 경복궁에 진을 치고 주둔하더니 때에 장만이 파주에 있으며 왕이 남천(南遷)하심을 듣고 곧 제장회의를 열고 정충신(鄭忠信)의 말을 좇아 제장을 명하여 홍제원 고개를 넘어 안장고개에 올라 진을 치고 싸울 새
그 이튿날 새벽에 이괄 군이 성문을 열고 나와 산을 외어 싸고 싸우거늘 관군은 산상에 있고 적군은 산하에 있어 쌍방이 격전하여 적군이 패하여 이괄 한명연이 부문으로 나와 그 이튿날 삼전(三田)도에 이르러 광주를 지나갈 새 목사 임회(林檜)를 죽이고 밤에 이천(利川)에 이르니 괄의 장수 기익헌(奇益獻) 이수백(李守白)에게 죽인 바 되고 그 아들 전과 명연은 만주로 들어가고 왕은 공주로부터 2월 21일에 환궁하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