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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그림자 삶의 끝인 죽음이 좋은 이유>의 줄거리:
사람들이 죽음을 두려워하고 싫어하는 이유는, 거짓 죽음을 인간의 죽음으로 잘못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참 죽음을 알면 이 세상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일 중에서 죽음처럼 좋은 일은 절대로 없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게 됩니다. 죽음에 대한 오해는 삶에 대한 오해에서 기인합니다. 육체로 사는 삶이 실체 아닌 그림자임을 모르기 때문이지요.
그림자 삶의 끝인 죽음이 좋은 이유
(사도행전 7장 54절~60절)
54.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그를 향하여 이를 갈거늘
55. 스데반이 성령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56.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한대
57. 그들이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고 일제히 그에게 달려들어
58. 성 밖으로 내치고 돌로 칠새 증인들이 옷을 벗어 사울이라 하는 청년의 발 앞에 두니라
59. 그들이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이르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60.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이르되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그림자 삶의 끝인 죽음이 좋은 이유>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그림자 삶의 끝인 죽음이 좋은 이유’
지난 시간에 “천상에서 땅으로 드리운 그림자의 삶”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육체로 이 땅을 사는 것은 그림자의 삶입니다. 우리 인격의 핵심인 마음이 하늘로 올라가서 인자 예수님 안에서 영화로운 광채이신 하나님을 바라볼 때에 삶은 그림자가 됩니다.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신다는 것은 간단히 말해 마음에서 하나님이 1등이신 상태입니다. 하나님만을 있음으로 느끼고 좋음으로 확신하며 소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상태가 이 땅에서는 그림자로 나타나는 육체의 삶입니다.
본문에서는 스데반 집사님이 순교를 당하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죽음은 결코 나쁜 일이 아닌 좋은 일이었습니다. 어느 정도로 좋은 것이냐면 육체로 살고 있는 동안에 이 세상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일 중에 최고로 좋은 일입니다. 내게 일어날 수 있는 최고의 일이 죽음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의 죽음이 최고는 아닙니다. 개역한글 성경의 시편 116편 15절을 보면 “성도의 죽는 것을 여호와께서 귀중히 보시는도다”라고 하였습니다. 성도는 앞서 말씀드린 대로 마음에서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는 자들입니다. 인자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을 바라보는 자들이고 하나님을 있음으로 느끼고 좋음으로 확신하며 소원하는 자들입니다. 귀중히 보신다는 것은 보물처럼 여기신다는 것입니다. 즉 성도의 죽음이란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맞이할 수 있고 경험할 수 있는 일 중에 최고의 일입니다. 우리가 사는 동안 경험할 수 있는 일들 중에는 좋은 일이 많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는 것이 거짓이 아니라면 이 세상에서 경험할 수 있는 것 중에 육체의 죽음보다 좋은 것은 없습니다.
이 육체의 죽음을 마음이라는 관점에서 보자면 그림자가 사라지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앞서 스데반 집사님의 설교에서 아브라함이 영광의 하나님을 보고 고향 친척 아버지의 집을 떠나게 되었다는 내용이 언급되었습니다. 그리고 스데반 집사님의 순교현장에서 하늘이 열리는 것을 본 사건을 통해 아브라함이 영광의 하나님을 보았다는 말씀의 의미를 살펴보았습니다. 사람이 지상에 살고 있는 동안에 마음이 천상의 상황에 참여하는 것이 올바른 믿음의 상태입니다. 마음이 천상을 향해있다는 것은 마음이 인자 예수님 안으로 들어가 영화로운 광채이신 하나님을 바라보고 있는 상태입니다. 이 상태를 염두에 두고 이 땅의 삶은 그림자의 삶이라고 비유적으로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이 비유에 고개를 갸우뚱 하시는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우리는 종종 성도의 삶을 빛과 소금에 비유합니다. 또 그동안 “반응하지 말고 발산하자”라는 주제로 많은 말씀을 나누어왔습니다. 발산하는 삶은 마음이 하늘로 올라가 하나님과 연결되어 있는 상태에서 성령을 통해 이루어지게 됩니다. 하나님의 기운과 뜻이 성령을 통하여 생각과 감정과 의지와 말과 행동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땅에서 하늘의 빛을 발산하는 존재로서의 삶이 그림자라는 비유와 잘 맞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 수 있습니다.
다만 이것은 관점의 차이에서 생길 수 있는 오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림자에는 언제나 실체가 존재합니다. 이 실체가 무엇인지를 염두에 둘 때 그림자에 대한 비유는 오해 없이 이해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삶에서 실체가 되는 것은 이 세상이 아닙니다. 성도에게 있어서 이 세상은 객관적 사실로는 존재할 수 있지만 주관적 현실이 될 수는 없습니다. 마음이 예수님 안으로 들어가게 되면 이 세상의 어떤 것에서도 있음의 느낌을 갖지 못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천상에 계시면서 오직 하나님만을 보고 계시기에, 예수님 안에 들어간 마음도 오직 하나님만을 있음으로 느끼고 좋음으로 확신하며 소원하게 됩니다. 그렇기에 성도의 마음에 있어서 이 세상은 실체일 수 없습니다. 성도의 마음에서는 오직 천상에 계신 하나님을 실체로 느낄 뿐입니다. 하나님과 예수님 사이에는 어떤 방해물도 끼어있지 않은 밀접한 관계로 하나를 이루고 계십니다. 바로 이 관계가 성도의 마음으로 느껴야 할 유일한 실체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위해서 항상, 쉬지 말고, 범사에 예수님 안에 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 나타나는 육체의 삶은 하나님의 빛을 받아 나타나는 그림자로 비유될 수 있습니다. 그림자로서의 삶과 발산의 삶은 상충하는 개념이 아닙니다. 이 세상을 사는 동안에 마음이 하늘로 올라가 있으면 지정의와 언행은 성령님에 의해서 하늘의 기운을 발산하게 됩니다. 세상에서 빛의 역할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한편 관점을 바꾸어서 실체와 그림자라는 관계에서 보자면 내 마음에서 실체로 느끼는 세계가 하늘일 때에 이 세상의 삶은 그림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개념을 염두에 둘 때 본문에 기록된 스데반 집사님의 행적이나 설교 속에 나오는 믿음의 선진들 그리고 사도들과 예루살렘 교인들의 삶의 모습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들이 마음을 인자 예수님 안에 보내는 동안 천상으로 올라가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만을 실체로 느끼며 현실로 삼게 되었고, 그러한 마음은 영화로운 광채이신 하나님 앞에서 그림자를 만들어 내게 됩니다. 그 그림자가 땅에 드리워진 형태로 드러나고 있었던 것입니다.
한편 이렇게 마음에서 천상을 실체로 느끼게 될 때 나타나는 증거가 있습니다. 육체의 죽음에 대한 생각이 완전히 달라집니다. 본문 59절을 보면 “그들이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이르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라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간구는 다소 특이하다 여겨집니다. 이제까지는 예수님이 스데반 집사님의 영혼을 받지 않고 계셨다는 말이 되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살펴본 대로라면 스데반 집사님의 영혼은 이미 예수님 안에 들어가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새삼스럽게 이런 간구를 하게 된 이유가 무엇일까요?
우리는 이러한 간구가 육체의 죽음을 앞두고 나타났다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즉 인자 예수님 안에 마음을 둔 성도의 죽음에는 특별한 의미가 있습니다. 스데반 집사님이 죽기 이전의 마음상태를 분석해봅니다. 스데반 집사님은 인격이라는 주체성으로 의식을 가지고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붙잡고 있었습니다. 그야말로 항상, 쉬지 않고, 범사에 십자가 예수님을 향하여 깨어 있었습니다.
사람의 영혼이란 곧 영이신 하나님을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입니다. 스데반 집사님은 주체적인 의식으로 마음이 십자가 예수님을 향하여 항상 깨어 있었던 것입니다. 십자가 예수님을 먼저 의식할 때에 스데반 집사님의 영혼이 인자 예수님 안으로 들어가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있음으로 느끼고 좋음으로 확신하며 소원할 수 있었습니다. 다만 몸이 죽으면 의식은 더 이상 유지될 수 없습니다. 몸이 죽으면 의식의 작용도 끊어지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의식으로 예수님의 십자가를 붙잡을 수 없게 됩니다. 이러한 일은 마치 전신마취를 할 때를 생각하면 이해가 쉽습니다. 살아있어서 호흡은 하지만 의식은 없는 상태입니다. 사람의 본질은 마음이기 때문에 육체가 죽는다고 해서 마음까지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육체가 죽으면 의식은 사라지게 됩니다. 살아있는 동안에는 인격의 핵심인 마음이 인자 예수님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예수님과 하나님이 계신 천상의 관계에 참여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몸이 죽게 되면 더는 의식으로 십자가를 붙잡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육체를 떠난 마음은 예수님 안에 온전히 머물게 됩니다.
우리는 살아있는 동안 천상의 관계에 참여하기 위하여 십자가를 바라보고 이 세상은 그림자로 살아가게 됩니다. 그러나 죽은 후에는 의식이 없기에 십자가를 붙잡을 수도 없고 붙잡을 필요도 없습니다. 살아서 예수님께 마음을 보냈던 성도들의 마음은 완전히 예수님 안에 안착하게 됩니다. 마치 영주권을 받는 것과 같습니다. 이제 예수님께서 영혼을 받으셔서 아버지 품에 드립니다. 그러면 마음은 영화로운 광채이신 아버지 품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죽음 이후에 이러한 일이 일어나기에 스데반 집사님은 굳이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라고 기도했던 것입니다.
정리해봅니다. 우리는 육체가 살아있는 동안 의식으로 십자가 예수님을 기억할 수 있습니다. 그럴 때 마음은 그리스도 연쇄과정을 따라 하늘로 올라가게 됩니다.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을 바라보며 하나님의 있음을 느끼고 좋음을 확신하며 소원하게 됩니다. 이러한 삶을 살아가다가 육체가 죽게 되면 의식도 중단되게 됩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마음을 받으셔서 하나님께 드리십니다.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을 바라보는 상태에서 영화로운 광채이신 하나님 품에 안기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도가 죽을 때에 나타나는 일입니다.
여기서 그림자 비유를 떠올려봅니다. 마음이 그리스도 연쇄과정의 예수님과 하나가 되어서 천상의 관계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사람의 삶은 인간 세상에서 그림자로 비유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림자 비유에서 육체의 죽음은 어떻게 표현될 수 있을까요? 육체가 죽으면 삶은 중단되기에 그림자가 없어지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다만 그림자가 없어지는 것이지 그림자를 만들어내는 실체까지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육체가 살아있는 동안에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의식으로 붙잡고 있음으로 영혼이 예수님 안으로 들어가서 영화로운 광채이신 하나님을 볼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영광의 하나님을 보았고 스데반 집사님이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았던 것과 같습니다. 이러한 성도가 죽을 때에는 예수님께서 그 영혼을 받으셔서 하나님께 드리는 일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이제 영화로운 광채이신 하나님을 바라보던 자리에서 벗어나 영화로운 광채 속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실체가 빛 바깥에 있을 때는 그림자를 만들게 되지만, 실체가 빛 안쪽에 있다면 그림자는 생길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영화로운 광채이신 하나님을 바라볼 때는 마음 뒤쪽으로 삶이라는 그림자가 드리워집니다. 그런데 마음이 영화로운 광채이신 하나님 품으로 들어가면 더는 그림자가 생길 수 없습니다. 이러한 상태가 되는 것이 바로 성도의 죽음의 의미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과정을 정확히 이해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죽음이란 예수님을 잘 믿던 사람이 어느 날 죽으면 하나님께서 그 영혼이 떠돌지 않도록 받아들여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과정은 그 반대입니다. 영화로운 광채이신 하나님 품안으로 성도의 영혼을 받아들이기로 결정하실 때 그림자가 없어지는 육체의 죽음이 이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만약 스데반 집사님이 죽음을 예감하고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라고 기도를 했지만 예수님께서 “아직은 때가 아니다.”라고 여기셨다면 죽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돌에 맞아 죽은 줄 알고 내던졌어도 다시 살아나 예수님이 바라시는 활동을 이어나갔을 것입니다. 스데반 집사님의 죽음은 단순히 돌에 맞은 결과가 아니라 예수님께서 때가 되었다고 여기시고 영혼을 받아들이신 결과로 이루어진 일이었습니다.
이것은 스데반 집사님에게만 국한되는 일이 아닙니다. 마음이 인자 예수님 안으로 들어간 모든 사람들은 그림자의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육체가 죽었기 때문에 영혼이 하나님께로 가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영혼을 받으시고 하나님께 드리시는 과정이 그림자가 없어지는 육체의 죽음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중요한 점은 스데반 집사님의 순교 현장으로부터 모든 선민의 죽음의 비밀이 드러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비밀의 핵심은 육체의 죽음이 그림자의 사라짐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그림자는 실체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육체의 죽음은 실체의 차원에서 아무런 손실이나 상실이 아닙니다. 영혼이 영화로운 광채이신 하나님 안으로 들어갔기 때문에 그림자로서의 이 땅의 육체는 없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스데반 집사님의 순교현장에서 사울을 비롯한 무리들은 자신들이 주체적으로 스데반 집사님을 돌로 쳐서 죽였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육체의 죽음은 스데반 집사님의 마음이 영화로운 광채이신 하나님 안으로 들어감으로써 그림자가 없어진 것뿐이었습니다. 결코 스데반 집사님의 실체가 사라진 것이 아닙니다. 스데반 집사님이 현실로 느꼈던 실체는 없어지지 않았습니다.
이 세상에 선민 한 사람의 육체를 죽일 수 있는 힘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겉으로 보기에 모든 순교현장에서 박해하는 사람들이나 공권력에 의해서 죽임을 당하는 것으로 보일 수 있습니다. 천 명이 순교했다면 예수님을 통하여 영화로운 광채이신 하나님의 품안으로 한 사람 한 사람을 품으셨고 육체라는 그림자가 없어지는 것으로 그 결과가 나타난 것뿐입니다. 결코 박해하는 자들의 주체적인 활동으로 천 명이 죽었고 마침 그들이 예수를 잘 믿는 사람이었기에 떠도는 영혼을 하나님이 받아들이신 것이 아닙니다.
예를 들어 들판에 나무가 햇빛을 받아서 그림자가 생겼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그림자가 보기 싫어서 그림자를 없애겠다고 폭탄을 던졌습니다. 그러나 결코 그림자는 사라지지 않습니다. 선민의 육체를 통해 이루어지는 삶의 모습이 이와 같습니다. 선민의 육체의 삶은 그림자이기 때문에 공권력이나 범죄나 사고나 각종 질병이 선민의 육체를 죽일 수는 없습니다. 마음이 천상에 가있는 동안 선민의 육체와 육체의 삶은 실체가 아닙니다. 실체가 아니라는 것은 그 당사자의 마음에서 실제로 있음의 대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육체와 삶이 객관적 사실로 존재하는 것은 분명하나 마음에서 현실로 느끼는 것은 하나님입니다. 그림자인 육체와 육체의 삶이 끝나는 순간은 영화로운 광채이신 하나님께서 그 사람의 마음을 완전히 품으시는 순간입니다. 성도의 마음이 영화로운 광채이신 하나님 안으로 들어갈 때 비로소 그림자가 없어지고 이 땅에서의 죽음이 실제로 이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암 때문에 죽는 선민은 아무도 없습니다. 암이 끝까지 치료되지 않았어도 암 때문에 죽는 것이 아닙니다. 암은 천상에 올라간 내 마음으로부터 땅에 드리운 그림자인 몸을 절대 죽이지 못합니다. 그림자인 몸이 죽는 것은 예수님 안에 들어가 있는 마음을 영화로운 광채이신 하나님이 품으심으로 이루어지는 일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육체의 죽음을 결과론적인 입장에서만 생각합니다. 단순히 암에 걸렸으면 암 때문에 죽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영적인 무지함에서 비롯된 오해입니다. 성도의 죽음은 영혼이 하나님께 받아들여진 결과라는 것을 꼭 이해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한편 본문 60절을 보면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이르되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고 하였습니다. 죽음을 자는 것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쉽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앞서 이루어진 베드로의 설교를 염두에 두면 좋습니다. 3장 19절을 보면 “그러므로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 없이 함을 받으라 이같이 하면 새롭게 되는 날이 주 앞으로부터 이를 것이요”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새롭게 된다고 번역된 부분을 직역하면 “위를 향해 호흡하다”라는 뜻이었습니다. 이는 곧 그동안 아래를 향하여 호흡하였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아래를 향한 호흡이란 이 세상의 대상들로부터 있음을 느끼고 좋음을 확신함이 들숨이 되고 그것들을 소원함이 날숨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반대로 위를 향한 호흡에 있어서는 인자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의 있음을 느끼고 좋음을 확신함이 들숨이 되고 하나님을 소원함이 날숨이 됩니다.
사람이 잠들 때는 의식은 끊어지지만 호흡은 계속됩니다. 전신마취를 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마음이 영화로운 광채이신 하나님 안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위를 향한 호흡이 완전하게 이루어지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육체가 죽었으니 의식은 없지만 실체로서의 마음은 여전히 존재하며 하나님으로 호흡을 해나가는 것입니다. 다만 이제 하나님 안에 들어가게 되었으니 더는 소원할 필요가 없습니다. 있음을 느끼고 좋음을 확신하는 하나님으로 마음이 완전히 채워진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육체와 연결되어 의식이 살아있을 때는 항상 죄의 체질의 영향을 받습니다. 죄의 체질은 자꾸 이 세상 것들을 있음으로 느끼고 좋음으로 확신하게 합니다. 이렇게 세상에 대해 반응하게 하는 죄의 체질과 싸우기 위해 주님의 십자가를 놓치지 않으려 애를 썼습니다. 그런데 마음이 육체를 떠나 하나님 안에 들어가게 되면 더 이상 방해가 되는 죄의 체질 또한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저 자연스럽게 하나님 아버지의 있음을 느끼며 좋음을 확신하는 대로 채워지는 것입니다. 마치 아기들이 엄마의 품에 안겨서 체온을 느끼며 잠드는 것처럼 영화로운 광채이신 하나님의 품에서 잠을 자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재림 때에 신령한 몸을 입고 깨어날 때까지 이러한 상태는 지속됩니다.
육체가 죽는다고 해서 마음에서 이루어지는 있음을 느끼고 좋음을 확신하고 소원하는 호흡의 과정은 중단되지 않습니다. 다만 육체의 의식이 깨어있는 상태를 살아있는 것으로 볼 때 의식이 끊어진 상태를 잔다고 표현할 수 있을 뿐입니다. 육체라는 그림자의 삶을 살아갈 때는 의식이라는 주체성을 가지고 십자가 예수님에 대해 깨어있어야만 했습니다. 이것이 죄의 체질과의 싸움입니다. 그러나 마음이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 안으로 들어가고 육체가 죽게 되면 더는 죄의 체질과의 싸움은 필요가 없습니다.
스데반 집사님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라는 기도를 사울도 들었을 것입니다. 그래서인지 사울은 사도 바울이 된 이후에 고린도후서 5장 8절에서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있는 그것이라”고 고백합니다. 이 말이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라는 스데반 집사님의 기도와 똑같은 내용입니다. 또한 빌립보서 1장 23~24절을 보면 “내가 그 둘 사이에 끼었으니 차라리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훨씬 더 좋은 일이라 그렇게 하고 싶으나 / 내가 육신으로 있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 유익하리라”고 하였습니다. 둘 사이라는 것은 몸과 그리스도 사이입니다. 육신이 살아있는 것이 교인들을 위한 일이지 자신을 위한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바울이 유익하게 여기는 일이란 지금이라도 그림자의 삶이 멈춰지고 마음이 예수님께 받아들여지고 영화로운 광채이신 하나님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자신의 바람대로 당장 하나님 품 안으로 들어갈 수는 없었습니다. 그렇게 기도하였을 것이나 예수님께서는 바울을 통해 하실 일이 있음을 가르쳐주셨습니다. 바울을 통해 믿지 않는 자들에게 말씀을 전하고 영적으로 깨우치게 해주는 일이 이루어지기를 바라셨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그 영혼을 아직 받아주지 않으셨던 것입니다.
스데반 집사님의 죽음은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을 통하여 세상에 탄생하게 된 진정한 교인과 진정한 교회가 무엇인지를 잘 보여줍니다. 교인의 모습이란 유무상통이나 산헤드린공회에 잡혀 재판을 받는 과정과 스데반 집사님의 설교를 통해 이해되는 구약성경과 선진들의 모습을 통해 제시되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그러한 교인이 생을 마치는 죽음에 어떠한 의미가 있는지를 밝히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2~7장까지는 참 교회를 드러내 보여주고 또 참 교회를 이루는 참 교인의 일생이 어떠한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성도의 육체의 죽음은 그림자가 사라지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죽음은 갑작스럽게 찾아오는 재앙이 아닙니다. 영화로운 광채이신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하여 나의 마음을 품으시기로 결정하지 않았다면 육체는 죽지 않습니다. 그리고 육체의 죽음은 마음이 죄의 체질을 떠나서 하나님의 품에 안겼다는 증거입니다. 이제 영원히 하나님의 있음을 느끼고 좋음을 호흡하며 단순히 소원하기를 넘어서 온전히 하나님으로 채워지는 깊은 평강의 세계로 진입해 들어가는 것입니다. 스데반 집사님은 그 죽음을 통하여 이러한 진실을 드러내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언제 영화로운 광채의 품안으로 우리의 마음을 끌어안고자 하시는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습니다. 다만 우리는 스데반 집사님의 순교를 통해 성도의 삶이란 이 세상 그 누구도 해칠 수 없는 그림자의 삶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누가 무슨 짓을 하더라도 그림자를 변형시킬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림자의 삶이 이루어지는 이 세상에 대해 조금의 피해의식도 가질 필요가 없습니다. 그것이 스데반 집사님이 자신을 돌로 치는 사람들을 향하여 용서의 기도를 드리는 것으로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이들은 스데반 집사님을 죽인다고 생각했지만 스데반 집사님은 죽음을 사람이 결정하는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느끼고 있었습니다. 돌에 맞아 죽게 되더라도 그것은 영혼이 영화로운 광채이신 하나님의 품에 받아들여짐으로 그림자가 없어지게 되는 것에 불과하다는 것 또한 느끼고 있었습니다. 그렇기에 몸을 돌로 쳐 죽이고자 하는 사람들에 대해 눈곱만큼의 피해의식도 가질 필요가 없었습니다.
여러분의 마음이 하늘로 올라가 인자 예수님 안에서 영화로운 광채이신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생기는 그림자의 삶을 산다면 그 누구도 그림자의 모양을 변경하거나 피해를 주거나 없애는 일을 할 수 없습니다. 설령 무슨 일이 일어날 때 세상 사람들은 그 원인을 사건사고에서 찾으려고 하겠지만 그림자로 사는 사람에게는 어떤 원수나 사건사고도 해를 끼칠 수 없습니다. 주님의 십자가를 붙잡고 마음이 인자 예수님 안에 머물러 천상에서 영화로운 광채이신 하나님을 바라보고 있는 동안 우리는 불사신과도 같은 존재입니다. 그러한 내가 이 땅에서 없어지는 때는 내 영혼이 하나님을 바라보는 단계에서 영화로운 광채이신 하나님의 품안에 안길 때입니다. 모든 죄의 체질이 사라져서 하나님을 호흡하며 하나님으로 채워지는 안식의 시간이 주어질 때 그림자인 이 세상의 삶도 끝나게 될 것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스데반 집사님이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지상의 비밀과 천상의 비밀을 알았습니다. 지상에서의 삶은 그림자의 삶이며 영화로운 광채이신 하나님 안으로 들어가는 과정이 죽음이라는 것을 기억하게 해주시옵소서. 그럼으로써 오직 십자가 예수님께 우리의 의식이 고정되어서 그림자의 삶을 살다가 아버지께서 부르실 때 가장 좋은 복임을 느끼며 이 세상을 떠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