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회 애지문학작품상 시부문 수상작
북극 항로
김 정 웅
깨뜨려야 해
가려는 마음조차도
배가 다닐 곳은 못돼
빙하는 단단한 벽
방위를 잃고 떠다니는 마음들이 모인
얼음 기둥들로 가득한 바다를
건너가고 싶어
빠른 길 수에즈 운하를 두고
쇄빙선을 찾다가
결국엔
늦는데도
더 늦을 텐데도
바다를 깨뜨려
나아가야 하니까
배가 달려야 하니까
개척한다는 것은
결국은
누구에게는 등을 보여야 하는 일
등을 돌리는 일보다
등을 보는 일이 힘들었던 기억
번져 가는 뜨거운 상념이
빙하 속에 차갑게 갇히는 시간
나침반이 N극을 잃은 낯선 북극에서
S극만이 서성거리는 우리의 좌표는 해빙되고
─ 김정웅 외 『북극 항로』(애지문학회 사화집, 2023년)에서
제10회 애지문학작품상 시부문 수상 소감
분주한 오전이 지나고 유난히 지난했던 뜨거운 여름의 흔적을 아직 떨쳐내지 못한 바람이 점심 무렵을 맴돌고 있을 때전화가 걸려왔습니다.
복잡한 도로에서 운전대를 급히 버리고 갓길에 차를 세우며 비상등 불빛 아래 깜박이던 메모장을 서둘러 찾던 일들.
차이콥스키 피아노 협주곡을 듣다가 문득 떠오른 시구 하나를 놓칠까 봐 음악을 잠시 멈춰야 하나, 전곡이 끝날 때까지 기억하고 있어야 하나, 속으로만전전긍긍하던 아름답던순간들.
이 모든 찬란한 찰나들이 시가 옆에 있었기에 가능했던 순간들입니다.
하지만 몇 년 전시집을 내 보겠다고 보냈던 어설픈 원고가 우여곡절 끝에 덜컥 등단으로 이어질 때는 미처 몰랐습니다. 대부분 그렇듯이 어느 일이든 외부 간섭없이 오롯이 혼자서 즐기던 때가 더 좋게 여겨지곤 합니다.
원고 말미에 등단지의 이름을 적고 원고를 내보내는 일은 사실 큰 부담으로 다가왔습니다.
시를 통해 현실의 고통에서 탈피해보고자 했던 어리석은 생각은 얼마 가지 않아또 다른 현실과의괴리감에서 불편한 줄타기를 하고 있었습니다.
주체하지 못하고 요동치는 관념들의 곁가지들을 끝내 자르지 못하고 날것으로 내보내는 날들로 아팠습니다.
이러다가는 한 번도 스스로들여다보지 못했던 내 우물의 밑바닥을 기어이 볼 것 같다는 두려움이 조금씩 밀려오기도 했었습니다.
인생은 같은 노선의 시내버스를 타는 것과같다고도 합니다. 다람쥐 쳇바퀴처럼 같은 노선을 온종일 빙글빙글 돌지만 타는 시각과 정류장, 그리고 내리는 정류장도 제각각인 무수한 사람들과 가끔동승도 하고 이별도 하는 여정 말입니다.
정해진 항로로 가는 편안한 길이 보이는데,
그런 길도내가 들어서면 불편해질 것 같은 불안감이 한 번씩 엄습했습니다.
그렇다고 낯선 길을 도전할 용기 또한 부족한 소심한 성격의 소유자라
시라는 버스 승차권을 구해서 탔으나 이 노선이 아닌 것만 같고,
묵묵히 차창 밖풍경에 시선을 고정하고 탑승하고 있는 다른 승객들 사이에 간간이 아는
얼굴들을 보면 올바른 버스를 탄 것 같기도 하고 그러다 중간에 내리는 사람을 안 보일때까지 고개를 돌려 응시하는 일에 점점 흥미도 잃어가고.
버려지는 관념들과 사유들의 찌꺼기 더미에 남겨지는 나라는 혼돈과 혼몽.
소설 『네루다의 우편배달부』에서 시를쓰기 전 우편배달부 마리오처럼 시인 네루다에게 “시는 무엇입니까?”라고 순진하게 물을 수 있었던, 버스 승차권을 지니기 전의 상태로 다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들이 시를 쓰려는 마음을 붙잡고 방해하던 즈음에 들어온 시가 「북극항로」였습니다.
시를 찾아가는 일은 새로운 항로를 개척하는 것처럼,
설렐 수도 있으나 그 과정은 힘들고 결국은 좌절할수도,
가끔은 기쁠 수도 있는, 계획이 없는 끝없는 여정인 것 같습니다.
사실 시를 통해 기쁨보다는 허무의 근원과, 창작의 본질에대하여 고뇌와 회의가 뒤섞이고 있을 무렵 나온 부족한 작품에 등을 토닥거리는 단비처럼 내려주신 과분한 선정에 송구하고 무거운 마음 또한 드는 것 또한 사실입니다.
좋은 약은 독이 될 수도 있다는데 시가 그런 것 같습니다. 시 버스의 승차권을 주신 『애지』를 통해 다시 한 번 귀한 파마콘(pharmakon)을 처방받습니다. 더욱정진하라고 격려해주신‘애지 문학회’와 『애지』에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지금 저에게 누가 만약 “시는 무엇입니까”라고 묻는다면 저는 ‘인디언 썸머’를 찾는 일이라고 답하고 싶습니다. 북미대륙에서 겨울이 오기 전 반짝 느껴지는 짧은 여름날. 대부분 모르고 그냥 지나치는 순식간의 여름. 찾을 때까지 끝나지 않을, 한 번 기억되면다시 찾으러 갈 수밖에 없는 가련한 중독.
영화 『인디언 썸머』의 엔딩 독백으로 이번 소감문을 채우려 합니다.
겨울이 오기 전 여름처럼 찾아오는 뜨거운 날.
모든 사람에게 찾아오지만 그 모두가 기억하지는 못하는 시간.
다만 겨울 앞에서 다시 한 번 뜨거운 여름이 찾아와주길 소망하는 사람만이
신이 선물하는 짧은 기적, 인디언 썸머를 기억한다.
내가 그날을 기억하는 것처럼,
기억한다는 것, 그것은 아직 끝나지 않은 까닭이다.
2023년 가을, 인디언 썸머를 기다리며
김 정 웅
약력
71년 전남 광주 출생
조선대학교 치과대학 졸업
여수 스마일치과 원장
2019년 『애지』 등단
여수 작가회의 회원
시동인 햅별 활동중
뉴스탑 전남 칼럼 필진
여수 시민 오케스트라 고문
여수 안이치 장학 사업회 공동 대표
동부매일신문 칼럼 연재
여수 한영대학 출강
제10회 애지문학작품상 시부문 심사평
2023년도 애지문학상에 김정웅 시인의 시 「북극 항로」가 선정되었습니다. 최종 후보에 오른 작품들은 권기선 시인의 「if 빙하기」, 아타세벤 파덴 시인의 「수면 운동가」, 김정웅 시인의 「북극 항로」였습니다. 각기 다른 매력과 특장을 지닌 이 세 시인들의역작을 놓고 애지문학회 회원 분들께 설문한 결과 약 70%의 지지를 받은 김정웅 시인의 「북극 항로」가 수상의 영예를 안게 되었습니다. 우열을 가려냄이 아니라 한 개인 독자로서의 견해라 하겠으나 회원 다수의 지지를 받은 「북극 항로」는 생의 운명론적인 지향점을 극복이라는의지의 여정으로 은유화한 수작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시인이 다른 시인의 작품에 대해 뭐라 말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러니 평가라기보다는 감상의 차원에서 이루어진 결과이기에 더 한층 가치가 있을 수 있겠습니다. 마지막 행까지 읽기를 마치면 절로 고개가 끄덕여집니다. 그리고 새삼 인생에 대해 고민해 보게 합니다. 빙산이 유영하는 암흑의 바다, 그차가운 수심에 이르는 시인의 고뇌가 행간마다 파도로 출렁입니다.
수상자 김정웅 시인께 축하의 말씀을 드리고 앞으로도 한곁같이 좋은 작품으로 만나 뵐 수 있기를 고대합니다.
수고해주신 회원 여러분 감사합니다. 건강하셔서 좋은 인연 오래오래 이어질 수 있기를 진심으로 희망합니다.
─ 애지문학작품상 심사위원 일동(심사평: 회장 최병근)
첫댓글 축하드립니다 김정웅 시인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