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놋 뱀과 예수님 십자가
본문 <요3:10~15>
(지난주) 밤에 은밀히 예수님을 찾아온 니고데모에게 “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고 말씀하심으로 유대인의 신앙체제를 단번에 정죄하신다. 구원은 인간이 무엇을 하는 방식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거듭나게 하시는 출생의 방식으로 되어진다는 것을 알려 주신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손에 구원을 맡기지 않으신다. 출생에 관한 한 인간은 100% 수동적일 수밖에 없듯이(자기 의자나 원함으로 태어난 사람 있나?), 영적인 출생인 거듭남 역시 우리가 할 일은 하나도 없다는 것이다. 생명은 주어지는 것이지 우리가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다는 이 말 속에 깊은 내막이 있다. 며칠 전에 수십 년 동안 신앙생활을 열심히 했다는 어떤 분과 예정에 대해 논쟁을 하다가 끄트머리에 이런 질문을 던졌다.
1.당신은 구원을 받았는가? 즉 거듭났는가? 거듭났다면 그 근거는 무엇인가?
-답변이(ㅎ님의 은혜로 IX를 영접하여 영의 구속을 받았다고 함).
2.다시 질문함(그럼 그 영의 구속이 살면서 취소될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가?)..
-답: 계3장 사데교회 예(이기는 자는 흰옷을 입을 것이요, 이름을 생명책에서 흐리지 않을 것)
=> 즉 사람의 하기에 따라 구원이 취소된다는 것임
3.흰옷을 입는다는 게 무엇인가?(글쎄요..몰라/ 말해달라고 함).
세 가지 질문을 던졌는데 첫번째 답변부터 틀리기 시작해서 전부다 틀렸다. 첫번째 답변이 어디서 틀렸는가? ㅎ님의 은혜로 예수를 영접해서 영의 구속을 받았다는 답은 얼핏 들으면 정답 같아 보인다. ㅎ님 은혜로 예수를 영접(즉 믿어서) 구속받았다..) 미안하게도 오답이다. 왜?
-이것을 주님이 니고데모에게 한 말씀과 비교해 보자,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한다.
그런데 이 분은 물세례에 대한 개념을 모른다(언급하지 않음) 물은 뭐다?(죽이는 것임). 즉 자신이 죄와 허물로 죽어 ㅎ님의 말씀대로 살수 없는 무능하고 무가치한 자임을 깨닫는 것을 죽은 자라고 함(I'm Not'g/먼지요, 벌레요). 그래서 구원을 말하려면 먼저 자신이 영적인 무능함과 무가치함을 고백해야 한다. 가령, 먼저 자신이 ㅎ님 앞에서 그 어떠한 선과 의를 행할 수 없는 자임을 인정하고, 그렇기에 자신은 저주받고 지옥가기에 마땅한데, 그런 자신을 ㅎ님이 은혜로 믿음을 주셔서 IX를 믿어 구원을 받았다-라고 해야 정답이라는 말이다.
인간 자신이 ㅎ님 말씀을 도저히 지키지 못한다는 자기부인이 일어나서 ㅎ님의 긍훌이 아니면 살 수 없다는 절박한 마음으로 두 손 들고 항복하며 용서를 구하는 자에게 ㅎ님의 긍휼이 입혀진다. 이런 자에게 ㅎ님이 은혜로 믿음을 주셔서 IX십자가를 붙잡게 하시는데, 그게 진짜 은혜다. 은혜란 받을 자격이 없는 자에게 베푸시는 ㅎ님의 선물을 말한다. 그러나 오늘날 은혜라는 용어가 교회 안에서 너무도 가치가 하락한 변질된 용어가 되고 말았다.
자기가 복음을 들었을 때, 자신의 의지와 결단으로 예수를 믿었다고 하면서 동시에 이것이 ㅎ님의 은혜라고 말한다면 앞뒤가 안 맞는 말이다. 자격없는 무능한 자에게 주어지는 은혜를 자격있는 자가 받았다니 어불성설이다. 그러니까 은혜의 의미를 모르고 세뇌되어 그냥 은혜라는 말을 습관적으로 쓰고 있을 뿐이다. 자기 가능성이 있는 자에게는 ㅎ님은 절대로 은혜의 믿음을 주시지 않는다. 믿음이 왔다는 것은 성령이 임했다는 말이다. 그러나 자기가 믿었다는 자는 ㅎ님의 은혜로 온 믿음이 아니다. 그래서 성령이 임한 것도 아니다.
즉 물세례로 죽은 적이 없는 자에게 성령세례를 주시지 않는다는 말이다. 물세례는 율법과 같다. 죄를 깨닫게 해서 죽음의 자리로 가게 한다. 그게 물세례이다. 그래서 율법의 마지막 주자인 세례요한이 나는 물로 세례를 주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성령으로 세례를 주신다고 한 것이다. 율법으로 죄를 깨닫게 해서 구원자 메시야를 찾으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죄를 모르는 자는 IX를 찾지 않는다. 그들이 자기 의로 가득찬 바리새인들이 아닌가?
그래서 2번째 질문이 나가는 것이다. 그럼 그 영의 구속(거듭남)이 취소될 수도 있는가? 그러니까 계3장의 사데교회를 예를 들며, 이기는 자는 흰 옷을 입을 것이요, 그는 생명책에서 지우지 않을 것이라고 쓰여 있단다. 구원에 대한 확신이 없으니까 거기는 이렇게 쓰여 있으니 취소도 가능하다는 답을 한 것이다. 과연 ㅎ님이 주시는 구원이 사람 하기에 따라 취소도 되는가? 이게 바로 내가 믿는 믿음의 맹점이고 한계이다.
흰옷은 무엇인가? IX를 믿음으로 입혀주시는 의의 옷이다. 창3장에서는 가죽옷으로 비유되기도 했다. 죄 없는 양의 피 값을 상징하는 가죽옷을 아담이 스스로 지어 입은 게 아니라, 죄를 짓고 숨은 아담과 하와를 찾아오셔서 ㅎ님이 손수 지어 입히신 것이다. 그래서 거기 보면, 용서 받아 살리심을 받은 하와를 일컬어 ‘산자의 어미’라고 부르신다. ㅎ님의 은혜로 죄로 죽은 하와가 살아난 첫 번째 사람임을 공표하는 말씀이다.
이 흰 옷은 마25장에서, 왕의 아들의 혼인 잔치에 입고 와야 할 혼인예복이다. 즉 그리스도의 신부들은 신랑의 피로 값주고 산 십자가의 피의 공로를 믿음으로 받아 구원된 자들이라는 표식을 혼인예복으로 말한 것이다. 인간의 율법 행함의 의가 아니라, IX를 믿는 믿음의 의의 옷을 입었느냐를 확인하는 말이다.
또한 계19.8절,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로서 이것을 성도들의 의의 행실이라고 했다. 의의 행실이란 사람의 행함을 일절 가미하지 않고 오직 ㅎ님의 의이신 IX를 믿는 믿음의 의를 말한다. 그렇다면 누가 예수를 믿을 수 있는가? 자신이 죄 밖에 나오지 않는 저주의 자식임을 아는 자만 예수를 믿게 된다. 이게 바로 주님이 말씀하신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는 이치이다. 물로 죽어야만 구세주이신 IX를 믿게 된다는 말을 압축해서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다고 하셨다.
이러한 깊은 내막을 모르고 그저 ‘예수 믿으면 천국 간다’는 말에 현혹되어, 천국가고 싶은 욕심에 내 뱉는 말이 ‘ㅎ님의 은혜로 예수를 영접해서 구원 받았다’라고들 한다. 은혜를 남발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그 구원이 어떤 가치가 있는 줄을 모르니까 행여나 살다가 잘못하면 취소될 수도 있다는 말들을 하는 것이다. 대다수 기독교인들의 영적인 수준이 이러하다.
이치적으로 한 번 생각해 보자 ㅎ님이 주신 구원이라면 과연 인간의 행함에 따라 취소될 수 있겠는가? 처음부터 행함으로 구원된 게 아니라 ㅎ님의 망극하신 사랑과 긍휼하심으로 된 구원이기에 결코 취소되지 않는다.
롬5:8(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X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ㅎ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애당초 주님의 죽음은 만인을 위함이 아니라 자기백성을 위한 죽음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처음부터 죄있는 자들을 위해 죽으셨는데, 구원을 주신 후에 잘못이 있다고 취소시키겠는가? 취소는 논리에 안 맞는다.
<롬4:1~8> 읽고..
-5절(일을 아니함,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여기심
-8절~다윗의 행복(구원의 즐거움): 밧세바 사건 엄청난 중죄인(지옥 수백 번)..그냥 용서받음
->시51편, ㅎ님의 인자하심으로 용서하사 구원의 즐거움을 회복시켜달라고..(뻔뻔하게)
성도는 ㅎ님의 언약 안에서 구원된 자들임(요일4장~ ㅎ님의 사랑은 여기 있나니..화목제물,
->요15장~주님의 말씀: 너희가 나를 선택하지 않고, 내가 너희를 선택했다..그 엉터리들을)
이게 얼마나 큰 위로의 말씀인가? 나의 구원의 근거가 나의 어떠함 때문이 아니라 ㅎ님의 무조건적인 택하심과 ㅎ님의 일방적이고 원초적인 사랑으로 된 구원이라니...
<벧후1:1/10~11> 읽고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붙잡는 게 참된 신앙임. 언약을 믿는 것이지 자신 행함을 믿는 게 아니다.) 잘못된 믿은(자기 열심과 노력을 좋은 믿음으로 여김: 미혹 됨)
이러한 하나님의 구원 방식은 이미 구약에 여러 차례 언급되어 있습니다. ㅎ님은 언약으로 자기백성들을 구원하신다. 옛언약N-> 새언약이다. 옛언약은 사람의 행함으로 구원을 이루어보라고 주어진 실험 기간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고작 40일도 못되어 실패로 드러났고 그 결과로 첫 번째 돌판이 깨뜨려졌다. 그리고 다시 주어진 것이 두 번째 돌판이었다. 이게 새언약이다.
아론의 금송아진 사건으로 ㅎ님의 말씀을 어긴 자들이 3천여 명이 죽어나갈 때, 모세의 중보로 ㅎ님의 심판이 중단되고 다시 주어진 돌판이 새언약이었던 것이다. 두 번째 돌판은 ㅎ님의 긍휼과 용서를 담고 있는 언약이다. 인간은 할 수 없기 때문에 중보자의 희생을 통해 구원하신다는 메시지다. 모세의 중보는 IX의 십자가 대속을 상징한다. 롬5;8절에서 IX의 십자가 죽음은 ㅎ님의 자기백성에 대한 사랑의 확증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이처럼 새언약에 대한 말씀은 구약 성경 곳곳에 명시되어 있다. 렘31장, 겔36장 등등이다. 하지만 율법적 사고에 굳어진 니고데모가 그런 ㅎ님의 의중을 알 리가 없었다.
그래서 10절 말씀처럼 니고데모에게 ‘너는 성경을 가르치는 선생으로서 이런 일을 알지 못하느냐’고 다그쳤던 것이다. 그러나 율법적 사고에 굳어진 니고데모가 그런 ㅎ님의 의중을 알 리가 없었다. 아직 하나님의 영이 주어져 있지 않았던 그에게 성경의 이런 구절들은 그저 까맣건 글자, 하얗건 종이에 불과했다.
아무리 이스라엘의 선생이라 할지라도 성령이 아니면 깨달을 수 없는 것이 하늘의 일이며 성령님의 일이다. 이렇게 볼 때 10절의 말씀은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던 니고데모에 대한 단순한 책망이라고 말할 수 없다.
그렇다면 어떤 의미에서 하신 말씀일까? 니고데모(군림, 대중)를 이스라엘의 선생이라고 말씀하신 것은 니고데모가 이스라엘 안에서도 성경을 가르치는 일에 있어서 권위 있는 자임을 말씀하시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즉 성경에 대한 지식이 많은 자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가 거듭난다는 물과 성령의 일에 대해서 이해를 못한다면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겠는가?
주님의 의중은, 성경에 대한 그 어떤 지식도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알게 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성경에 대해서 권위 있는 지식자라고 할지라도, 그가 신학박사라고 할지라도 그 지식이, 어떤 사람을 인도해서 진심으로 그리스도를 믿게 하지는 못한다는 것이다. 자신의 죄를 깨닫게 하여 예수를 믿는 것은 오직 성령으로 되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너의 지식으로 ㅎ님의 일을 깨닫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암시하는 의미로서 10절의 말씀을 하신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어떤 사람이 ‘성경에 대해서 많이 안다’는 것만으로 그가 믿음이 좋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성경을 잘 모르면 믿음이 없을 것이라고 지레 짐작해 버리는 것이 얼마나 잘못된 편견인가를 알 수 있다. 특히 목사가 성경에 대해서 많이 안다고 해서 무조건 ㅎ님에 대해 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큰 실수를 하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이처럼 니고데모가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구원이란 인간의 의지와 노력으로 될 수 없다는 것에 대해 무지했기 때문이다.
7절에 보면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기이히 여기지 말라"고 말씀하신다. '거듭나야 하겠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네가 구원받기 위해서는 거듭남이 필요하니까 거듭나기 위해서 힘쓰라'는 의미로 하신 말씀이 아니라 '구원은 인간의 애씀으로 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위로부터 생명이 주어져야 한다'는 의미로 하신 말씀인 것이다. 니고데모가 이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인간의 무능함과 부패성에 대해 인식해야 했던 것이지만, 이러한 인식이 없는 니고데모가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은 당연한 일이다.
아무리 기라성 같은 성경지식을 갖춘 선생이라고 해도 성령이 임하지 않으면 인간 자신의 죄로 인한 부패성을 알지 못한다. 그래서 자신이 힘쓰고 노력해서 구원을 따내려고 몸부림치는 것이다. 니고데모가 그 대표주자이다. 그래서 겔36장에서 이미 새언약을 말씀하셨지만, 성령이 임하지 않은 니고데모는 그 말씀의 참 뜻을 몰랐던 것이다.
에스겔서는 바벨론에 의해 멸망을 당하고 그곳의 노예로 끌려가 절망적인 상태에 놓여 있는 유다 백성들을 향해 주어진 하나님의 위로의 말씀이었다. 그들이 왜 멸망을 당해 그러한 낮아진 상태에 놓여 있어야 하는지,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들을 어떻게 회복시켜 약속의 땅으로 돌아오게 하실 지에 대한 메시지가 에스겔서이다.
“36:26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27 또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지라”..많은 용어가 나옴(밑줄-)
이 구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당신의 택한 자녀들을 어떻게 구원하시는지를 알 수 있다. 하나님은 그들 속에 새 영을 부어주심으로 ‘새 사람’을 만드는 방식 즉 새 창조의 방식으로 구원하신다. 이를 위해 그들을 먼저 심판의 자리, 저주의 자리로 이끌어 가신다. 바벨론에게 멸망을 당하여 그들의 노예가 되어 하루하루 절망적인 삶을 살게 하신 이유는 그들의 죄를 보게 하시려는 한 가지 목적이었다.
그 낮은 자리에서 자신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지킬 수 없는 자라는 것을 깨닫고 애통해하며 하나님의 자비를 구하는 자들로 만드시겠다는 것이다. 이것이 새 마음이다. 이 새 마음이 주어질 때 비로소 하나님의 규례를 지켜 행하라는 말씀의 의도가 무엇인지 알게 되기 때문이다.
굳은 마음이란 자기 의를 포기하지 않는 마음이다. 내가 마음만 먹으면 신앙생활 잘 할 수 있어. 내가 마음만 먹으면 천국 갈 수 있어. 내가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 살 수 있어. 이런 마음이 굳은 마음이다. 이런 마음이 십자가의 원수된 마음이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이런 굳은 마음으로 힘을 다해 하나님께 예배하고 하나님을 섬기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마음으로 드리는 예배와 찬송과 기도는 사탄을 경배하는 일이다.
굳은 마음이 부드러운 마음으로 변화된 사람은, 자신이 그 무엇을 해도 율법을 지킬 수 없다는 것을 보게 된다. 그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 행하는 것이란 하나님의 언약을 바라보는 것을 말한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새 언약의 성취로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 것이었다. 유대인들은 불행히도 이러한 하나님의 의도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 결과 약속의 땅으로 돌아간 후에 또 다시 힘을 다해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 행하는 열심의 길, 자기 의의 길로 나아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의 사고방식 역시 이와 하나도 다르지 않다. 자신이 예수를 믿었으니 거듭났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자신의 거듭남을 신앙 행위, 선한 삶으로 입증하려고 생각한다. 구원을 받았다면 행함의 열매가 맺혀진다고 말한다. 죄를 알지 못하기에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이다. 죄를 알지 못하고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영을 받은 적이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을 바로 이해해야 한다. 그래야 하나님의 일을 분별할 수 있게 된다.
ㅎ님께서 하나님의 영을 우리에게 부어주시는 이유 중의 하나가 주제파악이다. 선을 행하는 것이 불가능한 구제불능적인 자신의 실상에 눈이 열리게 하기 위해서이다. 즉 죄를 하나님의 시각으로 볼 수 있게 해주기 위해서이다. 하나님께서 죄를 얼마나 심각하게 보고 계시는지 우리는 이해하지 못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이 임할 때 하나님의 시각으로 죄 아래 놓인 내 자신의 비참한 영적 상태를 볼 수 있게 된다. 이것이 부드러운 마음이다.
굳은 마음을 가진 이러한 자들에게 하나님의 영을 부어주심으로 그리스도의 피 앞에 무릎을 꿇게 만드신다. 이것이 하나님의 율례를 행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율법에는 이를 지켜 행하라는 요구가 아닌, 그리스도를 믿으라는 한 요구만 담겨 있음을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죄의 종으로 태어난 인간은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 행할 능력도가 없고 그럴 마음도 없기 때문이다. 롬10:4절에서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라고 말씀한다. 그리스도께서 율법의 마침이 되셔서 그를 믿는 자들에게 의를 이루어 주신다.
ㅎ님께서 우리를 기뻐하실 때가 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영에 의해 자신의 비참한 실상을 보고 애통해 할 때이다. 시51:17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
그래서 주님은 마9:13절에서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라고 말씀하셨던 것이다.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눈이 열릴 때 비로소 하나님께 긍휼과 자비를 구하는 자가 된다.
이것이 롬10:13절의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는 말씀의 뜻이다. 자신의 무능과 무가치함에서 오는 애통함으로 참된 소망이신 예수의 이름을 부르는 자, 누구든지를 말하는 것이지, 예수를 믿으면 지옥 가지 않고 천국 가기 때문에 주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사탄의 이름을 부르는 일에 불과하다. 하나님은 이러한 자들의 기도를 듣지 않으신다.
ㅎ님의 영으로 거듭나서 새 마음을 갖게 된 자들의 소망은 오직 죄인을 부르러 오신 그리스도 한 분 뿐이다. 내가 자기사랑이라는 덫에 걸려 있음을 보고 있기에 자기행위를 보지 않게 된다. 이것이 사도 바울이 깨달았던 ‘한 법’이었다. 롬7:21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그래서 25절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ㅎ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ㅎ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라고 고백했던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영으로 거듭난 자들에게 맺히는 인식의 변화이다. 자기 사랑에서 자기 미움으로 바뀌게 된다. 더 이상 자기 행위에 매여 있지 않게 된다. 행위에서 자유하기 때문에 그리스도 안에서 마음의 안식을 누릴 수 있게 된다. 이것이 거듭남이고 성경이 증거하는 구원이다. 하나님을 기쁘게 하기 위해 무엇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행하신 그 놀라운 구원을 기뻐하며 누리는 것이다.
본문 <요3:11> 읽고,
우리와 저희로 구분 짓는다. 주님의 부르심에 응한 자는 ㅎ님의 구원의 경륜을 알고 있고, 명확히 눈으로 본 것처럼 확신에 차있지만, 니고데모와 같은 바리새인들은 문자적인 지식은 많으나 당당봉사와 같아서 ㅎ님의 뜻을 모르기에, 종교인으로 죄의 종이 되어 살다 죽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을 영으로 보느냐 의문(문자)로 보느냐는 생사를 가름하는 중요한 잣대가 된다. 한마디로 성령을 받아야 죄를 알고 의를 알고 심판을 알게 된다는 말이다.
12절~ 땅의 일(이스라엘 역사를 통해서 일하시는 ㅎ님의 구속사를 말한다.) 예) ㅎ님이 시내산에서 주신 두 돌판의 의미를 니고데모는 몰랐다. 당연히 가죽옷이 뭔지도 모름, 성경 전체를 몰라. 그러니까 종교 의식을 행하는 것이 신앙으로 여겨서 바리새인의 노선을 걷는 것이다.
하늘의 일(옛 언약을 폐하시고 새언약으로 일하시는 것-즉 메시야 IX의 대속으로 주시는 은혜의 구원을 육신 덩어리들이 어찌 알겠느냐는 말씀)/ 십자가 복음을 세상을 비웃는다: 인과율에 어긋나기 때문임. 세상은 복음을 미워함, 바울이 나는 복음을 부끄러워 아니한다고 외침)
13절~ 하늘에서 내려온 내가 가르치는 것이 참된 것임을 말씀하시는 것임. 주님의 가르치심은 새언약이고 십자가 복음이다. 바리새인이 가르치는 율법 행함의 의는 거짓이라는 의미이다. 그래서 요한복음 서두에 ~세례요한과 주님이(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외침, 율법 행함이라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지고 힘겨워서 고통스러워하는 자들에게, 율법의 의가 아니라 믿음의 의가 ㅎ님이 원하시는 참된 의이니까 거기서 돌이키라가 회개하라 임. (IX=천국 자신)
<14~15절> 앞에서 니고데모에게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한다는 말을, 여기서는 갑자가 놋뱀 사건과 자신의 십자가 죽음을 가져와서 설명하고 있다.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는 것과 놋 뱀 사건과 십자가는 같은 것이라는 말씀이다.
물과 성령이라는 말은 먼저 죽이는 일이 있고 그 다음에 살리는 성령을 부어주어 살리는 게 것이 ㅎ님의 구원 방식이라는 말이다. 그게 놋뱀 사건이고 십자가 사건이라는 말이다. 놋뱀 사건은 민21장에 나오는 내용인데 가서 살펴보자.
<민 21:4-9> “백성이 호르산에서 진행하여 홍해 길로 좇아 에돔 땅을 둘러 행하려 하였다가 길로 인하여 백성의 마음이 상하니라 5 백성이 하나님과 모세를 향하여 원망하되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올려서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는 고 이곳에는 식물도 없고, 물도 없도다 우리 마음이 이 박한 식물을 싫어하노라 하매 6 여호와께서 불 뱀들을 백성 중에 보내어 백성을 물게 하시므로 이스라엘 백성 중에 죽은 자가 많은지라 7 백성이 모세에게 이르러 가로되 우리가 여호와와 당신을 향하여 원망하므로 범죄하였사오니 여호와께 기도하여 이 뱀들을 우리에게서 떠나게 하소서 모세가 백성을 위하여 기도하매 8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불 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달라 물린 자마다 그것을 보면 살리라 9 모세가 놋 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다니 뱀에게 물린 자마다 놋 뱀을 쳐다 본 즉 살더라”
광야에 나온 이스라엘은 계속해서 ㅎ님을 원망하며 불평하였다. 물이 없다고, 음식이 박하다고, 애굽에서 먹던 부추와 마늘과 고기를 달라고, 길이 험하다고 타박하니까 불뱀을 보내 물어 죽게 하신다. 불뱀은 맹독을 가진 독사라고 보면 된다. 물리면 전신에 독이 퍼져 서서히 죽게 되는 무서운 뱀이다. 그러자 모세가 ㅎ님께 기도하게 되고, ㅎ님의 응답은 - 장대에 놋뱀을 매달아 그것을 보면 살리라는 처방을 내리신 것이다.
인간의 이성과 상식을 깨뜨리는 처방이다. 독뱀에 물린 사람에게 해독약이나 다른 의술적인 방법이 아니 장대에 매단 놋뱀을 보면 낫는다니.. 도대체 이해가 안 되는 비책을 말씀하신다. 그러자 불뱀에 물리고 나서 이 말씀을 의심하는 자들은 비웃음을 치며 여러 민간요법이나 자기방식대로 하다가 죽어갔지만, 순종하여 놋뱀을 쳐다본 자들은 다 낫게 되었다.
광야는 인간 내면에 감추어진 죄의 속성을 드러내는 곳이다. 좋은 환경에 등 따습고 배부르면 신상이 편안해져서 남에게도 너그럽게 대하게 되니 좋은 사람, 착한 사람으로 포장되기 쉽다. 그러면 내면의 악함이 좀처럼 나타나질 않게 된다. ㅎ님은 이것을 아시고 일부러 ‘너희들은 모두 악한 놈들이야’를 폭로하시기 위해 광야의 환경으로 안배하신다. 그래서 자신의 뜻대로 안풀리면 곧바로 죄악의 본성이 드러난다. 거품을 물며 이를 갈고 ㅎ님을 원망하고 저주하는 것이다. 애굽에 장지가 없어서 우리를 여기로 끌고나와 죽게하느냐고 ㅎ님께 항변한다.
지금 이스라엘이 그러한 형국을 맞은 것이다. 그렇게 ㅎ님을 거역하고 배신한 결과가 심판과 멸망이다. ㅎ님을 거역한 죄로 온 그 죽음의 자리에서 살길은 오직 ㅎ님의 긍휼하심만을 바라는 것뿐이다. 그게 바로 ㅎ님의 방식인 장대에 달린 놋뱀을 바라보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장차 자기백성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십자가에 달리신 IX의 죽음을 상징한다.
문제는 장대에 매단 놋뱀을 바라보아야 사는데, 누가 바라보겠는가? 인간의 방식으로는 도저히 살길이 없다는 것을 아는 자만, 마음이 깨뜨려져서 겸비한 자만 바라보고 살게 된다. 이처럼 자신에게는 살 길이 없음을 아는 자만 ㅎ님의 구원을 믿고 붙잡게 되는 것이다. 야곱이 얍복강에서 환도뼈가 부러져 더 이상 살길이 없게 되자 오직 ㅎ님만 쳐다보게 된다. 이게 이스라엘이다. 자기 의, 자기 방식이 끝나서 지팡이를 짚고 사는 존재가 되었다. 지팡이는 ㅎ님을 비유한다.
누가 IX의 십자가를 붙잡는가? 누가 예수를 믿어 영접하는가? 자기 의가 끝난 세리와 창기와 같은 자다. 자기에게는 죄밖에 나올 게 없음을 아는 자만 십자가 밑으로 나아온다. 이게 자기부인이다. 선악과 따먹고 ㅎ님에게서 떠나 ㅎ님 자리에 앉은 인간이 스스로 자기부인의 자리로 내려갈 수가 없다. ㅎ님의 안배하심 속에서만 가능한 일이다. 그래서 고난과 역경이 당시에는 고통스러워도 그게 복이다. ㅎ님의 어떠하심을 배우고 주님께 자신을 의탁하게 되기 때문이다.
자기부인은 곧 자기 죽음을 말한다. 죽은 자는 말이 없다. 자기 원함도 자기주장이 없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입술만 열면 사망의 말을 뱉어내기 때문에 입을 열수가 없다. 그러니 유구무언이다. 이게 죽은 자이다(아임 낫팅!). 이런 자에게 성령을 보내사 ㅎ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게 하신다. ㅎ님의 자녀, ㅎ님의 아들로 삼아주시는 것이다. 성령, 즉 그리스도의 영, 아들의 영을 받으면 그가 산자이고, 영생을 가진 자가 되었다.
그게 본문 15절이다.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갈4장에서는 우리에게 천국의 유업을 주시는 이유를 좀 더 구체적으로 말씀한다. 우리가 원래 ㅎ님의 아들이지만 어려서는 후견인 밑에서 종노릇을 하게 하신다. 그러다가 ㅎ님이 안배하신 사건과 환경 가운데 때가 차면, 아들의 영인 성령을 보내서 ㅎ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게 하신다. (중요함) 성령을 보내 아들 삼는 이유는 우리가 원래부터 아들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4장6절 너희가 아들인 고로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ㅎ님을 아버지라 부르게 하신다(그래서 천국은 유업으로 받게 하신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창세전부터 ㅎ님의 아들인데 왜 이 세상에 내려 보내시는 걸까? 그 목적은 오직 하나, 은혜를 알게 하기 위해서다. 천국은 은혜의 나라다. 은혜를 모르는 자는 해당이 안된다. 그래서 ㅎ님의 구원의 시작은 먼저 그들로 하여금 전혀 자격이 없는 자들로 깨닫게 안배하신다. 그게 광야의 고난이다. 그리고 그들을 조건 없이 구원시킴으로 은혜의 범벅이가 되게하여 ㅎ님의 은혜를 세세토록 찬양하게 하려는 것이다.
찬송~, 이게 은혜로 구원받은 성도의 할 일이다. 은혜를 모르면 노래는 해도 찬송을 하지 못한다. 찬송은 은혜가 벅차서 내면에서부터 솟구치는 감격과 감사의 표출이다. 우리가 주일에 모이는 이유 주의 하나도 이 찬송을 함께 부르기 위해서지 구원을 위해 모이는 게 아니다.
따라서 성도는 성령을 받고 보니 자신이 구원을 위해 해야 할 것이 아무것도 없고, 대신 IX가 이루신 그 의를 전가 받은 은혜로 산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것을 아는 것이 진리다. 여기에서 진정한 자유함이 넘친다. 그 사랑과 은혜에 감복하여 흘러넘치는 기쁨과 행복과 만족함을 어디에 비견하겠는가? 그래서 성도는 환경과 상관없이 항상 기뻐할 수 있고 범사에 감사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게 성도가 가지는 행복이고 즐거움이다. 이런 구원을 주신 ㅎ님께 감사와 찬송을 드립니다(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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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사랑과 복음교회 | - Daum 카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