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이야기-
(박영희의 “접기로 한다”를 읽고)
2020. 9. 24 그래도
접기로 한다 /박영희
요즘 아내가 하는 걸 보면
섭섭하기도 하고 괘씸하기도 하지만
접기로 한다
지폐도 반으로 접어야
호주머니에 넣기 편하고
다 쓴 편지도
접어야 봉투 속에 들어가 전해지듯
두 눈 딱 감기로 한다
하찮은 종이 한 장일지라도
접어야 냇물에 띄울 수 있고
두 번을 접고 또 두 번을 더 접어야
종이비행기는 날지 않던가
살다보면
이슬비도 장대비도 한순간,
햇살에 배겨나지 못하는 우산 접듯
반만 접기로 한다
반에 반만 접어보기로 한다
나는 새도 날개를 접어야
둥지에 들지 않던가
남편은 입버릇처럼 말한다. “나 같은 건 없는건가요?”라고.
추가열의 대표곡인 “나 같은 건 없는건가요?”가 자기의 상황을 대표곡하는 곡이라며 자기 좀 봐 달라고, 자기만 바라 봐 달라고 노래를 부른다.
“그럴리가?”
나는 시장가서 좋은 식재료를 보면, 단 1초의 망설임도 없이 바로 산다. 남편 해 줄려고, 좋은 식당에 가서 새로운 음식을 먹을 때도 그렇다. 무슨 재료를 사용했는지, 어떻게 만들었는지 살펴보고 물어봐서 집에 오면 꼭 내 손으로 만들어 해서 먹인다.
좋은 옷, 멋진 가방이나 모자, 신발을 봐도 바로 산다. 근사하게 차려입고 나서는 남편의 멋진 모습이 좋기 때문이다. 그렇게 사서 애다 안긴 것들이 한 방 가득이다.
그런데도 투정이, 토라짐이 장난이 아니다.
남편이 클 때 누군가로부터 사랑을, 관심, 인정을 못 받고 자란 것이 아닐까? 생각할 정도다.
그런데 도가 지나쳐도 너무 지나치다.
세상에 이렇게나 재미있는 일이 많고, 좋은 사람이 많은데 어떻게 자기만 혼자만 하루 온종일 바라보며 세세세 놀 수 있겠는가? 내가 필요로 하는 사람도 더러 있지만 나를 찾는 사람도 많아 나는 지분을 나누듯이 나의 시간을 나누며 바쁘게 종종거린다.
그리고 하루 온종일 같이만 붙어 있다고 어디 능사겠는가? 서로 심리적으로 안전한 거리에서 함께 또는 각자 행복해야 하는 거 아닌가?
하루 종일 붙어있으면 진짜 숨 막힌다. 남자가 무슨 말이 그렇게나 많은지. 나는 조용히, 가만히 있고 싶은데도 자기 혼자 이야기를 하다가 내 반응이 없으면 확인 사살까지 한다. 우리 가족 이야기만 해도 말이 많을 텐데 내가 알지도 못하는 자기만 아는 남의 이야기까지. 그것도 했던 이야기를 하고 또 한다. 나한테만 이미 일곱 번이나 한 줄도 모르고.
식상하다 못해 나중에는 짜증이 난다. 나는 도전적이고 성취지향적인 사람이 흥미롭고 좋은데 그런 노력이 없다. 자기 형제들 단톡방에 올라온 가짜뉴스를 마치 진짜인양 그대로 철썩 같이 믿고서 나를 세뇌하려고 든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변한 게 하나도 없다.
옛날에는 그런 저런 이야기도 묵묵히 들어주고 대꾸도 해주며 살았지만 요즘은 그런 이야기는 꺼내기만 해도 확 짜증이 올라 온다. 신물증이 난다. 듣고있는 시간도 아깝다.
남편말로는 자기는 나의 말투, 행동, 무심함, 뻔뻔함을 일곱 법이 아니라 일흔 일곱 번도 용서해 주고 접는데 나는 단 한 마디도 안 참고 턱을 치켜든다고 사람이 변했다고 한다.
그 착하고 순하던 박미옥이는 어디로 가고 똥고집 세고, 대가 세고, 자기 마음에 안 들면 단숨에 내쳐버리는 철면피, 냉혈한이 되었다고.
나는 이미 오래 전부터 접기를 너무나 많이 해서 더 접을 데가 한 군데도 없지 싶다.
날이 선 종이날도 접고 또 접으면 화장지처럼 부들부들해져 볼 일 볼 때 그저 그만인 것처럼 나 또한 그렇게 된 줄도 모르고.
그런데 알란가?
일단 접어진 곳은 원래의 상태로 되돌아 갈 수 없다. 그렇게 되지 않는다.
아무리 손바닥으로 펴고 또 펴도, 다리미질까지 해도 한 번 접혀진 흔적은 없앨 수는 없다.
그 틈새, 그 균열은 영원히 회복되지 못한다.
사람의 관계가 그렇다. 오해와 이해. 이해와 화해를 거쳐 다시 함께 하는 시간을 가진다 해도 이전의 상태로 돌아갈 수는 없다. 접혀졌던 보이지 않는 실금을 타고 여기저기로이미 다른 곳으로 물길을 내고 건너가 버렸기 때문이다.
함께 하지만 이전이 아닌 사이가 되어 살아가고, 비켜가고, 무덤덤해져가고 타인이 되어간다.
관계가 이전같지 않다고 애닮아 하지도, 안타까워하지도 않는다.
연연함이 사라지고 적당한 타인으로 살아가도 그렇게 불편하지가 않다.
살면서 수없이 접는다.
반, 반의 반, 반의 반의 반.....
그러다보면 서로가 알고 있던 사람도 그 사람이 이런 사람이었나? 이런 면이 있었구나. 그랬었구나. 그런데 나는 그걸 몰랐었네. 하고 담담해진다.
그러니까 접는 것은 차선이다. 거리두기의 시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