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엽기조선왕조실록 ㅡ31ㅡㅡ 32
조선시대의 학생시위
얼마 전 6.10 항쟁 기념행사가 지났다.
이 땅의 민주화를 위해 온몸을 내던진 학생들이 있었기에 오늘날 민주화된 대한민국이 있을 수 있었다는 말에 부정할 이는 없을 것이다.
자, 그런데 말이다.
고루할 것 만 같은 조선시대에도 이런 학생시위가 있었다면, 독자제위들은 믿으시려나?
예나 지금이나 학생들의 몸에 흐르는 뜨거운 피는 불의를 보면 못 참는 것일까?
조선시대 시위의 현장을 달려가 보자.
“이런 된장, 주상 전하가 궁 안에 절을 짓는 단다!”
“아니, 숭유억불(崇儒抑佛)을 나라의 기본 컨셉으로 잡은 나라에서 어처구니를 물 말아 먹는 이런 짓을 하다니. 이런 가련한 영혼 같으니라고, 그래 전하 옆에 있던 꼬붕들은 다 뭐했다냐?”
“말리긴 말렸는데, 말리는 시늉만 했대.”
“이것들이 복지부동(伏地不動)이 나오려면 아직도 5백년은 더 지나야 하는데, 주상전하가 YS도 아니고 말야.”
“어쩔거야?”
“일단 장의(掌議 : 성균관 학생회장)한테 안건 제출하고 총학생회의 결단을 기다려보자구.”
성균관 유생 최원택과 박원국은 식당으로 달려가는데, 1448년 7월 세종대왕 치세 기간 중에 있었던 7월 투쟁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어이 학생회장…아니 장의, 이번 사태를 그냥 내버려 둘거야? 이건 긴급조치를 능가하는 전제군주정치의 폭압이야!”
“인정, 일단은 유생총회를 열고 어찌해야 할지를 보자고.”
이렇게 해서 성균관 유생들은 아크로폴리스…가 아니고 학생식당에 모이게 된다.
모여서 갑론을박 이번 안건을 어째야 하는지에 대해 의견을 모은다.
“무조건 가두투쟁에 들어가야 한다! 임금이 우리를 너무 만만히 보고 있는거다!”
“이렇게 나가다간 소림무술을 생활체육으로 배워야 할지도 모른다! 무조건 막아야 한다!”
대충 이런 의견이 모아지자, 성균관 유생들은 이번 집단행동에 대한 이름부터 만들기 시작한다.
“일단 이름이 폼나야 뭘 해도 하는거 아니겠어? ‘임금님 사찰건설 저지 비상대책위원회’ 어때?”
“비상대책위원회란게 좀…우리의 의지를 확고히 보이기 위해서 임금님 사찰건설 및 유교폭살 음모 분쇄 규탄 위원회 어때?”
“야, 너무 길잖아. 그리고 너무 과격하잖아. 그래도 도망갈 구멍은 만들어 놔야지. 이게 데모 원투 해보냐? 쥐도 막판에 몰리면 고양이를 문다잖아. 그냥 임금님 사찰건설 저지 비상대책위원회로 가자.”
그렇게 회의 이름을 정한 유생들은 이번 건의 ‘투쟁 위원장’을 뽑게 된다.
바로 처음 투쟁을 제안한 최원택이 투쟁위원장인 소두(疏頭) 자리에 앉게 되는데,
“일단은 투쟁에도 선이 있고, 후가 있는 것이니까 일단은 대자보 붙이고, 임금님한테 우리의 의지를 담은 결의문…이 아니라 상소문(이걸 유소儒疏라 한다)을 올리기로 한다. 일단 연명상소로 할거니까 다들 수결(사인)할 준비해둬라.”
자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투쟁이 시작되는 것이다.
‘임금님 사찰건설 저지 비상 대책위원회’는 부랴부랴 상소문 내용을 적어내려가는데, 상소문이 대충 완성되면 유생들이 이 상소문 내용에 찬성한다는 사인을 하게 된다.
이때부터가 본격적인 시위의 시작이었다.
“자 이제부터 가투(가두투쟁)에 나섭시다!”
“와~!”
거리로 쏟아져 나온 유생들은 임금이 있는 궁궐로 거리행진을 하는데,
“사찰타도, 공자 만세!”
“긴 밤 지새우고~.”
“철의 유학생!”
그렇게 궁궐 앞까지 달려온 이들은 오와 열을 맞춰 궁궐 앞에 앉아서 유소를 임금에게 올리는데, 보통 유소 한번에 임금이,
“그래, 그래 네들 말이 다 옳다. 내 대뇌와 소뇌가 잠시 출타를 하였나 보다.”
라면서 선선히 인정하는 경우는…없었다.
학생시위를 한 두번 해본 성균관이 아니었기에(조선시대 96회나 이런 시위를 벌였다) 이들도 장기전을 준비하기에 이른다.
“일단 궁궐 옆에다가 식당을 준비하고, 그래 화염병은 안 되고 대자보 쓸 준비해 알았지?”
소두 최원택의 주문에 따라 식당을 차리고 장기전을 대비하는 성균관 유생들 한편 세종대왕도 인상을 잔뜩 찌푸리며 성균관 유생들이 들고 온 유소(儒疏)를 기분 나쁜 듯이 훑어보는데,
“이것들이 하라는 공부는 안하고, 어디서 데모질이야 데모질은! 이것들을 그냥 확 군대로 보내버릴까 보다.”
“저…전하, 아직 젊은 것들이라 혈기가 왕성해 그런 것이니 너그럽게 이해하십시오.”
“지들도 지치면 알아서 해산하겠지. 일단 기동대 애들이랑, 공수부대 애들 대기 시켜놓고 성균관 애들 경계나 하라고 해.”
세종의 이런 생각을 비웃듯 성균관 유생들은 투쟁의 강도를 높이려 하는데,
“임금께서 우리의 요구를 쌩까버렸다! 투쟁의 수위를 높입시다!”
“옳소, 이참에 우리 삭발…은 좀 그렇고, 그래 단식투쟁 합시다!”
“그럽시다 밥 굶읍시다. 이 참에 다이어트도 하고, 꿩먹고 알먹기네.”
임금이 성균관 유생들을 무시하자, 유생들은 단식투쟁에 나서려 하는데…. 조선시대의 학생시위의 분수령 ‘7월투쟁’은 어떻게 진행될 것인가?
시대의 아픔을 함께했던 조선시대의 모래시계 ‘7월투쟁’의 뒷 이야기는 다음회로 이어진다.
커밍~쑤운~.
[엽기조선왕조실록]ㅡㅡㅡ 32
조선시대의 학생시위 下
성균관 유생들의 분노는 하늘을 찌르는데, 거듭해 유소를 올려봤지만, 이를 쌩까 버리는 임금을 보며 성균관 유생들 특단의 대책을 강구하게 되는데,
“이럴때 필요한 게 한총련 아니겠어? 투쟁을 해도 개별 대학들이 산발적으로 하는 것 보다는 전국 대학을 다 결집시켜 정부에 압력을 가하는 게 효과적이라고!”
“야, 전국에 대학이 어디있어? 기껏해야 사부학당(四部學堂 : 조선시대 서울에 있었던 동학東學, 서학西學, 남학南學, 중학中學을 일컫는다. 국공립대학이라 보면 된다) 정돈데.”
“그럼 서총련이라도 조직해야지!”
그렇게 해서 사부학당의 대표들과 이번 ‘임금님 사찰건설 저지 비상대책위원회’의 성균관 대표 최원택은 서울시내 모처에서 비밀회동을 가지는데, 6.10항쟁 직전 이화여대에 모인 전대협 소속학생들의 그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우리의 길 앞에는 투쟁밖에 없습니다. 나가서 함께 싸웁시다”
“돌맹이 하나론 세상을 바꿀수가 없습니다. 일단 민중들을 깨우치는 것이 급선무입니다. 노동자들에게 다가가야 합니다”
“…야, 너 ○○ 계열이냐?”
“어, 여기 ○○ 계열 아니었어요?”
“야 임마, ○○ 가 여기 왜 끼여 있어? 여긴 NL주축이야!”
“지금 무슨 짓입니까! 이런 분파주의는 우리의 투쟁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지금 우리가 싸우는 도중에도 사찰이 지어지고 있습니다! 동지 여러분 싸웁시다!”
“다 좋은데 일단 투쟁은 돌맹이로 합시다.”
“안됩니다! 일단 노동자 농민에게 다가가야 합니다.”
“농활은 지겹다니까!”
이런 갑론을박 속에 사부학당과 성균관은 권당(捲堂 : 수업거부, 단식투쟁)으로는 세종대왕의 마음을 돌릴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이렇게 된 이상 마지막 수단을 써야 합니다. 이번 항쟁의 승리를 위해서 우리 모두 일치단결해 투쟁의 대오를 유지해야 합니다.”
“아니, 그래도 공관(空館 : 동맹휴학)까지는 좀 무리가
아닐까요? 일단 노동자 농민교육에 힘써서…”
“…그놈의 노동자 농민 한번만 더 찾아봐! 가뜩이나 학출(학생출신)들 욕 먹고 있는데, 꼭 이런 것들이 활동가랍시고 현장 가서는 사고 친다니까 아이구 이걸 그냥! 너 임마 내가 네속을 모를줄 알어? 대충 이렇게 팔뚝질 몇 번 하고는 나중에 386이랍시고 어디 가서 벼슬 자리 할려고 하는 거지? 이런 것들이 꼭 티를 내요 티를….”
“고마해라, 마이무따 아이가.”
“먹긴 뭘 먹어? 에라이 엿이나 먹어라!”
대충 이렇게 지지고 볶던 성균관과 사부학당 대표들은 최후의 수단으로 공관(空館)을 결행하기로 하고는 각자 속해있는 학교로 돌아가는데,
“오늘부로 우리는 공관을 하기로 했습니다. 다들 수업 땡땡이친다고 좋아하지 말고, 틈나는대로 학습도 하면서 알찬 휴학기간을 보내십시오. 이상 전달 끝~.”
“아싸~ 놀러간다~.”
이렇게 해서 서울소재 5개대학이 일제히 동맹휴학에 들어가게 되었던 것이다.
바야흐로 7월항쟁이 클라이막스로 치닫는 순간이었다.
학생들이 동맹휴학을 하게 되면, 조정과 임금은 난감한 상황에 빠지는데, 오죽 정부가 잘못했으면 학생들이 나서서 동맹휴학을 할 정도 겠냐라는 여론의 압박이 가해지기 때문이었다.
“아니, 저 잡것들은 하라는 공부는 안하고 뭔놈의 데모질이야 데모질은! 어이 이조판서 이걸 어쩌라고 엉!”
“전하…죽여주시옵소서.”
“전하, 이참에 녹화사업을 벌여서 데모 주동자들을 전부 전방으로 보내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야, 너 지금 5공화국 찍냐? 좀 현실성 있는 대안을 내놔봐 현실성 있는!”
공관은 임금에게도 무시 못할 압력으로 작용하였던 것이다.
그도 그럴것이 나랏돈 들여서 조선 팔도의 수재란 수재는 다 모아놓은 성균관과 사부학당이 조정과 임금의 결정에 반대하며 그들의 본분인 공부까지 접겠다는 의미인 공관은, 말 그대로 조선왕조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었던가? 이쯤해서 세종대왕은 타협안을 내놓게 되는데,
“어이 황정승, 황희! 이쯤해서 수습합시다. 나도 왕으로서 가오가 있지, 이렇게 물러날순 없고, 대신 황정승이 이번 사태를 수습하세요. 시국선언을 하던, 비상조치를 하던 어쨌든 애들 제자리로 돌려놔요 알았죠?”
그렇게 황희 정승은 얼떨결에 이 7월 항쟁의 수습책임자로 떠오르게 된다.
“만만한게 홍어 X이라고 뻑하면 나보고 해결하래….”
그렇게 세종대왕의 뒤치다꺼리를 떠맡게 된 황희정승, 황정승이 선택한 해결방안은 다른게 없었다.
바로 맨투맨 설득방법이었다.
한달동안 성균관 유생들 집을 돌아다니며 맨투맨으로 유생들을 설득했던 것이다.
조선시대의 학생운동을 보면, 꽤 낭만적이었다는 느낌이 든다. 어지간한 일에 대해선 조정도 눈감아 주었고, 가두시위, 단식, 수업거부, 동맹휴학 정도로 학생시위를 접었던 유생들의 모습도 신기하다 할 수 있겠다.
뻑 하면 화염병에 극한대치를 벌이는 오늘날의 시위를 생각한다면, 성균관 유생들의 시위 모습은 애들 장난수준이란 생각도 들지만, 그에 앞서 학생시위를 너그럽게 봐준 조선 정부나 자신들의 주장을 알리고 설득하는데 주목적을 둔 유생들의 자세가 이런 시위문화를 만들어 내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하긴 전제군주정치에서 폭력사태를 벌였다가는…. 어쨌든 나름대로 부러운 단면을 보여준 시위란 생각을 지울수 없는 대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