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트로크
박송이
창문이 열리고
별들이 반짝인다
도랑과 도랑 사이를 견디는 돌무덤과
돌무덤의 음계를 짚는 손가락들
얇은 네 손가락은
생전 처음으로 G코드 음을 짚었다
찬 벽에 걸린 달력이 되어
이상하게 순종하는 시체의 웃음으로
아무렴, 우리가 울다 웃고 미치고 자빠지면 어쩌랴
갓 낳은 달걀의 온기를 기억할 것
시인을 질투하지 말 것
돌이건 꽃이건 못이건 반짝이는 건 죄다
쓸모가 없다
커튼 사이로
커튼이 펄럭인다
낮은 볼륨과
홀로 낯선 쓸모로
나는 지금 없는 당신을 연습하는 중이다
—《포엠포엠》2012년 봄호
구름이 지나가는 마을, 론셰스바예스
박송이 《현대시》2012년 10월호
창밖 가로등을 카메라에 담은 거였는데
지독한 농담과 우울의 니코틴이 흐르는
네 강가까지 와 버렸다
네 몸 위로 내가 눕고
내 몸 아래 네가 젖는다
내 목을 잃고
네 목으로 갈아 끼워
우리의 목은 박자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새빨간 거짓말이 적힌 새 악보를 따라 부른다
새가 없는 나라를 산 적 있는가
부리와 날개를 잃고
척추와 발톱이 구부러지는
새의 등뼈를 따라
구불구불 불구의 나라로 날아간 적 있다
나는 크고 아름다운 새의 눈에
한 주먹 모래를 붓고 싶었다
눈을 잃은 바다와
발 없는 길목을 따라
공중을 잃고
몸통을 불사르는 시체처럼
샹들리에 사이를 오락가락했으므로
나는 새가 죽은 나라에 산 적 있다
소리 없는 울음과
조용한 심장
그리고 자라는 손톱들
창밖엔 어둠 속의 어둠이 물들고
울다 웃는 일이 쉬워지고
새벽에 닦는 고요한 숟가락
커튼 대신 걸린 목들
지상에는 지상의 목들이
새가 사라지는 노래를 부른다
—《현대시》2012년 10월호
------------
광화문 꽃집
박송이
꽃이 한창입니다
꽃이 총이 아닌 까닭에
우리는 얼마나 무사합니까
핀 자리와 진 자릴 노래하다
피는 꽃은 다시 피는 꽃이라고
봄이 가고 봄이 가고 봄이 가고 봄이 옵니다
그래, 얼마나 다행인가. 꽃이 총이었다면 혹은 지폐였다면 우리는 정녕 무사했을까? 꽃은 다만 꽃일 때 아름다운 것이다. 다만 꽃이었길래 지는 게 못내 아쉽고 그 자리를 자꾸 더듬어 보는 것이다. 그리고 다시 피길 간절히 바라는 것이다. 사람 또한 그렇지 않겠는가. 사람이 사람일 때, 그래야 비로소 아름답고 그립고 기다려지는 것이다. 광화문에 이젠 그런 꽃들이 가득했으면 좋겠다. 채상우 (시인)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나는 입버릇처럼 가게 문을 닫고 열어요 (외 2편 박송이)
회전 행거에 오색 양말을 진열해 놓았어요
오세요 오지 않은 발들을 기다리는 일
이게 양말 가게 직원의 하루니까요
메트로놈 45BPM을 켜 본 적 있으세요
느리고 고요한 박자가 이토록 우습고
쓸쓸해 보일 수 있다니
나도 모르게 고개를 까딱거리고 있어요
온종일 양말들 곁에서 말이죠
누군가 한 켤레 혹은 열 켤레를 사 가기도 하고
천 원짜리 지폐들이 내 손에 쥐어지기도 해요
관객 없이 무대에 선 저 버스킹맨은 이해할지 몰라요
동전과 시절을 맞바꾸는 기분을요
성게를 만져 본 적은 없지만
따끔한 맨발이라는 건 알 것만 같은 것처럼요
그래선지 저 산 능선이 꼭 홍어 무침을 삼키는 것만 같아요
모든 게 기분 문제겠지만요
라면물이 끓고 있어요
이제 저 버스킹맨은 어디로 가는 걸까요
발꿈치를 사포로 문지른 잿빛 구름들이
딸 깍 딸 깍 잘도 흘러만 가는데요
소심한 책방
짧아지는 연필을 사랑해야겠다는 생각
딱딱한 솔방울을 궁굴리며 궁굴리며
용기의 얼굴을 내밀고 가야겠다는 생각
손바닥 같은 숲속 작은 사람들 곁에서
우산을 펼쳐야겠다는 생각
신앙을 가져야겠다는 생각
첫 시집을 내고 예술가라기보다는
생활인에 가까워졌다는 생각
시집을 팔아야겠다는 생각
깨진 보도블록 탓하지 않으면서
까인 무릎을 껴안아 줘야겠다는 생각
저마다 바다를 띄우고
그마다 닻을 품고
이마다 파도를 버틴다는 생각
쓰러진 볏잎들을 묶어 줘야겠다는 생각
도탑게 도탑게 골목을 돌 때마다
툭툭 솔방울이 떨어지고
작은 시집을 파는 책방이 문을 연다
똑똑 문을 열면 낱말들이 몰려와
슬픔이 무사하다는 생각
나무항구 3
잘 삶아진 옥수수를 입에 물고
죽림 분기점을 지나고 있을 때였다
나는 그것을 직감했다
무언가 들이닥쳤을 때 그것이 나의 의도와
상관없이 쳤거나 비켜섰거나 했을 때
어느 쪽으로든
죄책감에 무방비하다는 걸 말이다
그러다 보니 나는 옥수수 알맹이 같은
이 한 줄 따위로도 이 썩을……
동정하는 편 쪽에 설 수 있다
고라니야, 고속도로엔 건널목이 없단다
—박송이 시집 『나는 입버릇처럼 가게 문을 닫고 열어요』 2022.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