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사기 12:8-15 그 뒤를 이어 베들레헴의 입산이 이스라엘의 사사가 되었더라 9 그가 아들 삼십 명과 딸 삼십 명을 두었더니 그가 딸들을 밖으로 시집 보냈고 아들들을 위하여는 밖에서 여자 삼십 명을 데려왔더라 그가 이스라엘의 사사가 된 지 칠 년이라 10 입산이 죽으매 베들레헴에 장사되었더라 11 그 뒤를 이어 스불론 사람 엘론이 이스라엘의 사사가 되어 십 년 동안 이스라엘을 다스렸더라 12 스불론 사람 엘론이 죽으매 스불론 땅 아얄론에 장사되었더라 13 그 뒤를 이어 비라돈 사람 힐렐의 아들 압돈이 이스라엘의 사사가 되었더라 14 그에게 아들 사십 명과 손자 삼십 명이 있어 어린 나귀 칠십 마리를 탔더라 압돈이 이스라엘의 사사가 된 지 팔 년이라 15 비라돈 사람 힐렐의 아들 압돈이 죽으매 에브라임 땅 아말렉 사람의 산지 비라돈에 장사되었더라.
사사 입산, 엘론, 압돈
입다가 죽은 후, 세 명의 사사가 등장합니다. 7년을 다스린 입산, 10년을 사사로 지낸 엘론, 8년을 다스린 압돈이 그들인데, 본문은 그들의 사역을 거의 언급하지 않습니다. 사역에 관한 언급은 없고 대신 간략한 특징만 기록하는데, 입산은 아들 30명과 딸 30명을 외국 사람과 결혼시켰다고 되어 있습니다. 8-10절을 보십시오. “그 뒤를 이어 베들레헴의 입산이 이스라엘의 사사가 되었더라. 그가 아들 삼십 명과 딸 삼십 명을 두었더니 그가 딸들을 밖으로 시집 보냈고, 아들들을 위하여는 밖에서 여자 삼십 명을 데려왔더라. 그가 이스라엘의 사가가 된 지 칠 년이라. 입산이 죽으매 베들레헴에 장사 되었더라.”
베들레헴 사람 입산은 칠 년 동안 이스라엘의 사사로 지냈는데, 그에 관한 기록은 자식 60명을 바깥사람, 즉 외국인과 결혼시킨 것이 전부입니다. 딸 삼십 명은 밖으로, 즉 외국으로 시집보내었고, 아들 삼십 명도 외국 여자를 데리고 와서 결혼시켰습니다. 무슨 뜻일까요? 입산은 자식들의 결혼을 통해 이스라엘을 개방화했다는 의미입니다. 이방 민족들에 의한 압제가 언급되지 않았음을 볼 때, 이는 아마 사돈이 되는 나라들과 일종의 불가침조약의 성격을 띤 외교정책의 결과가 아닐까 하는 암시를 줍니다. 당시 결혼이 중요한 외교정책의 수단이었으니까요. 그렇다면 입산은 자녀들의 결혼을 통해 일종의 세계화 정책을 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는 이스라엘의 생활권이 이방 나라에까지 넓어지는 동시에, 지긋지긋한 이방 나라들의 침략으로부터 이스라엘을 지키기 위하여 자식들의 정략결혼을 이용했습니다.
그 뒤를 잇는 엘론을 보십시오. 11-12이죠. “그 뒤를 이어 스불론 사람 엘론이 이스라엘의 사사가 되어 십년 동안 이스라엘을 다스렸더라. 스불론 사람 엘론이 죽으매 스불론 땅 아얄론에 장사되었더라.” 엘론은 입산보다 더 기록이 없습니다. 그냥 십년 동안 사사가 되어 이스라엘을 다스리다가 죽어서 아얄론에 장사되었다가 전부입니다. 상장을 나누어줄 때, 여러 사람에게 같은 상장을 주면 첫 사람만 내용을 읽고 그다음부터는 무엇이라고 합니까? “이하동문”이라고 합니다. 엘론이 그런 경우입니다. 그는 다른 말을 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입산과 동일한 사사였습니다. 입산의 사역을 모델로 해서 외교정책을 중시했고, 그 밖에 다른 언급을 할 내용이 없었습니다.
이 두 사람을 통해서 알 수 있는 내용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언약 백성으로 부름을 받은 이스라엘이 갈수록 언약 백성의 특징을 잃어가더니, 이 두 사사에 와서는 외교정책을 통해 거의 ‘이방화’ 되었다는 뜻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중복도 있었겠지만, 거의 60명의 외국인 사돈이 있었습니다. 그렇게 외국과 정략결혼을 통해 돈독한 관계를 맺어서 침략으로부터 보장책을 마련했는데, 그로 인해 독특한 언약 국가인 이스라엘의 정체성이 다 무너지고 거의 이방화되었습니다. 나중에 북이스라엘의 아합왕 때 그의 아내 이스벨 하나로 이스라엘이 거의 우상으로 초토화되었는데, 60명의 외국인 며느리와 사위가 이스라엘의 지도권으로 들어와서 그들이 들여놓은 우상 문화가 얼마나 극심했겠습니까?
아마 당시 사람들은 입산과 엘론을 세계적인 지도자로 평가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들에 관해 아무런 평가도 하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 앞에서 평가받을 만한 사역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미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이방 나라들의 침략으로부터 안전하게 지켜지고 세계로 뻗어 나가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말씀해주셨습니다. 그 방법은 이런 정략결혼을 통한 외교정책이 아니라, 말씀에 충실해서 자신의 정체성을 굳게 지키고 그 독특한 믿음의 역량을 빛과 소금의 모습으로 담아 은혜를 흘려보내면 됩니다. 이스라엘 안에서 주변 나라들과 다른 거룩하고 독특한 말씀과 은혜의 아름다움이 흘러나가면 온 세계가 이스라엘로 모여들고 인종과 피부를 넘어 그 은혜와 생명을 나누어주는 참된 세계화가 이루어질 것입니다. 나중에 솔로몬의 지혜가 흘러갔을 때 시바 여왕을 비롯해서 온갖 열방들의 호기심이 몰려왔고 이스라엘의 명성이 높아졌던 것과 동일합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가 말씀에 충실하지 않고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서 자신이 없으면 밖에서 심리학, 상담학, 철학, 인문학, 과학 등 온갖 것을 들여옵니다. 사람을 이해하고 공동체를 이해하는 학문과 방법들이 필요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교회가 언약 공동체의 특징을 생명으로 담고 있으면 이런 학문이나 방법을 성경으로 재해석해서 그 이론들이 하나님 안에서 원래의 자리를 잡게 합니다. 그러나 교회가 자신이 없으면 학문과 세상의 방식으로 성경을 재해석하여 언약을 비틀어버리는 역전의 현상이 나타납니다. 입산과 엘론은 자녀들의 정략결혼을 통한 세계화 정책으로 이스라엘 공동체 가운데 그런 역할을 한 사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교회를 세계화, 현대화시켰는지는 모르겠지만, 하나님의 거룩한 언약 공동체인 교회를 세상의 찌꺼기들로 더럽혔습니다. 오늘 교회가 참된 부흥의 길로 가려면 바깥의 여러 잡다한 프로그램이나 사람들이 좋아하는 유행들을 교회 안에 들여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교회 안에 들어와 있는 그런 것들을 치워버리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래야 막혀 있던 은혜의 샘물이 다시 터지고, 성령의 생수가 교회 울타리를 넘어 가정과 세상과 직장에까지 자연스럽게 흘러가서 물이 바다 덮음같이 여호와의 영광을 아는 지식이 이 땅을 덮는 진정한 부흥이 일어나게 됩니다.
그 뒤를 잇는 압돈은 조금 더 독특합니다. 13-15을 보십시오. “그 뒤를 이어 비라돈 사람 힐렐의 아들 압돈이 이스라엘의 사사가 되었더라. 그에게 아들 사십 명과 손자 삼십 명이 있어 어린 나귀 칠십 마리를 탔더라. 압돈이 이스라엘의 사사가 된 지 팔 년이라. 비라돈 사람 힐렐의 아들 압돈이 죽으매 에브라임 땅 아말렉 사람의 산지 비라돈에 장사되었더라.” 전에도 보았듯이 어린 나귀를 탔다는 말은 당시 최고급의 운송수단을 가지고 있었다는 뜻입니다. 성경에서 나귀를 탄다는 말은 대체로 존귀와 번영을 뜻합니다. 압돈은 자신과 더불어 아들 40명과 손자 30명이 전부 존귀와 번영을 누렸습니다. 최고급 세단을 끌고 다니면서 이 성 저 성을 왕래하며 재판도 하고 백성들을 가르치기도 하면서 왕처럼, 귀족처럼 살았습니다.
압돈은 아들과 손자를 전부 활용해서 재판과 가르침을 베풀었던 일종의 사역 네트워크를 잘 구축한 사사입니다. 그러나 그의 마지막은 아말렉 사람의 산지 비라돈에 장사되었습니다. 앞서 입다 시대에 있었던 동족상잔의 비극, 그리고 입산과 엘론의 시대에 있었던 언약의 정체성을 무너뜨린 세계화 정책, 압돈의 부와 번성은 이후로 있을 40년 동안 블레셋의 압제를 암시하는 어두운 그림자입니다. 생명이 있는 기독교에는 교회 밖의 좋은 프로그램과 부와 번영, 그리고 첨단 문물이나 어린 나귀라는 좋은 운송수단이 없어도 그것과 비교가 되지 않는 성령의 교통하심이라는 탁월한 수단이 있습니다. 이 네트워크는 하늘과 땅을 이어줍니다. 교회와 교회를 이어주고 성도와 성도를 연결시켜 줍니다. 그 성령의 교통하심이 하나님의 말씀을 수단으로 전 세계의 교회를 하나로 묶어줍니다. 오늘 교회가 새로워지고 살 수 있는 길은 교회 밖에서 참신한 프로그램을 들여오는 길이 아니라, 다시 말씀으로 돌아가 성령의 교통하심을 사모하는 데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않고 능력에 있습니다. 성령의 능력은 말씀과 기도에서 나옵니다. 우리 안에 있는 모든 세상의 방법을 내려놓고 순전한 말씀과 기도로 돌아가 하나님의 주시는 부흥을 사모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박홍섭목사 / 한우리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