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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안식일 취지는 허니문 여생>의 줄거리:
그동안 우리는 성경에 언급된 안식일 규정을 지키는 대신 예수님이 부활하신 일요일을 주일로 지켜왔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습관적이고 형식적으로 안식일이나 주일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안식을 제정해주신 근본 취지를 내것으로 만드는 일입니다. 이 근본 취지가 바로 꿀처럼 달콤한 하나님과의 밀월여행으로 인생을 살라는 것입니다.
안식일 취지는 허니문 여생
(누가복음 6장 1절~5절)
1. 안식일에 예수께서 밀밭 사이로 지나가실새 제자들이 이삭을 잘라 손으로 비비어 먹으니
2. 어떤 바리새인들이 말하되 어찌하여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느냐
3.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다윗이 자기 및 자기와 함께 한 자들이 시장할 때에 한 일을 읽지 못하였느냐
4. 그가 하나님의 전에 들어가서 다만 제사장 외에는 먹어서는 안 되는 진설병을 먹고 함께 한 자들에게도 주지 아니하였느냐
5. 또 이르시되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 하시더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안식일 취지는 허니문 여생>이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안식일 취지는 허니문 여생’
제목은 안식일을 제대로 지킨 이후의 삶은 허니문이 된다는 의미입니다.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는 계명은 십계명 중 제4계명에 해당하는 말씀입니다. 거룩하게 지키라는 것은 다른 날과 구분하여 지키라는 뜻입니다. 출애굽기 20장 9~10절을 보면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 일곱째 날은 네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가축이나 네 문안에 머무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제4계명으로 언급된 안식일 규정을 지키지는 않습니다. 기독교 종교는 예수님이 부활하신 일요일을 주일이라고 부르면서 예배당에 가는 날로 지켜왔습니다. 그러나 안식일이나 주일을 습관적이고 형식적으로 지키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본래 안식일을 제정해주신 근본 취지를 내 것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는 암암리에 안식일의 문자적 규정을 폐지하신다고 보아도 무방합니다. 규정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3500년 전에 모세에게 십계명을 알려주셨던 하나님의 취지를 내 것으로 만들 수 있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안식일의 취지를 내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돈이 드는 것도 아니고 수고와 노력이 드는 것도 아닌 공짜입니다. 그러나 이 공짜가 위대합니다. 운명을 바꾸어 놓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안식일의 취지를 내 것으로 삼을 수 있다면 죽을 때까지 여생은 하나님과의 허니문이 됩니다. 허니문 즉 밀월(蜜月)여행은 꿀처럼 달콤한 기간이라는 뜻입니다. 안식일의 취지가 지켜질 때에 우리의 삶이 꿀처럼 달콤해질 수 있음을 약속드릴 수 있습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립니다. 공짜는 위대합니다. 내 수고와 노력이 많이 들어간 일들은 어쩌면 인생을 더욱 혼란스럽게 할 뿐이지 위대한 역사를 이룰 수도 없습니다.
예수님과 바리새인들과의 안식일 논쟁의 이유는 한 가지였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습관과 형식에 매여서 안식일 규정을 붙잡고 있었고 아무것도 해서는 안 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있었습니다. 한편 예수님께서는 안식일 제정의 근본 취지를 드러내셨습니다.
바리새인들에게 안식일 규정의 근본정신은 상실되고 관습과 형식만 남아있던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우리에게서도 나타나고 있는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2020년도에 공생애를 살고 계셨더라면 분명히 교계 지도자들과 더불어 주일 논쟁으로 계속해서 갈등을 빚으셨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원하시는 것은 부활사건을 기념한다는 명목하에 일요일을 주일이라 부르면서 습관적이고 형식적으로 예배당에 참석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시대로부터 3500년 전에 모세에게 주셨던 십계명에 드러난 안식일의 근본 취지를 모든 삶의 현장에서 내 것으로 삼을 수 있어야 합니다.
이 안식일의 취지를 놓친다는 것은 우리 스스로가 엄청난 영적 손실을 감수한다는 것인데 결코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여생만큼은 삶의 질과 의미가 바뀔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리고 안식일의 취지를 내 것으로 삼을 때에 삶은 바뀌게 됩니다.
안식일의 근본 취지를 이해함에 있어서 가장 큰 오류가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처럼 특정한 일이나 행동을 해서는 안 된다는 규정을 기준으로 삼아 안식일을 지키는 것입니다. 문자적으로 보면 이것은 합당한 이유일 수 있습니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출애굽기 20장 9~10절을 보면 엿새 동안은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일곱째 날은 아무 일도 하지 말라는 말씀이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나뿐만이 아니라 가족과 객과 종들과 가축에게까지 해당되는 말씀입니다. 실제로 말씀이 이렇게 기록되어 있기에 안식일을 지키기 위해서는 일이나 행동을 하지 않는 것에 초점을 맞출 수밖에 없다고 여겨집니다. 그러나 이렇게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말씀 속에 들어있는 하나님의 의도를 생각해볼 수 있어야만 합니다.
비유를 들어서 이 말씀의 취지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제목에서 허니문을 언급하였습니다. 허니문은 신혼여행입니다. 백과사전에서는 긴 설명 후에 결론에서 “신혼여행은 신혼부부를 그들의 친척이나 친구, 그리고 일상생활로부터 분리시키고 고립시킴으로써 가장 친밀한 관계인 부부로 탄생하게 하고, 새로운 일상을 위한 준비를 하는 과정이다.”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생각하는 신혼여행의 분위기와는 사뭇 다릅니다. 분리와 고립이라는 어휘가 특징적입니다.
결혼하기 전에는 홀로 살았습니다. 그러다 결혼을 통해 두 사람이 짝이 되어서 모든 일을 함께 해나가게 됩니다. 결혼은 일상을 대하는 입장이 완전히 새롭게 바뀌는 사건입니다. 둘이 하나라는 것을 확인하는 것이 신혼여행의 의미입니다. 그런데 이를 확인하는 과정에서 분리와 고립이 요청됨으로써 인간이 맺을 수 있는 관계 중에서 가장 친밀한 관계인 부부로써의 삶과 새로운 일상이 성립됩니다.
이 설명에서처럼 신혼여행은 일상을 떠나는 것에 목적이 있습니다. 일상적으로 하던 모든 일은 중단하게 됩니다. 그렇다고 해서 신혼여행이 일상의 중단을 목적으로 한 행사는 아닙니다. 삶의 현장에서 이루어지던 일이 모두 중단되어야 하는 이유는 서로에게 집중하기 위해서입니다. 신랑은 신부에게만 집중하고 신부는 신랑에게만 집중하는 것입니다. 이 둘 사이에 어떤 일도 어떤 사람도 끼어들지 못하도록 일상을 떠날 필요성이 생겨난 것입니다. 안식일 규정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일상에서 반복되는 일들을 중단하는 것 자체가 목적이 될 수 없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세상의 그 어떤 관계보다도 돈독하게 하는 것에 목적이 있는 것입니다.
집중이 제대로 이루어질 수 없다면 신혼여행을 망치게 됩니다. 일상이 중단된 김에 배우자에게도 관심을 끊어버린다면 이혼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의 모습이 이와 같았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안식일 규정에 입각하여 아무 일도 하지 않고자 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에 대해서도 관심을 갖지 않았습니다. 바리새인들과 하나님은 이제 이혼을 할 수 밖에 없는 관계가 되었던 것입니다.
신혼여행을 갔다면 서로에게 집중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것만을 중요시해서 서로에게 무관심해진 상태가 된다면 앞으로의 부부생활 또한 행복할 수가 없습니다. 행여나 아기가 생기더라도 아기까지 불행해지는 결과가 초래될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안식일을 지키되 하나님과 이 세상 누구보다도 돈독한 관계를 맺고자 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하나님이 갖고 계시는 축복권을 끌어당기기 위해서 안식일 규정을 지키고자 했습니다. 그렇기에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바리새인과 하나님의 관계를 칼로 쪼개듯 결별시키는 일을 하셔야만 했습니다.
따라서 안식일을 제대로 지키는가를 확인하기 위해서는 일을 하느냐 마느냐로 판단할 수 없습니다. 얼마나 하나님과의 관계가 돈독한지를 확인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하나님과 나 사이에 일도 끼어있지 않고 사람도 끼어있지 않아야 합니다. 그 무엇도 끼어들 여지가 없이 하나님과 밀착된 관계를 이루었느냐가 중요합니다. 하나님과의 밀착이야말로 안식일 제정의 근본 취지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이해를 가지고 본문을 살펴봅니다.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제자들을 거느리고 밀밭 사이로 지나가셨습니다. 이때에 제자들이 시장기를 느꼈던지 남의 밀밭에서 이삭을 잘라 손으로 비비어 먹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필이면 바리새인들이 이 광경을 보게 되었습니다. 당시의 안식일 규정을 보면 추수나 탈곡을 금지하고 있었습니다. 아무 일도 하지 말라는 출애굽기의 말씀을 더욱 확장하여 해석하고 제시하였던 것입니다. 이 자체로만 보면 규정자체는 잘못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인정하고 따르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이 한 행동에는 추수와 탈곡으로 볼 수 있는 행위가 있었던 것입니다.
신명기 23장 24~25절을 보면 “네 이웃의 포도원에 들어갈 때에는 마음대로 그 포도를 배불리 먹어도 되느니라 그러나 그릇에 담지는 말 것이요 / 네 이웃의 곡식밭에 들어갈 때에는 네가 손으로 그 이삭을 따도 되느니라 그러나 네 이웃의 곡식밭에 낫을 대지는 말지니라”라고 하셨습니다. 바리새인들도 이러한 말씀을 잘 알고 있었기에 평소 같으면 제자들이 이삭을 조금 잘라먹는 것을 문제시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다만 안식일이었기에 추수와 탈곡을 하지 말라는 규정을 어긴 것을 문제시하였던 것입니다. 사실 이 문제는 제자들의 문제였기에 예수님께서는 평소의 온유하신 성품대로 바리새인들에게 “알겠다. 다음부터는 제자들에게 철저하게 주의를 주겠다.”라고 하셨다면 그대로 넘어갈 수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남의 밭에 들어가서 밀 이삭을 잘라 비비어 먹는 일로 바리새인들과 논쟁을 하십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8장 13절에서 “그러므로 만일 음식이 내 형제를 실족하게 한다면 나는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아니하여 내 형제를 실족하지 않게 하리라”고 하였습니다. 당시에 우상에게 바쳐졌던 고기 먹는 것을 두고 교회에서 분쟁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바울은 스스로는 우상을 아예 인정치도 않는 사람으로서 얼마든지 먹을 수 있지만, 그 모습을 보고 실족할 사람이 있다면 그를 위해 평생 고기를 안 먹겠다고 한 것입니다.
그런데 정작 오늘 본문의 예수님에게서는 이러한 태도를 발견할 수가 없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제자들을 지적함으로써 예수님을 비난할 근거를 찾았습니다. 예수님을 비난한다는 것은 실족할 위기에 처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바울과 같은 마음으로 이들을 생각하셨다면 그냥 주의하겠다고 말씀하시고 넘어가실 수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들과 논쟁을 벌이셨고 그 결과 이들의 화를 돋우게 됩니다. 11절에서 “그들은 노기가 가득하여 예수를 어떻게 할까 하고 서로 의논하니라”고 하였던 바와 같습니다.
물론 예수님께는 합당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안식일 규정을 언급하는 바리새인들의 마음상태를 보고 계셨습니다. 이들의 마음에는 눈곱만큼도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사랑하고자 하는 마음이 없음을 보셨던 것입니다. 안식일의 취지는 하나님과의 밀월여행입니다. 신혼여행은 일상의 삶의 현장으로부터 떨어진 곳으로 신혼부부를 분리시키는 것입니다. 누구도 어떤 일도 신랑과 신부 사이에 끼어들지 못하게 하는 것은 서로에게 집중하기 위함입니다. 인생의 처음이 신부를 맞이하는 것이고 신랑을 맞이하는 것이 되게끔 하는 것이 신혼여행의 의미입니다.
안식일의 의미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사업을 하는 사람이 평소에는 사업에 신경을 쓰더라도 안식일이 되면 마치 사업과는 무관한 사람처럼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마주대하는 것이 인생의 첫 번째 일인 것처럼 하나님께만 집중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의 마음에서 하나님은 제외된 상태였습니다. 오직 안식일에 일을 해서는 안 된다는 규정만 남아서 지켜지고 있었습니다. 안식일을 이렇게 잘 지켰으니 하나님께서 세상 축복을 줄 것이라는 생각만을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선민들에게 이러한 가르침을 전하고 있던 바리새인들에게 분노하실 수밖에 없었습니다. 선민 한 사람 한 사람은 매주 안식일을 통해 나머지 육일도 하나님과 밀착되어서 살아가는 삶을 살 수 있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안식일로부터 시작된 새로운 일상은 점차 세상에 다시 점령을 당하게 됩니다. 그럴 때에 다시 안식일을 맞이하며 세상에 정복되어진 나를 죽임으로써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것입니다. 의식에서 모든 일이 멈추고 마음에서 모든 관계가 끊어짐을 통해서 하나님과 집중하는 밀월여행을 보내는 날이 안식일이었던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에게는 이렇게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한 집중은 사라진지 오래였습니다. 안식일 규정을 지키면 세상에서 이루고 싶은 바람과 소원과 축복을 받는다는 미신만이 남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상태에서 예수님과 제자들을 비판하고 있으니 이처럼 괘씸하고 분통 터질만한 일은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마음을 담으시고 분노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한편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의 의미를 말씀하시며 3~4절에서 다윗이 진설병을 먹은 사건을 언급하십니다. 다윗이 도망자 시절 초기에 성전에 들어가서 제사장만 먹을 수 있는 진설병을 먹게 되었습니다. 다윗의 이야기 속에는 안식일에 대한 내용은 들어있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사건이 언급된 이유에는 하나님과의 밀착이 어떠한 것인지 잘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진설병은 성소 안에 진열되어 있던 열두 개의 떡입니다. 이 떡은 일정기간마다 새로 진열되는데 기존의 떡은 제사장이 먹고 새 떡을 올립니다. 이때 다윗은 성전 안으로 피신한 상태였습니다. 성전은 하나님의 이름을 둔 곳으로써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상징합니다. 그러한 곳에 다윗이 있었다는 것은 하나님과 밀착을 이루었음을 의미합니다. 즉 진설병은 성전 바깥에 있는 하나님과 밀착을 이루지 못하는 사람들은 먹을 수 없는 음식이고 하나님과 밀착을 이룬 사람들만이 먹을 수 있는 음식이었습니다.
안식일의 근본 취지는 하나님과의 연합과 밀착입니다. 5절을 보면 ‘또 이르시되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안식일의 주인이라는 것은 예수님 안에 하나님이 들어와 계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안식일은 하나님과 밀착을 이루기 위해서 모든 대상과의 관계가 중단되어야 함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이미 하나님과 밀착을 이루고 계셨던 예수님께 필요했던 것은 안식일 규정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1년 365일이 안식일이 성취되는 날이었고 분초 단위로 안식일을 준수하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의 삶은 하나님이 이 땅에 내려오셔서 움직이시는 것과 똑같은 효과를 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은 그러하신 예수님과 함께 있었습니다. 이것은 안식이 성취되고 있는 상황을 상징합니다. 예수님과 하나님 사이에 아무도 없었듯이 예수님과 제자들 사이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안식을 성취하기 위해서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규정이 필요했으나 이미 안식이 성취되었다면 더 이상의 규정은 필요 없었습니다. 다윗이 성전 바깥에 있었다면 진설병은 먹을 수 없는 떡이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제자들이 예수님과 함께 있음으로써 안식일의 목적이 달성되었기에 무슨 일을 하느냐 마느냐는 더는 문제가 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우리 또한 무슨 일을 해도 안식은 유지되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을 만나도 안식은 유지되어야 합니다. 안식의 상태에서는 일을 한다고 해서 그 일이 하나님과 나 사이에 끼어들지 못한다는 것이고, 어떤 사람을 만나다고 해도 그 사람이 하나님과 나 사이에 끼어들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안식의 목적은 단지 무엇을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돈독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돈독하기 위해서 일도 멈추고 사람도 만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하나님과의 밀착관계가 항상 유지될 수만 있다면 무엇이든 다 할 수 있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이것이 바로 안식일의 취지입니다.
안식일에 아무 일도 하지 말라고 하신 이유는 하나님과의 사이가 벌어졌기 때문입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음으로써 하나님께만 집중하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과의 밀착을 유지할 수만 있다면 모든 일을 다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제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예수님과 함께 함으로써 안식일의 취지를 성취할 수 있습니다. 나의 마음이 예수님을 바라보고 나의 의식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붙잡을 수만 있으면 예수님과 하나가 됩니다.
예수님에 대한 우리의 입장이 결정되는 곳은 바로 십자가입니다. 공생애의 예수님은 지혜가 많으시고 기적을 일으키시는 예수님이었습니다. 그러나 십자가의 예수님은 세상으로부터 버림 받으셨던 예수님입니다. 공생애의 예수님만을 향한다면 예수님에 대한 우리의 입장은 온전할 수 없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의식 속에서 붙잡을 때에 예수님에 대한 입장은 분명하게 드러나게 됩니다. 그리고 그럴 때에 안식은 이루어지게 됩니다.
안식은 쉼입니다. 스트레스도 없고 부담도 없고 책임도 없는 쉼이 우리 안에서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이러한 쉼이 이루어지는 상태에서 무슨 일이든 하는 것이 하나님과의 신혼여행이고 밀월여행입니다.
옛날에 중매를 통해 결혼을 하게 되면 신랑과 신부는 결혼식이 끝나도 서먹서먹합니다. 그런데 신혼여행을 가서 부부로써 찰싹 붙게 되고 돌아와서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게 되는 것입니다.
안식일을 통해 하나님과 밀착하는 것도 이와 같습니다. 무슨 일을 시작하기 전에 먼저 하나님과 찰싹 붙는 신혼여행이 이루어져야만 합니다. 신혼여행에서 일에 대해 책임을 느낄 수 없고 걱정을 할 수 없습니다. 오직 서로에게 집중하는 동안 관광을 하든지 식사를 하든지 달콤함만 있습니다. 우리의 삶에서 배우자를 만나든 자녀를 만나든 일을 하든지 밀월여행을 간 신혼부부가 찰싹 붙는 것처럼 하나님과 찰싹 붙어서 모든 일을 해나갈 수 있어야만 합니다. 배우자나 자녀나 부모를 대할 때에도 직장에서 일할 때도 아무 부담도 없고 책임도 없이 달콤함을 느끼며 해나갈 수 있습니다. 심지어 건강 문제나 돈 문제를 마주하게 될 때도 하나님과 붙어있기 위해서 의식으로 십자가의 예수님을 바라볼 수 있다면 안식은 유지됩니다. 그리고 안식이 유지되는 동안에 삶은 밀월여행이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여생이 달콤한 허니문이 되기를 바라시며 안식일을 지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안식일의 취지를 깨닫고 십자가의 예수님만 목숨 걸고 바라보시기를 바랍니다. 이 바라봄에는 돈도 노력도 수고도 들지 않습니다. 지속적으로 바라보기만 하면 됩니다. 그럴 때에 우리의 여생은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 아버지와의 밀월여행이 될 것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나의 의식이 주님의 십자가에 붙박이가 되게 하셔서 365일 분초단위로 안식이 이루어지게 하여주심으로써 하나님 아버지와 밀착되어 여생을 밀월여행으로 살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